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와 직녀의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는 두 별은 여름철을 대표하는 별들로서 중국 문화권에서는 지난 수 천 년 동안 매우 인기가 높은 별이었다. 두 별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노래를 모아 놓은 시경(詩經)에 이미 등장하고 있고, 서기 408년에 조성된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 속에 있는 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 별들에 대한 국가적인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 시대에는 칠월칠석에 국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잔치를 베풀고 칠석시(七夕詩)를 지어서 책으로 편찬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견우성은 주로 농사와 관계된 별점을 가지고 있었고, 시각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28宿(수)의 하나였으므로 천문학자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관측한 별이다. 그러한 관측의 결과는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다수가 남아 있다. 그런데 동양 천문학에서 이미 널리 다루어졌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문학적 견우성과 천문학적 견우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일반 시민들에게 견우성은 독수리자리의 알테어(Altair)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든 사서와 고대 천문서 및 천문도가 지칭하는 견우성은 염소자리의 다비(Dabih)라는 별이다. 견우성이 28宿(수)의 하나라는 사실은 그 별(별자리)이 황도와 백도 근처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알테어는 적위가 높아서 도저히 28宿(수)에 속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알테어는 은하수 속에 들어가 있으므로,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일반적인 설화와도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다수의 서적과 매체, 그리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행사와 천문관에서 상영되는 프로그램들에는 모두 알테어를 견우성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연구에서는 이러한 불일치가 천문학적인 견우성과 인문학적인 견우성의 불일치로 보고, 이 문제를 실증적으로 접근해 본다. 즉,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 실려 있는 견우성 엄폐 관측 기록을 조사하여 한국사에서 전문 천문학자들은 어느 별을 견우성이라고 보아왔는지 알아보고, 또한 일반인들이 지은 시문에는 어떤 별을 견우성으로 여겼는지 고찰한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선인들의 생각을 짚어보고,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살핀 다음,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본다.
능산리고분군 동하총은 바닥을 포함하여 15면으로 이루어졌으며, 가장 많이 사용한 암석은 복운모화강암으로 7면(46.6%)에 활용하였다. 또한 안구상편마암 3면(20.0%), 화강섬록암, 편마상화강암 및 우백질화강암을 각각 1면(6.7%)으로, 모두 판석으로 구성하였다. 현실과 전실 바닥의 각섬석편암(13.3%)은 모전석으로 사용하였다. 이 암석들은 모두 부여 일대에서 산출되며 주로 금강변에 산지가 분포한다. 당유인원기공비는 뚜렷한 편리와 안구상조직을 갖는 전형적인 안구상편마암이다. 이 암석은 동하총, 산직리 고인돌 및 세탑리 오층석탑의 일부 석재에 활용한 안구상편마암과 같은 종류이다. 이 안구상편마암은 부여 증산리에서 공주 덕지리로 연장되는 대규모 암체로 분포하며, 현재 정원석과 조경석 및 골재용 채석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일대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안구상편마암을 활용하기 위한 공급지가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는 암질이 약해 가공에 수월성은 있으나, 어두운 색을 띠어 벽화의 바탕과 각자에는 단점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인들이 거리와 지형 및 효율성과 수월성을 두고 어떤 운송체계를 선택했을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4세기 중반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장무이묘에서는 많은 수의 명문전들이 발견되었다. 2023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여러 차례 실견회를 가진 결과, 명문전은 총 10개의 유형으로 파악되었다. 본고에서는 장무이묘의 명문전에 기록된 내용과 그 작성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전체 문구들을 자세히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명문전들의 각 문구가 갖는 상관관계와 전체 문장의 기재 순서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명문전들은 내용상 무덤의 조영에 대한 정보를 외부 관람자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조주부(趙主簿)로 칭해진 화자가 장무이묘의 조영에 관여하였음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서진·동진대에 묘주의 가족이 아닌, 정치·사회적 인연으로 고분 조영에 참여한 인물들이 제작한 명문전들과도 비교된다. 4세기 중반 당시 낙랑·대방군 고지 내에는 고구려의 허용 속에서 중국인 사회의 전통에 따른 장의(葬儀) 문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분 내에 표현된 벽화·묵서, 명문전 등 외부에 공개된 다양한 전시물들은 묘주 일가가 이주민 집단과의 정서·지향을 공유하는 가운데,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목적과 관련 있다. 장무이묘에서 발견된 명문전들의 내용 역시 바로 그러한 맥락 속에서 기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행렬도는 묘 주인의 등급에 따라 인원수와 각종 대열 및 인원 배치가 규정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가두행렬에 동반되는 연희들은 대부분 산악 백희의 종목들이었다. 특히 안악 3호분의 악대는 고취와 횡취를 갖추고 있어서, 이 행렬의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호위병, 의장대, 악대, 연희자를 갖춘 고구려의 행렬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어가행렬과 일치하므로 그 영향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가두행렬은 왕의 어가행렬이다. 연등회에서 왕이 봉은사나 흥왕사를 다녀올 때, 왕이 지나는 차도의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설치했으며, 그 가두행렬의 규모가 매우 컸고 다채로운 음악과 공연을 연행했다. 나례는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으로 고려시대의 궁중의례에 수용되었다. 고려의 나례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가두행렬과 연희를 행했다. 그리고 정초에 풍물패가 행하는 지신밟기도 나례의 유풍이다. 조선전기의 궁중나례에는 방상시 12지신 이외에 판관 조왕신 소매 등 새로운 배역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례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환궁행사에서 왕이 탄 가마는 전후의 고취악대가 행진음악을 연주하고, 산붕이 인도하는 가운데 대궐을 향해 가두행렬을 진행했는데, 이때 각종 연희도 공연되었다. 이 환궁행사는 고려 의종 때의 환궁행사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의 삼일유가와 문희연은 양반층의 축제였다. 급제자는 악사와 연희자들을 대동하고 서울 시가를 3일간이나 돌아다니며 가두행렬을 벌이면서, 자기 가문의 경사를 축하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했다. 조선시대의 동제와 읍치제의에서는 사당의 신상이나 신대를 앞세우고 가두행렬을 진행했다. 중국의 마을제사인 영신새회가 후대에는 나례의 연문축역과 융합되었듯이, 한국의 마을제사도 지신밟기와 결합되어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신대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가두행렬이 형성되었다. 수영야류의 가두행렬은 가면극 공연의 홍보 효과가 있었고,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축제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북청군 토성리 관원놀이의 중심은 관원의 행차를 모방한 가두행렬이었다. 토성 관원놀이는 인명의 안과와 마을의 오곡 풍성을 기원하는 민속신앙의 기능, 가두행렬과 여러 연희들을 통해 흥과 신명으로 즐기는 오락적 기능, 주민들의 단결과 화합을 조성하는 사회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두행렬은 자생적 가두행렬과 외래 기원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행렬도의 고취와 횡취, 고려시대에 상원이라는 연등회의 시기와 왕이 참석한 가운데 행해지는 교방가무희 및 백희 공연, 동제의 지신밟기 등을 통해서 국제적 교류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상원연등회는 중국에서 유입되었지만, 왕이 선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봉은사에 다녀올 때의 가두행렬과 그 노변에 설치되는 등산과 화수 및 수많은 등은 고려 연등회의 특징이다. 이상의 모든 행사에서 가두행렬은 축제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고, 행렬의 중간이나 행렬이 끝난 후 펼쳐지는 전통연희의 공연에서 참가자들이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가두행렬의 참가자들은 각 행사를 통해 문화적인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자기들의 역량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In this thesis, I examined the mental, philosophical aspects and the aesthetic sense of our ancestors through the study of the patterns pictured in the mural paintings of Koguryo dynasty's old tomb. To view the mode of construction in Koguryo dynasty from present angle, the detailed analysis of the patterns was done. As a result, I could fully understand the formative consciousness of our nation. 1. I defined the process of transition of the mural paintings by putting some 70 mural aintings into the form of a diagram. 2. The cultural aspects of the mural paintings in Koguryo dynasty were characterized by the fusion of our primitive religion and Buddhism, Confucianism and Taoism which were introduced from China. From this fact, I could inferred that Koguryo people were giving off the strong desire for the faith by means of the mural paintings. Further more I found that configuration of the patterns such as religious elements. 3. The types of the patterns were classified into four types, this is, geometric type, natural type, cultural type and abstract type, Among these types, geometric type and natural type were nonsymbolic in nature but became cultured and abstracted in course of time. cultural pattern and abstract pattern got the symbolic meaning in the long run. Of all the constitution of the patterns represented in the mural paintings such as repeat constitution, left and right symmetric constitution, top and bottom symmetric constitution and rotary symmetric constitution, the left and right symmetric constitution was mainly used and some monotony of left and right symmetric constitution. The analysis of motif which was got from the mode of the patterns showed that the mixing of symbolic and nonsymbolic patterns made it possible to regard the separate symbol as compound in nonsymbolic patterns and the combination between nonsymbolic patterns ensured the understanding of other patterns in certain cases. Our ancestors made great efforts to transmit certain meaning symbolically. Also to heighten the symbolism, they drew the meangless patterns firstly and then appended meaning to those patterns secondly. Furthermore, they offered the background to the patterns comblined with symbolism, so that meaning transmission was clarified at last. As mentioned above, the patterns shown in the mural paintings of Koguryo dynasty's old tomb were characterized by natural beauty. And natural beauty was found out clearly in the form and constitution of the patterns. Therefore I concluded that our nation's religious, philosophical tradition was acted on the patterns strongly.
When restoring a tomb of Songeun, Park Ik that damaged by typhoon in Kobubri, Chungdomyon, Mill Yang, Kyoung Nam in October 2000, a flower designed stone and fresco was discovered. Soneun Park Ik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Kongmin dynasty and was consecutively occupied Sajaedogam(司宰少監; regarded as one of second highest official rank). The fresco realistically depicts custom of ordinary people in end of Koryo, beginning of Chosun dynasty that it is considered as an important research material in study of ostumes. Therefore, this research intend to contribute to study of costumes in general public of Koryo that has insufficient study materials through study and analyze of costumes in the fresco with literature research. The number of figures in the fresco is presumed as 26-27 in all but clearly observed figures is only five women and four men and partly damaged figures are two men and two women. Women are worn relatively long yoo that can cover hip as an upper garment and Sang(裳) as trousers. The upper garments are all adjusted to right and has Jikryoung gik (straight collars) but there are strip attached collars or double collars among the Jikryoung gik. The length of Sang reaches to ankle and a waistband is trailed to below the knees. Most of hair are combed in the two sides and made a ring, moreover worn ceremonial coronet, which imply the ceremonial parade. Distinguished from the frescos of Koguryo, there are no women wearing Po(袍) also Yoo with Dae(帶) and without were coexisted. The mens costume is mainly appeared in two types. One(元) is Danryoungpo, Po with round collar and wearing a lozenge shaped crest with a brim, the other is Jikryoung Po, Po with straight collar, and wearing Ballib(拔笠), the latter is a costume of two man presumed as envoys. In the case of Danryoungpo, its length reached to ankle that shows decorum and in Jikryoungpo its length is below the knees that seem to offer practicality for envoys to guide a long journey. Both man and women are in decent cloth with a crest, which simple costume for ordinary people as a Chaksoopo that has comfortable length for movement and narrow sleeves. Songeun Park Ik actively worked under regency of One dynasty that influence of Mongol is seen in mans crest. There are some changes but including womens costume most of cloth are followed Korean traditional costume style.
The mural portraits of the ancient Dukheungri tombs are very important for the study of our traditional costume because the tomb contains a stone. with the in-scription of the date of its erection, 408 A.D. and the name, and official status of the buried. The costumes shown in the mural paintings will be the basis on which historical research can be made concerning costumes before and after 400 A. D. The costume in the mural paintings is classified into five different categories; You (jacket), Po (overcoat), Go (trousers), Sang (skirt), and Gwan (hat). Comparing these categories with those of other mural paintings lead us to the following conclusions. 1. The length of the You (jacket) reaches below the buttocks and the sleeves are narrow. The edges of the sleeves are decorated with stripes. The You (jacket) over-laps on the right, center, and left sides, and there are many Jikryong (V-collar) and Danryong (rounded collar) styles, but it has a similar tendency to others of the Pyongyang area which exhibit many foreign influences. In a departure from tradition. the belts on the men's You (jackets) have only 3 knots in the front, with the back having more knots than the front. The belts of the women's You (jacket) seem to have had a band or button for fastening. We must re-evaluate the assumption that the You (jacket) and Go (trousers) of the northern peoples had the common characters of a belted You (jacket) and Po (over-coat) and that the Gorum originated from the Goryo or Unified Silla dynasty. The outside of the sleeves are longer and more to the side than the inner garment (underwear) so that the sleeves of the inner garment frequently overlapped the outer dress. The above mentioned facts have lead to the discovery of the "Hansam," "Tosi" and "Geodoolgi." 2. The Po (overcoat) was used only by the upperclasses and differs from those found in other mural tombs. The Po (overcoat) of the noble on the tomb mural is centered with an overlapping Jikryong (V-collar) while the other Po (overcoats) of the upperclasses are characterized by an overlap on the left, a Danryong (rounded collar) with two types of sleeves (wide and narrow). Foreign influences and traditional influences coexist in Po (overcoat). Belts have frontal knots without exceptions. The facts that the belts on the You (jackets) are on the front and the belts on the Po (overcoats) are on the back must be reexamined. 3. Go (trousers) is usually narrow, being wider in the rear and narrower below the knees. They were used by hunters on the back of horses with similar Go (trousers) from the Noinwoowha tombs being typical of the northern peoples. 4. Sang (skirts) are pleated as commonly seen in the Goguryo murals. The size of the pleat is varied, each pleat being characteristically wider and having different colors. Same types of pleat are discovered in Central Asia and China. It is uncertain whether the pleat of Goguryo was originated in Central Asia and China or only interrelated with those of the areas. 5. There are three kinds of Gwan (hats); Nagwan, Chuck, and Heukgun. Nag-wan was worn by the dead lords and their close relations. Chuck has three cone shaped horns. Heukgun was worn by military bandmen and horsemen. There are two kinds of hair styles. The up-style was used by the upperclass people closely related to lords, and other people used the Pungimoung hair style. The hair styles of the men and women are characterized by the Pungimoung style. which is a Chinese influence, but still retain their originality. The costume has a similar tendency from those from Yaksuri mural tombs, Anak No. 2 and Anak No. 3. We need to reexamine the costumes from $4{\sim}5$ century murals according to the Dukheungri murals. The costumes of Goguryo share many common factors with those of Western Asia, Central Asia and Ancient China (Han). It seems due to the cultural exchanges among the Northern peoples, the Western and Central Asians, and the Ancient Chinese. It may have resulted from the structural identity or morphological identity of the peoples, or their common social and natural environments and life styles. It will be very valuable to study the costumes of Japan, China, and Korea to find out the common factors. It is only regretful that the study is not based on direct observations but reported information made by 77 persons, because Dukheungri is an off-limits area to us.
본고에서는 정혜(貞惠) 정효(貞孝)공주의 묘지(墓誌)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발해 묘지 양식의 형성 배경과 특징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발해의 묘지 양식은 다음과 같은 고고학적인 특징과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발해의 묘지는 규형(圭形)의 비갈(碑碣)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규형으로 된 비(碑)는 동한(東漢) 시대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위진(魏晉) 시대에 이르러 무덤 앞에 묘비 세우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함에 따라 무덤 안에 규모가 작은 비갈 형태의 묘지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출토된 발해의 묘지 2점은 동시대의 당나라나 통일 신라의 그것과는 달리 규형의 비갈 양식을 띠고 있다. 이는 위진 남북조 시기의 비갈 양식이 고구려에 영향을 끼쳤고 다시 고구려의 비갈 양식이 고분벽화와 함께 발해의 묘지 제작 방식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인근 왕조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스스로의 독특한 묘지 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발해의 묘지 형태는 전형적인 규형(5각형)에서 뾰족한 윗부분을 다시 반으로 나누고 가로로 윗부분을 잘라 내어 사다리꼴의 변형된 규형(6각형)으로 변화 되었는데, 이는 이전과 동시대의 주변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고유한 양식이다. 셋째, 정혜공주묘지 정면의 테두리선과 문양도 새롭게 등장하는 양식으로, 발해의 묘지에서는 미학적인 기준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듯하다. 정혜공주의 묘지는 우선 비 몸돌의 정면에 실선을 새겨 넣어 장방형의 몸체와 사다리꼴의 이수(?首) 부분으로 구분하고, 다시 사면의 가장자리에서 두 선을 긋고 그 사이에 식물의 덩굴문양을 새겼으며, 윗부분의 사다리꼴 안에는 꽃문양을 새겨 넣음으로써 한층 화려한 모습을 보인다. 넷째, 발해의 묘지 양식은 인근 지역에 성립된 후대 왕조의 묘지 양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발해의 영향을 받은 고려는 물론 요, 송, 금, 원 등의 묘지에서도 발해묘지 양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첨차초각은 부재의 장식을 위한 그림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문양의 그림은 봉정사 극락전에서 보이는 덩굴문양 단청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봉정사 극락전의 첨차에서는 단청뿐만 아니라 하단에 연화두식을 새기면서 비로소 첨차초각이 시작되었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초기적인 덩굴초각을 가진 첨차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부재 표면에 직접 초각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후 덩굴초각은 오랫동안 전통 목조건축에서 중요한 첨차의 장식 기법이 되었다. 정자각은 임란 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건축물로서 대부분 덩굴초각을 새긴 첨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첨차초각은 처음에는 초각줄기가 주두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모양(상향형)으로 시작되다가 종래에는 재주두를 기점으로 그 줄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하향형)으로 변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과정과 그 원인을 살펴보았는데, 상향형이 하향형으로 변화는 과정 중에는 방향성과 연관이 없는 새로운 초각의 연결 방식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기간은 경종의릉과 인조장릉의 정자각이 지어지던 시기로 화반초각에서도 연꽃이 사라지기 직전의 과도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첨차초각의 방향성이 변한 원인으로는 이익공의 내부에 두 단에 걸쳐 새겨지는 덩굴초각이 주두를 기점으로 상하 양방향으로의 분리가 일어났는데 이는 초익공 내부에 하향형 초각을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변화된 초익공의 덩굴초각은 나아가 첨차초각의 방향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게 되었다. 이 글은 2018년 투고한 「능원 정자각의 화반초각에 대하여」의 후속된 글로서 정자각에 있는 여러 부재 중 하나인 첨차라는 부재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나머지 초각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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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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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당 사이트 및 협력기관이 정한 유료서비스(원문복사 등)는 별도로 정해진 바에 따르며, 변경사항은 시행 전에
당 사이트 홈페이지를 통하여 회원에게 공지합니다.
② 유료서비스를 이용하려는 회원은 정해진 요금체계에 따라 요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제 5 장 계약 해지 및 이용 제한
제 15 조 (계약 해지)
회원이 이용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는 때에는 [가입해지] 메뉴를 이용해 직접 해지해야 합니다.
제 16 조 (서비스 이용제한)
① 당 사이트는 회원이 서비스 이용내용에 있어서 본 약관 제 11조 내용을 위반하거나,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 서비스 이용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 2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없는 경우
- 기타 정상적인 서비스 운영에 방해가 될 경우
② 상기 이용제한 규정에 따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에게 서비스 이용에 대하여 별도 공지 없이 서비스 이용의
일시정지, 이용계약 해지 할 수 있습니다.
제 17 조 (전자우편주소 수집 금지)
회원은 전자우편주소 추출기 등을 이용하여 전자우편주소를 수집 또는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제 6 장 손해배상 및 기타사항
제 18 조 (손해배상)
당 사이트는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회원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당 사이트가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발생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하지 아니합니다.
제 19 조 (관할 법원)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한 분쟁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민사 소송법상의 관할 법원에 제기합니다.
[부 칙]
1. (시행일) 이 약관은 2016년 9월 5일부터 적용되며, 종전 약관은 본 약관으로 대체되며, 개정된 약관의 적용일 이전 가입자도 개정된 약관의 적용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