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동궁(東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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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궁(月池宮) 관련 자료 재검토 - 동궁(東宮)은 태자궁(太子宮)이 아니다 - (Reexamination on Materials related to Wolji Palace - East Palace is not the Crown Prince's Palace)

  • 최영성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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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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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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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계속된 안압지 발굴을 통해 안압지일대가 7세기 이래 동궁(東宮)이었으며, 또 1980년 발굴을 통해 동궁이월지궁(月池宮)이었음이 밝혀졌다. 안압지의 본래 이름이 '월지'라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증명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곳이 동궁으로 불렸다는 이유를 들어 태자궁으로 인식하는 학자가 많다. 동궁이 태자궁의 별칭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곳은 '독립된 전용 공간'으로서의 태자궁일 수 없다. 7세기 이후 신라에서는 월성(月城)의 정궁(正宮) 이외에도 동궁 남궁 북궁 및 양궁(壤宮) 등 별궁(別宮)이 있었다. '동궁'은 '동쪽에 있는 궁궐'이다. 그 위치를 가지고 붙인 이름이지 태자궁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월지궁 관련 여러 문헌 자료를 새롭게 분석하여 동궁이 태자궁일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일터에서 찾은 행복 - 달빛속에 동궁과 월지, 빛과의 동행

  • 박재정
    • 전기기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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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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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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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천년의 고도라 불리는 경주는 관광의 도시답게 여러 유적지,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우리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석굴암, 첨성대 등도 의미있고 소중한 문화재이지만, 이외는 조금 다른 멋이 있는, 땅거미가 지면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펼쳐지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동궁과 월지(안압지)는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축조된 궁원지(宮苑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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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의 적정수용력 연구 - 물리적 심리적 수용력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arrying Capacity of Donggung and Wolji, Gyeongju - Centering around the Physical.Psychological Carrying Capacity -)

  • 반상;서환;강태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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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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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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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최근 역사정원 관광공간으로 이용이 증가하고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의 물리적 수용력과 심리적 수용력을 중심으로 경주 동궁과 월지의 적정수용력을 측정하여 향후 정보 모니터링 조기경보시스템의 구축과 지속가능한 관리방안을 설정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현장관측과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물리적 수용력은 경관 결절점 공간용량과 도로 공간용량, 기타 공간용량을 나눠서 산정하였으며, 심리적 수용력은 관광객의 시각, 청각, 촉각, 행동 느낌과 만족도 측면에서의 접근을 통하여 추정하였다. 실제 이용관광객 수와 적정 수용력을 비교해 보면 주간에는 이용관광객 수가 적합한 반면, 야간에는 적정 수용력의 두 배 이상 초과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야간 방문객은 단체관광객이 주류를 이루어서 짧고 정해진 시간대에 집중되어 유적지의 경관과 식생 환경을 훼손시켰다. 이러한 결과를 중심으로 경주 동궁과 월지의 관리에 대한 정책적 관리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전기 경복궁 동궁(東宮)과 동조(東朝)의 건축공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Space of Donggung and Dongjo at Gyeongbokgu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 이정국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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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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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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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the architectural space of Donggung(東宮), the Prince's Palace, and Dongjo(東朝), the King's Mother and Queen's living spac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Royal palace can be divided into three parts, political space for king, living space for king and his family and government office. So first, we should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each space in the Royal Palace. Up to now we have looked at the architectural space of Donggung(東宮) and Dongjo(東朝) in Gyeongbokgung(景福宮), one of the Royal Palace, the result of this study is as followings. Donggung which was living space for Prince consisted of Jaseondang(資善堂), Seunwhadang(承華堂) and Kyejodang(繼照堂) in the era of King Sejong Kyejodang was demolished and Seunwhadang was destroyed by fire in King Jungjong era and was not rebuilded. This buildings The buildings consisted of Jeondang, Whudang, main gate, hapmun(閤門) and corridor or fence Donggung and Dongjo was separated wall Dong consisted of many buildings for Queen dowager, Queen and many royal concubines The arrangement of Donggung and Dongjo was assumed like as the Fig2.

동궁과 월지 출토 건축 목부재의 현황과 결구 제작기술의 수준 (A study on the wooden joinery technique of building members excavated at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 서효원;손은미;이선아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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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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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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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wood joinery technique in the ancient era. Joinery is one of the core techniques in constructing timber frame architecture in the Korean peninsula. These techniques can be revealed by examining wooden members of ancient buildings. The members were excavated at the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the historic site in Gyeongju. This study collects the data of 284 members excavated at the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and analyzes the details such as length, thickness, width, joint types, joint shapes. With the result of the analysis, this study tries to indicate the level of wood joinery techniques in ancient buildings.

동궁비 원삼에 사용된 금사의 과학적 분석 (A Scientific Analysis of Gold Threads Used in Donggungbi-Wonsam(Ceremonial Robe Worn by a Crown Princess, National Folklore Cultural Heritage No.48))

  • 이장존;안보연;한기옥;이량미;유지현;유지아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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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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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5-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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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동궁비 원삼의 직금단과 자수에 사용된 금사를 대상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재료적 특성을 파악하였다. 동궁비 원삼의 금사 배지는 비목질계 섬유소가 관찰되어 닥나무 섬유의 한지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XRF 분석을 통해 동궁비 원삼의 통수스란에는 순금의 편금사, 색동과 한삼에는 편은사로 제직한 직금단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편은사에서는 황이 높게 검출되는데 이것은 은을 사용하여 금빛을 내기 위한 훈증의 유황 성분의 영향과 보존환경에 의한 황화은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보의 문양은 연금사와 연은사로 표현하였으며, 용보의 테두리는 순금의 연금사로 장식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금사의 금속면과 배지 사이의 접착제와 혼합물에 대해 GC/MS, XRF, Raman 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단백질계 화합물인 아교와 같은 접착제를 사용하고, 혼합물로는 편금사의 경우 활석을 섞고, 편은사에는 석간주를 혼합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궐도(東闕圖) 판장(板墻)의 공간통제 효과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patial Control Effect of Panjang in Donggwoldo)

  • 하유정;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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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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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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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공간구문론(Space syntax)을 이용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판장의 설치에 따른 주요 권역별 공간변화를 비교하여 판장의 공간분할 기능과 역할을 재해석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동궐도>의 공간을 단위 공간으로 분해하기 위한 설정 기준을 마련하였고, 판장의 설치 전·후에 따라 2개의 볼록공간도를 작성해 공간구문변수인 연결도, 통제도, 통합도 값을 산출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 내 가림시설은 전각공간에 대한 변수의 평균값을 비교하였을 때, 동궐의 전체적인 배치에서 통제와 연결은 영향이 크지 않았다. 다만 특정 권역 내 공간의 접근성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가림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내전과 동궁 그리고 후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동과 접근에 제한을 주었다. 둘째, 판장은 내전과 동궁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공간의 활용방식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시설로 판장의 설치에 따른 공간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기능에서도 차이가 확인되었다. 내전의 수정전 권역과 희정당 권역 그리고 동궁의 성정각 권역에 판장을 설치함으로써 개방적이고 통제성이 높았던 공간이 통제성이 낮은 폐쇄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였고 사적인 공간이 조성되었다. 동궁의 완영당 권역은 판장을 여러 방향으로 설치함으로써 공간의 깊이를 증가시켰다. 이는 거쳐서 오는 공간의 수가 증가됨으로써 자유롭고 은신이 가능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셋째, 판장은 기존 선행연구에서 밝혔던 '시선차단·공간분리·동선조절'의 기능 이외에 '접근통제가 용이한 공간'을 조성하였다. 일정한 공간으로 유도함과 동시에 동선이 집중됨에 따라 접근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 되었으며, 판장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집중형 통제공간과 분산형 통제공간을 조성하였다. 본 연구는 그 간 가림시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연구 외에 판장에 대한 기능을 수학적 모델로 분석하여 특정 공간속에서 판장이 어떠한 양상으로 공간을 통제하였는지 수치적으로 확인하였고, 공간의 통제와 연결, 은신과 개방성 등의 해석으로 연구의 방법을 확장한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연구의 방법론이었던 공간구문론을 <동궐도>에 적용하기 위해 궁궐의 건축 및 조경요소의 단위공간 분할 및 연결 유형에 따른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궁궐과 유사한 전통주거단지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분석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공간구문론의 분석을 통해 결과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공간조직이 가지는 구성적 특질을 표현하는 숫자들로 제한된 체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한계가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의 생태적 수용력에 관한 연구 - 탐방로의 이용행태 및 손상도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Ecological Carrying Capacity of Donggung and Wolji, Gyeongju - Centering around the Used Pattern and Damage Degree of Trail Routes -)

  • 이홍;강태호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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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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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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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경주 동궁과 월지의 생태적 수용력 연구를 위해 유적지내에서 관찰되어지는 7가지 이용행태에 따른 이용구간별 녹지 평균손상도를 산정하였다. 이를 위해 탐방객 이용행태의 이용인수 및 이용시간을 조사하고 손상도를 산정하였다. 각 이용행태별 손상도를 통하여 4가지 조사구의 적정수용력, 표준수용력과 한계수용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각 조사구의 이용행태별 이용인수 및 이용시간에 따른 손상도를 산정한 결과, '걷다'의 경우 평균 2.15로 가장 높았고, '눕다'의 경우 0.05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각 조사구의 손상도는 조사구 4가 1.31로 가장 높았고, 조사구 3이 0.97, 조사구 1이 0.91, 조사구 2가 0.70의 순으로 나타났다. 각 조사구의 손상면적을 산정 후에 생태적 수용력을 추정한 결과, 조사구1, 2, 3, 4의 적정수용력은 각각 40인, 249인, 107인, 37인, 한계수용력은 각각 116인, 713인, 306인, 107인, 표준수용력은 각각 75인, 463인, 198인, 69인으로 추정된다. 경주 동궁과 월지의 바람직한 관리를 위한 최대의 생태적 수용력은 한계수용력 이하로 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려 문종대 왕태자(王太子) 책봉(冊封)과 태자(太子) 관련 제도(制度) 정비의 의미 (Th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Installation of the Crown Prince During the Period of King Munjong in the Goryeo Dynasty)

  • 김선미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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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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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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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고려의 제11대 왕인 문종은 제8대 왕인 현종의 아들이자, 제10대 왕인 정종의 이모제(異母弟)이다. 정종은 자신의 아들 4명이 있었지만 아우인 문종에게 선위하였다. 문종이 즉위한 배경은 먼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엿볼 수 있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장자 이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고려 초기에 어린 아들이 있을 경우 장성한 아우에게 선위하는 전례가 있었으며, 정종과 문종의 혈연적 배경이 동일하였다. 또한 당시 고려인들도 전왕(前王)의 아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런 배경 하에서 문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정치적인 세력을 가지고 국정을 파악한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정종의 아들이 장성함에 따라 왕권의 불안 요소가 되거나 향후 왕위계승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문종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선정하여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왕위계승상의 분란을 없애고자 하였다. 왕태자 책봉 이후 문종은 동궁관을 확대 정비하고 여러 태자 관련 의례를 시행하였다. 동궁관제는 1068년에 제도적인 완비를 보았다. 이때 정비된 동궁관은 중앙 관부의 축소판으로 운영되었다. 또한 1054년의 거행된 태자 책봉 의례는 규정된 절차를 준수하며 시행되었으며, 책봉례 이후에 1056년에 왕태자의 장흥절(長興節)을 축하하는 의례가 시행되었고, 1064년에는 태자 혼인 의례가 거행되어 "고려사" 예지에 규정된 태자 의례가 실시되었다. 또한 문종은 왕태자 책봉을 국외에 알렸으며, 고려의 태자는 거란으로부터 3번 책봉을 받아 권위를 높였다. 이러한 여러 조치들은 국왕 다음가는 권위자로서의 태자의 위상을 강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태자는 문종 말년에 거동이 불편한 문종을 대신하여 國事에 참여하여 국왕 다음의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