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late Joseon dynasty

검색결과 451건 처리시간 0.022초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The Actual State and Transformation of Major Garden Ornaments in Changdeokgung Palace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오준영;이재용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9권1호
    • /
    • pp.10-19
    • /
    • 2021
  • 본 연구는 낙선재, 주합루, 존덕정, 대보단지를 중심으로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양상을 고찰하였다. 전각, 식생, 구조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심이 저조했던 점경물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상을 조명하기 위한 의도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향후 창덕궁 내 점경물의 복원정비계획 수립에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01년 체코인 브라즈가 촬영한 사진에 따르면 당시 낙선재 후원에는 석지(石池)와 괴석을 비롯해 총 6기의 점경물이 소재했다. 후원의 지면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로 불리는 석지와 괴석 2기, 화계 1단에는 괴석 3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괴석의 임의적인 재배치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 화계 1단에 위치했던 괴석 2기는 경훈각(景薰閣) 후원으로 이설된 상태이다. 둘째, 「동궐도」가 제작된 조선후기와 달리 1900년대 초반 주합루 후원에는 괴석 2기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외형, 규격, 의장이 유사한 전통적 양식의 점경물이었다. 하지만 주합루 후원의 괴석은 모두 1970~1980년대에 타지로 이설되어 현재는 고유위치를 벗어난 상태이다. 1기는 빙천(氷泉) 입구와 금천교 인근을 거쳐 애련정 후면에, 또 다른 1기는 연경당 장락문(長樂門) 앞에 남아 있다. 셋째, 과거 존덕정 일곽에 소재했던 점경물 중 괴석 1기는 현재 구성 부재가 분리된 상태로 정자 주변 석교와 영화당 인근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영화당 인근의 대석은 1990년 무렵 앙부일구 모조품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이설되었다. 또 다른 괴석 1기는 후원 정문으로 이설된 이후 현재는 소재 파악이 어려우며, 본래 위치에는 완전히 상이한 형태의 점경물이 새롭게 배치되어 있다. 넷째, 대보단지에 현존하고 있는 대석 2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청사(李王職廳舍) 현관 기둥의 초석으로 사용되던 건축 부재였다. 해방 이후 이왕직청사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고, 1960년 무렵 사무총국 건물이 전소되자 기단 위에 배치되어 있던 석상(石像)과 대석이 대보단지로 이설되었다. 대보단지의 대석은 건축부재가 점경물로 오인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동궐도(東闕圖) 판장(板墻)의 공간통제 효과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patial Control Effect of Panjang in Donggwoldo)

  • 하유정;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5권4호
    • /
    • pp.196-209
    • /
    • 2022
  • 본 연구는 공간구문론(Space syntax)을 이용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판장의 설치에 따른 주요 권역별 공간변화를 비교하여 판장의 공간분할 기능과 역할을 재해석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동궐도>의 공간을 단위 공간으로 분해하기 위한 설정 기준을 마련하였고, 판장의 설치 전·후에 따라 2개의 볼록공간도를 작성해 공간구문변수인 연결도, 통제도, 통합도 값을 산출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 내 가림시설은 전각공간에 대한 변수의 평균값을 비교하였을 때, 동궐의 전체적인 배치에서 통제와 연결은 영향이 크지 않았다. 다만 특정 권역 내 공간의 접근성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가림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내전과 동궁 그리고 후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동과 접근에 제한을 주었다. 둘째, 판장은 내전과 동궁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공간의 활용방식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시설로 판장의 설치에 따른 공간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기능에서도 차이가 확인되었다. 내전의 수정전 권역과 희정당 권역 그리고 동궁의 성정각 권역에 판장을 설치함으로써 개방적이고 통제성이 높았던 공간이 통제성이 낮은 폐쇄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였고 사적인 공간이 조성되었다. 동궁의 완영당 권역은 판장을 여러 방향으로 설치함으로써 공간의 깊이를 증가시켰다. 이는 거쳐서 오는 공간의 수가 증가됨으로써 자유롭고 은신이 가능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셋째, 판장은 기존 선행연구에서 밝혔던 '시선차단·공간분리·동선조절'의 기능 이외에 '접근통제가 용이한 공간'을 조성하였다. 일정한 공간으로 유도함과 동시에 동선이 집중됨에 따라 접근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 되었으며, 판장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집중형 통제공간과 분산형 통제공간을 조성하였다. 본 연구는 그 간 가림시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연구 외에 판장에 대한 기능을 수학적 모델로 분석하여 특정 공간속에서 판장이 어떠한 양상으로 공간을 통제하였는지 수치적으로 확인하였고, 공간의 통제와 연결, 은신과 개방성 등의 해석으로 연구의 방법을 확장한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연구의 방법론이었던 공간구문론을 <동궐도>에 적용하기 위해 궁궐의 건축 및 조경요소의 단위공간 분할 및 연결 유형에 따른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궁궐과 유사한 전통주거단지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분석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공간구문론의 분석을 통해 결과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공간조직이 가지는 구성적 특질을 표현하는 숫자들로 제한된 체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한계가 있다.

역사도시구조와 연계한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와 역할에 관한 연구 - 경주, 개경, 한양, 수원화성을 중심으로 - (A Composition and Role of Urban Water System in Connection with Historic City Structure - Focusing on Gyeongju, Gaegyeong, Hanyang, and Suwon Hwaseong -)

  • 강인애;이경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9권4호
    • /
    • pp.99-110
    • /
    • 2021
  • 본 연구는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조선후기 신도시로 조성된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도시에서 나타난 도시수체계의 구성방법이 지니는 특성을 파악해보고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도시입지, 도로, 도시시설 배치 등을 중심으로 도시골격구조와 연계하여 물길이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 수체계의 구성형태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도시 내 수공간 경영에 투입되었던 기술적, 계획적 요소와 함께 도시구조와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연구대상지에서는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부분적인 하천 정비와 인공수계를 도입하여 도시수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특히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도시구조와 도시발달과정, 도시구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져 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치수, 이수 등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현실적 수요가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물 공간과 관련된 다양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물 공간을 경영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적, 기술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연구대상지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도시형성·발달과정에서 도시수체계가 지니는 계획적 요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로 연구대상지로 선정된 신라왕경 경주, 고려 개경, 조선 한양, 수원 화성의 도시수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는 배수,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이 공통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수체계의 구축방법이나 활용성에서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물과 자연수계는 도시입지의 상징적 요소로서, 그리고 지리적 관념과 어우러진 도시 입지를 결정하고 도시의 좌향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로 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연수계는 지형여건과 어우러져 도시 형성·발달과정에서 구축되는 도시수체계의 구성형태를 결정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로 자연수계를 기반으로 구축된 도시수체계는 자연물길과 계획적 인공수로가 결합되어 도시구조의 일부로서 위계별 수계의 활용성이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로 도시수체계는 배수체계와 재해를 고려한 치수의 관점 이외에 도시용지의 확보, 도시시설 배치와 영역 확보, 기능지역 구성, 토지구획과 연계하여 계획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사칠논쟁(四七論爭)의 연원과 문제의식 -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중심으로 - (On the Problems of Iphakdosoel and Chunmyongdosoel, as the philosophical background of the Four-Seven Debate)

  • 장숙필
    • 동양고전연구
    • /
    • 제32호
    • /
    • pp.129-158
    • /
    • 2008
  • 본고는 "입학도설"과 "천명도설"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사칠논쟁의 연원을 밝힘으로써 조선유학이 오늘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사칠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이론논쟁으로, 이로부터 파생되는 인심도심논쟁, 인물성동이논쟁, 미발심체논쟁 등 심성설 중심의 이론탐구는 조선유학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접근은 대체로 이러한 이론논쟁을 현실을 도외시한 조선성리학의 공리공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도외시한 이론논쟁이긴 하지만 한국인이 지닌 철학적인 사고능력을 보여주는 철학논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촌의 "입학도설"에서부터 나타나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이해는 성리학이란 수기치인지학으로서 결코 현실과 유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상사회는 통치계층의 도덕성실현위에 모든 사람들의 도덕성이 실현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의 근거를 밝히고, 수양의 목표를 제시하며, 선악의 유래를 명확히 함으로써 현실적인 악을 극복하고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 된다. 이런 문제의식은 추만의 "천명도설"에서도 그대로 계승된다. 추만의 "천명도설"은 우리의 도덕성은 천명으로서 주어져 있으며 이를 근거로 천인합일이라는 이상에 도달할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본격적인 심성논쟁이 의리실천을 학문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도학의 전통이 세워진 이후 도학자임을 자부하던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는 것은 이것이 결코 현실과 유리된 공리공론이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조선유학이 가진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와 도덕성의 실현을 통해 인간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에 대한 가치론적 이해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큰 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경운궁 흥덕전의 조영 및 사용 연혁과 설행된 의례의 특징 (Characteristics of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history of use and performed rituals of Gyeongungung Heungdeokjeon)

  • 임초롱;주상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5권1호
    • /
    • pp.281-304
    • /
    • 2022
  • 흥덕전은 경운궁의 확장 과정에서 궁역으로 편입된 수어청 부지에 최초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어진 모사처, 임시 봉안처, 빈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흥덕전의 구체적인 조영 과정을 밝히는 한편, 흥덕전의 사용 연혁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설행된 의례를 분석하여 도출한 특징을 토대로 흥덕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흥덕전은 1899년 하반기에 건립되기 시작되어, 1900년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전은 부속 전각으로 어재실과 내재실을 갖춘 의례시설이었다. 흥덕전의 이건은 1901년 4월에 계획되어 6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건 공사는 선원전 부속 전각의 공사 및 선원전 중건의 추가 공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또, 흥덕전의 영건 역비와 이건비의 기록, 선원전 중건 관련 비용 내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흥덕전의 부속 전각인 어재실과 내재실이 선원전의 어재실과 이안청으로 이건되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전은 1900년 초 영건되자마자 두 차례에 걸쳐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차례의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의 어진 모사와 관련하여 선례가 없는 최초의 작업들이 진행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황실 의례를 위하여 별도로 건립된 전각을 어진 모사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빈전과는 다른 특징이 확인된다.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의례용 전용 전각이었으며, 어진 모사처로도 사용된 다목적의 의례용 전각이었다. 즉, 흥덕전은 경복궁 태원전과 함께 조선 후기 빈전 운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전각인 것이다. 흥덕전에서 설행된 어진 관련 의례에서도 주목되는 특징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짧은 기간 동안 다수의 작헌례가 설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주로 지방의 진전에서 거행되는 속절제와 삭망일의 분향이 확인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궁궐 내 진전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마지막은 전배 및 전알, 봉심이 다수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흥덕전은 황실 의례를 매우 중시하였던 고종의 의도와 경운궁 중건 과정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전각이라 할 수 있다.

1795년 봉수당 진찬(奉壽堂進饌)으로 보는 조선 후기 채화(綵花) 고찰 (A study on artificial flowe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ing on a birthday banquet inBongsudang Hall in 1795)

  • 이경희;김영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6권1호
    • /
    • pp.182-205
    • /
    • 2023
  • 1795년 화성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도식과 기록을 통해 왕실 채화의 용도와 사용방법이 비로소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수당 진찬에 사용된 채화의 용도를 구분하고 형태, 사용자, 사용방법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채화 기록을 고찰한 결과 전기에는 금·은·견사 등의 고급 재료로 만들었으나, 후기에는 재료에서 종이의 비중이 높았다. 채화의 척도는 예기척 28.4cm를 적용하였다. 채화의 용도는 관모를 장식하는 수공화(首拱花), 공간을 장식하는 준화(樽花), 잔칫상을 장식하는 상화(床花)로 구분되었다. 사권화(絲圈花)는 왕실 구성원의 수공화인데, 상품(上品)의 것을 어잠사권화(御簪絲圈花)라 하였다. 봉수당 진찬에서 정조와 혜경궁이 어잠사권화를 사용했고, 관모의 오른쪽에 꽂았다. 백관 이하의 수공화는 홍도이지화(紅桃二枝花)가 사용되었고, 관모의 왼쪽에 꽂았다. 홍도이지화는 수공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관직의 유무나 높고 낮음에 따른 차등이 없었다. 악공과 여령의 수공화는 백관 이하의 수공화보다 비싸고 화려했다. 정재에 따라 관모에 수공화를 여러 개 꽂기도 하였다. 준화는 2개의 용준(龍樽)에 홍도화와 벽도화를 꽂아서 2개의 주칠한 아가상(阿架床)에 각각 올렸다. 아가상과 용준을 홍색 무명 얼기로 서로 묶어서 준화가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하였다. 정조·혜경궁·군주들만 사용한 상화는 대수파련, 중수파련, 목단화, 월계화, 사계화, '별(別)'자가 붙은 홍도화 등이었다. 내빈과 신하들이 사용한 상화는 소수파련과 홍도화였다. 봉수당 진찬에서 수공화·준화·상화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복숭화꽃[도화(桃花)]으로, 복숭아는 장수와 벽사의 의미가 있었다. 그 외에 사용된 여러 종류의 꽃과 문양은 길상적인 의미였다. 이상의 연구 결과가 정조대 채화의 용도별 특징과 사용방법에 관해서 이해하고, 궁중잔치 재현행사와 전통문화콘텐츠 및 궁중채화 제작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제주 관덕정(觀德亭) 벽화의 도상과 표상 (Iconography and Symbols of the Gwandeokjeong Pavilion Murals in Jeju)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3권3호
    • /
    • pp.258-277
    • /
    • 2020
  • 제주의 관덕정은 군병들의 활터로 '활쏘기'는 물론 '말 타면서 활쏘기', '전쟁의 진법'까지 훈련하여 상무 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쟁 대비를 위해 무예를 연마할 목적으로 1448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제주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인원이 운집할 수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각종 연회나 관아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관덕풍림'과 같이 계절의 정취와 자연의 운치를 향유하는 장소였다. 이러한 장소성과 건축적 의미가 큰 관덕정이 17세기 건물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기에 건물 상인방 4면의 5가지 그림이 조선 후기의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관덕정은 10여 차례 이상의 수리와 중수를 거쳤기에 벽화가 구체적으로 언제 처음 그려졌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의 벽화원형은(1976년 모사본 기준) 벽화의 도상과 양식으로 추정해보면 1850년(철종1) 재건, 1882년(고종19) 중수, 1924년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의 보수, 1969년 10번째 중수 때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벽화 도상을 분석하여 제작 시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즉, 최초 <호렵도>가 18세기 이후 그려지기 시작한 점을 비롯하여 삼국지의 유명 화제인 <적벽대전>이나 한나라 때의 은일자를 그린 <상산사호>, 당나라 시인 두목의 이야기인 <취과양주귤만거>와 같은 고사인물도의 유행과 민화풍의 <십장생도> 등의 주제는 물론 그림의 구성, 인물의 무기와 복식, 산수 표현과 채색, 필법 같은 세부적인 사항도 관덕정의 벽화가 19세기 말경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그려진 작품임을 방증한다. 또한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던 회화 주제나 양식과 관련이 깊어 1850년이나 1882년에 제작된 벽화가 1924년 보수와 1969년 중수를 거치면서도 벽화의 기존 내용과 형태를 보존·유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으로 관덕정의 벽화 주제나 구성 방식은 군사훈련이라는 건물의 목적과 기능에 적합하게 건물 중앙 좌우에 파노라마 형식으로 <적벽대전>, <호렵도>를 구성하고, 바깥쪽으로는 감계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제주의 관리가 지녀야 할 덕목인 은일과 입조 등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상산사호도>나 <취과양주귤만거>의 고사 인물도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선 사상과 장수를 상징하며, 궁중 행사나 장식화로 쓰이던 주제가 민간으로 확장되어 길상·벽사 기능이 강화된 <십장생도>를 표현하였는데, 이는 당인들의 지향을 반영하기 위해 전체적인 벽화 주제와 구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벽화의 산수가 제주의 명산인 '한라산'이라는 점, 높고 낮은 오름, 현무암 자연석 돌담 표현, 수많은 고사 중에 제주의 진상품이자 특산품인 '귤'을 주제로 한 두목의 고사를 채택하여 시각화한 점, 백록담의 흰 사슴 전설의 응용, 제사를 중시하는 유가적 관습이 남병산의 제사 장면으로 표현된 것 등은 모두 제주의 풍속과 자연환경, 생활상의 일부를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창선감의록>의 적장자 콤플렉스 (The Legitimate and Eldest Son Complex in Changseongameirok)

  • 조광국
    • 고전문학과교육
    • /
    • 제38호
    • /
    • pp.65-101
    • /
    • 2018
  • <창선감의록>은 종법주의가 확립되는 흐름 속에서 차세대 가부장인 적장자에 의해 발생하는 가문의 위기를 정면에 내세워 그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선보였다. 본고에서는 그 문제의 발생과 해소 과정을 적장자 콤플렉스 차원에서 해명하고자 했다. 화춘의 적장자 콤플렉스는 카인 콤플렉스, 특히 카인의 장남 콤플렉스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바 보편성을 지니며, 한편으로 시대적 작품적으로 적장자 콤플렉스라는 특수성을 띤다. 화춘의 적장자 콤플렉스는 화춘 개인을 넘어서 심부인의 종부 콤플렉스 그리고 조월향의 총부 콤플렉스와 결합하면서 확대 심화되어 마침내 가문 차원의 콤플렉스로 자리를 잡는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이에 <창선감의록>은 우리 문학사에서 적장자 콤플렉스를 노련하게 다룬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확대 심화된 적장자 콤플렉스는 차남 화진에게 전가되어 그가 짊어지고 해소해야 할 것이 되는데, 화진은 지극한 효제로 가문 차원에서 자리를 잡은 적장자 콤플렉스를 해소하기에 이른다. 화진의 효제는 심부인 화춘 모자에 대한 효제를 넘어서서 가문에 대한 효제로 수렴된다. 그 가문에 대한 효제라는 것이 일정 부분 종법질서에 흠결이 없는 가문에 대한 효제의 성향을 띠는바, 종법주의 실현의 요체로 작동한다. 그와 관련하여 효제는 그 자체를 위하는 무조건성과 그 자체에 복이 내재되어 있는 필연적 보상성을 띰으로써 종법주의 이념에 당위성과 필연성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화진의 효제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화욱(가부장)-화춘(적장자)-화천린(입후자)'의 종법주의를 실현하는 요체로 구현된다. 그런데 종법주의가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고, 왕가의 경우에는 종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다소 유연하게 구현되는 양상을 띤다. 이렇듯 적장자 콤플렉스의 해소를 통해서 종법주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작품 곳곳에 근원적인 죄의식과 심리적 고통이 매우 강하게 배어난다. 그런 죄의식의 고통은 적장자 콤플렉스 내지는 적장자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는 종법주의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이념으로 제시될수록 그에 상응하여 언제든지 적장자 콤플렉스가 분출될 수 있음을 방증한다. 적장자 콤플렉스가 표리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능원(陵園) 정자각(丁字閣)의 첨차초각(檐遮草刻) 변화에 대하여 (A Study on the Change of the Cheomcha-chogak of the Neungwon-Jeongjagak)

  • 전종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4권1호
    • /
    • pp.280-301
    • /
    • 2021
  • 첨차초각은 부재의 장식을 위한 그림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문양의 그림은 봉정사 극락전에서 보이는 덩굴문양 단청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봉정사 극락전의 첨차에서는 단청뿐만 아니라 하단에 연화두식을 새기면서 비로소 첨차초각이 시작되었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초기적인 덩굴초각을 가진 첨차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부재 표면에 직접 초각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후 덩굴초각은 오랫동안 전통 목조건축에서 중요한 첨차의 장식 기법이 되었다. 정자각은 임란 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건축물로서 대부분 덩굴초각을 새긴 첨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첨차초각은 처음에는 초각줄기가 주두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모양(상향형)으로 시작되다가 종래에는 재주두를 기점으로 그 줄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하향형)으로 변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과정과 그 원인을 살펴보았는데, 상향형이 하향형으로 변화는 과정 중에는 방향성과 연관이 없는 새로운 초각의 연결 방식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기간은 경종의릉과 인조장릉의 정자각이 지어지던 시기로 화반초각에서도 연꽃이 사라지기 직전의 과도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첨차초각의 방향성이 변한 원인으로는 이익공의 내부에 두 단에 걸쳐 새겨지는 덩굴초각이 주두를 기점으로 상하 양방향으로의 분리가 일어났는데 이는 초익공 내부에 하향형 초각을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변화된 초익공의 덩굴초각은 나아가 첨차초각의 방향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게 되었다. 이 글은 2018년 투고한 「능원 정자각의 화반초각에 대하여」의 후속된 글로서 정자각에 있는 여러 부재 중 하나인 첨차라는 부재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나머지 초각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전경(典經)』 「제생(濟生)」편 연구- 강증산의 권능(權能)·지혜(智慧)와 관련하여 - (A Study on the Chapter 'Saving Lives' from The Canonical Scripture: Regarding the Power and Wisdom of Kang Jeungsan)

  • 고남식
    • 대순사상논총
    • /
    • 제41집
    • /
    • pp.63-131
    • /
    • 2022
  • 「제생」편은 총 44절 1개 장으로 강증산(姜甑山, 1871~1909) 성사(聖師)의 권지(權智)에 기반한 내용으로 병의 치료에 대한 구절이 대부분이며 이외에 자연 재해(災害)로부터의 구제, 일상 인사(人事)에서의 갈등의 해소, 제생을 위한 인간 각자의 지혜의 계발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실에서 세계가 팬데믹 병겁을 겪기도 했지만, 병의 치료는 당대 하층민들이 겪는 병고(病苦)를 긍휼히 여겨 치료해준 내용들이다. 강증산은 권능과 지혜로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로 인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순조롭지 않은 현상으로부터 민중이 겪는 피해들을 구원하고 구제해주었으며, 인간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소해주었다. 또 「제생」편에 지혜라는 것은 세상을 보는 높은 견해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정의 하에 기록된 내용은, 지혜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해 나갈 수 있고 나아가 남을 구제해 줄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제생」편 구절들의 특성을 바탕으로 『전경』 각 편에 나타난 강증산의 제생 양상을 찾아본 후 구절의 변이를 『대순전경』 6판과 비교해 본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강증산의 제생은 조선 말기의 일상에서 위정자들의 폐해로 고난 및 고통에 처한 당대 일반 민중들을 구제하는 전무후무한 절대적 행적임을 볼 수 있다. 둘째, 『전경』 일곱 개의 편에 천지인으로 용사(用事)된 강증산의 권능에 의한 제생 관련 구절들이 분포되어 각 편의 제목이 나타내는 의미를 이루고 있다. 셋째, 「제생」편은 단지 치병만 기록된 『대순전경』 6판과 다르게 자연재해로 인한 민중들의 생활의 어려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며 일상사에서 겪는 당대 정치사회적 현실과 관련된 고난과 고충을 구원해준 것이 특질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범주에서 구원과 구제의 내용을 『전경』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병만을 치료해준 일을 담고 있는 『대순전경』의 치병 장과 구분되는 면으로 『전경』 「제생」편만이 갖고 있는 특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