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노영한 회장(전 한국축산환경시설기계협회장, 전 본지 편집장)

  • Published : 2017.04.01

Abstract

이 코너는 그 동안 양계산업을 위해 헌신해 온 양계인(관련인)들을 만나 최근의 근황을 들어보고 과거의 추억(업적)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만들고자 마련하였다. 이번호는 전 본회 전무(본지 편집장), 양돈협회 전무, 한국축산시설환경협회 회장 등 축산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노영한(79세) 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Keywords

계란값, 시내버스값, 연탄값이 같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1.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다.

“축산업계를 떠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나 최근의 축산 동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AI와 구제역 소식 등을 뉴스를 통해 접할 때마다 축산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영등포 자택(아파트)을 방문해 만난 노영한 회장은 양계협회의 재정상황은 어떤지, 검정소는 잘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일 정도로 양계산업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보여주었다.

노영한 회장은 2007년 축산기자재 협회장을 뒤로하고 44년 동안 연을 맺었던 축산업을 떠나 현재는 영등포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둔 노 회장은 모두들 성실하게 잘 살고 있어 걱정이 없고, 평소에는 운동, 배움, 신앙생활 등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보람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국가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에서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으며,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소 하루 1시간 이상 인근 체육시설에서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기공 운동을 즐기고 있다. 노 회장은 충현교회의 절실한 신자로 70세까지 맡고 있던 장로직을 은퇴하고 다양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2. 축산인 권익보호에 앞장

노영한 회장은 양계업과 인연을 맺지 않았으면 교편을 잡고 학생들을 가르쳤을지 모른다고 회고하였다. 충북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 종축장을 거쳐 경기도 종축장에 근무할 당시 고향에서 교직을 맡아달라는 권유가 있어 준비를 하고 있을 당시 한국가금협회(양계협회 전신)에서 정부의 위탁을 받아 1966년 검정사업을 경기도 종축장에서 실시할 때 업무를 담당한 인연으로 교직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듬해 공릉동에 닭 경제능력 검정소를 시작하면서 가금협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축산 관련 일을 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 회장은 가금협회에 근무하게 되면서 4개월간 월급이 나오지 않아 여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일하면서 얻는 보람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노 회장은 양계산업이 축산업 중 국내에 가장 빨리 뿌리를 내리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다. 가금협회 사무국장과 전무를 하면서 국제적인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현장에 접목시키는데 정부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발전시켰다.

“저는 양계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에 사무국 업무를 맡아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었던 행운아입니다.”라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청와대, 국회, 정부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인맥을 갖고 있었고 정확한 판단과 외부로부터 오는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여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 주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0년 당시 미국은 남아돌아가는 잉여농산물을 처리하는데 부심을 하고 있었고 한국 등원 조국에 옥수수 등 곡물을 지원하였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이를 차관으로 들여와 소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노 회장은 당시 청와대 및 정부에 축산을 부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했고, 이를 위해 축산을 하는데 세금을 면세(재산세, 취득세 등)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양계를 하기 쉽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당시 계란값, 시내버스값, 연탄값이 같을 정도였으니 닭 숫자만 늘리면 돈을 벌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양기술과 질병예방이 가장 큰 현 안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봉국 가금협회 회장(현 서울대 명예교수)과 함께 월례 강습회를 다달이 실시했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회원들이 그 내용을 알려달라는 요구로 인해 이를 정리해서 보내주기도 했고, 1969년 월간양계를 창간하면서 다양한 정보가 생산자들에게 전달되면서 양계산업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 회장이 월간양계 편집국장으로 활동할 1978년부터는 정보도 중요하지만 시각적인 면도 중시를 했기 때문에 볼륨도 늘리고 질적인 향상을 꾀했다. 이때부터 양계 안테나를 만들어 각 분야별로 분석 내용을 실어 사양 가는 물론 사료, 약품 회사의 실무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 양계협회를 그만두자 양돈협회에서 영입을 제안하였다. 당시 양돈업계는 물론 축산업계의 현안은 대기업 축산업 진출을 막고, 배합사료 영세율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양계산업 업무를 계속해왔던 노 회장으로써는 양돈에서 일하는 것이 맞지 않았으나 두 가지 문제는 축산 전체적인 현안이기 때문에 도와줄 것을 허락하고 양돈협회 전무이사를 수락하였다.

노 회장의 인맥과 논리를 통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 성공하면서 많은 축산업자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다. 2000년부터는 초대 기자재 협회장인 양창옥 사장(다나 기계)의 권유로 한국축산환경시설기계협회에 발을 들여 협회장까지 지내며 7년간 해외 수출 및 국내 기반 구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바 있다.

3. 변화에 대처하는 지혜 필요

노 회장은 과거에 비해 현재의 국내외 상황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미국도 트럼프 대통령이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하면서 우리나라에 소고기 관세철폐 등 수입개방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이며, 닭고기와 계란 역시 여차하면 쉽게 수입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과거 레이거노믹스 정책은 그동안 보호무역으로 일관하던 미국 정책을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주도의 경제로 전환시킨 바 있고 현재의 중국이 이러한 물결을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기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노 회장은 강대국들의 전략과 흐름을 잘 파악하는 것이 이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이라 조언한다. 처음 발을 들였던 검정소 사업과 관련해서는 1960년대만 해도 검정성적이 품종을 선택하는 절대적인 지표였기 때문에 출품업체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어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요즘엔 인문학에 관심이 있어 평생교육원에서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내용들을 배우면서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재직기간 동안 축산업을 위해 뛰어온 발자취가 축산업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후배들이 축산업을 지속 가능하게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이처럼 노 회장의 마음은 언제나 축산인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