• 제목/요약/키워드: Changdeokgung's Rear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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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의 시문분석에 의한 의경(意境)과 경관 특성 (A Study on Yijing and the Landscape Characteristics through the Analysis of Poems in Changdeokgung's Rear Garden)

  • 손용훈;함광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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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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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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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의 목적은 사의적 대상에 대한 해석방법으로서 의경(意境) 개념을 사용하여 창덕궁 후원의 경관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다. 의경에서 경(境)은 경계를 의미하며, 사물을 인식하는 범주이다. 사의적 대상에 관한 인식의 범주는 감정적인 면을 대상으로 하는 정경이 있으며, 이보다 확대되어 진리 혹은 이상의 정신적 대상을 포함하는 의경의 단계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의경의 구조를 분석 틀로 하였으며, 조영 주체인 왕의 행적과 고전을 중심으로 창덕궁 후원의 의경과 경관 특성을 명확히 하였다. 연구결과, 창덕궁 후원 조영에 있어서 인조, 숙종, 정조 세 왕이 깊게 관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조는 후원 조영의 물리적 기반을 닦았고, 숙종은 상림십경(上林十景)을 통해 후원의 정경을 향유하였으며, 정조는 학식과 정치적 비전에 관한 뜻을 후원에 투영하여 의경의 범주를 넓혔다. 의경 개념은 정신적 대상의 범주를 체계화하고 이해하는데 유용한 사고방법으로, 형태보다 정신적 대상을 중시한 우리나라 전통조경의 효과적인 해석 방법론이라 하겠다.

근현대기 창덕궁 후원의 동선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Road in the Changdeokgung Palace Rear Garden between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하태일;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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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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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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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 정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공간이다. 후원의 경관체험에 있어서 동선의 복원은 주요 공간을 연결하는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선의 복원을 위해서는 생성과 소멸, 유지 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한다.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서 근현대 시기까지 문헌과 도면자료 분석과 현장조사를 병행함으로써 창덕궁 후원에서 발생한 동선의 변화를 세밀하게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시계열적인 분석을 위해 조선시대 제작된 「동궐도」, 「동궐도형」와 함께 근현대시기 제작된 「창덕궁평면도」, 항공사진을 사용하였다. 시대별 동선의 변화를 중첩하여 변화를 비교하기 위해 각기 다른 좌표체계로 이루어진 도면과 사진을 지리정보시스템인 ArcGIS에서 하나의 좌표계로 변환하여 정합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 이후 총 37개의 구간이 이용되었으며, 이 중에서 13개가 유지되고, 14개가 사라졌으며, 10개가 신설된 것을 확인하였다. 멸실구간 중에서도 능허정 북쪽 원로는 후원에 대한 공간을 연결하고 경관의 향유를 위해 시급히 회복시켜야 할 곳으로 판단된다. 신설구간에서도 대보단지~옥류천 구간에 대해서는 대체동선의 신설이나 구간의 단축 등을 통해서 영향을 최소화할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후원에서 동선체계에 대한 변화가 가장 크고 빈번하게 시행된 것이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보수정화사업 이었음을 밝혔다. 후원에 대한 주체적 관리가 어려웠던 일제강점기보다 1970년대 이후 발생한 동선의 변화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옥류천 진입로는 1990년대까지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잘못된 원형 인식으로 인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해 명확한 기제와 원인을 찾고, 훼손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사업의 전개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근현대기 창덕궁 후원 동선 변화를 시대별로 밝혔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이다. 다만, 조경계획이나 정비에 대한 자료를 찾지 못해 복원해야 할 위치와 형상을 명확하게 제시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본 연구에서 밝힌 자료를 이용해서 동선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공간 이용도, 관람체계, 방재 및 유지관리 등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건 경복궁 후원 오운각(五雲閣) 권역으로 조명한 조선시대 궁궐 별원(別苑)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Byeolwon (別苑: A Separate Garden Made Away from Living Space) in Palace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Illuminated by the Oungak Area at the Rear Garden of Reconstructed Gyeongbokgung Palace)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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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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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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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고종 연간 경복궁 후원의 북쪽에 조성된 오운각 권역의 특성과 창덕궁 후원 옥류천에 구비되어 있던 기능적 요소가 경복궁 후원으로 치환되었던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오운각 권역은 샘과 천하제일복지 각자가 있던 기존의 공간을 활용하여 왕의사적인 공간으로 정비된 공간이었다. 고종은 오랫동안 창덕궁 옥류천이 담당했던 왕실의 휴식과 위락기능을 중건 경복궁에 그대로 옮기려 하였다. 그 결과, 옥류천과 유사한 기능을 하도록 조성된 오운각 권역이 후원의 별원으로 개발되었다. 양자 간에는 후원의 최북단에 조성된 입지 외에도, 건물의 구성 및 유배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상용 수경설계 등에서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오운각 권역은 옥련정, 오운각, 벽화실과 천하제일복지천의 수경시설로 구성되었다. 이중에서 벽화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옥류천과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갖되, 지형의 굴곡, 경사, 수계의 상황 등 주어진 입지조건에 따라 조성되어 색다른 정감을 갖는 공간으로 개발되었다. 먼저, 옥련정은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경관을 조망하기 위해 높은 언덕에 입지하였고, 천하제일복지천의 독특한 형식의 수로는 위이암의 유배거의 기능을 모방한 형태로 추정된다. 한편 오운각은 옥류천의 농산정과 같이 주거가 가능한 집으로 조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다분히 옥류천의 기능과 위상을 경복궁에 치환하기 위한 조성목적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궁궐 후원의 기능 공간이었던 별원의 특성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창덕궁 후원 산단(山壇) 권역 구성요소의 특질과 변용 (Studies on the Characteristics of Spatial Components and Conversion of Sandan Area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 정우진;유기석;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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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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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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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 산단(山壇) 권역의 조영 특성과 공간성격을 구명하는 것으로서, 권역 내의 공간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조영개념, 경관설계기법 및 변화과정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의 결과는 아래와 같다. 산단 권역에는 인조, 숙종, 순조 연간과 일제 강점기 및 근래의 보수공사 등 여러 시대에 걸친 경관 층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인조 연간에 취승정(聚勝亭)의 건립으로 개발된 산단 권역은 임금의 휴게시설로 조성되었고 이러한 용도는 숙종이 낙민정(樂民亭)을 건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순조 연간, 즉 동궐도 제작 이전에 산단과 백운사(白雲社)가 건립되면서, 이 일대는 산신을 제사 지내는 제례공간의 성격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조성된 건축요소들은 당시 통용되던 토지신(后土神)에 대한 제례시설을 구비했던 것이거나 유교례로 해결될 수 없는 왕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산단 권역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 특징으로 판단된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창덕궁 평면도의 분석 결과, 일제 강점기까지 산단은 존치되어 있었으나 해방 후 어느 시점에 철거된 것을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이 일대가 '빙천'이라는 관람지로 개발되면서 대대적인 변형이 이루어졌다. 이때 빙천을 거치는 신작로의 공사가 병행되었는데, 현 상태는 당시 공사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1970년대 빙천 보수공사에 참여한 관계자의 인터뷰 결과, 당시의 공사가 음용수를 위한 2개소의 배수시설을 신설할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옥류천 어정(御井)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련(柱聯)을 통해 본 창덕궁 옥류천 일원의 경관 해석 (Interpretation of Landscape Based on the Pavilions' Hanging Couplets of the Ongnyucheon Region in the Changdeokgung Palace's Rear Garden)

  • 장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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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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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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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창덕궁 옥류천 일원에 소재한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亭), 취한정(翠寒亭)에 걸린 주련시(柱聯詩)에 표현된 경관요소들을 중국 당대(唐代) 의경 이론을 정리한 왕창령(王昌齡, 698-757)의 세 가지 경계로 구분하여 경관을 해석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물경(物境)과 관련하여 봄날 새벽녘이나 달밤, 비가 개이고 이슬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정원에는 꽃이 피고, 연못에서 물고기가 노닐고,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꾀꼬리가 우는 경관이 그려졌다. 둘째, 정경(情境)과 관련하여 임금이 화려한 부채 아래로 붉은 장막을 친 수레에 앉아 옥류천 일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려서 태평한 시절에 대한 감정이 표현되었다. 셋째, 의경(意境)과 관련하여 옥류천 일원의 승경이 자연과 물아일체를 경험하는 청정한 경지를 제공함으로써 신선세계로 묘사되었다.

창덕궁 후원의 현판(懸板)과 주련(柱聯)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관람객의 경관인식 연구 (A Study on the Landscape Perception of the Chinese Visitors Through the Boards and Couplets of Changdeokgung Palace's Rear Garden)

  • 장림;양유선;손용훈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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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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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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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창덕궁 후원의 경관요소로서 현판과 주련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연구가 많았으나 중국인 관람객의 경관인식을 실증 연구한 사례는 없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실증연구를 통해 중국인 관람객들이 창덕궁 후원에 있는 현판과 주련을 얼마만큼 주목을 하는가, 주목을 한다면, 얼마만큼 이해하는가, 현판과 주련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부용지와 옥류천 권역에서 경관인식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중국인 관람객의 97.5%가 창덕궁 후원의 현판을 읽었으며, 이는 대부분의 중국인 관람객이 한자 기호에 대해 익숙하기 때문에 현판과 주련에 대한 인식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현판과 주련에 대한 이해도'가 유의한 값(0.00 < 0.05)으로 나타났으며 평균값이 3.39 > 2.97로 현판이 주련보다는 이해도가 더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전체 경관을 해석에 있어서 현판과 주련에 대한 도움'이 유의한 값(0.00 < 0.05)으로 나타났고 평균값이 3.85 > 3.37로 현판은 주련에 비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부용지와 옥류천 권역의 현판과 주련에 대한 인지도 차이를 검정한 결과 부용지 권역의 부용정, 옥류천 권역의 소요정 현판은 주변 경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상관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실제 인터뷰를 실시한 결과, 관람객들이(4인) 공통적으로 제시한 것은 현판과 주련에 대한 이해도는 자신의 교육 배경, 직장,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 외에 응답자는 경관 감상할 때 있어서 해설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The Actual State and Transformation of Major Garden Ornaments in Changdeokgung Palace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오준영;이재용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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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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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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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낙선재, 주합루, 존덕정, 대보단지를 중심으로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양상을 고찰하였다. 전각, 식생, 구조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심이 저조했던 점경물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상을 조명하기 위한 의도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향후 창덕궁 내 점경물의 복원정비계획 수립에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01년 체코인 브라즈가 촬영한 사진에 따르면 당시 낙선재 후원에는 석지(石池)와 괴석을 비롯해 총 6기의 점경물이 소재했다. 후원의 지면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로 불리는 석지와 괴석 2기, 화계 1단에는 괴석 3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괴석의 임의적인 재배치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 화계 1단에 위치했던 괴석 2기는 경훈각(景薰閣) 후원으로 이설된 상태이다. 둘째, 「동궐도」가 제작된 조선후기와 달리 1900년대 초반 주합루 후원에는 괴석 2기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외형, 규격, 의장이 유사한 전통적 양식의 점경물이었다. 하지만 주합루 후원의 괴석은 모두 1970~1980년대에 타지로 이설되어 현재는 고유위치를 벗어난 상태이다. 1기는 빙천(氷泉) 입구와 금천교 인근을 거쳐 애련정 후면에, 또 다른 1기는 연경당 장락문(長樂門) 앞에 남아 있다. 셋째, 과거 존덕정 일곽에 소재했던 점경물 중 괴석 1기는 현재 구성 부재가 분리된 상태로 정자 주변 석교와 영화당 인근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영화당 인근의 대석은 1990년 무렵 앙부일구 모조품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이설되었다. 또 다른 괴석 1기는 후원 정문으로 이설된 이후 현재는 소재 파악이 어려우며, 본래 위치에는 완전히 상이한 형태의 점경물이 새롭게 배치되어 있다. 넷째, 대보단지에 현존하고 있는 대석 2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청사(李王職廳舍) 현관 기둥의 초석으로 사용되던 건축 부재였다. 해방 이후 이왕직청사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고, 1960년 무렵 사무총국 건물이 전소되자 기단 위에 배치되어 있던 석상(石像)과 대석이 대보단지로 이설되었다. 대보단지의 대석은 건축부재가 점경물로 오인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창덕궁 후원 관람지(觀纜池)의 조영과 실체에 관한 재고(再考) (A Re-discussion on the Construction and Identity of Gwallamji Pond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 오준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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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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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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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창덕궁 후원의 관람지(觀纜池)를 대상으로 그동안 곡해된 정보로 수용되었거나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조영 양상과 역사적 실체를 재조명하였다. 주요 논제는 원지(苑池)의 조영 시기와 재정비, 가설(架設) 목교의 변화, 접안시설의 실재(實在), 평면형태의 변형 여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관람지는 고종 연간 발발한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완결된 상태로 조영되었다. 이후 주변 시설을 비롯한 관람지 일원은 한동안 황폐한 상태로 방치되다가 1900년대 초반에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기존 논의에서 제시된 '관람지 조영 공사의 중단과 재개' 과정은 뚜렷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둘째, 관람지에는 형태와 구조가 다른 세 가지 종류의 목교가 순차적으로 가설되었다. 특히 관람지 정비 이후 가설된 두 번째 목교는 동궐도형 에 묘사된 '주교(舟橋)'로 판단되며, 난간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장식도 가미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세 번째 목교는 일본풍으로 제작된 교량이었다. 셋째, 관람지의 동쪽 호안에는 승선(乘船)과 하선(下船)을 위한 접안시설이 실존하였다. 접안시설은 「동궐도형」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도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관람지 정비공사가 여러 차례 시행되면서 접안시설은 점차 훼손되었고,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넷째, 관람지는 애초부터 현재와 유사한 한반도 모양의 평면형태로 조영되었다. 호리병 모양으로 조영된 관람지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모양으로 개축되었다는 통설은 재고가 필요하다. '반도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에도 일제가 의도적으로 관람지를 변형시켰다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표암(豹菴)의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에 나타난 궁원 유람행사의 내용과 의미 (Content and Meaning of Royal Garden Sightseeing Event in Pyoam's 「Hogayugeumwongi」)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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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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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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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의 목적은 표암의 "호가유금원기"에 담긴 궁원 유람행사의 내용과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방법은 사료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왕이 친히 신하들에게 궁원을 안내하고 설명한 일을 기록한 "호가유금원기"는 한국의 조경문화사에 있어 매우 귀한 사료이다. 이러한 일은 중국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2. 특히 이 일을 기록한 사람이 당대에는 시 서 화 삼절로 이름이 높았고 후대에는 '예원(藝苑)의 총수(總帥)'로 평가받는 표암 강세황이라는 점은 이 사료의 가치를 더한다. 3. 이 유람 행사의 성격은 정조의 집권 초반기에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규장각의 완비,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어진 도사 등에 기여한 근신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정조는 자신의 정치 이념을 실현하는데 공이 큰 근신들의 노고에 대한 은전을 베풀기 위해 궁중 내에 금단의 공간인 금원을 활용하였다. 4. 창덕궁 후원에 대한 유람 동선의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후원을 유람하는 동선이 고정적이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이날의 가을 정취를 즐기기 위해 정조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최선의 유람 동선이었을 것이다. 5. 이 행사의 특징은 격식이 없고 다소 즉흥적인 '유람'이었다. 즉 정조 치세 중반 이후에 신하들에게 베푼 '상화어조연(賞花漁釣宴)'은 꽃구경과 낚시, 시 짓기 등 행사의 개최시기와 형식, 참가자격 등의 틀을 갖춘 궁중 '연회'였음에 비해 이날의 행사는 비교적 사적이고 자유로운 '놀이(遊)'였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는 관련 사료들의 고찰을 통해 "호가유금원기"를 쓴 전후 맥락을 비롯해 이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호가유금원기"는 귀중한 문화콘텐츠로서 추후 궁원 관람에 있어 스토리텔링 자원으로서 활용 가능할 것이며 이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