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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瀟湘八景), 전통경관 텍스트로서의 의미와 결속구조 (A Study on the Meaning and Coherence of Sosangpalkyung as a Text of Traditional Scenery)

  • 노재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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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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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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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소상팔경은 중국에서 태동하여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시와 그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전통 경관의 원형을 이끄는 문화현상으로 자리하였다. 지금까지 팔경 등 '경(景)'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정작 국내 팔경문화의 원류가 되는 소상팔경의 형식과 의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조경학적 연구 성과는 찾을 수 없다. 본 연구는 '문화경관 텍스트'로서의 소상팔경가와 소상팔경도에 담겨진 정형적 모습은 무엇이며 소상팔경이라는 문화현상 속에는 과연 어떠한 인식체계와 사유방식(思惟方式)의 결속구조가 엮여져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시도되었다. '팔(八)'의 상징성을 정리하고 경관 어휘소의 분절 및 해체를 통해 '소상팔경' 각 경의 표층구조와 상관관계를 기호학적 관점에서 아이콘과 코드로 풀이하는 한편 텍스트 '소상팔경가'와 '소상팔경도'의 결속구조와 그 의미를 파악하였다. 소상팔경은 음양관과 팔괘(八卦)를 기본으로, 인생과 자연의 순환 및 변환 원리를 문자와 그림 텍스트로 정리한 언어기호이며, 문장의 문법적 구조와 형식은 단어의 상징성을 강조한 함축언어를 유사성과 대비성의 원리로서 전개 대응시킴으로서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의식 안으로 옮겨오려고 시도한 결속구조와 결속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소상팔경'은 다양한 경관 요소를 일정한 형식과 구조의 틀 속에서 배열함으로써 인생과 자연의 생멸 과정과 교감 그리고 소통을 변증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상팔경의 이미지 기호는 결국 인생과 자연의 순환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시간 및 계절 순환체계에서 인간이 관조하여 바라본 서사적 풍경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입된 "소상팔경"의 문화현상은 성리학적 풍경으로 덧칠되면서 조선의 문예미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 결속구조는 조선의 색채 풍경으로 변형되었지만 결속력은 꾸준히 전승되어 전래 문화경관의 기본 텍스트이자 한국적 풍경의 원형이 되었다.

나비의 이미지를 응용한 의상 디자인 연구 -수용성부직포에 의한 누비 응용기법을 중심으로- (A Study on Fashion Design Applied by Butterfly Image -Focused on the Application Method of the Nubi by Watersoluble Paper-)

  • 허진영;김혜연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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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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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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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민화나 고화에 많이 등장하는 호랑나비나 제비나비형태의 그림은 다수 있지만 한자 문화권이라 그런지 '나비'라는 말은 늦게 나타난다. 나비라는 말은 나불나불 나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고서에 호접(胡蝶:범나비), 황접(黃蝶:노랑나비) 등으로 나타나다가 1481년에 나온 두시언해(杜詩諺解)에서 나비 또는 나뵈로,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訓夢字會)에는 나뵈로, 숙종 시대(1675$\sim$1720)에 나온 시몽언해물명(時夢諺解物名)에는 남이로 나온다. 그 후로는 나?????? 또는 나비로 불러오다가 현재 나비가 표준말이 되어 쓰여 지고 있다. 아직도 지방에 따라서는 나부 또는 나베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나비는 연인의 사랑 기쁨 행운 장수 영원 등의 의미와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끌려 예로부터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공예품, 장신구등에 응용되어 왔다. 본 연구는 이러한 나비의 형태와 색채를 분석하고 수용성 부직포를 이용한 누비 응용기법을 적용하여 나비의 형태미, 날개시맥의 섬세한 조형미를 표현하였으며 가볍고 드레이프성이 좋은 기본소재를 사용함으로서 나비의 날개 짓이 주는 율동적 움직임을 용이하게 표현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본 연구는 상기의 표현 기법이 나비 이미지의 미적표현에 적합함과 아울러 디자인 전개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 결과 나비 날개 윤곽선의 부드러운 곡선은 인체의 선적 조형미에 잘 부합되어 의상과 인체가 조화롭게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누비 응용 기법이 가진 특성들이 소재 표현기법으로 다양화 될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누비 기법의 응용을 통한 혼합기법이 의상에 적용됨으로서 오뜨 꾸뛰르(Haute Couture) 적인 고급스러운 작품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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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조의 문사양성과 문집편간 (A Study of the Training for the Literary Scholars and of the Compilation and the Publication of Anthologies during the Reign of the King Sungjong in Chosun Dynasty)

  • 신승운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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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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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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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In this paper, I intended to study the policy executed by the king Sungjong(성종), the ruler of the early Chosun(조선) Dynasty, for the purpose of the training for the literary scholars under the diplomatic necessity and from his own interest in literature, and the compilation and the publication of anthologies of the famous civil officials in those days under the influence of this policy. The overall findings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 1. Sungjong was comparable with the Sejong(세종) in his studiousness and especially, he was very interested in literature. He composed verses personally, showed them to his civil officials and demanded their poems in response to his own ones. Futhermore, he executed steadily the institutions of Eung-je(응제), Kaw-si(과식) and Weol-kwa(월과) that demanded creative writings from his civil officials. The purpose of these institutions which was propelled by the king Sungjong was the training for the literary scholars under the diplomatic necessity. 2. Chosun Dynasty exchanged envoys with Myeong(명) Dynasty during the time of the king Sungjong as many as 100 times. The training for the excellent literary scholars was nationally urgent problem because the competent literary scholars were needed whenever Myeong Dynasty dispatched the envoys to Chosun Dynasty. Eung-je, Kwa-si and Weol-kwa were executed from practical demand and 1 - 3 persons at the minimum, 60 - 70 persons at the maximum took part in this institution at a time. This means that 60 - 70 literary works were produced at a time. Therefore, the steady execution of Eung-je, Kwa-si and Weol-kwa inevitably resulted in mass production of literary works. 3. The king Sungjong instructed his civil officials to compile the anthologies of the then representative civil officials as a means to encourage literary compositions, read it himself and took actions to publish them at the expense of government. There were six anthologies compiled and published under this policy of the king Sungjong, Kang Heui­maeng's Sasukjejib(강희맹, 사숙제집), Shin Suk-ju's Bohanjaejib(신숙단, 보한제집), Kim Su-on's Shikujib (김수온, 식우집), Choe Hang's Taeheojeongjib(최항, 태허정집), Seo Keo-jeong's Sagajib (서거정, 사가집), Lee Seok-hyeong's Jeoheonjib(이석형, 저헌집). Yu Ho-in's Noekyejib(유호인, 뇌계집+CZ48), Lee Seung-so's Samtanjib(이승소, 삼탄집), Kim Jong-jik's Jeompiljaejib(김종직, 점필제집) of three were examined by the king Sungjong, but published later because of the death of the king. 4. jeompiljaejib was compiled by order of the king Sungjong and passed Eulram (을람 : king reads an anthology personally) which contained Joeuijemoon(조의제문) that criticized the king Sejo(세조) who had usurped a throne. The recording of Joeuijemoon became an issue in process of Muosahwa(무오사화), and it was ordered that the printing blocks should be broken and the published books should be collected and be burnt up. These procedures destroyed the social atmosphere that people considered it an honor writing literary compositions, compiling and publishing anthologies thanks to the steady efforts of the king Sungjong. 5. It had an important effect on the compilation and the publication of anthologies after that, breaking the printing blocks, collecting and burning up the pulished books of Jeompiljaejib because of recording of Joeuijemoon. Namely, it got universalized to delete compositions that can cause problems in the future as well as the parts related to political issue, from the objects of recording. Such tendency became one of the important principles of the anthological compilation after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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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 전승되는 아름다움의 장소신화 : 사회적 자연과 명산의 여행지리 (Place-myth of The Scenic Beauty from Mt. Kumgang : The social nature and the travel geography of noted mountains)

  • 신성희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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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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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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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사회과학계에서 '산(山)'은 환경 및 생태와 주로 연관되어 사회와 문화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자연'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진 한반도에서 산은 자연과 사회집단이 교류하면서 형성하는 '사회적 자연'이며 이러한 산지들로의 여행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자연의 사회화 및 문화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여러 명산들 가운데 왜 금강산은 유독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전승되어 왔으며 수많은 예술창작의 원천이 되어 왔는가? 에 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조선시대 금강산의 여행 지리를 검토한다. 구체적으로 한국인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서 금강산이 지닌 장소신화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금강산 여정은 당시의 교통 여건에서 한계에 달하는 체력소모와 장기간의 불편 및 위험에의 끊임없는 노출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하여 극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금강산의 경관은 더욱 더 아름답고 신비롭게 기억되었다. 금강산 여행을 필생의 소망으로 여기고 성취하려던 이유는, 선대 여행자들의 기록과 예술작품을 통해 금강산은 당시 최고의 '여행 로망지'로 알려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토록 아름답다고 알려진 금강산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순수한 동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의 실천은 개인의 미적 향유와 즐거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감상을 도덕적 책무 및 학문적 이상을 실천하는 일과 동일시하는 유교적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한편, 금강산 여행자들은 각종 기행문학과 회화 등 예술작품으로 금강산 여행을 재현하여 기억하였는데, 이 또한 개인적 차원의 문화예술 행위를 넘어서서 가보지 못한 사람들과 후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즉 여행 경험의 적극적인 사회적 기록이자 문화정치적 재현의 과정이었다. 이는 금강산 여정의 종료가 결코 여행의 끝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며, 여행의 기억과 재현을 통해 상상의 지리로 새롭게 재생산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금강산이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는 독보적인 장소신화를 형성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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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팔경의 시원(始原)과 변용(變容)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Origin and Transformation of Jeonju-Palkyung)

  • 노재현;손희경;신상섭;최종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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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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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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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전주를 대상으로 한 11개 집경(集景)의 표제어 및 시어(詩語) 분석과 해석을 토대로 전주 팔경의 형식과 내용상의 시원 및 변용과정을 시계열분석으로 살핀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팔경시 이전에는 전주팔경의 골격과 유사한 형식의 집경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추재집"에 실린 여덟 편의 시를 전주팔경의 시원(始原)으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없으며 그 시기는 1829년경으로 추정된다. 이후 19세기 말 작품인 '완산승경'과 '열녀춘향수절가에 기재된 팔경'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시인 신석정이 전하고 있는 팔경' 중 '동포귀범'만이 행정구역의 변화에 따라 동지포에서 봉동의 동촌으로 대상장이 변용되었지만 모두 조수삼의 팔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표제어 일치율 분석 결과, 전주팔경은 최소한 19C 후반에 정착(定着)된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줄곧 전주를 대표하는 경관으로 지속된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남천표모'와 '곤지망월'이 추가되어 전주십경으로써 외연(外延)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팔경 제영의 형식성에도 불구하고 "패향십영(沛鄕十詠)"이나 "견도십영(甄都十詠)" 그리고 "빈일헌십영(賓日軒十詠)" 등 조선 전기의 집경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 나루시마 슈쿠시(成島淑士)의 집경 속에도 경기전 건지산 조경단 오목대 그리고 기린봉 덕진연 만경대 등 조선왕조의 발생지이자 전라감영의 수부(首府)로서의 상징성이 높고 전주십경의 연원(淵源)이 되는 명소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때 전주팔경의 의미론적 태동기는 조선 전기까지로 그 전범이 소급(遡及)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는 견훤도(甄萱都)와 같이 후백제 도읍지로서의 회고(懷古) 관성(慣性)이 큰 승경 뿐 아니라 만경대와 같이 고려말 정몽주와 이성계를 상기시키는 내용의 경물 또한 전주 팔경에 등장함으로써 후백제 도읍지로서의 전주의 위상을 높이고, 조선 왕조의 발흥지로의 역사적 간극을 좁히고 있음이 확인된다. 전주팔경은 후백제 이후 조선시대 역사문화를 담는 유기체적 존재로 다소 부침(浮沈)을 거듭하였지만 지역의 대표적인 승경으로 꾸준히 변용되어 왔다. 전주 팔경은 '전주 한풍경(韓風景)'을 이해할 수 있는 문화족보로,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을 사는 전주인의 몫이라 판단된다.

<영사정팔경도(永思亭八景圖)>와 팔영시로 본 영사정팔경의 경관구조와 의미 (A Study on the Landscape Structure and Meaning of Eight Scenic Views of Yeongsa-jeong Pavilion through the Painting and Poem)

  • 노재현;손희경;김홍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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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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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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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문헌조사 및 시화(詩畵) 분석 및 해석 그리고 현장조사를 통해 <영사정팔경도>와 청계 양대박의 영사정팔영시에 드러난 영사정팔경의 경관구조와 의미를 분석 해석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영사정과 그 일원은 조영자 안전이 선친의 음택을 향해 망배를 올리던 '영사'의 공간으로, 영사정팔경은 남원 형승의 거점이자 요체인 지리산과 순자강 그리고 요천, 금석교, 청계동 등 영사정을 중심으로 한 남원 승경을 관망대상으로 하고 있다. 영사정팔경은 일반적인 정자팔경과는 달리 다시점 구도와 시점 그리고 장소의 전이를 보이는 가운데 영사정은 물론 순자강과 요천 일대의 산수경관을 조망하는 파노라믹한 부감적 구도를 보인다. 영사정팔영은 중국 소상팔경과의 시각적 결속의 흔적이 다수 엿보이는 가운데 남원지역의 토속적인 경관과의 어울림을 추구한 조선중기 과도기적 특성을 지닌 제영 집경으로 판단된다. 팔영시와 팔경도 각 1 2영[경]에 등장하는 '창송취죽(蒼松翠竹)'은 영사정의 조영자인 안전 또는 팔영시의 저자인 양대박의 현신이자 경관 향유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표제에 등장하는 시어 및 화소의 음양론적 특성을 해석한 결과, 팔영시에서는 대부분 음적인 시어들로 충만해 있고 팔경도 또한 이에 조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사정팔영에서 묘사된 행위와 <영사정팔경도>에 표현된 행위에 대한 비교 분석 결과, 제3경 순강모우를 제외하고는 두 매체 간에는 일치된 특성이나 공통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음은 볼 때, 매체간의 형식적 유사성은 인정되지만 영사정팔영과 팔경도는 언어예술과 공간예술의 본질적 속성에 충실한 다른 결과물로 추정된다.

밀양 칠탄정 경영과 칠리탄 16경의 경관특성 (A Characteristics of 16 Scenes of Chilitan and Management of Chiltanjung, Milyang)

  • 김수진;정해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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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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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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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오한 손기양이 경영한 칠리탄 일원의 경관특성을 고찰함으로써 조선 16~17세기 선비가 지향했던 출처관과 이상적인 경관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으로는 「칠탄정십육경도」에 묘사된 그림과 시문 그리고 현장답사를 진행하여 각 경의 구조와 해석을 진행하였다. 오한은 광해군 4년 조정의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자 은거를 결심하고 낙향하게 되는데, 평소 엄자릉의 은일적 삶을 흠모하여 엄자릉이 칠탄을 경영한 것과 같이 원래의 종천을 칠리탄이라 이름하고 그 주변 정자에 짓고, 낚시하는 장소를 마련하는 등 자연에 귀의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은거를 하고 있음에도 임금과 조정을 걱정하는 등 도학적 출처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칠탄정 원림 건물의 각 기둥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수신, 안빈낙도 등의 성리학적 사유와 무위자연을 표상하고자 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1936년 모습이며, 읍청당을 중심으로 운강루, 벽립재, 칠탄정 등이 위치하고 있다. 원림 주변에는 '진암수석', '기암', '오한손선생장구지소', '조기' 등의 각자가 남아있어 당시의 장소정체성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중건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칠탄정 주변으로 소나무를 비롯한 전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연꽃, 복숭아, 대나무 등이 식재되었다고 하며, 현재 은행나무와 배롱나무, 소나무와 밤나무가 발견되는데, 식물의 상징성과 실용성을 고려하여 식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칠탄정 16경의 경관묘사 방법은 '장소+경관(행위)'의 구조로, 칠탄정을 중심으로 근경, 중경, 원경이라는 장소적 특징을 분류하여 해석하였으며, 칠탄정 일원의 각 경관을 은자를 비롯한, 군자, 신선사상, 향토경관, 태평성대 등을 상징화하여 유교적 이상향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십이곡"에 나타난 메타교육적 함의 (The Meta-Educational Implications of Toson-Shibigok)

  • 박미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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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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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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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퇴계 이황이 창작한 ${\ulcorner}$도산십이곡${\lrcorner}$이 오늘날에 어떤 교육적 가치를 발휘하는 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ulcorner}$도산십이곡${\lrcorner}$과 그 발을 통하여 퇴계가 1차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자로서 의도했던 교육의 대상과 교육 목적, 교육방식과 내용을 살펴 당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이런 교육적 태도가 어떤 메타교육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규명하였다. 퇴계는 ${\ulcorner}$도산십이곡${\lrcorner}$을 교육적 의도에서 창작하고 그 의도를 ${\ulcorner}$도산십이곡발${\lrcorner}$ 통해 밝혔다. 퇴계가 의도한 1차 교육적 의미는 퇴계가 직접적인 교육자로서 시조라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피교육자에게 전달하고자 한 문학교육이다. 대상은 아배 즉, 자제로 나아가 학문에 입문하는 초학자를 설정하였다. 교재는 당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노래, 시조를 선택하였다. 이는 당대 문화를 비판적으로 인식한 결과로 선택된 것이다 노래의 교육효과를 최대한 고려한 문학교육으로 교재의 내용은 퇴계의 평생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다. 퇴계는 이와 같은 1차 교육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문학교육적 구도를 당대의 다른 유학자 및 후대인에게까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는 오늘날 교육이론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 메타교육적인 것이다. 퇴계는 본인의 삶을 선택하는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 교육으로서의 메타교육 학문 즉 진리에 접근하는 학문적 태도에 대한 메타교육 등 다양한 메타교육적인 방법을 보여주었기에 퇴계의 작품과 삶이 지대한 교육적 가치를 오늘날까지도 지니게 된다.입고)와 관련된 다양한 문헌자료의 전승은 해당 시조 뿐 아니라 시조문학의 수용과 전승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플래쉬>고정식>스크롤 방식 순으로 나타나 전체의 결과를 종합하여 볼 때 플래쉬 방식의 성능이 우수함을 알 수 있었다.장 많았고 약 $88.9\%$가 동반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CD가 가장 많았다.구 결과와 유사한 결과이다.고 사료된다. 6. 치료전에는 차이가 없던 남,여군 사이에 치료후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치료 효과에 관계없이 남여에 따른 성장양상의 차이가 그대로 표현된 것으로 사료된다. 연구는 거대 편도를 가진 기능성 III급 부정 교합자의 구개 편도 절제술 전후의 인두강, 설골, 두부 위치의 변화 양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단국 대학교 부속 치과 병원 교정과에 내원한 남녀 환자 42명을 대상으로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55.19\%$로 첨가량이 증가하면서 두 항목 모두 크게 감소하는 결과를 보였다. 색도를 분석한 결과 L값, a값, b값 모두 표고버섯 분말 함량이 증가하면서 감소하였고, 모든 처리구에서 기존 무첨가구와 극히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료별 관능검사 결과에서 색 (color), 먹을때의 느낌 (chewiness)과 단맛(sweetness)의 경우 무첨가구와 모든 처리구가 유의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향미 (flavor)와 전반적인 기호도(overall acceptability)에서 당화액과 추출액의 혼합비가 7:3인 시료구만이 무첨가구와 유의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로 보아 표고버섯 추출액을 당화액에 첨가하여 조청을 제조할 경우 적정 첨가 수준으로 당화액과 추출액의 비가 3:7의 범위를 넘지 않아야 버섯의 장점을 살리면서 기존 조청의 특성을 변화시키지 않는 제품을 제조할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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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조의 이미지 구현방식과 의미화 과정 연구 (A Research on Park Jae-sam's Sijo with Emphasis on his Methods of Creating Poetic Images and the Process of Creating New Ideas)

  • 손진은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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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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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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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논문은 현대시조사에서 박재삼 시조의 위치와 중요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박재삼은 '형식미와 내용미의 행복한 일치'를 그 시조 창작의 지향점으로 삼아 시조 쓰기를 진행해 왔다. 박재삼은 이를 위해 여러 시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이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그 점이다. 이 글에서는 박재삼 시조 창작방법론의 키워드라 판단되는 이미지의 구현방식과 의미화 과정을, 한의 정서와 영원성의 결합, 양가성의 정서를 통한 초월, 병렬 형식의 은유로 이루어진 언술구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미지 구현방식과 의미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박재삼 시조 미학의 차별성의 첫 번째 특징은 한의 정서와 우주적 무한과 시간적 영원을 본질로 하는 범주인 '영원성'이 결합하는 양상이다. 그동안 박재삼의 시조에서 이 영원성의 문제는 간과된 측면이 있다. 이 영원성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으로 인해 나타난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또 다른 세계, 즉 '저승'이라는 공간과의 소통을 시도하며, 슬픔에서 생산된 아름다운 가치인 '한'이 영원성과 결합됨으로써 자아의 정체성을 찾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이 영원성은 상당히 내면화되어 있으며 변신 모티브 역시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시의 구조 안에 내밀하게 설정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 구성방식이 그동안 논자들로 하여금 시조에서 영원성을 언급하지 못한 요인이 되었지만, 이 점이 박재삼의 시조가 한국 시조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부분이다. 두 번째 특징은 상반되는 이미지를 병치하고 통합함으로써 초월에 이르는 의미화 방식이다. 박재삼은 어떤 정서가 단일한 이미지로 환원되는 것을 거절하는 전략을 가지고 시작에 임했다. 그의 시의 밑바탕을 이루는 한의 정서 자체가 삶의 기본적인 구조를 내포하며 인생과 자연의 온갖 바람을 담고 있는 본질적 요소이다. 이 양가적 정서는 한 시 안에서 존재해도 어긋나지 않는다. 이 의식의 근저에는 삶에 대한 너그러운 인식과 세상사에 대해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삶의 자세가 깔려 있다. 미학적 측면으로 드러나는 이런 양가적 감정은 인생관, 세계관으로까지 확산된다. 그의 시에 드러나는 정서가 복합적이라는 것이 다른 서정 시인들과의 또 하나의 차별성이다. 그 결과 이런 양가성의 인식과 종합이라는 시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미지 구현방식과 의미화 과정의 세 번째 특징은 언술구조가 은유구조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병렬 형태로 연결되어 시의 전개에 관여한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내 사랑은"이라는 시의 '울음'의 미학을 그려내는 이미지가 어떻게 구현되어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의미화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도출되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병렬형식의 이런 언술구조는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무엇보다 직유가 사용되지 않고 예측하지 못하는 은유로 된 언술구조가 의미작용을 일으키며 시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박재삼의 토속적 서정이 체질적인 것인 동시에 그 바탕에는 민족정서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고, 그 호흡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통적 호흡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이는 앞으로 더 깊은 고찰을 요한다. 박재삼은 현대시조사에서 순정하고 서정적인 시인으로서 한국 전통의 정서와 특징을 자신의 창작방법론에 담아냄으로써 여타 시인들과 차별화된 가치 있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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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창(時調唱)의 전개(展開)와 현황(現況) (The development and current status regard to Sijo-chang時調唱)

  • 문현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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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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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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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시조창사(時調唱詞)'를 노랫말로 하는 시조창의 전개와 현황에 대한 논문이다. 시조창은 현재까지 전하여지는 우리 한민족의 대표적인 시가(詩歌)로, 역사적으로 신라 향가(鄕歌) 이전부터 그 근원을 소급할 수 있으나, 현재 전하는 시조창은 1800년경 조선조 후기부터이다. 시조창은 1800년경 서울 일원에서 발생한 경제(京制) 평시조(平時調)로부터 태동하여 다양한 악곡의 종류가 생겨나고, 또한 서울뿐 아니라 각 지방으로도 널리 불려 다양한 지역별 창제가 생겨났다. 본고에서는 1800년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조창의 전개 양상을 1800년대와 1900년대 이후로 구분하여, 1800년대는 고(古)악보를 중심으로 현행 악곡과의 비교를 통하여 현행 악곡의 발생 과정을 살피고자 하였으며, 1900년대 이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제를 비롯한 영제, 내포제, 완제 등 각 지역별 창제와 현재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불리는 석암제 창제를 포함하여 인물(창자) 중심의 전승계보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1800년경의 고악보에 수록된 초기 시조악곡들은 거의 현행 경제 평시조와 지름시조 계통이었다. 1900년대 이후에는 악곡의 종류가 십여 종류로 다양화됨과 아울러 지역별 창제도 확립된 시기로 경제 시조창 외에 영제, 내포제 등 시조창이 생겨났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석암 정경태가 만든 창제가 전국을 통일하다시피 하여 각 지역별 창제의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으로 1900년대 초, 중반 또는 중반기 이후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시조창의 학술, 창작 및 공연별로 그 양상을 각각 살폈다. 학술 부문은 1950-60년대 초창기에 장사훈과 이혜구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이후 황준연, 김영운, 서한범, 변미혜, 최헌, 임미선(무순) 등과 같은 국악학자들과 시조창에도 관심이 많은 김동준, 신웅순, 신경숙, 조규익(무순) 등의 국문학자들이 뒤를 이었다. 또한 김기수, 이주환, 정경태, 이양교, 김호성, 조순자 및 필자(무순) 등의 전문 실기인들도 학술적 가치가 큰 악보집이나 저서 및 논문 등을 통하여 시조창 이론의 정립을 꾀하였다. 창작 부문은 시조창에 한정된 곡은 아니지만 정가에 바탕한 아악풍의 곡들을 만든 김기수로부터 시작되어 한만영, 이성천, 황병기, 김용진, 박일훈, 이상규, 김영동, 임진옥, 황의종, 이해식, 전인평, 이준호, 김성경, 유은선, 이건용, 백병동, 이만방, 황성호, 김기영, 구본웅, 임준희, 이찬해, 류형선, 김현정, 박경훈, 박정규, 신동일, 안현정, 윤혜진, 이태원, 임희선(무순) 등의 작곡가들에 의하여 시조 창작곡을 포함한 정가창 관련 창작성악곡들이 이어져 왔다. 공연 부문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시조창을 포함한 전통 정가창 위주의 공연이 펼쳐졌으나, 그 이후에는 대중성 짙은 퓨전 국악이 활성화함에 따라 젊은 작곡가들과 몇몇 퓨전 정가 공연그룹에 의하여 퓨전 정가곡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나 아직은 다른 국악기 분야에서처럼 활발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결론에서는 전통 시조창의 올바른 전승을 위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를 제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였다. 첫째, 현행 전하는 다양한 시조창 악곡이 골고루 불려지지 않으며, 곡명에 있어서 창자나 지역에 따라 달리 부르는 등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점, 둘째, 악곡의 종류별로 얹어 부르는 시조창사의 획일화, 셋째, 시조창자가 부를 수 있는 노래 장르의 영역이 점점 축소되고 있는 점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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