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study the manufacturers of the astronomical instruments invented as part of the so-called Ganui-Dae (astronomical platform) project in the reign of King Sejong (1418-1450) of the Joseon dynasty. The main purpose of this project was to compile the Chiljeongsan-Naepyeon, a Korean calendar, that lasted for 5.5 years from 1432 to 1438. Through this project, a total of 17 astronomical instruments such as the armillary sphere, celestial globe, and auto-striking clepsydra were developed. It is generally known that most of them were manufactured by Lee Cheon (李蕆, 1376-1451) and Jang Yeong-Sil (蔣英實, fl. 1423-1442). In this study, we investigate the accounts of the Veritable Records of King Sejong, Munjong, and Sejo, focusing on the inscription written out to memorize the completion of the Ganui-Dae project. We found that at least 12 persons took part in manufacturing the astronomical instruments of the Ganui-Dae project. Lee Cheon was involved in the production of four instruments, while Jang Yeong-Sil was involved in two; therefore, it seems that the achievement of Jang Yeong-Sil was overestimated. We also found that Jeong Cho (鄭招, ?-1434) was a scientist and Lee Cheon was an engineer in the early phase of the Ganui-Dae project, while King Sejong and Yi Sun-Ji (李純之, 1406-1465) played major role in the late phase. According to our study, King Sejong and Yi Sun-Ji were involved in the production of at least seven and five instruments, respectively. In conclusion, we believe that this study will be helpful to understand the practical manufacturers of the astronomical instruments invented during the Ganui-Dae project in the Joseon dynasty.
성남 고등동 회곽묘는 한 지역에서 다른 시기에 제작된 6기의 회곽묘가 발굴되었으며, 회곽묘 조성에 사용된 삼물회의 다양한 제작 기법이 확인되었다. 삼물회의 제작 기법을 규명하기 위하여 고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석회 원료와 제작 기법 및 배합 방법을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고문헌에는 석회의 원료 중 저품위 석회석을 사용한 기록과 배합 재료로 황토와 백토, 기와 가루 등과 같은 석회의 강도를 향상시킬 수 있는 포졸란 물질 사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삼물회의 다양한 배합 방법이 기록되어 있어 이에 대한 재현 실험을 바탕으로 석회 원료, 배합 재료, 배합 비율에 따른 삼물회 제작 기법 분석이 요구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석회를 다방면으로 사용하였으나 공급이 적고 기술적인 미숙함으로 지속적인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대량 생산됨과 함께 석회 제작 기술이 발달하였다. 16세기와 18세기 회곽묘 삼물회의 제작 기법 분석을 바탕으로 고문헌에 기록된 배합비와 배합 방법들이 적용된 것을 알 수 있었으며, 회곽묘 삼물회는 시기에 따라 석회의 품질이 변화하였고 배합 재료 또한 변화됨에 따라 배합 비율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회곽묘 삼물회의 배합 비율은 시기에 따라서 변화하였으며, 주례와 가례를 기준으로 정해진 배합 방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회곽묘 삼물회의 제작 기법에 대한 과학적 분석 자료가 지속적으로 구축된다면 회곽묘 편년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약초원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고 조경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본초학 연구가 이루어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의료체계 속에서 약초원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약초원은 여말선초인 13~15세기에 발달하였다. 지역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자연관의 영향으로 토산 약초를 뜻하는 향약(鄕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고려 말 문인들이 약포(藥圃)를 가꾼 경향이 발견되며, 향약 조사 발견 재배 탐구 등 관련 정책이 시행된 조선 초 종약전(種藥田)이라는 이름의 약초원이 조성된 사실이 확인된다. 내의원과 혜민서와 같은 중앙의료 기구 부속 시설이었던 종약전은 15세기 중반에 실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조선 건국과 함께 설립되어 조선 후기에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약전은 약현, 율도, 여우도, 사아리 등 한양 도성 밖 여러 곳에 있었고, 그 규모는 18세기 초 당시 약 16만 제곱미터였다. 형개, 지황, 감초 등을 포함한 수십 종이 종약전에서 재배되었고, 내의원에서 파견된 의관과 관노비 수십 명에 의해 종약전이 운영되었다. 종약전은 새로운 약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라는 사회적 배경 측면에서 르네상스시대 의과대학의 약초원과 공통점을, 약초의 종류 위치 기능 등의 측면에서 중세 유럽의 성곽과 수도원 내 약초원과 유사점을 지닌다. 본 연구는 약포와 종약전의 구체적 공간 형태를 밝히지 못한 점에서 한계를 가지나, 우리나라에서 약초원이라는 정원 유형이 여말선초 향약을 중심으로 한 의학의 발달과 함께 나타났으며 공동체의 치료제 재배를 위한 실용정원으로 기능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闕內各司), the Government office in the pal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oyal palace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political space for king, living space for king and his family and government office. So first, we shoul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pace in the Royal Palace. Up to now we have looked at the architectural space of Gwolnaegaksa in Gyeongbokgung (景福宮), one of the Royal Palace, the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ings. There were not many Gwolnaegaksas in the early days in Gyeongbokgung. After King Sejong, some office buildings were established in that palace. King's closest guards, like as Seonjeonkwan (宣傳官), Gyumsabok (兼司僕), Naegeumwi (內禁衛) had been on duty in Sajeongjeon Haengrang (思政殿 行廊), a kind of servants' quarters. Bincheong (賓廳), a conference room of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s was situated in Geungjeon Haengrang (勤政殿 行廊). There were also barracks of other palace guards in Geungjeon Haengrang. Gyeongyeoncheong (經筵廳), a place to prepare and wait, was built separately from Geungjeon Haengrang Layout drawings of Gyeongbokgung painted since the 18th century were different from document in some parts. The arrangement of the Gwolnaegaksa was assumed like as the Fig. 9.
GogeumGyeongheomHwalyubang [古今經驗活幼方] is a medical book dedicated to Smallpox, written by YU Sang [柳瑺] in the Joseon Dynasty (late 17th century to the early 18th century). As a smallpox specialist for the Joseon royal family, YU Sang was well-reputed after successfully treating smallpox of three of the 27 Joseon kings. There are four features of this book. First, the causes for smallpox are roughly recorded. Second, YU Sang emphasized the distinction between patients who could or could not be cured. Third, the herbs related to the treatment of smallpox are selected and organized separately. Fourth, YU Sang discusses the contents of diverse medical books and his own experiences. Conclusion : YU Sang's significant knowledge of smallpox treatment is well presented in his book, GogeumGyeongheomHwalyubang and this wealth of experience would have an important role in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smallpox treatment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article focuses on the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gat, the Korean top hat for men, to understand the diverse meanings behind the hat. During the late 19th to early 20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1392~1910) was plunged into confusion and turmoil as it was nearing its end. It was a period of drastic changes in regards to philosophy and ideology. To that end, the hats of society mirrored such changing times, as well as the differences in the awareness of Joseon's internal subject entities and external observers. Based on the analyses of the relevant documents, this study takes a multi-faceted approach to the process in which traditional Korean hats, which were once a symbol of the Joseon civilization, became reduced to an outdated object, as well as observing the awareness and attitudes of the entities involved in such a pivotal process.
본 연구는 세종대에 삼물회를 조선왕릉에 도입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1446년(세종 28년) 영릉의 구조적 변화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조선초 왕릉은 고려의 석실릉을 답습하여 조성하였다. 조선왕릉으로 처음 지어진 신덕왕후의 정릉은 고려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릉·현릉을 건립한 경험을 갖고 있는 김사행이 주도적으로 건립하였다. 이후 박자청이 이어받아 조선 초 석실릉을 건립하였으므로, 고려의 석실구조를 기반으로 조선왕릉이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성종대의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의 구조를 살펴보면 고려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에 기록된 태종과 원경왕후의 석실제도와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석실에 삼물회를 도입하여 구조적인 보강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1446년(세종 28년) 소헌왕후의 국상으로 영릉(英陵)을 건립할 때, 석실 내에 물이 스며들거나 고이지 않는 밀실한 구조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1446년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조성된 영릉(英陵)과 1452년에 조성된 문종의 현릉(顯陵)은 석실구조 바깥에 삼물회격을 추가로 시공한 석실과 회격의 복합구조체이다. 이것은 1468년(예종 즉위년)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석실을 폐지하고 회격만으로 현궁을 만드는데 구조적 기반이 되었다. 즉, 영릉과 현릉의 구조에서 내부의 석실구조를 제거하고, 바깥의 회격만을 시공함으로써 회격 현궁이 조성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릉은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복합 구조체인 회격석실릉에서, 석실을 제거하고 회격만을 조성하는 회격릉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1446년(세종 28)에 삼물회로 만든 회격구조를 석실에 결합한 회격석실릉은 조선만의 특별한 석실구조이며, 조선왕릉의 지하구조가 회격릉으로 변천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음을 논증한다.
이 논문은 ${\ll}$해동명적(海東名迹)${\gg}$에 실린 필적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 서풍의 흐름과 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ll}$해동명적${\gg}$은 16세기 초에 신공제(申公濟)가 간행한 서첩으로,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필적을 한데 모아놓은 최초의 집첩(集帖)이다. 필자는 선행연구에서 다양한 이본으로 남아 있는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배경과 판본을 분석하였다. 이번 연구에서는 ${\ll}$해동명적${\gg}$에 실린 조선 초기 필적의 서풍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였다.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관각(館閣)의 문서를 담당했던 사수(寫手)들의 서풍과 고령신씨(高靈申氏) 집안에 가전(家傳)되어 오던 서풍의 변화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왕희지 서풍이 건재한 가운데 원말 복고주의의 영향으로 파생된 다양한 서풍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서역 변방 출신 강리노노(康里??)의 서풍이 폭넓게 수용된 흔적이 주목된다. 이는 으레 조맹부(趙孟?)의 송설체(松雪體)로 대변되었던 여말선초에 실은 다양한 원대의 서풍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징표이다. 마지막으로 "패관잡기"에 실린 어숙권(魚叔權)의 기록의 진위 여부를 추론해 보았다. 어숙권은 ${\ll}$해동명적${\gg}$에 실린 박경의 필적이 실은 신자건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숙권의 출신과 정치적 입지를 기준으로 신자건과 박경의 관계성을 분석한 결과 어숙권의 주장이 타당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Buddhist painting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re characterized by diversification and subdivision of subject matters. Buddhist paintings rapidly declined since 19th century, being miniaturized and showing complicated composition. Figures that identified the shape of shoes in Buddhist paintings of late Joseon dynasty included sacheonwang that were placed in the left and right bottom of Buddhist paintings, sinjung, gwiwang and pan-gwan of siwangtaeng. Sacheonwang, an Indian folk god, was depicted as a noble person in "ahamgyeong", an early sutra, but was depicted as an armored warrior in Mahayana Buddhism world. The style of shoes sacheonwang in Korea were different depending on the times. The shoes of the sacheonwang sculpture in Seogguram of Shilla dynasty are sandal type. The sacheonwang that was drawn on Jijangbosaldo in Goryeo dynasty wears non-showy armor and red yi(履). The sacheonwang that was expressed on Buddhist paintings in Joseon dynasty wears showy armor and decorated hwa. Comparing the yi of Goryeo Jijangbosaldo sacheonwang with the yi of Bodhisattva on the Dunhuang yeolbanbyeonsangdo, Jijangbosaldo sacheonwang's shoes are Korean style in which the sole is flat and the front part has no decoration, but in the shoes of Bodhisattva on the Dunhuang yeolbanbyeonsangdo the sole is not flat, the front part is lifted. The style of shoes of pan-gwan, who is depicted on Siwangtaeng, is hwa. However, unlike the decorative hwa of sacheonwang, its front is not lifted and it has no decoration. It is assumed that the shoes of sacheonwang or pan-gwan represented obangsaek based on the idea of eumyang-ohaeng. Depiction of shoes shown in Buddhist paintings reflected the phases of the social life. In addition, the sandals of Shilla sacheonwang implies that sourthern culture in addition to Buddhism was introduced. Having expressed the shoes of Goryeo sacheonwang with conventional yi implies that Buddhism governed the inner world of the people, and the shape and material of the shoes reveals aristocracy. It is assumed that that an armored warrior wore yi, not hwa implies that the then society was stable. Also, it is assumed that that the shoes of sacheonwang on Buddhist paintings in Joseon dynasty were hwa implies that the role of tutelary god was stressed in the disordered society.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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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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