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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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적 공공설'과 8.15 해방 공간 ('Colonial Public-nes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Forced Occupation)

  • 원용진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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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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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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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전통적으로 한국 언론사 논의는 언론을 수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특히 해방 전후 언론 연구에서 그런 경향은 더욱 짙다. 언론을 수동적으로 대한다 함은 언론을 수단 혹은 도구로 보는 태도를 말한다. 언론사 논의는 그 같은 경향 내에서 언론을 민족 해방, 민족국가수립에 기여했는지 혹은 아닌지로 분류하고 평가하려 했다. 민족언론, 친일언론 등과 같은 친근한 구분법은 그로부터 나왔다. 최근 들어 그 같은 경향을 벗어난 연구들이 등장하고는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그 같은 민족주의적 시각으로부터 자유스럽지 않다. 덕택에 언론의 독자적문화, 민중들의 언론 습관, 일상 속의 언론 논의는 소홀히 다루어졌다. 이 글은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언론현상을 논의할 경우 해방당시를 섬세하게 설명할 방도가 없어진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넘어선 국면 분석을 통해 새로운 언론사 분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1945년 8월 15일이라는 해방 국면에서의 언론 상황을 점검하고 그를 통해 새롭게 대안적으로 포착해야 할 언론 단면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 점검을 통해 해방 국면에서 제한된 형태이긴 하지만 언론이 해방의 의미를 나누었고 민중들은 그 같은 의미를 언론을 통해 받아들이는 습관을 나름으로 형성한 식민지적 공공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그 공공성은 왜곡되고 식민지적인 것일 수밖게 없었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감정적 구조를 전달해주고 있었으며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는 영역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제에 의해 선사된 근대성의 공간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식민화된 공간만도 아닌 그 둘이 혼효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이후 한국 언론 문화, 관습, 언론을 받아들이는 습관 등 언론규율로 연장되었을 것이다. 혹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구적 근대성과 조우하면서 전혀 새로운 형태로 변해갔을 수도 있다. 지금의 언론 문화를 정리해내는 데 있어 식민지적 공공성에 대한 관심은 더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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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만(臺灣)의 문화재 제도화 과정과 조선 비교 (Process of Institutionalization of Cultural Property in Taiwan and Comparison of Joseon)

  • 오춘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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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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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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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대만과 한국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라는 공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두 나라는 좋은 비교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대만과 조선의 문화재 제도 분야의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법제도적 측면으로 보면 대만에서는 일본의 내지연장주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대만의"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시행규칙(이하 시행규칙)"은 일본의 법에 종속적이었고, 조선의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하 보존령)"은 대만보다는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차이를 일본의 압제 수준의 차별로 등치시키기는 어렵다. 둘째, 조선의 "보존령"제정에는 일본에서 공포되었던 관련 법령들이 참고되었으나, 대만의 "시행규칙"도 참고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의 "보존령"을 제정할 때에는 일본과 대만의 문화재에 관련된 모든 법령을 참고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셋째, 문화재 지정 수량과 내용에서 대만과 조선의 차이가 컸다. 대만과 조선의 지정 수량 차이는 두 지역 간의 전통문화자원의 차이가 가장 크며, 이에 따라 조선에서 지정된 문화재가 대만보다 14배 정도 많았다. 그리고 대만의 사적 중 절반 가까이는 일본 지배세력의 흔적들이었던데 비해, 조선에서 지정된 고적 중에는 일본 지배세력들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이는 두 지역 통치세력이 문화재에 대해 가졌던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효행 설화 연구 -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효행 양상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Filial Story - Focusing on the Communication with the Actor and Target in the 『三國遺事』(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三國史記』(Historical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 강성숙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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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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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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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시대 교화서와 달리 초기 '역사서'에 실린 기사는 교화적 효과만을 위해 수집, 편찬된 것이 아니어서 효행설화라 하더라도 각각의 서사가 효행을 드러내는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효에 대한 자세가 천편일률적이거나 무비판적이지 않다. "삼국사기" "예전(列傳))"과 "삼국유사" "효선(孝善)"편 효행설화에는 (1)처절한 효행과 그 포상에 서사의 초점이 놓여 부모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설화에서부터 (2)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효행의 완성에 영향을 주는 가능성의 서사, (3)부모가 적극적으로 자식의 삶에 관여하며 목소리를 드러내 자식의 자아실현을 촉발하는 효행 서사까지 두루 나타난다. 여기서는 후대 효행설화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자식에게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깨닫고 행동하게 하는 부/모의 모습이 나타난다. "삼국사기" "예전(列傳)"과 "삼국유사" "효선(孝善)"편 효행 설화는 전형화된 효행중심 서사뿐 아니라 가족 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변화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갈등과 소통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 윤리적 효의 성격과 그 실천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 분명해지는 반면, 타고난 효자의 효행 기록은 하기 힘든 어려운 행위에 대한 감탄이 주조를 이루게 된다. 삼국시대의 효행설화는 효행의 대상이 되는 부모가 그 존재감을 드러냄으로써 효자/녀가 진정한 효를 행하게 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데, 이를 통해 효자/녀는 자연스럽게 효(孝)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산 안확(自山 安廓)의 조선 민족사에 대한 이원적 접근 - 『조선문학사』와 『조선문명사』를 중심으로 - (A Study on Ahn Hwak(安廓)'s Dualistic Perception of National History: Focusing on 『History of Joseon Literature』 and 『History of Joseon Civilization』)

  • 김호직;최연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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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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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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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국학자 안확(安廓, 1886~1946)의 "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와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에 나타난 그의 조선 민족사에 대한 인식을 분석했다. 그는 조선의 각 시대별 문학 작품들에 내재된 민족의 정신 사상적 측면을 발굴하여 근대적 관점의 문화사를 기술했고, 고조선부터 조선까지의 한국 민족사를 연속된 정치사의 입장에서 재구성했다. 그에게 있어서 민족은 문화적 공동체("조선문학사")이자 정치적 공동체("조선문명사")였다. 안확은 '문화'와 '정치'를 이원적이지만 표리(表裏)의 관계로 파악했던 것이다. 안확은 "조선문학사"를 통해 민족의 정신적 '자각'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자각은 정신이 물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보편적 진보의 과정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문명사"에서 조선 정치사의 특색을 '자치'의 역사에서 찾았다. 조선 정치사가 자각적 자발적 문명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민의를 반영하고 수렴하는 고유한 자치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확은 그의 두 저서를 통해 조선의 민족사가 문화적 관점에서는 자각의 역사였으며, 정치적 관점에서는 자치의 역사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게 자각은 정신의 보편성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었고, 자치는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한 개념이었다. 안확은 두 저서를 통해 문화적 보편성과 정치적 독자성의 결합을 추구했다.

우리나라 농업기계화에 관한 조사연구 (A Investigation and Study on the Farm Mechanization in Korea)

  • 최재갑
    • 한국농공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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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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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9-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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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
  • 1.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agriculture in Korea is observed and the future of Korean agriculture is suggested with present situation in order to recommend a direction of policy in agricultural mechanization. 2. A factor analysis of agricultural mechanization The needs of agricultural mechanization in the view of both national need and the armer's desire under the present situation are analyzed with data from the various sources. The researcher found that the agricultural mechanization is badly needed to develop prospective Korean agriculture to future. 3. The direction of agricultural mechanization. It can be said that the position of agriculture in the national economy plays a very important role. This importance should not be ignored by the Politicians in their process of developing long range economy plan. The agricultural mechanization for the modernized Korean agriculture should be directed to increase the most effective results with minimize the least sacrifice. The merry tiller is recommended to the main agricultural machinery in Korea in order to meet its small farming operation un-its(or farm size). Tractor is recommended in the plain area for the crop cultivation. The cooperative cultivation for rice and the upland crops will be developed in the plain area. Tractor, therefore, is recommended for the main agricultural machinery in these areas. Either tractor or merry tiller is recommended to the orchard area by its operating size of the orchard. The researcher also disoussed about the development of animal husbandry on the farm with increasing the farm size in order to develop meadow and pasture nuder the consideration of both the improvement of food consumption and the comprehensive development of national resources. 4. Relationship between the Performance of various agricultural machinery and the economic scale. Because of the agricultural machinery needs an expensive fixed expense(fixed cost) the total expense Per ha of the fixed expense and the operation expense should less than the traditional expense Per Dan Bo with in creased corpgiclds Per Dan Bo. Since the anual fixed expense of the agricultural machinery is figured out by the durability the more the farm size the less fixed expense of machinery is required. The formula of this principle is as follows; fixed expense for Dan Bo=Fixed expense of agricultural machinery farm size(or farming scale) The breaking-even point is the balance point between the expense of the using agricultural machinery and the traditional farming expenses. Labor cost of the Dan Bo is increasing when the management scale increases by the tradititional farming while the machanized management decrease the management cost Per Dan Bo. The reseracher found that the distribution of agricultural machinery will be the adeventeous after the year of 1981 by the result of frguring out the breaking-even point. 5. The Investigate and the conclus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found out the direction of agricultural machanization and the breaking-even point of various agricultural machinery, there for is found out effective of the using various agricultural machinery for Collection cutter, Binder, Footing thresser, Semi-power thresser, Power thresser, Combine, Power rice-Trans-Planter,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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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이벤트의 결합체로서 건축환경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Environment as a Combination of Performance and Event)

  • 김주미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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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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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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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전환기적 시대상황의 인식과 뉴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미래 건축환경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건축언어와 새로운 디자인 전략을 제안하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었으며, 그 연구내용과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예술 속에서 공간, 인간의 신체, 그리고 움직임을 재해석하고 그 예술적 의도를 환경디자인과 결합시켜 퍼포먼스·이벤트건축의 가능성을 고찰하였다. 둘째, 건축환경은 물질들만의 집합보다는 공간, 움직임, 우연적 상황 그리고 이벤트들의 결합체로서 보았다. 또한 퍼포먼스장소로서의 환경을 이해함과 동시에 디자인 행위자체를 퍼포먼스 과정으로 제시하였다. 셋째, 인간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항상 반응하며 스스로의 조절을 통해 적응하는 유기체적 시스템이다. 건축 또한 현시대의 불확정적인 인식체계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구조, 테크놀러지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행위, 활동이 결합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 시스템으로 설명되었다. 넷째, 본 연구자는 종래 모더니즘 디자인에서의 형태와 기능의 인과론적, 기계론적 조형태도에서 벗어나 상대론 적, 유기론 적 관점을 취하과자 하였다. 특히 탈 물질적인 환경의 개념을 강조하였으며 형태와 기능의 상호 텍스트 성,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호변화 가능성을 지원할 수 있는 탈 프로그램 방법을 제안하였다. 결과적으로 퍼포먼스·이벤트건축의 전략은 인간의 자율적 기능의 회복과 예술로서의 환경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으며, 시스템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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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검토 (A Critical Review on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Architecture)

  • 강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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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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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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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is study is on historiography of Modern Architecture since its beginning to present. As a critical review of the history of the writing history of Modern Architecture, this study tends to be a meta-history and criticism of historical text. This study try to analyse historiographical project of Modern architecture at specific phase since the beginning of modern architecture.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architecture shows that writing a history is making a discourse of Modern architecture as a imaginative representation to define and justify Modernism in architecture. The analysis of canonic text since early 20th century proves that the history of writing history of Modern architecture played a critical role not only to shape of our ideal but the practice of architecture with a ideology construction in retrospect. With a name of truth or morality they made myths about the modernity in architecture. So we can find deep 'Hagelean Unconscious' in writing history of Modern architecture not even the first generation of historians but the second generation who were influenced by earlier writer in spite of their intention of revision and overcoming, which is in itself the key concept of Hegel's philosophy of History. Under this kind of 'operative' discourse our view point of Modern architecture were confined and the historiography of Modern architecture itself was narrowly defined as a kind of melodrama that a few architect and work of art matters. The rise of critical history fundamentally has changed the way of seeing and writing the history of Modern architecture. but it has also a new kind of dilemma as regard to writing history and involving practice. This review of historiography traces the texts of historians as like Pevsner, Giedion, Banham, Rowe, Tafuri, Frampton, and Curtis relating to different discours making. When we consider Benjamin's famous concept of constellation, writing history necessarily is a kind of montage making in time and we always need to recognize the historicity of historiography.

주거변화의 일상사적 담론과 한국 주거의 근대화과정 (Discourse of "Alltagsgeschichte" and Modernization Process of Korean Housing)

  • 전남일;홍형옥;양세화;손세관
    • 대한가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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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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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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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modernization process of korean housing during the past one century. To following up the changes of everyday lives of common peoples, magazines, news papers, tourist's records and gossip items were collected and interpreted from the microscopic point of view. In this study arguments on 'modernity' of korean housing was focused on some issues, thus, separation, differentiation, individualization, as well as privatization. Concrete discourses are; firstly, spatial isolation of housing and urban place each other, secondly, functional division of inner spaces of housing, and lastly, guarantee of privacy sphere. Historical changes of housing showed some meaningful phenomena. Before modernization housing was place of reproduction and consume at the same time. However after modern urban space came into existence and work and rest were separated, housing gained only mono function. Thus, housing have only one meaning as private place for nuclear family, that is "Home, Sweet Home." Instead of past multi-functional rooms, functional prescribed rooms, for example, dinning room, were newly born. In the past, the boundary between public and private sphere was not clear. For examples, everyday experiences of family were extended to the street and in the house in most cases spaces were shared. But after modernization the scale of individual spaces become larger and private life can be secured. Consequently, history of everyday life from traditional agricultural society to industrialized modern society demonstrates the structural context between the micro and macro dimension in the fields of human life. In other words, everyday lives and macro history response each other and create new perception of time-space structure in the modern housing.

역사그림에 나타난 사진의 진실과 관찰자적 재현 (The Truth of the Photograph and its Representation of Observer Appeared in the Painting of History)

  • 이경률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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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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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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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attitude of observer in the painting of history is to exclude a prejudice and a subjective view of an artist and to introduce a photograph, which is a record of objectivity, in the process of painting. Its ultimate intent is to redescribe the fact of an event's image intactly without any prejudice and to represent the event as a proven evidence that it was. The representation of history based on fact had already been conceived in imagination of renowned artists such as Francisco Goya or $Th{\acute{e}}odore$ $G{\acute{e}}ricault$ even before cameras were invented. What they portrayed was their own truth of reality which is gained through their observation, not a history that have corresponded to political ideologies, for all reliance on a limited tool of representation, painting. Furthermore, history was necessary for 19th century impressionism artists to be represented under proven fact in a neutral perspective excluding all subjective prejudice, not based on the representation with imagination. Edouard Manet in particular reconstited an instant moment on the basis of real proof of photograph without personal prejudice or opinion as if today's photojournalism. The catastrophic series by Andy Warhol and the photographic painting by Gerhard Richter show another role of painting in the realm of art, each of them implying information distortion and abuse by current media and intentional deformation toward history as Manet's painting of history. Today, the representation of an historical event that we experience in the era of the Internet and social networks having a great deal of information already came to be the exclusive property of the cutting edge mass media. Nevertheless, the attitude of observer which is realistic and contemplative in the realm of art is the crucial point in terms of artists' act as ever.

순조(純祖)-순종실록(純宗實錄)에 나타난 포백척(布帛尺)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Pobeckchuck in the History from the Sunjo to the Sunjong Dynasty)

  • 이은경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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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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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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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This study aims at defining the meaning of Pobeckchuck in the historical view-point, which appeared in the History of Joseon Dynasty, regarding the periods from the ruling period of Sunjo to that of Sunjong as the latter part of history. Pobeckchuck used in King Sejong was redressed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ment in the Kyeonggukdadejeon(code), in which time one Pobeckchuck was 46.80cm long. It is known that Juchuck, Hwangjongchuck, Youngjochuck, Joraegichuck etc. which had been used in the ruling period of Sejong Dynasty, were used till the period of Youngjo. Also, the document shows that in the 12th ruling period of Sunjo, Pobeckchuck was used for measurement, and in the 20th ruling period of Sunjo, newly-made ruler was only used for the measurement of fields, but no more details about how long it was. But according to the document complied at that time, one Pobeckchuck was 46.80cm long, which fact reveals that the same measurement was used as in the ruling period of Sunjo. When all the measurement laws which were established in the 3rd year of Junghee, the 6th year of Kwangmu were abolished, Pobeckchuck was solely banned from its use, which fact offers a glimpse of how confusing at that period was. The comparison and examination among many documents in the latter part of Joseon Dynasty show the differences within about 4cm that one Pobeckchuck ranged from 44.80cm to 48.80cm long. But no other document on measurement appeared in the History of Joseon Dynasty, except for the 46.80cm. Thus, the 46.80cm corrected in the ruling period of Sunjo proves that one chuck in Pobeckchuck adopted by the dynasty was used as the measurement of length till the ruling period of Sunj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