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Neo-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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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의원(醫員)의 변화와 자기의식(自己意識) 형성 (Study about the formation of doctors' identity in the Joseon(朝鮮) Dynasty)

  • 김성수
    •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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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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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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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朝鮮) Dynasty, the medical world was encountering a great change. It is said that a large stream between the first half and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was a qualitative transition from official relationships to private relationships, that is, from adjustments by governmental power to contractual relationships between individuals. Doctors who can be said to be the core of the medical world became to be left in severer competition. The fact that the number of people engaged in medical practice increased to the extent that doctors had to compete with each other implies that not only demand for medical care was increasing but also that medical care was becoming social service that must be shared by all people in the Joseon Dynasty rather than by small numbers of men of power. Anyway, it seems like that, in the competition that was becoming fiercer, they tried to establish their authority in diverse methods unlike before. As an authority to determine the social positions of doctors in the latter half of the Joseon Dynasty, the government was still occupying an important position, but doctors tried to show off their medical techniques utilizing excellent teachers or books. Meanwhile, they were making efforts to improve treating skills and thereby they were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medical techniques although they were sometimes criticised because of radical treatment or fierce drugs. In this process, it seems like that some doctors made efforts to establish the social meaning of medicine and their identity. In the short dialogue with Hong Yangho(洪良浩), Cho Gwangil(趙光一) was presenting the image of doctors as active and subjective beings. Pointing out the fact that in the society where feudal position systems were still impregnable, even the Confucian scholars who could be considered as a leading group could not but be passive in front of the sovereign power, he emphasized the fact that doctors could practice treatment as they liked. In that he re-discovered the meaning of treating people's diseases as a professional intellectual and that he was forming a subjective sense that medical techniques are active self expression, it can be carefully said that Cho Gwangil was obtaining his identity as a doctor. In the society in the Joseon Dynasty where the position systems were still valid and the value system under Neo-confucianism(性理學) supporting the system was impregnable, this change can be thought to be small yet quite meaningful.

『중용』과 진화생물학의 대화 가능성 모색 (A Study of the Possibility of Interaction between the Doctrine of the Mean and Evolutionary Biology)

  • 김재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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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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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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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중용"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과 "시중(時中)", 그리고 "천지위만물육(天地位萬物育)"의 이슈가 진화생물학의 유전자, 자연선택, 종 다양성 문제와 대화 가능한지 그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성리학과 진화생물학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중용"과 진화생물학의 접점이 무엇인지 모색하고 있다. 이 논문은 세 가지 점에서 "중용"과 진화생물학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검토한다. 첫번째는 인간 본성에 대해 천명지위성과 유전자의 관점에서 대화 가능한지 살펴본다. 두 번째는 존재 이유의 타당성을 시중과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세 번째는 생물간 상호 유연 관계를 천지위만물육과 종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 번째 모색의 소주제들은 <리와 기 vs 유전자와 운반체>의 구조적 연관성, <성선 vs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성>의 판단기준, <인 의 예 지 vs 후성규칙>에서 '후천적 선험' 도출 가능성이다. 두 번째 모색의 소주제들은 <천리의 뒤집힘[번(?)] vs 돌연변이>, <변/화 vs 진화>의 시간관, <시중 vs 자연선택/적응>의 메타meta적 접근이다. 세 번째 모색의 소주제들은 <리일분수理一分殊 vs 부분과 전체>의 프랙탈 구조, < 일기一氣 vs 생물간 상호 유연>의 상동관계, <천지위 만물육 vs 생태계>와 치중화致中和의 과제이다. 이러한 모색과 제안들에 대한 후속연구는 "중용"을 둘러싼 성리학 연구의 지평 확대를 가져 올 수 있다.

기학(氣學)과 심학(心學)의 횡단적 소통구조에 관한 연구 - 장횡거(張橫渠)와 왕양명(王陽明)의 이론을 중심으로 - (The Dialogue of Gi-Hak and Sim-Hak)

  • 장윤수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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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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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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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종래 '병렬적' 또는 '대립적'으로 이해되던 장횡거(張橫渠)의 기학(氣學)과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을 상호 소통의 차원에서 해명해 보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필자는 여기에서 태허(太虛)와 양지(良知)의 개념을 직접 비교함으로써 기학(氣學)과 심학(心學)의 존재론적 구조가 상통함을 설명하려 하였고, 그리고 대심(大心)과 치양지(致良知)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기학(氣學)과 심학(心學)의 공부론이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논증하였다. 장횡거의 태허론(太虛論)은 불교의 적멸론(寂滅論)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심학(心學)을 기학(氣學)으로 이해하는 작업, 즉 양지(良知)의 본체를 태허(太虛)로 이해하게 되면 그동안 양명심학(陽明心學)이 정주학(程朱學)으로부터 줄기차게 받아야 했던 '불교적 이단론(異端論)'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이 연구는 횡거 철학의 전통을 정주리학(程朱理學)의 시각에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육왕심학(陸王心學)의 전통에서 읽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여기에서 성리학의 발전적 계승으로 양명(陽明) 심학(心學)을 해석하였고, 또한 양명(陽明) 심학(心學)의 이론선구로 횡거(橫渠) 기학(氣學)을 이해하였다.

왕의 즉위와 대동법 시행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Throne of Kings and Implementation of Daedongbeop)

  • 최학삼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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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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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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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광해군 즉위 후의 경기대동법(선혜법), 인조 즉위 후의 강원도대동법, 효종 즉위 후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의 시행은 새로이 즉위한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시키려 했던 위대한 경세가(輕世家)의 대단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세 왕의 즉위 후 시행된 대동법은 그 시행과 관련하여 큰 위기에 당면하게 된다. 시행과 관련된 위기의 차이점은 광해군 때와 인조 때의 대동법은 시행결정 후 시행은 즉시 이루어졌으나 얼마 안가서 폐지위기에 놓였다는 것이고, 효종 때의 충청도 및 전라도 대동법은 시행 전에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 반대를 극복하고 시행된 이후에는 폐지위기를 맞지 않고 계속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세 왕의 즉위와 그 새로운 왕에게 기대를 걸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한 대동법의 시행을 성공시킨 경세가(輕世家)들의 노력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광해군 때의 한백겸과 이원익 및 황신, 인조 때의 조익과 이원익, 효종 때의 김육 등은 공물방납의 폐단을 개선하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개선시켜 주고자 하는 공통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해석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 그 해석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경세가(輕世家)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법 시행을 위한 정책입안과 시행인 것이다.

동해 무릉계(武陵溪) 명승 탄생의 문화사적(文化史的) 배경 (The Cultural History of Mureung Valley, the Scenic Site designated as National Cultural Proper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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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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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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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강원도 동해시에 소재한 무릉계는 역사 경관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 불릴 만한 수려한 비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많은 선현들의 유람이 있었고, 이들이 남긴 시문과 각자 등의 역사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무릉계는 두타산(頭陀山) 무명의 한 골짜기였으나 1577년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유람을 통해 '무릉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당대 명사들이 유람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다. 지역민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들도 애호하는 유람 명소였다. 무릉계는 사람들의 유람을 통해 선계 강학처의 의미가 부여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그 명성은 수그러들지 않아 현재까지도 유람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무릉계를 유람한 사람들은 그 과정이나 감흥을 시문으로 남겼다. 이러한 시문에는 무릉계가 품고 있는 심미적 이미지가 표현되었으므로, 시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무릉계의 이미지가 형성되어가고 그 명성이 알려진다. 무릉계를 제재로 한 시문은 무릉계의 장소적 의미와 명성을 알릴 수 있는 전거가 되었다. 무릉계에 새겨진 수많은 각자는 무릉계의 명성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며, 사람들로 인해 그 공간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시문이나 각자 등은 오늘날 무릉계의 역사 유적으로 남아 무릉계의 문화사적 의미와 그 명성을 더욱 각인시켜준다. 특히 각자를 통해 조선 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무릉계를 유람한 것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무릉계는 일찍이 척주팔경의 하나로 지목되었고 무릉계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무계팔경도 만들어진다.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정수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릉구곡이 설정됨으로써 경관의 장소적 의미를 넘어 성리가 구현되는 도학의 장소로도 의미가 부여된다.

이불(李?)의 주육관(朱陸觀) 연구 - 『주자만년전론』을 중심으로 - (A Study of Li Fu's Appreciation of Zhu Xi and Lu Jiuyuan's Philosophy - Centering around Zhuziwannianquanlun -)

  • 임홍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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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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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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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주희와 육구연 간의 논쟁은 송명이학의 전개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학술논쟁이자 주희의 학술 생애 중 가장 격렬했던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양자 간의 사상적인 이견(異見)으로 인해 전개된 논쟁은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다만 학문 방법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고 한다면, 그들 사후 이로 말미암아 전개된 것은 양대 학술 유파 간의 분쟁이라 할 수 있다. 송 원 명대를 거쳐 학술계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주륙이동논쟁은 주희 사상의 변화를 고증하는 문제에 있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육자의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주자의 사상 역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청대에 이르러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었고, 각각의 주장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문장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청대의 육왕학자인 이불은 "주자만년전론"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자와 육구연의 사상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주자만년전론"이 비록 육왕학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면이 없지 않지만, 주륙 사상에 대한 비교 작업이 객관적인 고증학적 작업을 통해서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불의 주륙관은 육왕학을 기본 토대로 하여 주자학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주륙 사상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불은 육왕학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육왕학에 대해 선별 취사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

이도설(理到說)에 대한 우담 정시한(愚潭丁時翰)의 견해 (Udam Jeong Sihan(愚潭 丁時翰)'s View on the Ido-seol(理到說))

  • 이원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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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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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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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만년 학설인 이도설(理到說)에 대한 우담 정시한(愚潭 丁時翰, 1625~1707)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퇴계 이도설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수용과 계승 및 발전의 양상을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퇴계 이후 이도설은 '물리도심(物理到心)'으로 이해되었고,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은 이를 무위의 본체인 '리(理)'에 '저기서부터 여기로 이른다'는 방향성과 운동성을 부여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반면 우담은 '물리도심'을 긍정하였고, 이를 '리'의 온전한 체(體)를 부여받아 만물의 용(用)을 아울러 갖춘 '심(心)'이 만물을 통섭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존에 구축한 '리의 용(用)'에 대한 정치한 해석에 기반하여 '이도(理到)'를 '물아위일(物我爲一)'로 확장하였다. 이때의 '물아위일'은 단순한 융회관통의 차원이 아닌 '물리'가 질서정연해져 '심' 속에 누가 되지 않는 경지가 된다. 우담의 견해는 '이도(理到)'의 서술어에 해당하는 '도(到)'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이를 '진(盡)'으로 대체하여 이도설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갈암과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우담은 보다 본체론적인 측면에서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우담의 견해는 퇴계가 구축한 '리' 중심의 성리학 체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용한 틀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담의 리체용론이 퇴계학파의 사상 형성과 그 양상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이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도설(理到說)에 대한 견해를 통해 본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의 '리(理)' 개념 (Hanju Yi Jinsang(寒洲 李震相)'s concept of Li(理) through his viewpoint on the Ido-seol(理到說))

  • 이원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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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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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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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물격설(物格說)인 이도설(理到說)에 대한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주의 '리(理)' 개념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퇴계 이도설에서 포착되는 퇴계 성리학 체계에서의 '리' 개념이 후대에 전개 심화되는 양상을 확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무위의 본체인 '리'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던 이도설에 대해 영남지역의 퇴계 후학들은 대체적으로 자구(字句) 해석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한주 역시 '격물(格物)' '물격(物格)'에서의 '격(格)'을 '구(究)'의 의미로 풀이한 것에 기반하여 이도(理到)의 서술어인 '도(到)'를 '진(盡)'의 의미로 풀이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퇴계가 '리(理)의 자도(自到)'를 승인하면서 체인하였던 '리'의 '체용(體用)'과 '활물'적 특성을 퇴계 성리학의 종지(宗旨)로 보았으며, 이는 그의 인식방법론으로 대표되는 삼간법(三看法)을 설명하는 곳에서 나타난다. 한주 이전의 학자들은 자구의 의미를 수정하는 데에서 더 이상의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어 이도설 해석을 통해서 학문적 특성을 파악하기에는 부족하였다. 한주는 리(理)에 대한 활간(活看)이 부족할 경우 '심(心)'과 '리(理)'의 관계를 곡해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리일분수(理一分殊)의 관점에 기반하여 퇴계 이도설을 평가하였다. 그 결과 물리(物理)를 본구한 '심'의 주류변화(周流變化)와 '리'의 작용성을 등치시켜 '리'의 '분수' 적 측면을 아우르면서 '심'이 만물의 '리'를 통섭한다는 '리일'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의 핵심 쟁점 : 심(心)과 기질(氣質)의 관계 문제 (On the Fundamental Issue of Ho-Rak Controversy)

  • 이상익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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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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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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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호락논쟁의 핵심 쟁점은 '담연허명(湛然虛明)한 심(心)'과 '청탁수박(淸濁粹駁)이 뒤섞인 기질(氣質)'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호론(湖論)에서는 기질(氣質)을 '심(心)의 재질(才質)'로 보아 심(心)과 기질(氣質)을 동위(同位)로 규정했으며, 낙론(洛論)에서는 기질(氣質)을 '이목구비(耳目口鼻)의 형기(形氣)'로 보아 심(心)과 기질(氣質)을 이위(異位)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낙론(洛論)의 이위론(異位論)은 이심이성론(二心二性論)에 빠짐은 물론, 성리학의 전반적 체계와도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론(湖論)의 주장처럼 심(心)과 기질(氣質)을 동위(同位)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호론(湖論)이 심(心)과 기질(氣質)을 동위(同位)로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시(同時)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호론(湖論)의 주장처럼 심(心)(담연허명(湛然虛明))과 기질(氣質)(청탁수박(淸濁粹駁))을 동위동시(同位同時)로 규정하면, 인간의 심(心) 성(性)에서 '순선(純善)의 가능근거'를 확보하기 어려운바, 그리하여 낙론(洛論)에서는 호론(湖論)에 대해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이나 양웅(揚雄)의 성선악혼설(性善惡混說)과 같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한말(韓末)의 유학자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은 '담연허명한 심(心)'과 '청탁수박이 뒤섞인 기질(氣質)'의 관계, 즉 '중저미발(中底未發)'과 '부중저미발(不中底未發)'의 관계를 '동위이시(同位異時)'로 규정했는바, 동위이시론(同位異時論)이야말로 심(心)과 기질(氣質)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었던 것이다.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한문산문(漢文散文) 연구(硏究) (A Study on Bangsan Heo hun's(許薰) Essays in Classical Chinese)

  • 조상우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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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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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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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에서는 영남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방산 허훈의 "방산집"을 중심으로 II장에서는 방산 허훈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고, III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허훈의 산문 중에서 잡저(雜著)에 실려있는 작품 몇몇을 선정하여 그 내용을 분석하고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II장에서는 방산의 삶과 학문적 연원을 살펴보았는데, 방산은 평생 정치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처사적 삶을 살았다. 방산의 학문적 성향에 대해서는 근기와 영남학파, 두 진영을 아우르는 학문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방산의 학문적 계보는 근기학파의 개산지조(開山之祖)인 미수(眉?) 허목의 학문이 곧 한강(寒岡) 정구에게서 나왔고 한강의 학문은 퇴계에게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방산의 학문에 직접 영향을 준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순암 안정복계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방산은 성재를 통하여 순암계 우파를 퇴계학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영남학파보다는 근기학파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방산의 저술에는 실용적인 측면이 많다. III장에서는 방산의 한문산문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여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와 자주국방의 인식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근기학파의 학문 전통 고수에서는 실증주의, 실용주의에 입각한 서술을 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을 가지고 대의 중심으로 한 글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속에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정당하다고 보지 말고 예부터의 일을 상고하여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산의 사고에는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근기남인의 학문 성향이 짙게 베어 있다고 하겠다. 자주국방인식에서는 <포설>과 <거설>을 통해 병가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있다. 방산이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새로운 장비에 대한 정보와 이에 대한 교육과 구축이다. 그러면 조선은 군사력이 강력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