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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 전지구 해양자료동화시스템(GODAPS): 개요 및 검증 (Global Ocean Data Assimilation and Prediction System in KMA: Description and Assessment)

  • 장필훈;황승언;추성호;이조한;이상민;부경온
    •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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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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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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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에서는 기상청에서 2018년부터 운영 중인 전지구 해양자료동화시스템 GODAPS에 대하여 소개하였으며, 2015년 2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일년간의 실험 수행을 통한 결과를 분석하여 이 시스템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GODAPS는 크게 해양-해빙 모델과 3차원 변분법 기반의 자료동화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지구적으로 수집된 현장 및 위성 관측자료를 자료동화하여 매일 1회 분석장과 예측장을 생산한다. 이때 해수면온도, 수온과 염분 프로파일, 해수면고도 변이, 그리고 해빙농도 관측자료를 자료동화한다. 분석증분 및 배경장/분석장으로부터의 관측증분에 대한 분석, 자료동화를 적용하지 않은 실험과의 비교 등을 통해 GODAPS 자료동화 결과를 비교검증하였다. 자료동화는 관측자료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며, 전지구 규모에서 편차를 줄인 분석장과 예측장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변동성이 강한 중위도 해역의 쿠로시오와 걸프만 해류의 중규모 현상을 재현하는데 있어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하였다. 해양초기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모델과 자료동화 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다양한 관측자료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해양관측자료는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가용한 자료를 자료동화 과정에 포함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수온에 비해 염분의 경우 상대적으로 관측자료가 부족한데, 최근에는 SMAP (Soil Moisture Active Passive) 등 인공위성을 활용한 표층 염분자료가 제공되고 있으며, 기상청에서도 자료동화 과정에 독립적인 위성 염분자료를 활용한 분석장 검증 및 자료동화에 직접적용하는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표층 염분의 자료동화를 통해 열대해역의 혼합층 깊이가 개선되고, 결과적으로 기후예측성을 향상시키는 연구결과(Hackert et al., 2020) 등을 고려할 때, 향후 위성관측 표층염분의 자료동화는 기후예측 분야에 있어서 점차 중요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의 실험결과에서도 GODAPS의 염분 관측증분 오차가 표층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고 있어, 해양초기장의 정확성을 높이고 나아가 기후예측성을 높이는데 위성 염분자료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유산 관리를 위한 지명(地名)의 가치와 활용 방안 (Toponymic Practices for Creating and Governing of Cultural Heritage)

  • 김순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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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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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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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지명은 인간의 인식 작용이 환경과 만나는 지점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많은 문화유산의 명칭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지명이거나 지명을 그 이름 속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지명유산 속에는 인간 집단과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그들이 만들어온 총체적 생활 양식, 나아가 소속감과 장소감에 이르는 모든 문화적 상징과 질서들이 내장되어 있으며, 인류 공동체가 소유한 문화와 자연을 외부에 지시하고 상징하고 통합하여 대표한다. 지명유산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본 연구의 목적은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지명의 가치를 정리하고 유형문화유산 관리를 위한 지명 기능의 활용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첫째,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지명의 의미를 다룬 장에서는 먼저 문화와 문화 경관 개념에 담긴 중층성과 다양성, 그리고 경관현상학적 비재현성을 살펴본 후 지명 문화유산에 대한 국내외 논의를 제시하였다. 2003년 유네스코가 채택한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과 연계하여 원주민과 소수민족 등이 소유한 '문화, 유산, 정체성으로서의 지명' 논의를 지명 연구 분야의 선행 연구와 유엔지명표준화회의의 결의안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이를 기초로 지명이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적 특성과 선정 기준을 문화성, 공간성, 역사성, 사회·경제성, 그리고 언어성으로 나누어 사례 지명과 함께 제시하였다. 둘째, 유형문화유산 관리를 위한 지명 실천이란 장에서는 먼저 지명의 지시 기능을 중심으로 문화유산의 합리적인 관리 방안을 제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공식 문화재 명칭을 분석하여 명칭의 구성 및 관리에 있어 체계적이고 통일된 원칙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명 스케일과 다중-지명영역을 활용하여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설정하는 방안을 시론적으로 논의하였다. 최근 유산 연구 분야에서 강조되고 있는 공간적 전환과 참여적 전환, 그리고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다중적 관점의 필요성을 고려하여 특정 지명 스케일과 다중-지명영역의 선택을 통한 문화재 보호구역 및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이 결정되어야 함을 제안하였다.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 디지털 판독의 성과와 고찰 (A Study on the Digital Decipherment of the Goguryeo Stele in Chungju)

  • 조영훈;권다경;안재홍;고광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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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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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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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발견 이후 탁본(拓本)과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판독(判讀)을 시도하였으나 여전히 판독되지 않거나 서로 이견이 있는 글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에서는 반사율변환이미징(RTI)과 3차원 스캐닝 기반의 디지털 가시화 결과를 이용하여 학제 간 디지털 판독을 수행하였다. 이를 근거로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관하여 작성된 2019년 공동 판독안을 1979년과 2000년의 선행 결과와 정량적으로 비교하여 글자 변화에 따라 8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판독 성과를 고찰하였다. 공동 판독회의 중요한 성과는 기존에 판독되지 않았던 4개의 글자가 새롭게 확정되고, 28개의 글자가 처음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선행 판독안에서 이견이 있었던 전면 68자와 좌측면 20자가 합의 과정을 통해 각각 한 글자로 확정되었다. 선행 판독문과 비교하여 '확정'으로 합의된 글자는 총 89자(22.6%)가 증가하였으며, '이견' 글자는 126자(32.0%)가 감소하였다. 이처럼 충주고구려비의 디지털 판독은 RTI와 3차원 스캐닝을 통해 선행 판독문을 재검토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한 채 판독이 유보된 상태로 남아 있는 글자들이 123자(31.3%)나 존재하므로 판독률을 높일 수 있는 연구가 꾸준히 필요하다. 향후 충주고구려비를 비롯한 금석문 판독의 고도화는 인문학과 이공학의 융합 연구가 기반이 되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영상 분석 기술의 적용뿐만 아니라 글자 신호를 좀 더 가시화할 수 있는 판독 맞춤형 기술 개발에도 노력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용산 총독관저 정원의 조경사적 의의 (The Yongsan Governor General Official Residence in Korean Landscape Architectural History)

  • 김해경;유주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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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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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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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조영된 용산 총독관저와 그 정원에 관한 연구이다. 네오바로크풍의 건물과 정원이 계획되었는데, 이때 작성된 설계도면은 기존과는 달리 정원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용산 총독관저 정원설계도면의 해석과 신문기사 관련 문헌을 통한 분석으로 도출한 조경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용산 총독관저 정원이 근대시기에 조영된 최초의 서양식 정원으로서의 가능성이다. 건물과 함께 정원이 1909년에 완성되어 1911년 조영된 덕수궁 석조전 정원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둘째, 당시 근대건축과 함께 도입된 정원 양식과 정원 구성요소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중심과 정원 진입부의 기념비가 연결된 중심축을 기준으로 정원구성요소가 배치되었는데, 시각적 중심이 되는 비스타(Vista)를 이루는 기념비, 바로크 정원에서 보이는 화단 형태, 축과 대칭으로 배치된 수공간, 화단 형태와 축을 강조한 배식 패턴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서양정원문화의 전파이다. 서양식 문화인 가든파티 형식의 원유회가 열렸으며, 관저에서는 저녁시간대에 만찬과 의전 행사를 진행하였다. 넷째, 근대 조경도면으로의 사료적 가치이다. 도입 수종과 배식 패턴을 구분한 최초의 근대 조경도면으로 기존의 간략한 수목 심벌 또는 화단 형태의 표기에서 진일보한 표현이다. 부차적으로 지형 변형을 위한 현재 표고와 계획고, 수경요소의 배관, 상세 단면 등이 표기되어 있다. 향후 근대조경의 실질적인 분석을 위해서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분석으로 근대조경에 대한 연구의 폭이 확대되길 바라는 바이다.

고전 시문과 회화를 통해 본 연(Nelumbonucifera)의 활용과 애호 행태 (Utility and Care Patterns of Lotus Shown in Classic Poetries and Proses, Painting)

  • 김명희;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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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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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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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의 목적은 옛사람들이 '연'이라는 식물소재를 활용한 방법과 그로부터 취하고자 했던 가치와 의미, 감상 태도 등에 대한 실제적 사례들을 고찰하는데 있다. 이를 위한 연구의 방법은 연에 대한 감상과 관념세계가 반영된 시문과 회화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의 관상 가치는 대규모 집단식재와 부지규모의 소규모 식재, 분연(盆蓮)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특히 대규모 면적에 집단적으로 식재된 연은 여타의 초화류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경관을 제공하였다. 별서와 후원 등 사적인 공간에 연지를 조성하고, 연을 애호한 여러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소는 연이 개화할 무렵에 아회의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작은 연지조차 조성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분지를 이용하여 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 꽃과 잎, 줄기와 연밥 등 세부요소 모두의 관상가치가 뛰어난 점은 연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둘째,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향원익청(香遠益淸)'으로 표현된 향기는 연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이다. 전통정원에 있어서 연은 향기를 제공하는 후각적 요소로 활용되었다. 옛사람들은 연의 향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에 더해 '군자의 품격'에 비유되는 상징물로 여겼으며, 이를 시문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연은 청각적 요소로도 활용되었다. 즉, 수면과 넓은 연잎에 빗방울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를 '연당청우(蓮塘廳雨)' 또는 '하당야우(荷塘夜雨)'라 하여 운치 있는 소리로 즐겼다. 넷째, 연꽃을 구경하는 여름놀이를 '세속에 오염된 마음을 씻는다'라는 의미의 세심(洗心)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류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왕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이 즐겼다. 이 밖에 연과 관련된 풍류로 큰 연잎과 속이 빈 줄기의 특징을 이용하여 술을 마시는 방법인 '벽통주(碧筒酒)' 혹은 '하심주(荷心酒)', 상비주(象鼻酒)가 있다. 또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연밥과 '채련곡'은 남녀 간의 연애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기호(記號)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많은 '채련곡'이 전해지며, 남녀 간의 애정을 묘사한 여러 풍속화에는 연당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은 고대 이래로 사상과 종교 등 문화적 배경을 초월해 폭 넓은 계층이 애호하여 왔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연이 갖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사찰 등 종교시설과 관련된 식재 사례를 다각적으로 고찰하지 못한 점은 본 연구의 한계이며 추후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스마트교육과 독일의 미디어교육 (Korea Smart Education and German Media Education)

  • 김문숙
    • 비교교육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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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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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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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21세기 지식기반정보화사회의 심화와 더불어 생겨난 우리의 스마트교육 정책이 교육환경과 교육내용, 교육방법 및 평가 등 교육체제의 혁신에 집중한 나머지 교육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인간교육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위해 한국의 스마트교육에 해당하는 독일의 미디어교육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우리 스마트교육에 필요한 시사점을 도출해 내고자 했다. 독일도 정보화 사회의 도래와 함께 미디어교육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여하며, 2009년 이후 미디어교육은 모든 주의 모든 학교가 실천해야 하는 의무사항이 되었다. 따라서 추진되고 있는 미디어교육정책을 각 주별로 분석하였고 연구결과 이들 주에서 실천되고 있는 미디어교육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1) 미디어교육을 일정기간 완수해 내야하는 특수교육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교육과정과 유기적 관계에서 실천하고 있다. 2) 미디어교육전개 과정이 위로부터의 일방적 지시와 전달이 아닌, 현장 교사의 실천적 사례를 적극 반영하며 그 방향성을 모색하는 민주적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3) 정보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토대로 정보화 사회에 필요한 청소년의 인성과 정체성에 관여하고 있다. 미디어교육정책의 방법과 절차에 관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시사점과 달리 세 번째 시사점은 미디어교육의 근본적 목적으로 이 연구논문에서 제시하는 가장 핵심적 시사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교육적 맥락에서 시도되고 있는 독일의 미디어교육 정책은 환경혁신이나 교육콘텐츠개발과 같은 물리적 기반혁신이 중심이 된 우리 스마트교육정책에 시사 하는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교육의 목적은 스마트환경구축과 스마트한 교육방법이 아니라, 미래사회를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스마트한 인간의 양성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환경 인프라라와 물리적기반에 치우쳐진 우리 스마트교육의 담론을 스마트시대에 요구되는 인격과 정체성에 대한 담론으로 바꾸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교실혁명이 아닌 인간중심 교육혁명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고종황제 만수성절 경축 문화 (The Celebration of the Mansuseongjeol of Emperor Gojong)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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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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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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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만수성절은 본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컫는 용어이다. 조선의 경우 만수성절의 칭호를 쓸 수 없었지만, 개항 이후 자주적인 대외관계를 펼치기 위해 미국공사관을 설치한 해인 1888년부터 고종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 칭했던 용례가 나타난다. 이어 1895년 무렵에는 만수성절이란 호칭이 더욱 널리 사용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를 기념한 경축 행사가 활성화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만수성절 축하 행사는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국내 관원, 외국인, 학생, 종교인, 언론인, 상인, 민간단체, 전국의 개항장 등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고종황제 탄신을 기념하여, 축하 계층이 두텁고 넓었다. 즉 계층 지역 인종에서 보편성 전국성 국제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축하 문화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에게 황실후원금도 지급되었다. 당시 만수성절 경축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황제권 강화와 내국인의 민심 결속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런 모습이 국내에 상주하는 각국 외교관과 취재기자를 통해 세계에 보도되어, 국권 신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장악하고 황권을 위축시키면서 만수성절 행사도 축소된다. 통감부 시기에는 황실지원금의 단절, 일제의 단속,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인해 만수성절 기념 행사가 거의 사라졌고, 궁중에서만 친일관료와 일본인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경축연만 설행되었다. 고종황제의 권력 실축과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몸이었고, 만수성절 경축도 동반 추락하였다. 그런 가운데 궁중 전통 연향 문화는 해체되고, 일제에 의한 공연 환경의 변화로 인해 대한제국 최고의 공연자들은 일개 유희물로 전락해 버렸다. 비록 황제를 향한 존경심과 애국심의 표출 창구였던 만수성절은 굴절되었지만 황실 자본력에 힘입어 구축된 행사 과정에서 창출된 문화적 성취들은 한국근현대문화사가 전개되는 내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 고스트볼의 비밀>의 구성적 특징과 전통귀신담의 콘텐츠화의 의미 (The story structure characteristic of the "Shinbi Apartment" animation and meaning of contents of the traditional ghost story)

  • 송소라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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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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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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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국내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인 투니버스가 자체 제작한 <신비아파트> 시리즈를 대상으로 작품의 구성적 특징을 살피고, 이를 통해 귀신담의 콘텐츠화가 갖는 의미를 고찰하였다. <신비아파트> 시리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공포 애니메이션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제작이 이루어졌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아울러 국내에서 주로 방영되었던 일본 제작 공포 애니메이션과 서사의 구성과 지향에서 차이를 보이면서, 국내 전통 귀신담의 형식과 지향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갖는 구성적 특징 및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탐색해볼 만한 의미를 갖는다. <신비아파트> 시리즈 가운데 정규 방송 첫 시즌으로 방송되었던 <신비아파트: 고스트볼의 비밀>(이하 <고스트볼의 비밀>)은 현대의 괴담이 갖고 있는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귀신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 가운데 '원귀형'의 구조를 수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서사를 보다 풍부하게 하였다. 괴기스러움과 예측불가능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귀신의 형상은 현대의 괴담이 지향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귀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지 않고, 등장하는 귀신에 사연을 입히고 이를 들어주고 소통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련하여 서사의 지향을 소통과 이해, 그리고 용서와 화해에 두고 있다. <고스트볼의 비밀>이 갖는 독특한 이야기의 구조와 내용은 '귀신'을 단지 충격과 공포, 두려움과 불안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친근함과 오락의 대상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어린이'라는 개념이 생성되면서 교훈과 교화의 차원으로 귀신이야기를 다루었던 근대의 관습을 계승하며, 악귀를 통해 '어린이'에게 필요한 모험과 용기는 물론 현대사회의 물질과 외모 지향에 대한 경계 등으로 이야기의 교훈성을 지속한다. <신비아파트> 시리즈는 '귀신'을 상업적 콘텐츠로 성공시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 도구는 물론 완구 등에도 이야기의 구성과 캐릭터가 적극적으로 사용이 되었다. 이는 오락과 유희 대상으로 귀신을 향유하는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귀신문화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케 하였다는 점에서 <신비아파트> 시리즈가 보여준 스토리텔링의 힘과 캐릭터의 탄생은 의미가 있다.

조선전기 군례(軍禮)의 정비와 사례(射禮)의 의례화 (A study on the Ritualized of Royal Archery of early Chosun Dynasty)

  • 이왕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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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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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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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조선시대의 군례(軍禮)가 중국 고대의 의례를 답습한 것만이 아니라 삼국시대와 고려를 이어 내려오던 전례도 함께 수용되었음을 밝혔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례(射禮)를 들어서 군례의 역사적인 정착과 의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군례는 국가의례인 오례의가 정착되는 성종대에 정비되었다. 군례가 국가 전례서에 공식적으로 오례의 하나로 포함되면서 군사의례가 완비되었다. 그러나 군례의 정비는 중국 고대의 예제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던 전통적인 부분을 흡수하는 선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중국의 예제는 "주례"의 오례 구조를 계승하였던 당대의 "개원례"를 도입하였으며, 삼국시대의 예제를 계승한 고려의 오례 구도를 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군례의 기원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와 주나라 및 당 송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런 오랜 기간을 통해 정비되고 개선된 의례 형식이 가미되어 정착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의 군례에 활쏘기가 들어간 것은 조선왕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이었다. 조선초부터 활쏘기는 왕실은 물론 관료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교적 관점에서 활쏘기가 군자의 덕을 살필 수 있는 의례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부분도 있으며, 태조를 이은 국왕들이 왕실내 전통적인 행사로 활쏘기를 이어간 것도 한 요인이었다. 활쏘기가 습사(習射)와 관사(觀射)로 정비되면서 점차 의례적인 절차로 규정되었으며 결국 세종대 오례의에 포함되고 성종대 의례로 정비되었다. 습사와 관사는 사례의(射禮儀)로 정비된 이후에도 의례적인 시행만이 아니라 국왕들의 잦은 활쏘기에 맞추어 활발하게 거행되었다. 다만 성종대 성균관 대사례가 정비된 이후 왕실의 활쏘기는 축소되었다. 특히 중종대 이후에는 국가적인 사례의 거행이 드물게 되었으며, 국왕이 활쏘기를 장려하는 것도 조선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되었다. 이점은 중종대를 전후하여 문치를 강조하던 사림파의 정계 진출 이후 벌어진 일이라고 보인다. 중종 재위기간 내 국왕이 주재하는 활쏘기가 2회만 거행되었다는 점이 그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초부터 왕실의 장기이며 상무기질을 북돋기에 가장 용이한 방안이었던 사례(射禮)가 쇠퇴했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군례를 소홀히 다루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초 군례의 정착과 사례의 정비는 상무적 기상이 강조되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 변화양상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제로 중종대 이후 잦은 왜변을 거치면서 상무적인 군례의 시행이나 활쏘기는 권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을 거친 뒤 새로 도입된 명나라의 군제에 맞추어 군례가 변화되고 새롭게 정비되는 과정에서 무예가 강조되었다. 결국 조선전기의 군례는 그 정착 과정이 국가의례적 속성을 보이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다분히 의례적(依例的)인 수준으로 변모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이점이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될 조선의 딜레마였음은 물론이다.

모헌(慕軒) 강필신(姜必愼)의 생애와 문학연구 (A study on Mohun(慕軒) Gang, pil-shin(姜必愼)'s life and Literature)

  • 맹영일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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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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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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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18C 전반기는 다양한 시인들이 출현했던 시기이다. 소론과 남인 계열, 중인계층의 문인들 역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 시기 남인문학을 주도했던 문인들은 소위 문외파로 불리던 사대부들이다. 이들 강박, 이인복, 이중환, 오광운, 강필신은 모두 근기 남인 계열의 사대부들이며, 백련시단의 구성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강박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강필신은 당대의 평가에 비해 그 실체를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강필신은 조선 후기 남인 계열의 대표적 문인이다. 강필신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분석하면 그의 문학세계의 면모를 일정부분 확인할 수 있다. 강필신과 교유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은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먼저 백련시단으로 대표되는 청남 계열 문인들로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집단, 두 번째로 진주 강씨 가문, 세 번째로 강필신의 말년 세거지였던 경상도 지역의 문인들로 분류할 수 있다. 강필신의 교유관계는 시회(詩會)를 통해 이루어졌다. 시회는 기본적으로 강박을 비롯한 인척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시회의 구성원들이 달라졌다. 강필신은 서울과 경상도를 오가며 시회를 가졌다. 이는 강필신이 근기 남인으로서의 특징을 지니면서 동시에 영남 남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강필신의 문학이 근기 남인과 영남 남인 사이에서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하면 조선 후기 서울과 지방의 문학 교류 양상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강필신의 문학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