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View

검색결과 560건 처리시간 0.025초

한국의 문화재 보존·관리에 있어서 원형개념의 유입과 원형유지원칙의 성립, 그리고 발달과정 (The Introduction of the Concept of "Original Form" to the Heritage Conservation and Management and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Principle of "Maintaining the Original Form")

  • 이수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49권1호
    • /
    • pp.100-119
    • /
    • 2016
  • '원형'과 '원형유지'는 국내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에 있어서 철학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적인 개념이자 원칙이다. '원형'은 20세기를 전후한 근대기에 국내에 그 용어가 유입된 이후 구체적인 의미에 대하여 심도 있는 논의나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탓에 여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을 지닌 용어로 남아있다. 또한 용어에 대한 개념이 구체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1999년 문화재보호법에 '원형유지' 조항이 신설되어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는 기본원칙으로 명문화되었지만 유효한 원칙으로 실무에 적용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첫 단계로 원형개념이 유입되는 과정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원형유지의 원칙이 문화재 보존 관리 및 활용의 공식적인 원칙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검토와 사례연구를 통해 개념이 유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양식'을 중심으로 원형개념이 고착화되는 경향, 그리고 시대 중에서도 최초의 시기, 또는 가장 이른 시기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그로인해 고정된 시점에 맞추어 문화재를 보존관리하면서, 원형이 지녀야 하는 다양한 측면의 속성들을 간과해 온 결과 원래의 재료 등 원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손실된 채 문화재를 보존하는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태도와 경향이 문화재를 다양한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와 흔적을 담아내는 물질적 산물로 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시대적인 역사인식이 단층적이며, 원형유지의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원칙의 타당성에 대하여 보존철학적 관점에 근거한 심도있는 논의가 부족하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원형에 대한 개념정의는 문화재가 지닌 다양한 가치를 고려하여 그 개념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하며, 문화재의 종류별 특성을 고려한 원형개념이 정립되어야 하고, 원형유지 조항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을 검토하여 실제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제언하였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제와(製瓦)의 기술문화적 인과성 (A Study on the Causality of Technology Culture of East Asian Roof Tile Making Technology Since the 17th Century)

  • 김하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2권3호
    • /
    • pp.56-73
    • /
    • 2019
  • 본 논문은 동아시아 지역의 기와 제작 기술을 관찰함으로써 기술 양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연구 방법은 기존의 주된 연구 자료인 발굴 성과와 그에 따른 연구방법론인 제작 흔적 분석뿐만 아니라 문헌과 전승 기술 등을 함께 살피려 노력했다. 공정 단위마다 지역별 유사성으로 기술의 권역을 설정하는 작업을 통해 도구, 공정, 인원 편성 등 기술적 요인을 중심으로 접근했다. 따라서 본고는 선행 연구 성과 토대 위에서 기술양식의 파악이 형태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에 따른 기술의 인과성을 파악할 텍스트로서 작용 가능한지를 논증하는 실험이며, 이러한 논의를 추동하기 위한 시론(始論)이라 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의 기술 보유 지역을 네 개로 나누어 기와 제작 도구 및 공정을 분석하였다. 토형제작-기와성형-건정 세 공정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았으며 한국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살펴보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표면적인 현상으로는 양자강 이남과 오키나와가, 한반도 남방과 혼슈 지방이 유사한 기술의 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작 도구와 그에 따른 세부 공정을 유물, 교류관계와 함께 관찰하였을 때, 기와 제작 기술은 지역마다의 특수성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정별 세부 기법과 인원 편성 관찰은 공정 단위마다 다양한 권역 설정을 가능하게 했으며, 각 권역의 특색이 나타나는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를 추정할 단서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각 지역의 기술적 특징을 상호 비교하고 그에 대한 원인 규명을 시도하였다. '편절 기법'은 지역이 보유한 기법에 따라서 권역은 구분되었지만, 규구준승(規矩準繩)에 따른 건축 기술에 기반한 기법이었다. 특히 타 지역들과는 다르게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 일만이 공유하던 특수하고도 고유한 제작 기법이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타날 기법'은 기술이 전파되고 토착화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기술의 문화적 다변성과 보수성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중국 하북성 마을제 연구 - 하북성조현범장이월이룡패회중룡신적여인(河北省趙縣范庄二月二龍牌會中龍神的與人) - (A Study of Local Festival for the China Hebeisheng)

  • 박광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36권
    • /
    • pp.347-377
    • /
    • 2003
  • China is a country with large agricultural areas and subject to frequent calamities. Drought is the top of them. It has been a key problem for development of agriculture in the country. In the long struggle against drought, Chinese have accumulated many rational and irrational experiences. The Dragon Kings Belief, which is popular in North China and discussed in a thesis, is one of their irrational experiences. The belief was passed together with Buddhism from India to China in the Tang Dynasty. After it settled down, it was incorporated with the local five dragons belief and a set of beliefs in dragon kings came into existence. The emergence of the dragon kings belief ended the history that the title of rain got was not clear in China and Dragon kings finally got the status. Irrigation is the lifeblood of agriculture in China. In a Chinese mind, Dragon kings are the most important gods who take charge of rain and thus offer the lifeblood. In understanding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Chinese traditional culture, it is important for us to make clear the origin and evolution of the belief, find out its nature, function and operation. In the every year beginning of February of the Fanzhuang calendar in the people of Hebeisheng Zhaoxian, would all hold a festival to offer sacrifices to the $^{{\circ}TM}^{\prime}longpai$. Longpai was regarded as the core of the temple fair, thus the native sons came to call this festival; "longpaihui". In this region the'Fanzhuang longpaihui'developed into a well knownand grand temple fair. It was able to attract numerous pilgrims with its special magic power, occupying a place in $China^{{\circ}TM}$ 'eryueer'festival with festive dragon activities. The dragon is a common totem among Chinese nationals. The belief worship of the dragon dates from the start time of primitive societies. Dragon oneself the ancients worship's thunder lightning. In the worship of the great universe, at first afterwards this belief with the tribe's totem worships to combine to become the animal spirit. In ancient myths legends, along with folk religion and beliefs all hold a very important position. The longpaihui is a temple fair without a temple; this characteristic is a distinction between longpaihui and other temple fairs. As for longpaihui must of the early historical records are unclear. The originator of a huitou system has a kind of organized form of the special features rather, originator of a huitou not fix constant, everything follows voluntarily principle, can become member with the freedom, also can back at any time the meeting. There is a longpaihui for 'dangjiaren', is total representative director in the originator of a huitou will. 'banghui' scope particularly for extensive, come apparently every kind of buildup that help can return into the banghui, where is the person of this village or outside village of, the general cent in banghui work is clear and definite, for longpaihui would various businesses open smoothly the exhibition provides to guarantees powerfully. Fanzhuang longpaihui from the beginning of February to beginning six proceed six days totally. The longpai is used as the ancestry absolute being to exsits with the community absolute being at the same time in fanzhuang first took civil faith, in reality is a kind of method to support social machine in native folks realize together that local community that important function, it provided a space, a kind of a view to take with a relation, rising contact, communication, solidify the community contents small village, formation with fanzhuang. The fanzhuang is used as supplies for gathering town, by luck too is this local community trade exchanges center at the same time therefore can say the faith of the longpai, in addition to its people's custom, religious meaning, still have got the important and social function. Moreover matter worthy of mentioning, Longpai would in organize process, from prepare and plan the producing of meeting every kind of meeting a longpeng of the matter do, all letting person feeling is to adjust the popular support of, get the mass approbation with positive participate. Apart from the originator of a huitou excluding, those although not originator of a huitou, however enthusiasm participate the banghui of its business, also is too much for the number.

감은사지 삼층석탑 구조 (A study on the structure of the Three storied Stone pagoda in Gameunsa Temple site)

  • 남시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38권
    • /
    • pp.329-358
    • /
    • 2005
  •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시원적인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같은 석탑은 석조미술품이면서 석구조물이다. 지금까지는 탑을 이해함에 있어서 조탑사상과 미술사적으로는 깊은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져서 양식이나 편년 등은 깊이 있게 연구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석조건축물로서의 연구는 아주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석탑전문가들도 대부분이 미술사전공자이고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공학자는 극히 소수임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석탑을 이해함에 있어서 미술사 못지않게 구조를 포함한 힘의 전달 등 역학 적인 부분도 검토될 수 있도록 공학적인 면으로도 접근하여 탑을 보다 깊이 있게 그리 고 구조체로서 안전하게 이해하고 안전성도 검토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탑을 조성한 우리선조들의 기술적인 부분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 지대석과 하층기단면석을 한 돌로 만드는 기단부의 작은 부재를 가급적 크게 만들어서 상부 하중으로 인한 부재의 이완과 침하 등 부재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 한 것이며, 둘째 : 면석과 탱주의 이음에 있어서 탱주에 턱을 두어 면석을 끼워 맞추는 결구방식을 보면 탱주에 끼워지는 면석부분을 살짝 면접기하여 탱주 턱에 쉽게 끼워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면석 결구방식은 감은사석탑 이후 석탑의 면석 결구방식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결구방식이다. 셋째 : 각 면에 옥개석과 옥개받침석의 크기를 각기 다르게 하여 상 하 부재의 이음부를 일치하지 않게 하였다. 이는 수직 하중의 분산과 부재의 이완을 방지하기 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 동탑 해체 시 확인된 사항으로 옥개받침의 상면을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안쪽을 볼록하게 도드라지게 다듬어서 가능한 부재의 무게중심을 석탑의 중심에 가깝도록 고려하였다. 작은 부재를 가급적 크게 만든 것, 상하부재의 이음부를 어긋나게 한 기법과 무게중심을 되도록 석탑중심으로 오도록 한 수법 등은 당시 조탑인들은 상당한 수준의 공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구조를 이해하는 기술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교동도 사운드스케이프의 특성과 재현 (On the Characteristic and Representation of Kyodong Island Soundscape)

  • 김지나;조경진;권병준
    • 한국조경학회지
    • /
    • 제47권1호
    • /
    • pp.57-75
    • /
    • 2019
  • 본 연구는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 시각적 풍경 이면에 축적되어 있는 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통을 경험할 수 있으며, 사운드스케이프를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사운드스케이프는 M. Schafer가 비판적, 미적 관찰 대상이 되는 소리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으로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사용함으로써 경관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평화의 섬'을 비전으로 하고 있는 DMZ 접경지역의 교동도에서 사운드스케이프를 조사, 분석한 후, 지역주민 교육과 방문객 경험을 위한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재탄생시키고자 하였다. 교동도는 DMZ 접경지역이자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격변을 겪었으며, 최근에는 지역활성화를 위한 민관의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한강하구중립수역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평화의 섬'으로서 새롭게 장소마케팅이 되고 있다. 교동도의 사운드스케이프 조사를 위해 먼저 사운드아티스트와 함께 사운드스케이프의 개념과 기술에 대한 워크샵을 실시하였으며, 이어 관찰조사, 청취조사, 문헌조사를 진행하였다. 녹음결과물은 Schafer의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에 맞추어 기조음, 신호음, 표식음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사운드맵으로 기록하였으며, 교동도의 지역특성과 비전을 반영하여 사운드스케이프 작곡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스튜디오 작업을 진행하였다. 최종결과물은 '화합과 평화에 대한 희망과 염원'이라는 전체 주제를 바탕으로 '교동도와의 만남', '전쟁과 긴장', '교동도의 일상', '화합과 평화를 찾아서'로 세부 주제를 구성하였고, 전시와 YouTube를 통해 공유하였다. 이를 통해 교동도의 역사 및 지역정체성을 보존하고,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매체로서 사운드스케이프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결과물을 교동도에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기존 장소들을 활용하여 전시함으로써 공간활용을 제고하고, 지역 역사와 문화를 담은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교육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팔경시와 고지도에 투영된 여주팔경의 전승양상 (A Study on the Transmission Process of Yeoju-Palkyung in Old Poems and Map)

  • 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29권1호
    • /
    • pp.14-27
    • /
    • 2011
  • 본 연구는 여주지역에 전래되는 팔경시, 고지도, 옛 그림 그리고 고문헌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여주팔경의 내용과 의미를 개관하는 한편 여주팔경의 전승과정을 면밀히 되짚어봄으로써 '여주팔경'의 뿌리찾기를 시도하였다. 여주팔경 중 5개경은 소상팔경의 시각적 결속력을 유지한 관념적 경관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지역의 유서깊고 지명도 높은 유적과 여강 중심의 토착민의 삶을 담은 '생활 속의 경'이 혼재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옛 그림 속에 강조된 여주의 승경은 여강을 배경으로 한 범선과 청심루를 둘러싼 수목들, 그리고 신륵사 동대(東臺) 위의 다층전탑과 마암 등 상징성 높은 여주 팔경의 시점장과 대상이 중복되어 강조되고 있다. 현재 여주팔경의 모본은 최숙정과 서거정의 '여주팔영'인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이후 17세기 전반 조문수의 청기정십영 속에 현 여주팔경이 모두 포함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청기정십영 또한 여주팔경 전승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여지도서에 기록된 여주팔영과 현 여주팔경은 1개경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집경(集景)으로 판단됨에 따라 현 여주팔경의 연원(淵源)은 최소한 18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분석대상 고지도 공히 동일한 순서로 사촌어화, 신륵모종, 연탄귀범, 팔대장림, 양도낙안, 입암층암, 파사과우, 용문적취의 8개경이 일관성 있게 기재된 것으로 보아, 고지도에 기재된 팔경 또한 적어도 18세기 전형적 여주팔경의 모본(母本)으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주팔경의 전승경로는 여주팔영(최숙정 서거정)${\rightarrow}$청기정팔영${\rightarrow}$여주팔영(여지도서)${\rightarrow}$여주팔경(여주군)의 과정과 '여주팔영+금사팔영'${\rightarrow}$고지도 팔경${\rightarrow}$여주팔경(18C후반)의 전승과정 등 2개 버전(version)으로 분화 전승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근원적으로 여주와 금사 2개 경관소권의 대표경관을 포괄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 양자 동일한 연원을 갖는 여주지역 고유의 문화경관이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의 사상적 분화와 전개양상에 관한 연구 - 황간(黃?)과 원대(元代) 금화학파(金華學派)의 사상적 연관성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ifferentiation and development aspects of Zhu-zi xue - centering around the connection between Huang Gan and Jin-hua school in Yuan period)

  • 지준호
    • 한국철학논집
    • /
    • 제23호
    • /
    • pp.317-347
    • /
    • 2008
  • 본 논문은 주자문인인 황간과 원대 금화학파의 사상적 연관성을 연구함으로써 주자문인 및 주자 후학에 의한 주자학의 분화와 발전 과정을 분석하였다. 황간은 주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도학파 주자문인이며, 그의 학문은 절강(浙江) 금화학파(金華學派), 강서(江西) 쌍봉학파(雙峰學派), 신안(新安) 주자학파(朱子學派)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상사적인 흐름 속에서 도통론을 기반으로 황간의 학문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파, 즉 사상사적으로 면재(勉齋) 황간(黃?)으로부터 하기(何基), 왕백(王柏), 금리상(金履祥), 허겸(許謙)으로 학통이 이어지는 절강(浙江) 금화학파(金華學派)를 연구의 주요 범위로 하고 있다. 황간과 원대 금화학파의 사상적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종법적인 도통관이다. 황간의 도통설은 주자의 도통관을 진일보 발전시킨 것으로서 주자가 유가의 도통을 집대성하였음을 논증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황간의 도동관은 특히 주자학의 적전(嫡傳)을 자부하는 금화학파에 의하여 계승된다. 둘째, 체용론과 관련한 "분수이리일(分殊而理一)"이라는 인식방법이다. 황간은 태극과 음양의 관계를 '도겸체용(道兼體用)'의 측면에서 일종의 '이일분수(理一分殊)' 또는 '일이이(一而二)'로 설명한 바 있다. 황간은 '도(道)의 체(體)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파악하기 힘들므로 우리들은 여러 만물에 산재해 있는 이(理)를 통하여 도(道)의 체(體)를 이해할 수 있다'라는 '유용이언체(由用而言體)' 또는 '인용이명체(因用而明體)'라는 구체적인 인식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인식방법 역시 황간의 후학인 금화학파에 의하여 계승된다. 셋째, 격물치지의 공부론이다. 황간은 존덕성과 도문학을 모두 중시하였으며, 금화학파 역시 존덕성과 도문학을 모두 중시하였다. 특히 허겸(許謙)은 '격물치지'의 공부론을 통하여 심(心)의 문제를 폭넓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금화학파는 당시 상산학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도문학의 의의를 상대적으로 보다 강조하게 된다. 따라서 유가 경전의 독서와 훈석(訓釋)을 중시하고 있으며 "분수이일(分殊理一)"의 인식방법을 자신들의 학문에 응용함으로써 "유전이구경(由傳以求經)"이라는 특색을 지니게 된다.

유교경전교육(儒敎經典敎育)을 위한 반성적(反省的) 고찰(考察) (A reflection on the education of Confucian classics)

  • 진성수
    • 한국철학논집
    • /
    • 제25호
    • /
    • pp.223-249
    • /
    • 2009
  • 본고는 유교경전교육의 올바른 방향설정을 위한 기초적인 작업으로서 유교경전교육의 필요성이 과연 당위적인 것인가, 혹은 자연적인 것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역사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즉 동아시아에서 경전(經典)의 의미, 중국문화의 경전화(經典化) 과정을 살펴보고, 경전화(經典化)의 문화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또한 한국 유교경전교육의 역사적 전개과정 및 현대사회에서 유교경전교육의 의미와 두 가지 딜레마에 관해 살펴보았다. 끝으로 유교의 핵심윤리인 오륜(五倫)의 범위를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발굴해야 하는 정당성 및 유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의의, 그리고 유교경전교육의 반성적 고찰의 의미에 관해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새로운 유교경전교육 컨텐츠 개발을 위해 세 가지 주제에 관한 기존의 접근 방법과 새로운 적용 방안을 제언형식으로 비교 검토하였다. 최초의 유교경전이 선험적(先驗的)으로 결정되지 않았듯이 현대의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 역시 철저한 검토 종합 반성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체계로 이해 및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교육방법으로서 관련 컨텐츠의 개발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맞는 가치들을 발굴 계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유교경전교육에 대한 유용성[효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유교경전교육 컨텐츠에 대한 엄정한 선별작업이 필요하며, 아울러 이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과 현대사회에서 기능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적 요소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실적 효용과 미래적 전망을 내놓지 못한 어떠한 사상이나 문명은 언제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이 현대 유교경전교육의 반성적 고찰이 필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조선조에서의 선진(先秦) 제자학(諸子學) 수용 양상 - 순자(荀子)에 대한 비판과 이해를 중심으로 - (The Aspect to Receive Pre-Chin Study of One Hundred Schools in Cho Sun Dynasty-Centered on the criticism and understanding of Hsün Tzu)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 /
    • 제25호
    • /
    • pp.251-292
    • /
    • 2009
  • 본고에서는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선진 제자학을 위상을 검토하고 아울러 순자사상의 한국적 수용과 전개 양상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여말선초부터 18-19세기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문집을 통하여 순자에 대한 이해양상과 시대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부터 고려 중엽까지는 지식인들이 선진 제자학 가운데 다른 학파나 사상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말선초 이래 "맹자"가 유가의 정통 경전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순자를 비롯한 선진 제가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고려부터 선초에 이르는 지식인들의 순자의 성악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으며, 다만 순자에 대한 이해의 심도가 점차 깊어짐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전성기에 이르면 선초에 비해 순자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 강도가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을 토대로 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성악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대체로 순자의 다른 사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 순자를 법가로 귀결시키는 논의도 일부 보이지만, 주자학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실학적 토대 위에서 제자학을 적극 수용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면 순자에 대한 이해 범위가 보다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글자 고증에 있어서 순자의 원문 및 주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 요컨대 조선조 지식인들의 순자 비판은 시종일관 그의 성악설에 근거하며 나아가 분서갱유를 주도한 이사(李斯) 등의 법가와 연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이를 제외한 순자의 기타 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자를 비판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제자서를 쉽게 접하거나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태도를 지녔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채호의 「독사신론」의 구성과 '민족사'의 재구 (The organization of Shin ChaeHo's Doksasillon and reorganization of the Nation history)

  • 김수자
    • 동양고전연구
    • /
    • 제36호
    • /
    • pp.203-228
    • /
    • 2009
  • 신채호의 한국 역사에서의 주된 관심 분야는 고대사였다. 그리고 그의 역사 서술의 특징은 민족을 역사의 중심에 두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목적의식적으로 강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민족주의론은 신채호의 경우에서처럼 '강한' 민족을 강조하고, 동시에 그것을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키려는 사회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었다. 사회진화론과 결합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를 한편으로는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망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신채호의 고대사 연구라 할 수 있는 "독사신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부여족을 한국 고대사의 주류로 '재발견'하고 고대사를 재구성, 구체화 시킨 신채호가 '부여족'을 한국 고대의 주 종족으로 선택하고 부여족을 한국 민족의 대명사처럼 사용한 이유는 부여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 속에서의 강성한 민족의 강조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던 구한말 시기 자강운동가의 면모를 잘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민족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채호는 국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근대화에 뒤쳐진 민족으로서 유일하게 동원할 수 있는 무기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밖에 없었던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간주된다. 이와같이 독사신론에서 보여지고 있는 단군, 부여족의 역사의 재구성과 민족의 구원자로 중시했던 영웅을 발견해 내는 과정 등이 신채호에게는 역사를 쓰는 이유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