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임진왜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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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기(1592~1598) 상급 수군 투구(胄)의 유형별 특성과 일러스트화 (The Type Characteristics and Illustration of War Helmets Worn by High Navy Offic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1592~1598))

  • 이주영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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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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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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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war helmets that were worn by high navy offic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1592~1598). War helmets worn during the War are classified into three types depending on whether they have a visor or 'cheom' and tongues or 'drim'. The war helmets of circumferential type has neither cheom nor drim. Those of cheom type has cheom, but not drim. And those of drim type has both drim and cheom or jeonbi. The war helmets of cheom type consist of a gamtu which is made of steel and looks like a reversed bowl and cheom that surrounds the entire circumference of gamtu. The war helmets of drim type are reclassified into two types in accordance with the shape of the gamtu and whether they have ganju. Of the two types, one type looks like a reversed bowl and has decorations on the top without ganju. The other type looks like a bottle neck and has ganju on the top, decorations above ganju. War helmets were in transition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Both the war helmets of cheom and drim types were worn during the War. At that time, the officers also wore war helmets having no ganju and looking like a reversed bowl and those having ganju and looking like a bottle neck. During the period, most war helmets were made of steel, but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most of them were made of leather.

임진왜란기(1592~1598) 상급 수군 갑옷갑[甲]의 유형별 특성과 일러스트화 (The Style Characteristics and Illustration of Armors Worn by high Navy Offic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1592~1598))

  • 이주영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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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3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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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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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is study is about the armors that high navy officers of Joseon wor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1592~1598). The kinds of armors that these officers wore during this period are Sueungap, cheolgap, pigap, jigap and myeongap. Sueungap, cheolgap, pigap are all described in literatures, which were released in that period and the early Joseon period. According to publications that were released during that period, Yuyeopgap was a type of an iron armor. Armors that are recorded in only literatures published in the early Joseon period include swaejagap, gyeongbeongap, dujeonggap, hwangdongdujeonggap and dudumigap. Myeongap is found only in publications that were made in the above war time. The styles of armors are largely classified into chalgap and dujeonggap. The chalgap-styled armors used gapchal as their main component. Dujeonggap-styled armors used fabrics and dujeong. The names and the manufacturing methods of the gapchal did not changed since its creation in the early Joseon period until the above wartime. But, their shapes were considerably changed between the two times. This is clearly shown in armors that were found in the moat of the Dongrae-eup fortress. Dujeonggap-styled armors that were used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Korea war were a successor to those of dujeonggap-styled armors of the early Joseon period. But the former armors were different from the latter in that they had no gapchal inside. They are well represented by Jeong Chung Sin's armor.

임진왜란기(1592~1598) 출토 포의 형태분석과 일러스트화 (Analysis and Illustration of the Formative Characteristics of Po Discovered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1592-1598))

  • 이주영;이경희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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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0권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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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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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In this study, the shapes of po worn by military officers who serve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1592-1598) were investigated. Findings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Various types of po that military officers usually wore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cludes jikryeong, dapho, dopo, cheolik, aekjureum, jangeui, jungchimak and bangryeongpo. Out of these types, cheolik and jungchimak were most often used by the officers. Po that were usually worn by military offic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as above mentioned is characterized as no difference in length between the front and back of the costume, kalgit and a pair of coat strings which are directly attached to po. The sleeves of the costume are bean chaff-shaped in some cases and just narrowly shaped in other cases. Similarly, the outer seop of po was either double-layered or single-layered. For jikryeong and dapho, mu is usually type of outside wrinkle. For dopo, its rear kit has the inner hem whose right and left edges are usually distant, respectively by 6~16cm, from the back center of the costume. Cheolik and aekjureum usually have either fine or broad pleats. For jangeui and jungchimak, mu is usually trapezoid in shape. Among various types of po which were usually worn by military officers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most representative are jikryeong from the tombs of Bae Cheon jo, dapho from Shin Yeo Gwan, dopo from general Bak and Bae Cheon Jo, cheolik from Nam Yoo and Cho Gyeong, aekjureum from Shin Yeo Gwan, jangeui from Kim Ham, jungchimak from Bae Cheon jo and bangryeongpo from Cho Gyeong.

한국 고활자명에 대한 연구 - 임진왜란 이후의 목활자를 중심으로 (II) - (A Study on the Names of Korean Old Movable Types)

  • 윤상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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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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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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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이 연구는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목활자들 중 일부 활자의 기본활자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기술은 먼저 대상 활자들에 대하여 각각의 간단한 내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이어서 각 문헌을 통하여 기존의 활자명들을 가능한 한 많이 조사하여 각 활자별로 나열하였다. 다음으로 이들 활자명에 이용된 요소들을 분석하여 기존의 활자명들이 어떤 요소들을 선호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았다. 이 선호도는 새로 발견된 활자에 대하여 명명하거나 기존의 활자에 대해 다시 명명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어서 필자 나름의 선정 기준을 적용하여 총 10종의 활자들에 대해 '交繼朴木活字', '羅州木活字', '前期校書館筆書體字', '仁祖寶錄字', '孝宗寶錄字', '後期校書館筆書體字', '觀象監 書名大字', '經書正音字', '倣洪武正韻大字', '剡溪門人錄大字'를 각각 표준 활자명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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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소재(所在) 16세기(世紀)의 조선(朝鮮) 내사본(內賜本) 연구(硏究) (A Study on Naesabon of the Joseon Dynasty of 16th Century in Japan)

  • 이재준;송일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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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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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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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 역사상 조선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으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국토가 유린되고 살인, 방화, 약탈은 물론 수많은 양민과 기술자의 나포, 문화재 반출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서적의 약탈 및 반출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약탈된 서적 중에는 내사본을 포함하여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조선전기 완질본이 다량으로 전존되고 있다. 일본 지역 내사본의 실제적 내용이 확인된다면 국내에 잔본 등으로 소장되어 있는 동본(同本)에 대한 간행시기와 배포규모 등의 관련 제반사항을 훨씬 더 자세하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 전존 내사본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은 서지학적, 역사학적 측면에서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판단된다. 이 연구는 현재 일본 지역에 전존되고 있는 우리나라 내사본 가운데 우선적으로 16세기에 내사된 서적을 대상으로 소장처, 판종, 시기, 주제 등의 종합적인 특징을 분석하였다.

의승장 기허영규와 의승의 봉기 - 특히 일본 종군승과 의승의 실체를 중심으로 - (The Monk Military General, the Reverend Giheo Yeong'gyu, and the Rebellion of Monk Military)

  • 황인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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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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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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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임진왜란시 일본 종군승 또는 감군승을 통한 침략을 갈파하여 유림의 중봉조헌과 함께 의승 의병의 봉기를 대비하였으며, 실제 청주성 전투와 제 1, 2차 금산성 전투에 함께 참전하여 순국 순교하였던 사실을 강조하였다. 특히 영규와 휘하 수백 또는 수천 의승은 불교계에서 최초로 봉기하여 스승 청허휴정과 동문을 중심으로 전국적 의승 봉기가 이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의승은 <진산미륵사초혼기(珍山彌勒寺招魂記)>에서 영규와 의승장과 종사관 군관승(의병장(義兵將) 판관승(判官僧) 1명, 의병장승(義兵將僧) 8명, 종사관승(從事官僧) 2명, 군관승(軍官僧) 1명)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종용사에는 '영규와 영규사졸(靈圭士卒)'로만 되어 있다. 영규의 사졸이 바로 의승인데 실록과 제문집류에서 20여명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 외에 다른 의승에 대한 구체적인 법명과 이들의 행적이 밝혀져서 그들의 순국 순교정신이 널리 추념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구한말 민중사상과 도교이미지, 그리고 도교서 언해 (Folk Ideas, Daoist Images, and Daoist Text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 이봉호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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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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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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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조선후기에 민중사상은 도교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감록』을 중심으로 한 민중사상은 '해도기병설'과 '남조선신앙', '미륵하생' 등으로 구체화되고, 이는 『정역』에 의해 개벽이라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들 민중사상에는 풍수와 도참의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도교의 방술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철종 때부터 도교서들이 번역되기 시작하고, 고종에 의해서 국가의 국역사업으로 많은 도교서들이 번역, 간행된다. 이들 도교서의 성격은 선서류(善書類)이거나 보권류(寶卷類)이다. 문제는 이들 선서와 보권류의 도교서들이 청대 민란의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도교서들의 번역은 민란이나 변혁을 바라는 민중들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할 것인데, 왜 고종은 도교서 번역 사업을 국가적으로 시행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민중사상을 정리하고, 그 내용들이 도교와 밀접한 관계임을 해명하였다. 또한 한국의 역사에서 도교는 국가적 위기에서 진호(鎭護)의 성격으로 등장해왔던 사실들을 정리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도교가 호출되는 상황을 정리했다. 아울러 『홍길동전』과 『홍길동전』과 거의 동일한 서사를 갖는 야담(野談)의 내용들 속에 도교적 요소들이 있음을 해명하였다. 고종이 국권을 잃을 상황에서 도교 선서와 보권을 국역하고 보급한 것은 도교의 국가 진호적 성격을 인식하고, 도교를 통해 국권을 지키고자 한 의도임을 해명했다. 아울러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도교적 풍습과 관례는 고종의 도교 선서와 보권의 보급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중완구의 제작 기술 (Manufacturing Techniques of Bronze Medium Mortars(Jungwangu, 中碗口) in Joseon Dynasty)

  • 허일권;김해솔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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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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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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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완구(碗口)란 유통식 화기로 발사체 장전 부분이 사발(碗) 형태인 화포이다. 발사체로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나 단석(團石) 등을 사용하였다.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이서(李曙), 1635)에 의하면, 대·중·소·소소완구 등 총 4종으로 구분되며, 실물은 대완구 1점(보물 제857호), 중완구 2점(보물 제858호, 제859호) 등 총 3점이 전한다. 본 연구에서는 임진왜란기에 제작된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중완구(보물 제858호)와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중완구(보물 제859호)의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제작 기술을 확인하였다. 첫 번째로 국내 현전하는 중완구가 단 두점인 만큼 정밀 3D 스캐닝 정보를 바탕으로 세부 제원을 서로 비교하고, 동 시기의 문헌 기록 수치와 함께 검토하였다. 전체 크기차는 근소하나 중량에서 5,507g의 차이를 보이고, 세부적으로 심지구멍 위치와 손잡이 길이가 상이하다. 한편 현전 중완구는 『화포식언해』의 중완구 제원과 가장 유사하다. 두 번째로는 중완구의 성분을 분석하고 기존 청동제 화약 무기와 함께 검토하였다. 표면 성분 분석결과, 중완구는 Cu-Sn-Pb의 삼원계 합금이며, 평균 함량(wt%)은 Cu 85.24 : Sn 10.16 : Pb 2.98이다. 중완구의 재료 성분은 기존에 조사된 조선 청동 화약 무기의 평균 성분과 매우 유사하며, 중세 유럽의 청동제 화포 재료(Gun-metal)와도 유사한 경향임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완구 표면의 주조 결함(casting defect)과 CT 상을 토대로 주조 기법을 추정하였다. 측면의 주조분할선으로 보아 주형을 반으로 나눈 분할 제작(piece mold)이며, 용탕의 주입은 약실끝 부분으로 포구가 바닥에 오는 수직 주형 설계로 추정한다. 특히 포신 기벽에서 주형과 코어를 고정하는 보조 장치인 채플릿(chaplets)이 확인되므로 이는 기벽을 일정하게 형성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편 보물 제858호와 제859호 중완구 두 점은 외형이 매우 유사하지만, 채플릿의 수량과 배치가 상이하여 주형 설계 일부가 달랐을 것으로 예상한다.

조선시대 청계천의 홍수와 하천정비 연구 (A Study on Flood and River Maintenance of Cheonggye-cheon Stream in the Josun Dynasty)

  • 김현준
    • 한국수자원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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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수자원학회 2006년도 학술발표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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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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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서울시에 의하여 지난 2003년 7월부터 시작된 복원공사가 2005년 10월 준공되었다. 원래부터 청계천은 인공의 하천이었다. 조선왕조 520년의 기틀을 다지면서, 도성에 있는 자연하천을 직강화하고 양안에 석축을 쌓아 개천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천에 인위적인 요소를 더한 것은 전적으로 홍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부터 헌종까지 도성에서 발생한 큰 홍수기록이 10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순조 32년(1832)과 헌종 12년(1846)의 피해가 컸었다. 순조 32년 6월부터 7월초까지 비가 오지 않은 날이 없다고 하였으며, 도성내 5부의 민가가 파괴된 것은 3,166호였고 죽은 자는 64명이었다. 헌종 12년 9월에도 큰 피해가 있었는데, 5부에 무너진 민가가 3,900여호나 되었다. 4대문 안의 서울은 북악산과 남산으로부터 가파르게 흐른 물이 고이기 쉬운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침수 피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개국 초기에 여러차례의 홍수피해를 당한 후에, 태종의 본격적인 하천정비 사업은 세종 때에 완성되어 오늘날 청계천의 기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이후 개천은 상류에서 쓸려내여온 토사가 쌓여 하천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영조 때에는 매립된 토사로 인하여 하천 바닥이 높아졌고, 양안의 도로와 거의 같은 높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에 영조는 대대적인 준설 사업을 펼쳤고 조선이 폐망할 때까지 주기적으로 준설을 하였다. 준설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측우기의 발명과 함께 한강과 개천의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수표(水標)를 제작하였고, 역대 왕들은 큰 비가 오면 강우량과 함께 하천의 수위를 점검하였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자연의 거친 손길에 대응하여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자 조선의 왕들과 관리 그리고 백성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본 고에서는 이러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 흔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없는 토양들이 있었는데 반해 남계통을 비롯한 학곡통, 회곡통, 백산통, 상주통, 석천통, 예산통 등 7개의 토양은 3kPa에서도 약간의 물의 이동이 있었다. 이는 모암이 화강 편마암인 관계로 토양 내에 물의 이동에 영향을 미치는 자갈의 함량이 높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고 추후의 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내용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1kPa에서 물의 이동은 삼각통에서 35.21 cm/day로 이동 속도가 가장 컸으며 그 뒤로 예산통, 화봉통, 학곡통, 백산통 등이 토양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였다. 가천통이나 석천통 및 우곡통은 1kPa에서의 이동 속도가 아주 느린 토양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포화되지 않은 상태인 1kPa에서 물의 이동 속도를 VGM 모형에 의해 예측된 값과 측정된 값으로 비교하였을 때 불포화 수리 전도도가 예측되지 않은 토양(석천통, 지곡통, 풍천통)이 존재하여 불포화 수리 전도도 특성평가에 대한 VGM 모형의 적용성에 문제를 보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논이라는 영농형태가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 토양의 수리적 특성해석을 위한 VGM 모형의 적용성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4일간의 기상변화가 자발성 기흉 발생에 영향을 미친다고 추론할 수 있었다. 향후 본 연구에서 추론된 기상변화와 기흉 발생과의 인과관계를 확인하고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초과수익률이 상승하지만, 이후로는 감소하므로, 반전거래전략을 활용하는 경우 주식투자기간은 24개월이하의 중단기가 적합함을 발견하였다. 이상의 행태적 측면과 투자성과측면의 실증결과를 통하여 한국주식시장에 있어서 시장수익률을 평균적으로 초과할 수 있는 거래전략은 존재하므로 이러한 전략을 개발 및 활용할 수 있으며, 특히, 한국주식시장에 적합한 거래전략은 반전거래전략이고, 이 전략의 유용성은 투자자가 설정한 투자기간보다 더욱 긴 분석기간의 주식가격정보에 의하여 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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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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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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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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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