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궁궐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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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궁궐정원의 경관 구성 비교 연구 - 창덕궁(昌德宮), 이화원( 頤和園), 선동어소(仙洞御所)를 중심으로 - (A Comparative Study on Landscape Composition of Palace Gardens in Korea, China, Japan - Focused on Changdeokgung Palace, Summer Palace and Sento Imperial Palace -)

  • 윤상준;안승홍;윤성융;염성진;박희성;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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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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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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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동아시아 삼국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고정원 문화의 정수이자 역사적 배경과 정치, 문화적 관계성 등을 공간적으로 잘 대변할 수 있는 궁궐정원을 대상으로 형성배경, 입지와 배치, 공간구성, 공간구성요소 그리고 조성계획 및 경관연출기법과 조망적 특징을 비교, 분석하였다. 이를 위하여 유사한 위상을 가진 한국의 창덕궁, 중국의 이화원 그리고 일본의 선동어소를 선정하여 3국의 궁궐정원에 대한 이해와 연구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경관 연출을 중심으로 한중일 궁궐정원의 원형에 대한 비교와 분석을 통해 동질성(유사성) 및 이질성(차별성)을 찾아 한중일 궁궐정원이 가지는 정체성을 규명하고 나아가 한국 궁궐정원이 가지는 가치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동질성과 이질성을 기반으로 도출된 비교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을 훼손하지 않은 정원의 조성으로 자연에 순응한 한국 고유의 양식을 보여준다. 둘째 동아시아적 사상을 반영한 다양한 상징적 정원요소가 표현되고 있다. 우리 궁궐정원의 발달에 있어 중국의 사상과 기술, 기법 등이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공간에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경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유사함은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셋째 창덕궁 후원은 엄격한 왕권의 권위보다 풍류적 취향의 문화 예술적 수용체 역할을 하였다. 창덕궁과 이화원, 그리고 선동어소가 문화수용체의 성격을 지니듯이 한중일 3국이 문화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그 형태와 재현의 방법이 다르며 각각 독자적인 궁정정원의 양식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정원이 각 나라 고유의 문화와 예술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동궐도에 보이는 궁궐정원의 조영수법 (A Study on Design Techniques of Palace Gardens presented in Donggwoldo)

  • 진상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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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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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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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연구의 목적은 "동궐도" 에 담겨있는 모든 정원 요소를 각 원(院)별로 나누어 세밀하게 살펴봄으로써 궁궐정원의 조영특성 및 수법을 파악 하여 전통계승을 통해 현대 정원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있다. 연구 방법으로는 동궐도에 나타나 있는 궁궐정원의 모습을 정원 요소별로 관찰하여 특성을 파악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동궐도에 나타나는 정원 요소로 괴석과 연못, 건물과 마당, 경계와 영역, 수목 등이 있으며. 공간에서 확인되는 각 구성요소의 배치특성을 파악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되었다. 입기의 경우 동궐도내의 원(院)은 명당 내부의 최적지를 선택하여 각각의 대지를 기존의 지형과 건물의 용도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연을 변형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식재는 궁궐을 조성하면서 기존 수목을 그대로 활용하여 원칙적인 식재 방법이나 수종의 선택 기준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칭식재를 한 점이 특징으로, 이러한 대칭식재 방법은 음양 표시의 작정관(作庭觀)으로 보인다. 수종의 선정에 있어서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수종을 선택하여 식재하였다. 지당은 궁궐정원에서 대부분 관념적, 추상적 형태를 상징하는 원형으로 나타나며, 중락(衆樂)의 장소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정자를 만드는 형식은 일정하지 않았고, 형태적으로는 삼각, 사각, 오각, 육각, 팔각 등에서 십자모양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하게 조성되었다. 괴석과 석함은 주로 침전 주위와 동궁처소 그리고 후원에 배치되어 있었다. 화계(花階)는 주로 침전의 후면 및 동궁전, 공주의 처소 등 주로 부녀자의 거처에 나타난다. 취병(翠屛)은 자연과 단절하는 장벽이 아니라 선택적 인입을 하는 체와 같이 자연의 기를 안도하는 의도로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구성방식에 있어서 서구나 중국의 경우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조선시대 궁궐정원은 형식에 있어서는 엄격한 유가적 규범이 적용되었고, 작정 수법은 신선사상을 많이 차용하였다. 그러면서도 소탈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과 중국의 궁궐 내 교량에 관한 경관특성 비교 연구 - 조선시대와 명·청시대를 중심으로 - (A Comparative Study of Landscape Characteristics on Bridges in Palaces of Korea and China - Focusing on the Chosun Dynasty and Ming and Qing Dynasties -)

  • 장푸천;이애란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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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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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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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교량(橋梁, bridge, 다리)은 물 위나 공중에 가설해서 통행하기 편리하게 하는 건축물이다. 다른 건축물에 비해 교량이 요구하는 건축재와 건축구조는 공간을 건널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건축할 때의 생산력, 과학기술 수준과 환경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고대 교량에 대한 학술 연구는 대부분 교량 건조기술 분야의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어 교량의 경관 미학과 역사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궁궐 내에 위치한 교량을 대상으로 분석함으로써 두 나라의 교량 형태와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이해와 기술, 미학적 자료의 축적으로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연구방법은 현장조사와 문헌 분석을 통해 교량을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교량의 재료, 형태, 경관과 장식 문화를 비교함으로써 한중 양국의 궁궐 정원의 교량 건축 스타일에서 물리적 형태미와 경관 및 장식미를 정량적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둘째, 교량의 분류를 통해 양국 교량 양식의 특징과 함께 공통점과 차이점을 추출하고, 그 원인을 물리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한중 양국 교량의 축조기술과 미학에 대한 상호간 연구에 기여할 것이다. 본 연구의 조사 결과를 보면 첫째, 재료 면에서 한국과 중국 궁궐 정원의 교량은 석재를 위주로 하지만 중국 궁궐의 교량은 목재 또한 운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 형태의 면에서 한국과 중국의 궁궐 정원의 교량은 모두 형교를 위주로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형태, 비율, 형교의 양식, 홍교의 공수 등에 있어서는 차이가 크다. 셋째, 연결 방식의 대부분은 중교형을 위주로 한다. 주변 경관과의 융합을 중시한다. 수면의 면적과 위치의 차이 때문에 한국 궁궐 내 교량은 주변 건물과 식생을 융합하고, 중국 궁궐 내 교량은 수경의 조화에 더 치중한다. 넷째, 장식은 한국과 중국의 궁궐 교량이 모두 교량의 예술성과 미관성을 중시한다. 문화적 특성으로 인해서 같은 유형의 장식이 스타일에 차이점이 있다.

사진과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추론한 근대 궁궐의 수목관리 판단 연구 (A Study on the Types of Tree Management in Modern Palace Using Photographs and Expert Interviews)

  • 최진서;김충식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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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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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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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1981년 ICOMOS-IFLA 국제 역사 정원 위원회에서 제정한 플로렌스 헌장에서는 역사정원을 식물이 주를 이루는 건축적 구성으로 이를 영원히 변하지 않도록 유지하고자 하는 예술가와 장인의 욕구사이에 존재하는 끊임없는 균형으로 보았다. 이처럼 정원의 주된 구성요소인 수목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생성과 소명을 반복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궁궐에서도 수목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을 것이다. 다만 과거 궁궐의 수목관리 기법을 고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적 기록 부재와 일제강점기로 인해 명맥이 단절됨에 따라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궁궐의 수목은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견해에 따라 궁궐 수목 관리 기법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수행되지 않았다. 본 연구는 근대에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과거 궁궐의 수목관리 판단 여부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근대기에 촬영된 사진을 활용하여 전문가에게 심층 인터뷰를 통해 수종의 식별과 전정여부를 파악한 내용을 토대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사진을 통해 수목의 수형과 잎 형태 식별이 가능함을 확인하였으며 정지·전정 등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근대기 궁궐의 수목관리 시행 여부를 추정할 수 있었다. 둘째, 4개 분야에서 8명의 전문가들에게 심층 인터뷰를 한 결과 수종 식별, 전정여부 및 목적, 방법 등의 관리여부의 판별이 가능하였으며 집단별 의견의 차이가 크게 발생하지 않고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셋째, 궁궐 수목의 관리 유형은 수형관리, 수목의 위해 요인 제거, 하층식생관리가 주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존덕정, 관람정 등의 사진을 통해 촬영 시점인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수목의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촬영된 사진을 토대로 전문가 인터뷰를 거쳐 일제강점기 이전 수목관리 여부 추정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대 상황에 따라 자체적으로 수행된 것인지 일제에 의해 수행된 것인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규명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과거 궁궐의 수목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수집된 자료를 통해 반박할 수 있는 근거자료를 마련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여 여부를 판단하였다. 또한 일반적인 정지·전정 이론을 토대로 전문가 의견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를 실시하여 연구결과에 신뢰성을 확보하였다.

일부 복원 사례를 통해 본 전통정원 보존기법 - 한·중·일 궁궐정원 유적을 중심으로 - (The Traditional Garden Conservation Techniques through Partial Restoration Case - Focusing on the Palace Garden Sites of Korea, China and Japan -)

  • 김동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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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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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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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전통정원 유적의 복원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중·일 궁궐정원유적을 대상으로 기단복원, 개별 정원요소 복원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이를 통해 각 보존기법별 고려되어야 할 특징들을 도출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단복원이 이루어진 정원유적들을 살펴본 결과, 북해공원의 만불루 경구는 관련 문헌과 비교분석을 바탕으로 기단부와 주춧돌만을 복원하였다. 부여 관북리 유적은 발굴이 완료된 지역 중 연못과 수로, 대형건물 터에 남아있는 기단과 흙다짐 기초만을 복원하였다. 평성궁의 제2대극전은 건물지와 기단을 복원하고 주변에 제2태극전의 영역을 알 수 있도록 장대나 말뚝을 설치하였다. 둘째, 개별요소의 복원이 이루어진 경주 동궁과 월지는 초기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연못 정원유구와 사료들을 토대로 전통정원 유적을 선제적으로 복원하였다. 원명원의 황화진은 서양동판화와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나 복원 이후 추가로 발견된 자료를 통해 현재의 모습과 다르게 복원한 점을 확인하였다. 평성궁 동원 정원은 기존 유구들을 복토하고 그 위에 건물들을 복원하였으며, 경석과 수로 등 대표적 정원 요소들을 보존처리하여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셋째, 기단복원은 전통정원 유적의 현재 상태 또는 발굴조사를 통해 기단부가 확인된 경우로 입면 구성방식이나 규모 등이 확인된 기단부를 우선 복원하여 영역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복원은 전통정원 유적 내 일부 건물이나 시설물 등 개별 요소들에 대해 문헌 고증을 통한 복원이 가능한 대상들을 한정하여 복원하는 방법으로 면밀한 문헌 고증이 요구된다.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과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Utilization and Symbolizes of the Joseon Dynasty Flowering Plant)

  • 김승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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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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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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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훼식물을 재료로 궁궐정원과 민가정원에 나타나는 지피식물의 이용특성과 상징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재 지역 및 현대 조경공간에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시대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출현한 화훼식물의 출현빈도는 매화, 연꽃, 모란, 국화, 파초, 영산홍, 장미, 진달래, 작약 등이 10회 이상으로 높은 빈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다음으로 비교적 출현 빈도가 높은 식물은 치자, 석류(8회), 패랭이꽃, 포도(7회), 난초, 정향, 봉선화, 원추리, 맨드라미, 무궁화, 철쭉류, 창포, 접시꽃, 황매화, 유자(5회), 부용, 동자꽃, 금전화, 베고니아, 해바라기, 양귀비, 수선화, 서향화, 옥잠화 등(4회)이였으며, 그 외에는 29분류군 총 81종의 화훼식물이 조사되었다. 둘째, 궁궐과 민가에서 사용되었던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은 분에 심어 가까이 두고 완상하거나 화단, 화계, 화오, 연못 및 담장주변 등에 주로 식재하였음을 고문헌의 기록과 정원도 및 민화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산홍의 식물재료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연구되어진 민가정원의 관련된 문헌(6점)이나 옛 그림(766점)에서 출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대중에게 유통이 극히 일부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시대 화훼식물 상징성은 유교의 절개, 군자, 청빈, 충효사상을 나타낸 경우,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을 나타내는 경우, 민간신앙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식물을 덕성함양의 대상이나 기복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 이용했던 화훼식물은 선비가 닮고 싶은 이상과 지향하는 정신세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선조들의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조선시대 이용하였던 화훼식물은 수목종류에 따른 보편적인 판단기준이 아닌 다양하고 주관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때에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조경공간에서의 활용범위 또한 넓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시대 궁궐정원의 원형경관 복원을 위한 제안 (A Proposition on Landscape Restoration of Joseon Dynasty's Palace Gardens)

  • 안계복;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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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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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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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궁궐의 원형 복원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판단의 준거들을 추출하고, 이를 경복궁과 창덕궁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궁궐의 원형 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안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원형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는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의 6 개념을 추출하였다. 현재 경복궁은 1888년을 시대성 기준으로 복원하고 있지만, 1395년의 시원성을 갖는 원형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경복궁의 복원은 건물 위주로 복원하고 있지만, 추후 연구에서는 근대 촬영된 경복궁 사진을 밑바탕으로 경복궁의 원형경관이 복원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덕궁 존덕정 일원은 약 240년 동안 통시적 불변성을 지닌 원형이 1884년경에 변형된 것이다. 1884년이라는 시대성보다는 통시적 불변성을 더 중요하므로 동궐도의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창덕궁 연경당 일원 원형에 대한 문제는 효명세자의 시원적 원형과 고종 때의 시대적 원형이 동일한 지역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므로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옥류천 지역은 1636년(인조 14년)에 시작하여 숙종, 정조를 거치면서 적어도 1884년(고종 21년)까지 약 250년간 불변성(不變性)과 통시성이 돋보이는 원형이다. 1884년 이후 옥류천 지역에 이루어진 변형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옥류천 지역의 원형 회복을 위해서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변형된 경관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 밖에 옥류천을 건너는 다리, 샘, 담장, 초가들도 동궐도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해야만 한다.

익산 왕궁리 백제궁원에서 출토된 괴석에 관한 연구 (Research on Odd-Shaped Stones at Baekje's Palace Backyard in Wanggung-ri, Iksan)

  • 노재현;신상섭;박율진;김화옥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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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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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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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괴석의 쓰임새, 형태, 규모 및 재질 그리고 산출지 등을 분석 고찰하여 백제 궁궐 후원의 성격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주요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익산 왕궁리 궁궐 후원에 활용된 괴석은 후원내 입수구 폭포석조를 위한 첩석(疊石)과 돌 자체의 아름다움과 기괴함을 완상하기 위한 치석(置石)의 2가지 쓰임새로 분류된다. 이 때 폭포석조에 활용된 괴석은 여러 형태와 재질의 돌을 혼합 배치시켜 축경형의 산수경관을 입체적으로 연출하고자 한 것인 반면, 치석으로 활용된 괴석은 돌 자체의 아름다움과 형태미를 감상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치석으로 활용된 총 26개 괴석의 크기는 대석 4개, 중석 4개, 소석 18개로 분류되었으며, 폭포석조에 이용된 총 24개의 괴석은 모두 소석으로 분류되었다. 이 두 부류의 괴석은 대부분 한 시야에 들어오고 친근감 있는 인간척도에 부합되는 규모였다. 치석으로 활용된 괴석의 재질은 석회암이 대부분이며, 그밖에 대리암, 석영, 녹색암, 점판암, 천매암 등의 변성암 계통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괴석의 특징으로는 무늬가 미려할 뿐 아니라 자연의 모습을 닮은 산형석과 거북, 자라, 돼지, 곰, 코끼리 등 동물 모양에 가까운 형상석이 대부분이었으며, 치석으로 이용된 괴석 중 일부는 특정한 형상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가공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괴석의 이용실태와 성격 등을 보아 왕궁리 궁궐 후원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는 '괴석 정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 왕궁리 출토 괴석의 출산지에 대한 문헌조사 및 관계자 인터뷰와 탐문조사 그리고 추정 채석지에 대한 현장 관찰 결과, 주산지는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과 왕궁면 도순리 시대산 등으로 추정되었다.

조선 후기 회화작품에 나타난 취병(翠屛)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huibyong(翠屛: a Sort of Trellis) in Paintings of Late Joseon Dynasty)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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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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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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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회화자료의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취병의 특성과 제요소를 고찰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회화자료 25종에 대한 분석 결과, 취병은 주로 사생활 보호를 위한 차폐시설과 부지의 공간을 분할하는 구획시설로 기능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정원에 품격과 아취를 부여하는 소품으로 설치되었다. 특히 취병 주변으로 학, 사슴등의 동물상 및 소나무, 파초, 대나무, 오동나무 등의 식물상과 괴석, 연못, 정자 등의 다양한 정원요소들이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이상적인 문인정원에 구비되어야 하는 일련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둘째, 취병은 중국 고사(古事) 속 문인문화를 표상하는 관념적인 물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이미지는 고스란히 정원문화 속에 투영되었는데, '인물고사도 속 원림'을 모방 재현하는데 있어 취병은 중요한 경물로 사용되어 왔다. 셋째, 형태 기능 측면에서, 조선시대 회화 속에 나타난 취병들은 기본적으로 차폐 및 구획의 기능이 주요하였다. 사람 키를 웃도는 담장이나, 심지어 중국 대문 앞뒤에 설치되는 영벽의 높이까지 솟아 있기도 하여 공간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취병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취병은 특정한 기능이나 입지상황 때문에 설치된 것보다는 당시 국내에 유행한 명대 문인문화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전해진 서원아집도 등에 나타난 취병의 도상은 한양을 중심으로 부유층의 저택에서 재현되었는데, 취병을 통해 부귀와 문인의 기상을 표현하려 했던 초기양식이 궁궐 및 상류층의 주택에서나 조성될 수 있는 고급 정원요소로 전화되었다. 또한 19세기 중엽 이후 취병의 활용은 평민의 주거양식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저변화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취병이 토착화된 전개로 간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