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ed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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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체(東坡体)·파자(破字)와의 비교를 통해 본 일본근세 한자문자유희 - 난지(難字)·이루이 이묘(異類異名)를 중심으로 - (A Study on Chinese Characters Play of Edo Period in Japan by Comparison with the Pattern of Tungp'o(東坡体)'s Characters Play and Paza(破字), the Method to Make an Analysis of Chinese Characters; Focused Nanji and Iruiimyo)

  • 금영진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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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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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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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동파체 및 파자와의 비교를 통해 본 일본근세의 문자유희방식, 특히 난지 및 이루이 이묘의 한자변형방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난지 및 이루이 이묘에 보이는 한자변형방식 중에서 글자의 장단이나 대소를 이용한 방식은 동파체의 그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글자의 농담이나 글자의 속을 하얗게 비우는 블록체(가고지)가 동파체에서는 흔히 보이는 반면, 난지 및 이루이 이묘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은 양국 문자유희의 상이점이라 하겠다. 두 번째로, 글자를 180도 뒤집거나, 90도 옆으로 뉘는 방식이 보인다는 점에서는 동파체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난지 및 이루이 이묘에서는 45도 기울기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글자를 뉘거나 기울이는 방향이 동파체에서는 작자마다 제각각인 반면, 난지 및 이루이 이묘에서는 대개 누인 방향이 오른쪽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동파체와 난지 및 이루이 이묘의 모든 용례에서 문자의 방향성을 의식한 작자의 고려가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동쪽과 서쪽, 혹은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방향성을 작자들이 나름 의식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소동파의 '장정'시에 보이는 목 '수(首)'자의 반전과 산바의 '남녀(男女)' 글자의 180도 좌우 반전은 그러한 방향성과 회전성을 작자가 충분히 의식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파자 방식 중의 하나인 부분결여 방식이 난지 및 이루이 이묘, 그리고 동파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한자를 둘로 쪼개어 그 사이에 다른 한자를 집어넣는, 파자의 분리법과 증보법을 복합시킨 방식이 동파체에서 발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일본에서 주로 에도시대의 3단 수수께끼나 그림 수수께끼방식인 한지에(判じ絵)에서 이용되었는데, 이는 동파체와 파자의 한자변형방식이 일본근세의 문자유희뿐만 아니라 수수께끼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겠다.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의 작정기법 (A Garden Making Methods of Enshu Kobori)

  • 홍광표;최미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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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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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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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고보리 엔슈(小堀遠州)의 정원이 그때까지 조성되어 온 기존의 일본 정원양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석하여 그의 독특한 작법(作法)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고보리 엔슈는 기존의 가레산스이 정원이 돌과 모래를 재료로 조성되는 양식적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레산스이 양식을 창안하였다. 그는 사쯔키철쭉을 강전정하여 돌과 조화를 이루도록 연출하였는데, 이러한 엔슈의 작법은 키레이사비(綺麗)라는 미적원리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엔슈의 정원은 일견 화려하면서도 단순한 정원미를 보이는데, 이것 역시 그가 창안한 독창적인 정원기법이다. 고보리 엔슈가 창안한 특유의 정원양식은 새로운 것은 추구하던 에도(江戶)시대의 사람들의 문화의식과 공가(公家) 문화가 확산되는 문화적 바탕이 작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고보리 엔슈는 의식을 위한 형식적 차원의 정원보다는 관상 위주의 정원을 설계하고 조성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고보리 엔슈가 작정한 라이큐지(?久寺), 다이치지(大池寺), 쇼덴지(正傳寺), 난젠지호죠(南禪寺方丈), 곤치인(金地院)을 대상으로 정원의 위치, 정원의 도입요소, 정원의 구성, 정원의 배경, 돌의 사용, 식물, 경관을 고찰하여 고보리 엔슈 정원의 독창성을 규명하였다.

일본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에 관한 역사적 고찰 - 1867년부터 1939년까지 만국박람회를 중심으로 - (A Historical Study on the Propagation and Diffusion of the Traditional Japanese Garden in Foreign Countries - Focused on World's Fairs between 1867 and 1939 -)

  • 윤상준;권진욱;홍광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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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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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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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을 위한 기준점 마련과 기반 구축을 위한 기본연구로서 일본의 전통정원 보급 및 확산에 있어 초기 단계인 유럽과 미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통한 조성내용과 파급효과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이 박람회를 처음 참가한 186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일본 정원이 조성된 박람회를 대상으로 조성된 정원을 파악하고 박람회 기간 중 그리고 폐막 이후 일본정원의 파급효과를 조사 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면 문화적 측면에서 명치정부의 첫 박람회 참여에 있어 독일인 바그너의 충고에 따라 문화와 공예를 박람회 주제로 선정하고 정원을 전통 건축물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면서 국가적 정책으로 대외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만국박람회 일본관에 대표적으로 조성된 강호시대 회유식 정원 양식과 다정은 유럽과 미국 내에서 일본정원의 대표적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미국인에게 일본 정원은 도입된 '이국적 미'이자 '문화유산'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고 반일감정을 없애려는 일본 제국정부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전통정원을 통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일본사회를 이상적으로 표현하여 서구 열강과의 차별성을 도모, '전통'과 '자연'을 키워드로 '영원한 평온'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박람회 이후 존치된 일본정원은 지속적인 일본정원의 모델 역할을 하였으며 박람회의 일본관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원과 관련된 많은 전문가가 일본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간 후 현지 정착하며 일본 정원이 현지에 녹아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 현대 판화속의 일본 현대판화의 국제성 연구 (Study on Internationality of Japanese Modern Print in the World Print)

  • 김승연;신지연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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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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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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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일본의 대중 미술로서의 판화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의 우키요에 판화부터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인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는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이후 새로운 인쇄 기술의 발달과 서구적 예술의 도입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그 이후 다이쇼시대(大正時代 1912~1926)가 되면서는 야마모토 카나에(山本 鼎)가 ${\ll}$명성${\gg}$지에 발표 했던 <어부(漁夫)>라는 작품을 계기로 한 창작 판화 운동이 일어났다. 창작 판화는 복제 우키요에 판화와는 달리 한 사람이 원화부터 인쇄까지를 스스로 제작하는 것으로, 작가가 주체가 되어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복제판화에 대해 반성하고 판화의 예술성을 인식하고자 한 이 운동을 시작으로 점차 많은 작가들이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 전시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사실 1900년대 전후만 해도 일본에서 판화는 서양화나 조각 등에 비해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부터 다수의 일본 판화가들이 국제 전람회에서 수상한 사실들은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1957년에 첫 국제 미술제인 동경 국제 판화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점차 일본에서도 판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미술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의 판화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판화가 독립된 장르가 아닌 현대 미술의 표현 양식의 하나로 종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판화가들과 대학 교육 차원에서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위기를 뛰어넘고 하나의 예술 장르로써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법과 현대적인 표현 방식을 접목하여 새롭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제작하는 판화가들이 등장하여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활약 했다.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해외 활동과 판화에 대한 연구, 신진 판화가들의 양성을 통하여 일본의 현대 판화는 세계적으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일본의 현대 판화가 발생되었던 역사적인 과정을 되짚어보고, 국제적인 위상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에셀나무(Tamarix aphylla)의 명칭문제에 대한 고찰 (An Investigation of Local Naming Issue of Tamarix aphylla)

  • 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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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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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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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성경에 쓰인 에셀나무(Tamarix aphylla)의 올바른 명칭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 식물의 형태분류학적인 특성 분석, Tamarix속에 대한 상징성 고찰, 한국고전과 중국고전에서의 용례 분석, 그리고 한중일 성경에 나타난 에셀나무 번역상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한 고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식물분류학적으로 Tamarix속 유사종의 구별은 잎과 꽃의 형태로 구분하지만, 그 크기가 2-4mm 정도로 매우 작기 때문에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스라엘 광야에 분포하는 T. aphylla와 중국과 한국의 T. chinensis는 가지가 처지는 모양이나 개화기간에서 확연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Tamarix속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한(漢)나라에서는 궁궐 안뜰에 심을 정도로 귀한 나무였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나무로 여겼다. 또한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계약의 표지로, 예언자 사무엘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무엘의 법정을 상징하였다. 한국고전 용례를 통해서 볼 때 Tamarix속은 이미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용어로 쓰였는데 '정류(檉柳)'는 의학적인 용어로 많이 쓰인 반면에, '위성류(渭城柳)'는 문학적 용어로 쓰였다. 중국의 본초서 가운데 정류(檉柳)와 관련된 문헌들의 연대와 명칭을 고증한 결과에 의하면 모두 16개 용어가 쓰였는데, 이 용어들 가운데 중국 성경에 쓰였던 '수사류(垂絲柳)'라는 단어는 없었다. 또한 당나라 왕유(王維 699-759)의 시 때문에 생겨난 '위성류(渭城柳)'라는 단어도 없었고, 오히려 주나라와 관계있는 '하류(河柳)'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중국의 학술용어를 조사해 보면 '수사류(垂絲柳)'와 '정류(檉柳)'가 대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중국성경에서 에셀에 관한 번역은 '수사류(垂絲柳)'로 하던지 '정류(檉柳)'로 하던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일본성경은 명치역 "구신약전서(舊新約全書)(1887)"에서 'やなぎ(버드나무)'로 번역하는 오류가 있었는데, "구어역(口語譯) 성서(聖書)(1955)"부터 'ぎょりゅう(정류(檉柳))'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ぎょりゅう(정류(檉柳))'는 야생종이 아니라 에도시대 도입종이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용어 설정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한국고전 용례분석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한국의 T. chinensis는 약용 및 관상용으로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생육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한국 성경에서 의약학 용어인 '정류(檉柳)' 사용하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어인 '위성류'를 사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성류'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조차 사용빈도가 극히 낮은 용어이고, 조선시대 문학하던 분들의 모화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이 용어 사용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논란이 있는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에셀나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의방류취(醫方類聚)"에 대한 판본(版本) 연구 (A study on the xylographica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 신순식;최환수
    •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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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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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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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1445) is a book compiled the medical achievements of China and Choseon in those times and it's our source of pride to have it In this country. It also deserves careful investigation since this book can provide some clues of features of missing books in China and Korea. The extent of accuracy of xylographica of old books determines the possiblity of in depth further study. So authors attempted to investigate the xylographica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one of the 3 main books in Korea. Previous investigation done by Miki Sakae and Kim Doo Jong are noticeable. On the basis of their respective works, we analyzed 'Annals of the Choseon Dynasty' to find records related with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and estimated the situation of its publication. We tried figure the situation of those times of China, Japan and Korea(including North Korea) and tried to estimate the book's original xylographica as much as we could. By King Sejong's command, the first draft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consisted of 365 books was made by collaboration of civil officials and medical officers during the period from 1443 to 1445. And then from 1451(first year of Moonjong's reign) to 1464(l0th year of Sejo's reign) lots of manpowers were employed and through the process of countless erasure, proofreading, arrangement and rearrangement revised version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which is called by Sejo text was completed. After 3 years of wood engraving work, the first printed form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alternately called Seongjong text) in folding case consisted of 266 chapters, 264 volumes came into the world in 1477.(8th year of Seongjong's reign). This was 32 years after the initial completion of the edition. So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exists in three forms as Sejong text, Sejo text and Seongjong text respectively. Since those texts were plunder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none of the original copy remains within korea. The texts were constantly moved to kadeungcheongieong, to Kongdeungpyeongio, Jesookoan of Edo, to East University of department of classic books, to Cheoncho archives, to the Imperial Museum and finally is kept in the royal palace at present. (Doseoryo text Eulhae printing type) Reduced-size republication books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in wooden type were imported at the time of 'Byeongja Korea-Japan Treaty in 1876' and of those 2 books, one copy was treasured in the Royal Household of the Yi Dynasty and than was lost during the Korean War circa 1950. The other remaining copy has been kept succesively by Kojong's imperial grant, Royal doctor Hong Cheol Bo, Hong Taek Joo, Hong Ik Pyo the book agent, and now is kept In Yonsei University Library and this is the only existing copy in Korea at present. In 1965, Dongyang Medical college published the transcription version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consisting of 11 books and then in 1981 after edition and arrangement by Choonghoa(中華) publishing company, photoprint copy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was published in Keumgang(金剛) publishing company In 1991, October Yeokang(驛江) publishing company producd photocopies of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which were previously translated into Korean by North Korea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 and then issued by medical publishing company. In China, two institutes, Zhejiang Institute of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and Huzhou Traditional Chinese Medical Hospital cooperated to publish a revised and marked text consiting of 11 books by adding marking points to japanse Edohakhoondang text which were used as a reference. Both the korean and chinese texts issued were grounded by the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kept in the royal palace. Any further study concerning ${\ulcorner}$Classified Collection of Medical Prescriptions${\lrcorner}$ can acquire its accuracy and objectivity when the japanese text kept in the royal palace is taken as an original c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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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성문화를 통해 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의 선정성 (Pornographic Animation's Sexuality through Japanese Sex Culture)

  • 최은혜;오진희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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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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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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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인류는 본능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을 지속해왔다. 인간의 욕구중 성욕은 식욕과 함께 가장 본능적인 것의 하나로 분류되며, 선사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적인 이미지 표현은 사회적, 윤리적 제약 하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매체의 발전을 수용하며 더욱 앞서 진화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사진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포르노그래피 이미지는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영상은 사진보다 직접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써 이러한 변화를 더욱 촉진하였고, 영상매체 중 하나로서 애니메이션은 장치에 의한 이미지인 실사영상이 가진 재현성의 한계를 넘어 실험을 거듭해왔다. 이 논문에서는 애니메이션에서 성적욕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와 이를 있게 한 사회적 배경으로서의 성문화를 연결하여 논의하고자 하며, 그 분명한 사례로써 일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일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은 문화와 사회제도적 역사로부터 비롯된 결과물로써 해석되어야 한다. 헤이안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성문화는 매우 개방적이고 때로 파격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변신, 변태, 미소년 소녀 성애, 촉수성교, 신체 특정부위의 빈번한 노출 등은 와카슈, 처방혼, 혼숙, 남색 등과 같은 고대 일본의 개방적인 성 풍습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성문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성적 표현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에 이르러 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외부로부터 강제된 서구 근대화에 의해 제도적으로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현재까지도 일정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에서는 고대 일본의 자유로운 성문화가 제도에 의해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 또한 문화현상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논의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에서 발견되는 선정성은 그들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며,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표현은 제도적으로 규정된 성 의식에 의해 굴절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는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에 성적표현의 자유로움을 부여함과 동시에 타자화 된 여성 신체에 대한 두려움이자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라는 이분법으로 변형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