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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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식물 누리장나무의 조경용 소재개발을 위한 기초연구 (Basic Studies of Korean Native Clerodendron trichotomum Thunberg for Landscape Uses)

  • 한인송;하유미;김동엽;이봉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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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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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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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전통식물 누리장나무를 조경 소재로 개발하기 위한 기초연구로서 자생지 환경특성 및 생육특성과 번식방법을 규명하고자 실시하였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하고 있는 누리장나무는 예로부터 어린 잎을 식용하거나 줄기, 뿌리 등을 약용으로 이용한 토종식물로서 전통 조경식물로 구분할 수 있다. 누리장나무가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1937년 정태현 등이 저술한 <조선식물향명집> 에서 개똥나무라 칭하였으며, 황해도 이남 산야지, 산기슭, 하천변, 둑 등에서 자라고, 식용 및 약용으로 이용된다. 누리장나무는 우리 역사와 함께 하였으며, 여름에 피는 흰 꽃과 가을에 익는 비취색의 열매는 관상가치가 높아 조경용 소재로 개발할 가치가 높다. 누리장나무는 낙엽활엽관목으로 한 화방내 꽃의 크기는 1.2cm로 작은 편이며 수술의 수는 4개, 암술의 수는 1개였다. 화방의 총 길이는 15cm, 화방폭은 20cm였으며, 화방당 꽃수는 84개로 한 화방당 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열매색은 흑청색으로 과폭은 0.72~0.75cm, 과고는 0.71~0.73cm로서 거의 원형에 가까웠으며, 6월 11일 착과되어 이듬해 봄까지 열매가 달려있어 열매 감상기간이 총 175일로 길었다. 자생지의 토양산도는 안양 수리산이 4.58로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의 5.52보다 낮았다. 누리장나무의 종자발아율은 자생지별로 다양하였으며, 플러그(plug) 상자에서 발아율이 80%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으며, 생장 역시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녹지삽목 시기를 6월과 7월에 걸쳐 실시한 결과 7월 7일 처리구에서 공히 발근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반면 6월 23일과 7월 21일 처리구는 발근율이 오히려 낮아졌다. IBA 농도에 따른 발근율을 조사한 결과, 7월 7일 IBA 1,000 ppm과 2,000 ppm 처리구에서 발근율이 94%, 97%의 높은 발근율을 보여 누리장나무의 녹지삽목은 7월 상순 IBA 1,000~2,000 ppm의 저농도에서 실시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매천별업(梅川別業) 퇴수정원림(退修亭園林)의 의미경관론적 해석 (Interpretation on the Theory of a Meaning Landscape in Maechun-Byulup Toesu-jeong Wonlim)

  • 이현우;김재식;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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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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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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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 위치한 조선 후기 퇴관(退官) 선비의 장구지소(杖屨之所) 매천별업 퇴수정원림의 조영요소와 이곳에 투영된 작정의도 및 의미경관적 요소의 추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퇴수정원림은 매천 박치기가 퇴관 후 은거를 위해 1870년 조영한 별서형 누정원림으로, 별업 경영의 면모를 기록한 '퇴수정기(退修亭記), 반선대기(伴仙臺記), 반선대10영(伴仙臺十詠), 퇴수정상량문(退修亭上樑文), 퇴수정원운병소서(退修亭原韻幷小序) 그리고 기타 현판과 주련 등의 기문에서는 조영자와 별업 조영의지 및 자연친화적 산수경영의 의도가 읽혀진다. 퇴수정원림의 공간구성 체계는 '퇴수정권역, 관선재권역, 계정권역' 등 세 권역으로 대별되며, 원림 주변에 새겨진 '매천별업(梅川別業) 반선대(伴仙臺) 심진암(尋眞巖) 야박담(夜泊潭)' 등의 암각서는 원림의 영역성을 규정하는 동시에 원림 작정과 관련한 다양한 의미경관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유상하며 곡수연회를 베푼 곡수유거(曲水流渠)의 조탁 흔적은 문화경관으로서의 별업의 의미를 한층 강화시켜 주고 있다. 더불어 '반선대기'와 '퇴수정원운'의 반선대10영 등의 시문에서는 공간의 의미부여 및 자연 관조를 통해 신선지향적 별업원림(別業園林)을 구축하고자 했던 매천 박치기의 조경가적 면모가 읽혀질 뿐 아니라 귀거래(歸去來)하여 퇴수(退修)하는 은사지소(隱士之所)이자 풍류지처(風流之處)로서의 현학적 의미경관 요소들이 추출된다. 퇴수정원림의 현존 식물상 및 주요 식생요소는 후원에 펼쳐진 송림을 비롯하여 느티나무, 산벚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물가 쪽으로 굽은 소나무 등이 파악되는데, 도입종인 미류나무와 퇴수정 전면으로의 경관 조망에 장애가 되는 일부 수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연에 의탁하여 이루어진 천연적 경관 면모를 보여준다.

임실(任實) 단구대(丹丘臺)와 삼계석문(三溪石門)에 새긴 의미경관과 단구구로회(丹丘九老會)의 아회(雅會)문화 (The Landscape Meaning and Literary Group Culture Carved in Danguedae and Samgaeseokmun of Imshil)

  • 이현우;이정한;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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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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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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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임실군 둔덕면 소재 구로정과 삼계석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의미경관적 속성과 그 속에 투영된 구로회 아회문화의 일면을 조명, 이 지역에 산재된 문화경관적 흔적을 고찰하고 그 함의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구로정과 삼계석문이 입지하는 지점은 둔남천, 오수천 그리고 율천 등 삼계의 합수점으로 둔덕의 별호라는 상징성을 보이는 승경의 요처이다. 특히 고지도의 묘사로 볼 때 '삼계'와 '삼계석문'은 둔덕 지형경관의 특성이자 랜드마크로써의 위용성을 가진다. 단구구로회(丹丘九老會)는 중국 백거이(白居易)를 중심으로 회동한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기원으로 태동한 것으로 도연명의 풍치를 사모한 60세 이상 노인 9명에 의해 조직되어 단구에 누대를 쌓고 동향 문인들과 더불어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둔덕의 문풍을 높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시대 팽배했던 노인회 모임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토대 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단구구로회의 내면적 추구 이념이 '장생(長生)'이었다면 외면적 이념은 '경로의 시대정신'으로 압축된다. 단구대(丹丘臺)는 물론 구선동(求仙洞), 방장산(方丈山), 대천대(對天臺)라 명명한 것은 인생의 과정을 상징화하고 스스로를 성찰하기 위한 장치로 판단된다. 또한 최치원의 모작인 쌍계사 입구의 '삼계석문' 각자를 소요처 주변 거대한 입석에 새긴 이면에는 현실의 속된 것으로 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으로의 지향성을 실천하여 신선이 된 것으로 추앙되는, 가장 현시적인 인물 최치원에 대한 연모(戀慕)와 신선경의 동경이 바탕이 된 것으로 추론된다. 구로정의 좌대인 단구대 석벽에 새겨진 총 4개 각자의 상징의미를 추적한 결과, 이 공간은 사성(四姓)의 구로의 아회 장소일 뿐만 아니라 신선이 거처하는 곳임을 자부하고 있다. 장소는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가 융합되어 장소정체성을 심화시키는 단구대와 구로정 그리고 이러한 유대감을 강하게 유발시키는 회의체인 구로회와의 조응(調應)은 장소애착의 정신이 올곧이 스며있는 장구지소(杖屨之所)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단구구로회에서의 행위는 전통적 방식의 아회 행위인 소요(逍遙)와 유상(遊賞), 음주와 시짓기 그리고 악기연주 행위가 펼쳐졌으며, 그밖에 청담(淸談), 전다(煎茶), 축원(祝願), 낚시 등이 더해짐으로써 상대적으로 전원취향적 은일성향적 아회로서의 성격이 한층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전 시문과 회화를 통해 본 연(Nelumbonucifera)의 활용과 애호 행태 (Utility and Care Patterns of Lotus Shown in Classic Poetries and Proses, Painting)

  • 김명희;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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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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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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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의 목적은 옛사람들이 '연'이라는 식물소재를 활용한 방법과 그로부터 취하고자 했던 가치와 의미, 감상 태도 등에 대한 실제적 사례들을 고찰하는데 있다. 이를 위한 연구의 방법은 연에 대한 감상과 관념세계가 반영된 시문과 회화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의 관상 가치는 대규모 집단식재와 부지규모의 소규모 식재, 분연(盆蓮)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특히 대규모 면적에 집단적으로 식재된 연은 여타의 초화류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경관을 제공하였다. 별서와 후원 등 사적인 공간에 연지를 조성하고, 연을 애호한 여러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소는 연이 개화할 무렵에 아회의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작은 연지조차 조성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분지를 이용하여 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 꽃과 잎, 줄기와 연밥 등 세부요소 모두의 관상가치가 뛰어난 점은 연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둘째,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향원익청(香遠益淸)'으로 표현된 향기는 연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이다. 전통정원에 있어서 연은 향기를 제공하는 후각적 요소로 활용되었다. 옛사람들은 연의 향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에 더해 '군자의 품격'에 비유되는 상징물로 여겼으며, 이를 시문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연은 청각적 요소로도 활용되었다. 즉, 수면과 넓은 연잎에 빗방울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를 '연당청우(蓮塘廳雨)' 또는 '하당야우(荷塘夜雨)'라 하여 운치 있는 소리로 즐겼다. 넷째, 연꽃을 구경하는 여름놀이를 '세속에 오염된 마음을 씻는다'라는 의미의 세심(洗心)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류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왕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이 즐겼다. 이 밖에 연과 관련된 풍류로 큰 연잎과 속이 빈 줄기의 특징을 이용하여 술을 마시는 방법인 '벽통주(碧筒酒)' 혹은 '하심주(荷心酒)', 상비주(象鼻酒)가 있다. 또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연밥과 '채련곡'은 남녀 간의 연애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기호(記號)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많은 '채련곡'이 전해지며, 남녀 간의 애정을 묘사한 여러 풍속화에는 연당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은 고대 이래로 사상과 종교 등 문화적 배경을 초월해 폭 넓은 계층이 애호하여 왔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연이 갖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사찰 등 종교시설과 관련된 식재 사례를 다각적으로 고찰하지 못한 점은 본 연구의 한계이며 추후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고봉(高峯)의 성리학(性理學)과 수양론(修養論) (Kobong(高峯)'s Philophy and the theory of Self-cultivation(修養))

  • 강희복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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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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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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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논문에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인물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사상에 관하여, 수양(修養)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해해보았는데, 이런 논의를 위하여 고봉의 "주자문록(朱子文錄)"의 구성과 특징 및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에 관한 견해도 함께 살펴보았다. 유학은 인학(仁學)(성학(聖學))이며, 이런 유학(儒學)의 문제는 근원 주체 관계로 요약해 볼 수 있고, 수양(修養)란 하늘과 사람의 관계 및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삶의 주체(主體)로서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은 고봉이 퇴계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문제에 관하여 논변(論辯)하기 이전(1557년, 31세)에 주자학(朱子學)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주자의 사상 가운데에서 수양(修養)를 지향하는 심성설(心性說)의 소개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으며, 퇴계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비교해볼 때 고봉의 "주자문록(朱子文錄)"은 문집 전체에서 시(詩)를 제외하고 다양한 자료들을 보다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퇴계(退溪)와 고봉(高峯)는 약 8년 동안(1559-1566)에 걸쳐 편지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의 문제(정(情)과 선악(善惡)의 문제)에 관하여 논쟁하였는데, 퇴계(退溪)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질적 차이가 있는 감정(이기호발(理氣互發) 칠정대사단(七情對四端))으로 이해하였고 고봉(高峯)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기공발(理氣共發) 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로 이해하였는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이발(理發)인가 기발(氣發)인가에 관한 논의는 개념에 관한 논리적 분석이나 이론적 타당성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 결국은 체인(體認) 확충(擴充)과 성찰(省察) 극치(克治)를 내용으로 하는 수양(修養)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性理學)과 "논사록(論思錄)"을 중심으로 하는 경세론(經世論)에 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그의 수양론(修養論)에 관한 연구는 많지 않다.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은 고봉이 수렴(收斂)의 공부가 부족하고 조존천리(操存踐履)의 공(功)이 없다고 하였다. 고봉은 "이심법설(移心法說)"과 "삼해(三解)"에서 마음(심(心)) 그리고 경(敬)과 성(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심(心))은 몸(신(身))을 주재하며, 활물(活物)로서 광명동철(光明洞徹)하여 온갖 이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성(性)(체(體))과 정(情)(용(用))을 포함한다. 마음(심(心))은 배(주(舟))와 같고 경(敬)은 키(타(?))와 같으니, 배가 파도에 있을 때에는 키로써 움직이며 마음이 물욕(物欲)에 있을 때에는 경(敬)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성인(聖人)과 중인(衆人)이 동정(動靜)할 때에 성(性)을 온전히 하기도 하고 해치기도 하는 것은 경(敬)과 사(肆) 혹은 성(誠)과 위(僞)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며, 성인의 도(道)로서의 경(敬)(주일무적(主一無適))을 통하여 하늘의 도(道)로서의 성(誠)(진실무망(眞實無妄))을 이룰 수 있는데, '심사명변(審思明辨)'하여 스스로 힘써 그치지 않는 것이 '사성지실(思誠之實)'이라면 정제엄숙(整齊嚴肅)하고 삼가하고 스스로 잘 지키는 것은 '주경지실(主敬之實)'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봉은 책을 읽을 때는 언어와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옛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하며, 마음으로 견득(見得)해서 삶 속에서 체인(體認)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과 "중용(中庸)"의 중화(中和)에 관하여도 시(詩)를 썼다. 이렇게 볼 때 고봉(高峯)은 유학의 수기(修己)(명명덕(明明德))와 안인(安人)(신민(新民))을 전제로, 신(新)유학(儒學)(주자학(朱子學))의 인간관(심(心) 성(性) 정(情)/미발(未發) 이발(已發)/체(體) 용(用))과 수양론(거경궁리(居敬窮理)/정제엄숙(整齊嚴肅) 주일무적(主一無適)/경(敬) 성(誠))을 충실하게 따르며 나름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황제 만수성절 경축 문화 (The Celebration of the Mansuseongjeol of Emperor Gojong)

  • 이정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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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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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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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만수성절은 본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컫는 용어이다. 조선의 경우 만수성절의 칭호를 쓸 수 없었지만, 개항 이후 자주적인 대외관계를 펼치기 위해 미국공사관을 설치한 해인 1888년부터 고종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 칭했던 용례가 나타난다. 이어 1895년 무렵에는 만수성절이란 호칭이 더욱 널리 사용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를 기념한 경축 행사가 활성화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만수성절 축하 행사는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국내 관원, 외국인, 학생, 종교인, 언론인, 상인, 민간단체, 전국의 개항장 등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고종황제 탄신을 기념하여, 축하 계층이 두텁고 넓었다. 즉 계층 지역 인종에서 보편성 전국성 국제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축하 문화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에게 황실후원금도 지급되었다. 당시 만수성절 경축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황제권 강화와 내국인의 민심 결속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런 모습이 국내에 상주하는 각국 외교관과 취재기자를 통해 세계에 보도되어, 국권 신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장악하고 황권을 위축시키면서 만수성절 행사도 축소된다. 통감부 시기에는 황실지원금의 단절, 일제의 단속,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인해 만수성절 기념 행사가 거의 사라졌고, 궁중에서만 친일관료와 일본인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경축연만 설행되었다. 고종황제의 권력 실축과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몸이었고, 만수성절 경축도 동반 추락하였다. 그런 가운데 궁중 전통 연향 문화는 해체되고, 일제에 의한 공연 환경의 변화로 인해 대한제국 최고의 공연자들은 일개 유희물로 전락해 버렸다. 비록 황제를 향한 존경심과 애국심의 표출 창구였던 만수성절은 굴절되었지만 황실 자본력에 힘입어 구축된 행사 과정에서 창출된 문화적 성취들은 한국근현대문화사가 전개되는 내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송대(宋代) 『선화화보(宣和畵譜)』를 통해 본 화론미학(畵論美學) (A Study of painting theory Aesthetics of "Xuanhehuapu")

  • 장완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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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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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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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중국 역사에 있어서 송(宋)는 금(金)이라고 하는 강대한 북방 이민족의 압력 하에서도 사회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한 시기이다. 송대는 전대의 문벌세족 장원경제가 철저히 와해되고 새로운 문인사대부가 대두되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조선, 야금, 방직, 염색, 인쇄 제지, 자기, 제염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공업이 상당히 발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상업의 번성과 도시의 발전, 남북지역 간의 교류로 발전을 이루었다. 상업의 번영과 도시의 발전은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저자거리에서 유행하는 민간문학인 "화본(話本)"소설의 등장이라든지, 문인 사대부들의 사(詞)를 비롯하여 회화에 있어서는 문인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대두된 시기이다. 또한 철학적으로는 리학(理學)이라는 새로운 신유학(新儒學)이 사회적으로 깊게 퍼져 나아가던 시대였다. 또한 송대 이래로 중국미학은 유 불 도(儒佛道) 3가(三家)가 합류되는 추세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물론 회화 및 화론미학에서도 두드러진 추세라고 할 수 있다. 즉 유학(儒學)이 주도하는 유불도 사상의 합류는 이론가들이 회화이론체계 내지는 그림을 평론하는 화평(畵評)이나 화감(畵鑑)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선화화보(宣和畵譜)"는 송대(宋代) 휘종(徽宗)의 명에 따라 선화(宣和)2년(1120년)에 편찬된 중요한 회화이론 저작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책의 중요한 의의나 그 가운데에 포함된 풍부하고도 복잡한 미학사상을 보지 못하여, 이로 인해 "선화화보"를 매우 낮게 평가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하기까지 했다. 휘종이 주제하던 화원(畵院)에서 회화는 어떤 면에서 있어서 휘종의 심미적 요구와 일치하는 풍격(風格)이나 기교, 법도로써 표현하기를 요구 받았지만, 이는 결코 다양한 소재나 스타일의 발전을 완전히 배척하였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것의 발전을 촉진하고자 힘썼다. 이는 송대 회화 스타일, 유파의 다양성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전 시대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선화화보"는 풍부하고 다양한 미학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거나 협소하지 않다. 이 책은 유가(儒家), 특히 리학(理學)과 도가(道家) 중, 특히 장자(莊子)의 미학사상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를 종합하여 "주역"을 통해 발현되고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선화화보"의 미학사상을 분석해 볼 것이다. 첫째, 서화 "동체"(서화동체(書畵同體))사상. 둘째, 회화의 "감계현우(鑑戒賢愚)"의 정치 교육적 작용과 순수예술의 가치와의 관계(시와 회화의 통일). 셋째, "예(藝)"와 "도(道)"의 통일. 넷째, "선화화보"는 중국 고대회화사에 있어서 가장 완전한 회화 분류학(分類學)을 세웠다. 다섯째, 회화평론의 방법에 있어서, "시대의 선후에 따라" "회화의 부문별로 그림을 나누고, 그림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고, 사람에 따라 시대를 논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주희(朱熹) 지각론(知覺論)과의 비교를 통해 본 김창협 지각론(知覺論)의 특징 (The Character of Kim Chang Hyup(金昌協)'s Zhi-Jue(知覺) Theory Through Comparison With Zhu Xii(朱熹)'s)

  • 이창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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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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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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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논문은 주희(朱熹)와 김창협의 지각론(知覺論)을 비교함으로써 김창협의 지각론(知覺論)이 어떠한 특징을 띄는지 살펴보았다. 주재(主宰)의 측면에서, 주희(朱熹)는 한편으로는 지각(知覺)을 주재(主宰)를 통해 나타난 상태로 여겼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재(主宰)를 가능케 하는 주체의 작용으로 여겼다. 김창협은 지각(知覺)이라는 표현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러한 혼용을 해소하고 지각(知覺)을 한정적인 의미에서 재정의했다. 그는 심(心)의 여러 측면 중에서 주재(主宰)의 주체 측면에 해당하는 작용이 지각(知覺)이며, 주재(主宰)를 가능하게 하는 작용, 혹은 주재(主宰)를 행하는 주체 자체를 지각(知覺)이라고 상정했다. 그리고 지각(知覺)을 성(性)이나 정(情)과 구분하고 지각(知覺)의 작용을 상술함으로써 주재(主宰) 주체로서의 심(心)의 역할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지각(知覺)과 성(性)의 구분에서 주체와 본성의 괴리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기(氣)가 리(理)와 별개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이기불리(理氣不離)를 침범한다고도 볼 수 있다. 김창협 당대에 제기된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이 무엇인가 하는 쟁정은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김창협은 지각(知覺)과 성(性)을 각각 주재(主宰)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하려 했으므로, 한편으로는 소이연(所以然)이 아닌 소당연(所當然)으로서의 성(性)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각(知覺)의 근거가 기(氣)의 허령(虛靈)함이라고 주장했다. 기(氣)의 허령(虛靈)함으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이 되는 리(理)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회피에 가깝다. 또한 성(性)이 소당연(所當然)으로 설정될 경우 지각(知覺)이 성(性)을 갖추고 작용으로 드러날 때는 이기불리(理氣不離)라고 할 수는 있지만 주체인 지각(知覺) 자체는 여전히 성(性)과 구분되므로 이기불리(理氣不離)에 대한 문제제기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희(朱熹)는 지각(知覺)을 지(智)의 용(用)이라고 주장하여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을 지(智)로 설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불교 비판에서 지각(知覺)을 언급할 때는 김창협과 유사하게 성(性)을 지각(知覺)의 소당연(所當然)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주희(朱熹)가 성(性)을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하려 했는가에 대해서 재고의 여지가 있는 셈이다. 지각(知覺)의 소이연(所以然) 문제에 대한 해명은 주자학의 체계를 공고히 하려 했던 조선 학자들에 의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지각(知覺)과 본성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희(朱熹)와 김창협은 유사한 관계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각(知覺)을 주체의 측면에만 한정하고 구체화하려고 한 것만을 김창협 지각론(知覺論)의 특징이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무예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 (A Task for Listing Martial arts of 『Muyedobotongji』 on the UNESCO Representative List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 곽낙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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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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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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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의 목적은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한 과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정조 14)에 편찬되었다. "무예도보통지"의 24가지 무예는 기본적으로 찌르는 방식의 자법(刺法), 찍어 베는 방식의 감법(坎法), 치는 방식의 격법(擊法)의 세 가지 방식으로 구분하였다. 둘째, "무예도보통지"의 무예가 무예사적 가치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18세기 한국 중국 일본의 동양 삼국 무예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합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가 세계기록유산으로 갖는 가치는 장교와 군졸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만든 무예 서적이라는 점이다. 셋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절차는 준비 및 제출, 심사, 결정의 세 단계로 진행되며, 소요되는 기간은 2년이다. 특히 심사보조기구는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산하 기구로서 24개 위원국 가운데 각 지역별로 1개국씩 전체 6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넷째,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인류무형유산 등재 과제는 다음과 같다. (1) "무예도보통지" 소장본에 대한 전수조사가 필요하다. (2) "무예도보통지" 무예의 시 도무형문화재 또는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다. (3) "무예도보통지" 무예 기법 및 동작에 대한 실기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 (4) "무예도보통지" 무예 복장 및 무기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5) "무예도보통지" 무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6) 문화재청 세계유산팀, 외교부 등 관련 부처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어야 한다. (7) 유네스코 등재기준과 충족을 위한 국내외의 "무예도보통지" 무예 관련 자료 수집을 포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8) 인류무형유산 등재유형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의 『대학(大學)』 독해(讀解)와 그 특징(特徵) (Seoktan Lee Shin-Ui's the Characteristic and Interpretation of Deahak(大學, The Great Learning))

  • 신창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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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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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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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고는 석탄 이신의의 "대학차록(大學箚錄)"을 통해, "대학"을 바라보는 그의 독창적 안목을 고찰하는 작업이다. 이신의(李?儀, 1551-1627)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경칙(景則)이며 호는 석탄(石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의 "대학차록"은 "대학장구"를 읽고 체득한 내용을 수시로 적은 기록으로 석탄이 정치지도자로서 기초를 다지는 학문의 초기 과정에서 저술되었다. 석탄은 "대학장구"의 체제인 장(章)과 구(句)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분석적 학문방법론의 새 지평을 열었다. "대학장구""서"에서는 대학의 핵심이 경(敬)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대학"이 심(心)과 성(性)을 함께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대학(장구)대전"의 경문(經文) 독해에서는 삼강령(三綱領)의 핵심을 명(明)과 신(新)과 지(止)에 달려 있다고 보고, 대학의 '도(道)', '명(明)'과 '덕(德)'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을 비롯한 "대학"의 여러 개념과 의미를 지(知)와 행(行),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읽어내며, 성리학을 한층 발전시켰다. "대학장구" 전문(傳文) 독해의 경우, 전 10장 전체에 걸쳐 50여구 하나하나를 분석적으로 검토하였다. 주자의 격물(格物) 이론이 담겨 있는 전5장의 경우,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독하면서, 이치의 궁구와 개별 사물에 대한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에 대한 물격지지(物格知至)로 나누어 '이치-공부-효험'의 순서로 정돈하였다. 마지막으로 정치사상의 핵심을 보여준 전10장에서는 혈구(?矩)의 길을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그것이 목민관의 제일 덕목임을 일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