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ilhak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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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實學' 개념의 적합성 또는 부적합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onceptual Suitability or Unfitness of 'Silhak')

  • 강정훈
    • 윤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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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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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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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실학實學은 반주자학 내지는 탈성리학의 성격을 가진 조선조 중후기에 등장한 사회사조로서 실용적이고 개혁적인 양상을 보였으며, 나아가 민족적 각성과 근대적 지향을 드러내는 특징을 가진다. 아마도 이런 정도가 현재 실학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의 일반일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의미는 조작의 소산일 따름이다. 이는 문헌을 통해서도 금방 확인될 수 있다. 즉 실학의 시대배경인 조선조의 대표적 기록문헌인 『조선왕조실록』을 놓고 그 용례와 빈도를 살피면 된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실학이란 용어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사용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대개는 시문을 다루는 사장학詞章學에 대비하여 경학經學이라는 의미로 제시되었다. 드물게 '진실한 학문'이나 '실제의 학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나 현재와 같은 의미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학이라는 용어가 후대의 조작을 통해 등장한 개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물론 후대의 명명 내지는 조작이 무조건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실학의 경우는 문제의 심각성이 큰 편에 속한다. 현재와 같은 실학의 의미가 등장한 것은 대체로 1930년대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의 상황에서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과 같은 조선학운동의 선구자들은 정약용의 학문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실학이라는 용어를 등장시켰다. 이는 주권을 빼앗긴 울분과 근대성에 대한 열패감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려는 메시아적 몸짓이었다. 시세가 급박한 터라 충분한 숙고와 성찰의 소산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울림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마련한 실학의 개념이 이후의 실학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논의를 거칠수록 실학의 개념은 구체화되고 탄탄해졌다. 남과 북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이 개념을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독자적 실학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양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실학의 개념이 확정적일 수 없는 까닭에 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러한 실학의 개념이 가지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기본적으로 조선조 중후기에 펼쳐졌다는 실학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통섭할 시대정신을 포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실학자로 거명되는 인물들 간의 교류와 연대는 매우 희미하다. 기껏해야 북학파로 일컬어지는 일단의 그룹 정도가 실제적 유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실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심에서 탈락 또는 이탈한 지식인들이었다. 아니면 명문가 소속이면서도 스스로 변방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현실과의 접점 또한 마련되지 않았던 탓에 이들의 사고는 이미 유토피아적 상상력으로 예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실학이라는 틀을 원용하여 조선조의 사상사를 구획하는 일은 다양성을 차단하는 한편 무리한 획일성의 성긴 그물을 던지는 모습일 뿐이다. 예를 들어 '실학의 윤리사상'과 같은 접근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조선조 사상사의 온전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학이라는 개념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단박에 풀어내기는 곤란할 것이니, 실학의 개념에 치명적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일을 우선으로 한 다음 절충의 태도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 문제는 철학이나 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조에는 철학이나 예술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층위가 다르다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겠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시경제설(詩經諸說)

  • 박순철
    • 중국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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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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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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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颐斋自10岁开始一直到63岁去世, 坚持进行记录, 留下了《颐斋乱稿》这一庞大的著书。根据该书, 我们可以把握他对《诗经》的众多观点。他的《诗经》诸说主要引用了陆机的《毛诗草木鸟兽虫鱼疏》, 朱熹的《诗传》, 星湖李瀷的《星湖僿说》, 根据自己的观点进行了整理与批评, 简单明了地进行了说明。从研究结果来看, 颐斋黄胤锡的《诗经》诸说具有以下特征:第一, 提出了毛诗的圣贤传授说, 毛诗通过孔子-子夏-孟仲子这样的传授过程, 一直保留至当时。第二, 关于《诗经》大序和小序的作者, 颐斋支持衛宏說, 坚持比较合理的观点。第三, 对于"郑风"淫乱说, 颐斋认为淫乱是因为音乐的演奏方式与所奏之乐导致的, 与诗的内容无关。第四, 颐斋在日常中对《诗经》进行了灵活引用。这是继承了《诗经》断章取义的遗风, 颐斋在日常生活中教授《诗经》, 并对其进行活用和意思疏通, 他对《诗经》有着深入了解。第五, 颐斋对《诗经》的演唱具有很大的关心, 对其进行了说明, 特别是对弹奏玄鹤琴演奏《诗经》的情况进行了阐明。

朝鲜秋史与清文人学术交流之小考 -以翁方纲與阮元为中心 (A Study of Korean Kim Jeonghui and Qing Dynasty Scholars Academic Exchanges -Focus on Weng Fanggang and Ruan Yuan-)

  • 최창원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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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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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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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After the Qing Dynasty overthrow of the Ming dynasty, this is far-reaching influenced on the Ming Dynasty's Sovereign state of the Joseon dynasty. Not only did regulations prohibit the entry into various books published by the Qing Dynasty, In addition, the "Northern Expedition" of Song Siyeo put forward the mainstream political proposal of the Northern Expedition and Qing Dynasty.Even in this context, Representatives of scholars such as Hong Daeyong, Bak Jega, Kim Jeonghui on the Joseon dynasty peninsula at the time, put forward the idea of "Learning from Central Plains" through several visits to Shuntian Prefecture (now Beijing), And gradually formed the well-known Silhak (Practical Learning) ideological of "Bukhak, (Northern Learning)" in the Joseon dynasty history. the Joseon dynasty Silhak ideological scholar of Kim Jeonghui also was under the influence of the Weng Fanggang and Ruan yuan other famous Qing Dynasty Textual scholar, Fruitful achievements in Chinese Classical Studies Epigraphy, Calligraphy.He founded the "Chusa-che" style of calligraphy Chusa, the "Chusa-che" styled is although born out of the clerical script, but more composition and See also asymmetrical in harmony, Strong and vigorous brush strokes, Every word vibrant, Make it a master of gold stone calligraphy in the Joseon Dynasty.This study based on some records of Kim Jeonghui's visited to Shuntian Prefecture(now Beijing),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activities of seeking truth to facts in Korea and the Qing Dynasty at the time, and the impact on these activities on calligraphy and painting in the Joseon Dynasty.

Curves on the Mother and Indices of the Rete Carved to Ryu Geum's Astrolabe

  • Mihn, Byeong-Hee;Kim, Sang Hyuk;Nam, Kyoung Uk;Lee, Ki-Won;Jeong, Seong Hee
    • 천문학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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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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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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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We studyed an Korean astrolabe made by Ryu Geum (1741~1788), the late Joseon Confucian scholar. It has a diameter of 17 cm and a thickness of 6 mm and is now owned by Museum of Silhak. In the 1267 of the reign of Kublai Khan of Mogol Empire, Jamal al Din, an Ilkhanate astronomer, present an astrolabe to his emperor together with 6 astronomical instruments. In 1525, an astrolabe was first made in Korea by Lee, Sun (李純, ?~?), a Korean astronomer and royal official of Joseon Dynasty. He was referred to Gexiang xinshu, a Mongloian-Chinese book by Zhao, Youqin (1280-1345), an astronomer of Mongolian Empire. This astrolabe has not been left. In the mid-17th century, an astrolabe was introduced to Joseon again through Hungai tongxian tushuo (渾蓋 通憲圖設) edited by Chinese Mathematician Li Zhi-zao (李之藻, 1565~1630), that originated from Astrolabium (1593) of Christoph Clavius (1538-1612). It seems that Ryu refered to Hungai tongxian tushuo which affect to Hongae-tongheon-ui (渾蓋通憲儀) edited by Nam, Byeong-Cheol (南秉哲, 1817~1863). We analysis lots of circles on the mother and a set of index from the rete of of Ryu's astrolabe. We find that the accuracy of circles has about 0.2~0.4 mm in average if the latitude of this astrolabe is 38 degrees. 11 indices of the rete point bright stars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celestial hemisphere. Their tip's accuracies are about $2^{\circ}.9{\pm}3^{\circ}.2$ and $2^{\circ}.3{\pm}2^{\circ}.8$ on right ascension and declination of stars respecti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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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의 산서(算書) 구고원류(勾股源流)의 수학적(數學的) 구조(構造) (Mathematical Structures of Jeong Yag-yong's Gugo Wonlyu)

  • 홍성사;홍영희;이승온
    • 한국수학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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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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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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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Since Jiuzhang Suanshu, the main tools in the theory of right triangles, known as Gougushu in East Asia were algebraic identities about three sides of a right triangle derived from the Pythagorean theorem. Using tianyuanshu up to siyuanshu, Song-Yuan mathematicians could skip over those identities in the theory. Chinese Mathematics in the 17-18th centuries were mainly concerned with the identities along with the western geometrical proofs. Jeong Yag-yong (1762-1836), a well known Joseon scholar and writer of the school of Silhak, noticed that those identities can be derived through algebra and then wrote Gugo Wonlyu (勾股源流) in the early 19th century. We show that Jeong reveals the algebraic structure of polynomials with the three indeterminates in the book along with their order structure. Although the title refers to right triangles, it is the first pure algebra book in Joseon mathematics, if not in East Asia.

조선시대 동유(桐油) 사용의 진위 (The Authenticity of the Use of Tung Oil in the Joseon Dynasty)

  • 장영주;류성룡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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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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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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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There are records and claims that tung oil was applied to Korean traditional buildings and furniture as finishing paint. Records of the use of tung oil(桐油) exist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and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儀軌). However, there is also a claim that tung oil was not produced in Korea on its own, and that tung oil was not applied to important buildings such as palaces. Silhak scholar(實學者) Seo Yu-gu says that in Korea, people do not know how to grow tung trees, and boiled perilla oil is called tung oil. If tung oil was used in the Joseon Dynasty, it would be necessary to use tung oil for waterproof coating to preserve current architectural heritage, otherwise, tung oil coating would not be desirable. Analyzing the Yeonggeon Uigwe(營建儀軌) among the Joseon Dynasty's Uigwes shows that tung oil is neither mentioned nor used. In addition,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Uigwes mentioned in tung oil, it was found that perilla oil or Myeongyu(明油), not tung oil, was recorded in the actual material used. Therefore, the records of the use of tung oil during the Joseon Dynasty can be seen as records using Myeongyu(明油) or Beopryeon perilla oil(法煉荏油).

유가 문인예술에 나타난 선비정신의 특질 -조선조 유가 문인의 문인화를 중심으로- (The review of characteristic for 'SUNBI'spirit, seen literati arts of confucian scholar -focused on literati paintings of confucian scholar for chosun dynasty-)

  • 권윤희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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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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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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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유가의 문인은 자신의 성정을 수양하고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지고와 지선의 삶을 추구하며 예술을 통하여 열락의 경계에서 삶을 향유하였다. 유가 문인의 예술은 주로 문인화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시서화가 어우러진 문인화는 문인의 인품과 학문을 전제로 한다. 이는 보통 여기(餘技)와 묵희(墨戱)·석묵(惜墨)으로 인한 신사(神似)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유가 문인예술의 지향은 사의성(寫意性)의 추구(追求)·정신성(精神性)의 추구(追求)·유·도가미학의 혼융추구에 있다. 이는 유가 문인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고매한 정신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유가 문인의 선비정신은 우선 절의는 절개와 의리 그리고 충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의병활동과 구국을 위한 강학활동, 성정을 자연과 함께 한 풍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선비의 절의(節義)·충절(忠節)·의병(義兵)·강학(講學)·풍류(風流)등이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경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인화에 담겨진 화제이다. 여기에 유가 문인의 흉중을 바로 읽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비정신의 미의식은 풍류·충절·실학·애민·의리·사랑 등에서 그 미학을 새겨볼 수 있다. 선비정신의 예술적 구현을 위한 예술의 심미체험은 주로 감성지능에 의한 심미의 체험과 개인의 성향에 따른 심미체험이 있다. 이는 우리의 여러 문인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조 유가 문인예술에 드러난 선비정신은 정신 지향성이었으며 여유 지향성이었다. 나아가 사의 지향성과 실득 지향성이 있어 선비정신의 특질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다산의 염습의 제도에 관한 연구 -상구정을 중심으로- (A Study on Dasan s System of Washing and Shrouding a Dead Body - Focused on SANGUJUNG -)

  • 손남숙;임영자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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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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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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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The system of washing and shrouding a dead body is a series of procedures for encoffining in funeral rites, which are taken after death indentification by using CHOKWANG and praying for the resurrection of a dead body by calling a soul departed from the body. The washing and shrouding a dead body (hereinafter reffered to as "YEOMSEUP") is the broad concept which contains the procedures of washing, clothing and shrouding the body. The clothing includes washing, putting rices into the mouth. and then dressing while the shrouding includes first wrapping, second-wrapping and encoffining. The clothes for YEOMSEUP (all clothes and articles for funeral rites are designated) will be put in the coffin along with a dead body according to the YEOMSEUP procedures. Dasan, a SILHAK scholar in the late Yi Dynasty, pointed out some problems of the funeral rites observed in those days. At the same time, he found that the problems had arisen from the misinterpretation of the original descriptions in Chinese characters. and had tried to correct them. The books written by Dasan basically emphasized his ideology reshaping the whole procedures by trimming and removing meaningless formalities which are too much luxurious and wasteful and making them as a part of the original principles of the funeral rites. His Intents are clearly shown in his wrings on practical ettiquttes, such as SANGRYESAJON and SANGUIJEOLYO. In its attempt, this study aims at reformulating the DASAN\\`s SANGRYESAJON in terms of YEOMSEUP methods. A lot of virtues of the Dasan, like WOOSU, SIMUI, DAEDAE, MO, SORYUMHYO and DAERYUMHYO could also be found accordingly. The merits and characteristic in funeral rites are an obedience in filial duty, the pursuit of frugality. and the efficiency of practical functions. It could be said that the resurvey of DASAN′s theory on YEOMSEUP procedures is a meaningful work today when the original meaning of funeral rites fades out. Furthermore, discussions of refined burial service and encouraging cremation designed to improve land use, which are widely spread among people, could weaken the basic philosophy of YEOMSEUP and more likely propagate the atmosphere of despising the dignity of human be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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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회화심미(繪畵審美) 고찰 (A Study on the Painting's Aesthetic of Gongjae Yoon Duseo)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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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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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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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 후기 해남(海南) 출신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숙종년간 활동한 선비화가로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교체되는 전환기에 조선 후기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서 그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남인(南人)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당쟁에 휘말려 출세길을 접고 서화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조선 후기가 시작되는 18C는 실학(實學)이 대두되고 민족주의에 대한 자각으로 진경(眞景)시대가 열린 시기였다. 이러한 때 실학사상을 예술세계에 접목하여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이며 현실개혁적(現實改革的) 심미의식을 발휘하여 서민풍속화 개척, 서양화법의 적용, 사실주의적 기법 추구, 남종문인 화풍 도입 등을 도모하였다. 철저한 학고(學古)를 통해 변통(變通)을 도모했던 그의 회화관은 학(學)·식(識)의 학문과 공(工)·재(才) 기예적 요소를 두루 갖추어야 화도(畵道)를 이룰 수 있다는 형신(形神) 겸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양한 화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인물화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사실주의 표현을 심미 특징으로 한다.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은 극사실적 묘사력과 구도의 혁신성이 탁월하며, 자신의 울분을 비장감있게 전신사조(傳神寫照)한 파격적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의 산수화는 형사적 진경과 신사적 관념을 융합하여 형상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구현한 망적지적(忘適之適)한 이형미도(以形媚道)를 이루었다. 한편 개방적 사고로써 다양한 서민 생활을 소재로 삼은 서민풍속화는 이형사진(以形寫眞)의 실득(實得)으로 파격을 도모하였는데, 이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소극적 항거이자 애민정신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후 그의 화풍은 장남 윤덕희(尹德熙), 손자 윤용(尹愹)에게 가전되어 전해져 조선 후기 서화예술의 변화와 부흥을 선도하였다.

『규합총서』 「봉임측」에 나타난 조선후기 사대부 여성의 향문화(香文化)와 인식 (Noble Women's Culture and Perception of Incense and Herbs in the Late Joseon Dynasty based on 『Gyuhap Chongseo』, 「BongimCheok」)

  • 하수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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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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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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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논문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이 향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는지에 대해 『규합총서(閨閤叢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규합총서』는 이빙허각(李憑虛閣, 1759~1824년)이 편찬한 유서(類書)로, 사대부 가정살림운영에 필요한 지식으로 여긴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본고는 「봉임측」을 중심으로 향에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분석하여 이빙허각이 향에 대해 가진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인식을 밝혀냈다. 이빙허각에게 향은 단순한 미용적 요소와 완물의 기능을 넘어서 건강과 위생, 생활지식에 이르는 다양한 전통지식의 가정생활 운영에 필수적인 도구로 여겨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규합총서』는 꾸준히 필사되고 전래된 점으로 미루어 사대부 여성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사대부 여성이 남긴 기록이 많이 전하지 않아 『규합총서』를 저술한 이빙허각의 시각을 중심으로 향문화와 인식을 살펴보았다. 이빙허각은 향이 대중적인 물품이 아니었음에도 향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과 그 활용법을 제공하였다. 이는 당시 여성의 지식과 문화 소양을 넓히고, 실용적인 지식을 통한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였던 이빙허각의 의지를 반영한다. 본고는 이빙허각이 향을 가정생활 운영에 필요한 중요한 물품으로 인식하였음을 규명하였다. 이는 당시 사대부 여성이 사회와 가정 내에서 지식과 실용적인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기여하고자 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향이 미용과 생활지식 등 다양한 전통지식 분야에서 실질적인 목적을 가진 물품으로 활용되었던 사례를 통하여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의 향에 대한 인식과 그 활용법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