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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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의례용 일월오봉도 병풍의 장황에 관한 고찰 - 초록색 회장 비단과 금박 장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Methods of Mounting the Five Peaks Screen - With the focus on green bordering silk and gilt ornamentation)

  • 박윤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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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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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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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조선 왕실에서는 영원불멸한 왕의 존재와 권위를 나타내고자 일월오봉도로 병풍을 만들어 왕의 공간마다 설치하였다. 일월오봉도는 궁궐의 가장 대표적인 의장물로 알려져 있지만, 다양한 형태로 제작했던 병풍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다. 이것은 현재 전하는 유물이 기록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의궤를 중심으로,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일월오봉도 병풍의 다양한 생김새와 장황 재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일월오봉도 병풍의 원형과 변형 과정까지 함께 고찰하였다. 의례용으로 제작한 왕실의 병풍들은 예식과 법도에 따라 엄격하게 제작되었고, 각각이 갖는 위상에 따라 장황에 사용하는 재료 또한 차등을 두었다. 궁궐의 정전(正殿)과 빈전(殯殿), 혼전(魂殿), 진전(眞殿)에 설치했던 오봉병과 궁중연향을 위해 제작했던 오봉병은 생김새와 크기는 모두 다르지만, 병풍을 꾸미는 비단 회장(回粧)은 일치하였다. 대체로 초록색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그 위에 꽃문양의 금박을 장식하였다. 쪽풀로 염색한 초록색 비단은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값비싼 붉은 색 비단을 대신하였으며, 영조22년 '문단(紋緞) 금지 조치' 이후에는 무늬없는 초록색 평직 비단을 사용했다. 그나마 비단에 올린 금박 첩금으로 인해 사대부가의 병풍과 차별되는 궁중 의례용 병풍의 장식미를 더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방치되었던 조선왕실의 병풍들은 1960년대부터 유물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보존처리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장황이 개장(改粧)되었고, 원형의 모습을 많이 잃게 되었다. 이것은 전통의 장황 문화가 단절된 것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다. 과거에는 고증의 부족으로 문화재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각 분야에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증을 철저히 하고, 문화재의 수리 이력에 대한 정보까지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The Actual State and Transformation of Major Garden Ornaments in Changdeokgung Palace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오준영;이재용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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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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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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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낙선재, 주합루, 존덕정, 대보단지를 중심으로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양상을 고찰하였다. 전각, 식생, 구조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심이 저조했던 점경물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상을 조명하기 위한 의도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향후 창덕궁 내 점경물의 복원정비계획 수립에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01년 체코인 브라즈가 촬영한 사진에 따르면 당시 낙선재 후원에는 석지(石池)와 괴석을 비롯해 총 6기의 점경물이 소재했다. 후원의 지면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로 불리는 석지와 괴석 2기, 화계 1단에는 괴석 3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괴석의 임의적인 재배치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 화계 1단에 위치했던 괴석 2기는 경훈각(景薰閣) 후원으로 이설된 상태이다. 둘째, 「동궐도」가 제작된 조선후기와 달리 1900년대 초반 주합루 후원에는 괴석 2기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외형, 규격, 의장이 유사한 전통적 양식의 점경물이었다. 하지만 주합루 후원의 괴석은 모두 1970~1980년대에 타지로 이설되어 현재는 고유위치를 벗어난 상태이다. 1기는 빙천(氷泉) 입구와 금천교 인근을 거쳐 애련정 후면에, 또 다른 1기는 연경당 장락문(長樂門) 앞에 남아 있다. 셋째, 과거 존덕정 일곽에 소재했던 점경물 중 괴석 1기는 현재 구성 부재가 분리된 상태로 정자 주변 석교와 영화당 인근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영화당 인근의 대석은 1990년 무렵 앙부일구 모조품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이설되었다. 또 다른 괴석 1기는 후원 정문으로 이설된 이후 현재는 소재 파악이 어려우며, 본래 위치에는 완전히 상이한 형태의 점경물이 새롭게 배치되어 있다. 넷째, 대보단지에 현존하고 있는 대석 2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청사(李王職廳舍) 현관 기둥의 초석으로 사용되던 건축 부재였다. 해방 이후 이왕직청사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고, 1960년 무렵 사무총국 건물이 전소되자 기단 위에 배치되어 있던 석상(石像)과 대석이 대보단지로 이설되었다. 대보단지의 대석은 건축부재가 점경물로 오인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문화재(文化財)의 국제적 불법 거래(不法 去來)에 관한 고찰 (An Examination into the Illegal Trade of Cultural Properties)

  • 조부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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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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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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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문화재의 국제적인 유통행위는 다수 국가가 관계되므로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법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다. 2차대전 이후 문화재의 가치가 물질적 가치에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신적 민족적인 측면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신생 독립국과 식민제국들 간에 문화재의 소유권 다툼이 쟁점화 되어 문화재 반환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적인 협력과 법제도적인 장치의 모색이 필요하게 되었다. 문화재의 불법거래에 관한 국제협약으로 유네스코(UNESCO)를 중심으로 문화재의 준비적 보존의무를 부과하는 1954년 "전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협약", 문화재 반 출입에 대한 통제와 반출에 허가장 발급을 통해 불법 취득 유통 억제를 위한 1970년 "문화재불법 반 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 도난이나 불법적으로 반출된 문화재의 국제적 반환을 의무화한 1995년 "유니드로와 협약"이 있다. 또한 유엔(UN)의 산하 기관으로 유네스코(UNESCO)는 특히 소위 문화재 분과(the Division of Cultural Heritage)를 마련하여 문화재에 대한 관계업무 처리에 주력하여 오고 있으며, UN 총회 역시 1973년의 결의 3187 이후로 문화재 보호에 관하여 계속적인 관심을 표현하여 오고 있는데 그 기본내용은 문화재의 원산국에로의 반환에 관한 국제 협력을 확인하고, 각국에 예술품 및 문화재의 불법거래 금지 및 방지를 위한 적절한 조처를 권고하며, 자국내 문화재에 대한 목록화 작업을 권고함과 아울러 종국적으로 많은 국가가 유네스코(UNESCO) 협약의 당사국이 되어 국제적인 협력체제의 구성원이 될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국제협약의 한계로 협약상의 문화재에 대한 정의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1954년 협약상의 문화재는 동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도 포함하고 있는데 1970년 협약은 그 제정 목적이 '문화재의 불법적인 반 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방지수단'의 강구에 있으며 따라서 그 규율대상도 원칙적으로 유형의 동산문화재(tangible movable cultural property)에 국한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1995년 협약도 역시 동산문화재를 규율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두 협약은 이 점에서 1954년 협약이나 주로 부동산적인 특성을 갖는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을 대상으로 하는 1972년의 협약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재의 개념에 대한 내재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협약의 제정 목적 및 취지가 다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866년의 병인양요,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식민통치, 군정기, 경제 개발기 등을 통하여 다수의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었다. 물론 이들 문화재를 전부 반환 받을 수도 없고 또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이들 중 일부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거나 또는 이들의 외국(특히, 일본)에서의 소재가 과거 한국민에 대한 지배의 상징으로서 기능한다거나 할 경우 반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의 입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1954년 협약 및 제1의정서의 비준은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된다. 반환을 요구할 경우 우선 문화재의 도난 여부가 핵심이며 이 경우 국제협약에 따라 조치하면 될 것이지만 외교적 협상의 단계에 이르면 이 문제는 정치적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경우 반환을 요구하는 국가는 상대국이 문화재를 반환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문화재의 불법거래 방지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에 반해, 동북아 지역 국가 및 시민사회의 방지노력은 대단히 미흡한 실정인 바,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 및 시민 사회적 차원의 체계적인 노력이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문화재의 불법적인 거래를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인터폴(Interpol) 회원국간 정보를 신속히 유통시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인터넷 기술에 바탕을 둔 통신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며 도난당한 문화재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기 위한 보다 효율적인 방안으로 문화재 보호 법률의 도입, 국제협약의 가입, 수집품 목록 구축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원각사(圓覺寺)13층탑(層塔)에 대한 근대적 인식과 오해 (The Modern Understanding and Misunderstanding about the Thirte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 남동신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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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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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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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고는 원각사탑에 대한 지난 백 년간의 근대 학설사를 층수에 초점을 맞추어 비판적으로 성찰하였다. 먼저 제II장에서는 근대 개항기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이 종래 한성의 '비미(非美)'내지는 흉물로 간주되던 원각사탑을 한성의 '기관(奇觀)'내지 '위관(偉觀)'으로 재발견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들은 불탑에 관한 예비지식이 거의 없는 서양 출신이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원각사탑에 대하여 객관적인 견문기를 남길 수 있었는바, 그들이 접촉한 조선 지식인들을 통하여 대체로 13층설을 받아들였다. 이어서 제III장에서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일인 관변학자들이 원각사탑을 본격적으로 학술 조사하고, 일제식민기 동안 조선총독부가 원각사탑을 문화재로서 관리하는 과정 및 그 문제점을 언급하였다. 특히 지난 100여 년 동안 원각사탑 층수 문제에 관하여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의 학설이 10층설에서 13층설로, 다시 다층설로 변하는 문제를 집중 조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제IV장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1962년까지 원각사탑에 대한 인식이 다층설에서 10층설로 바뀐 경과를 정리하되, 선행하는 일제식민기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이 13층설 일변도였음을 특기해두었다. 다만 1962년 이후 지금까지 원각사탑에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성과가 적지않이 발표되었지만, 층수에 관한 한 대부분 1962년에 확정된 10층설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학설사 검토의 결과, 원각사탑이 13층탑으로서 건립되었다는 근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백 년이 넘도록 13층설은 단 한 번도 공인받지 못하였으며, 학계에서 층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도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각사탑과 경천사탑이 10층탑이라는 현재의 통설은, 백 년 전에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가 최초로 주창하였다. 세키노는 원각사에 남아있는 「원각사비」가 글자를 거의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기 때문에 원각사탑의 현상만 건축학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10층탑이라고 주장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에 발견된 『속동문선』에 실린 「원각사비」에서 '탑 13층을 세웠다.'라는 구절이 확인되었다. 또한 15세기 후반 왕명으로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편찬자들도 원각사탑의 모범인 경천사탑 또한 '13층탑'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원각사탑 건립 직후 왕명으로 건립된 「원각사비」는 세키노의 10층설이 전제에 오류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세키노는,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 올려져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13층탑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는데, 「원각사비」는 세조가 처음부터 13층탑으로서 원각사탑을 건립하였음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다만 이례적이게도 13층탑을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을 올린 형태로 조성하였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왜 13층탑을 세웠으며, 왜 그것을 3층의 기단 위에 탑신 10층이라는 이례적인 형태로 구현하였는가? 세조가 원각사13층탑을 건립한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먼저 원각사탑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는바, 그 첫 단추는 원래의 명칭을 회복하는 데 있다. 필자는 전제의 오류 위에 구축된 세키노의 10층설-나아가 절충적인 다층설-은 이제 폐기하고, 「원각사비」에서 말하는 13층설을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

재미작가 홍언의 몽유가사$\cdot$시조에 나타난 작가의식 (A Study on Korean-American Writer Hong-Eun($1880\~1951$) focusing on Mong-yu siga(Traditional Korean Poetry, gasa and sijo of strolling in the dream))

  • 박미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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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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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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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문학작품은 선행 작품 혹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창작되고 있다. 당대의 문단활동을 통해서나 작가 자신의 소양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인 텍스트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작가의 의식에 적절한 반응양식이 선택하여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양식 또한 시대적, 개인적 필요성에 의하여 이런 과정을 속에서 되풀이된다.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홍언은 미국 초기 이민자이며 재미 한인신문 $\lceil$신한민보$\rfloor$의 발행에 오랜 기간 종사한 언론인이자 문인이다. 지면을 책임지고 있는 발행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비교적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문단과의 직접적인 교류나 활동은 없었고 미국 현지에서 함께 할 독자가 적은 가운데 시가만 400여 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본 연구에서 홍언의 다양한 작품활동 가운데 1935년,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는 몽유양식을 활용한 시가$\cdot$몽유가사$\cdot$몽유시조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다. 1935년과 1947년으로, 두 차례 $\lceil$신한민보$\rfloor$의 <사조>난에 몽유가사와 몽유시조를 싣는다. 홍언은 미국이라는 만리타국에 와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것을 모두 포기할 만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였으며 항시 조국의 현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창작된다. 첫 몽유시가는 1935년 4월 25일에 <이강산>을 필두로 1935년 5월 9일 부터 1935년 7월 4일까지 동회슈부라는 자신의 필명으로 <꿈에 고국에 가셔>라는 제목 하에 연작시가 8편을 차례로 연재하는 것이다. 이는 개화 가사의 형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향수와 1900년 전후의 조선 상황에서 정체된 역사의식을 담고 있어 중세적 이념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 몽유시가는 1947년 9월 25일 발표한 <나라와 고향>을 서시로 1947년 10월 2일부터 1947년 11월 6일까지 6 편을 연재하는 <꿈속에 강산>이다. 여기서 선택한 시형은 시조이며 그 시상의 전개가 1차 시도와 비슷하여 1차 시도를 의식하여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직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외적 장애요인이 제거되었는 데도 고국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를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서, 조국을 '살지 못할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몽유양식은 꿈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좌절된 욕망을 달성하고자 의도적으로 취하는 양식이다. 홍언은 이민 후 일제치하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 후에는 개인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국방문을 하지 못했다. 고국방문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홍언은 몽유양식을 활용하였다. 이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우언의 한 양식으로 즐겨 사용했던 전통 양식이자 개화기 지식인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다양한 글쓰기 방식의 일환으로 선택되어 문학사적 사명을 다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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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朝鮮時代) 도작농업(稻作農業)의 발전(發展)과 인구증가(人口增加) (Rice Cultivation and Demographi Development in Korea : 1429-1918)

  • 이호철
    • Current Research on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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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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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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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Rice culture in Korea has a long history ranging over two thousand years. In the agriculture economy of pre-mordern Korea, however, its importantce was not as great as generally assumed. In fact, rice culture reached full development only after the 1920s when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carried out its drive to increase rice production in the Korea peninsula. It was not until the mid-1930s that rice became the staple in Korean diet. This can be attributed to two factors : (1) a mountainous topography that provides little irrigated fields and (2) a climate characterized by droughts in spring and heavy precipitation in summer. The present paper attempts to answer some of these questions. Specifically it will focus on these : Did the development of rice culture actually result in population growth? What are the salient features of agricultural develdpment and population grow in traditional Korea? Does the case of Korea conform the prevailing generalization about the agriculture in East Asia? I have discussed the development of rice culture and population growth in the Chos$\breve{o}$n dynasty, focusing on the relation between the rapid spread of transplanting and the rapid growth of population from the seventeenth to the nineteenth century. Here are my conclusions. (1) The spread of transplanting and other technological innovationsc contributed to the rapid growth of population in this period. However, we should also note that the impact of rice culture on population growth was rather limited, for rice culture was not the mainstay of agricultural economy in pre-modern Korea. Indeed we should consider the influence of dry field cropsn population growth. Nevertheless, it is obvious that the proliferation of rice culture was a factor crucial to population growth and regional concentration. (2) How should we characterize the spread of rice culture in the whole period? Evidently rice culture spread from less then 20% of cultivated fields in the fifteenth century to about 36% of them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Although rice as a single crop outweighed other crops, rice culture was more then counter-balanced by dry field crops as a whole, due to Korea's unique climate and geography. Thus what we have here in not a typical case of competition between rice culture and day field culture. Besides, the spread of rice culture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accomplished by technological innovations that overcame severe springtime drought, rather than extensive irrigation. Althougt irrigarion facilities did proliferate to some extent, this was achieved by local landlords and peasants rather than the state. This fact contradicts the classical thesis that the productivity of rice culture increased through the state management of irrigation and that this in turn determined the type of society. (3) We should further study other aspects of the transition from the stable population and production struture in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to the rapid population growth and excessive density of population thereafter. We should note that there were continuing efforts to reclaim the land in order to solve the severe shortage of land. Changes also took place in the agricultural production relations. The increase in land producrivity developed tenancy based on rent in kind, and this in turn increased the independence of tenants from their landlords. There were changes in family relations-such as the shift to primogeniture as an effort to prevent progressive division of property among multiplying offspring. The rapid population growth also produced a great mass of propertyless farm laborers. These changes had much to do with the disintegration of traditional social institutions and political structure toward the end of the Chos$\brev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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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행정구역체계의 문제점과 개편의 방향 (Problems of administrative area system in Korea and reforming direction)

  • 임석회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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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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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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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현행 행정구역체계의 기본골격은 조선시대와 일제초기에 만들어질 것으로 그간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및 교통, 통신의 발달에 제대로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 편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이러한 현행 행정구역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의 합리적인 개편의 기본원칙과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다. 현행 행정구역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민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된 실질적 공간체계와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 공간체계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국토공간계획의 차원에 서 지역적 형평과 균형의 원리와 함께 중심도시와 배후지의 통합, 생활권의 계층체계와 행 정계층의 일치, 생활권의 범위와 행정구역의 일치 등을 원칙으로 한 행정구역개편이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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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의 貧民地域 形成過程과 空間分布의 特性 (Process and Spatial Distribution of Squatter Settlement in Taegu)

  • 배숙희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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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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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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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우리나라 대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빈민지역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도시내에서 어떻게 공간이동을 하였는가를 알기 위하여 대구를 사례로하여 고찰하였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구의 빈민형성은 해방 및 6.25 동란을 겪으면서 그 수가 증대되어 1차적으로 도심가까이에 빈민지역을 형성하였고 그 후 도시와의 진전에 따라 도시주변지역의 무단점거에 의한 2차적 빈민지역이 형성되었다. 2) 최근에서 도시재개발사업에 환경이 개선되어 일반거주지역으로 전환되었거나 혹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립되어 저소득층은 그 곳에 거주하지 못하고 도시근교의 영구 및 임대아파트 단지내에 대규모로 집단화하여 거주지의 수평적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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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논우렁이의 유해조류 섭식율 및 배설물 생산 (Grazing Rate and Pseudofaeces Production of Native Snail Cipangopaludina chinensis malleata Reeve on Toxic Cyanobacterium Microcystis aeruginosa)

  • 황순진;전미진;김난영;김백호
    • 생태와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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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spc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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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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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는 국내산 논우렁이를 이용하여 남조류 Microcystis aeruginosa에 대한 섭식율 (grazing rate, GR) 및 배설물 생산(pseudofaeces production)을 분석하였다. 섭식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시간, 개체크기, 개체밀도, 먹이농도 조건 하에서 실험하였다. 모든 실험은 3반복되었으며 실험수는 매년 M. aeruginosa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감호(서울소재)의 현장수를 이용하였다. 실험결과, 논우렁이는 투입 후 1시간 후에 0.538L $gAFDW^{-1}h^{-1}$의 최고 GR를 보이다가 7시간을 경계로 서서히 감소하였으며 유기물 생산량은 7시간 후에 50.30mg $AFDW^{-1}$로 가장 많은 양을 나타냈다. 서로 다른 크기조건에서 각 고가 4.5cm미만인 동물의 여과율 수치의 변화가 크고 13시간 후에 비슷한 수치가 나타나는 반면, 4.5cm이상인 것은 FR의 변화폭이 $-0.789{\sim}1.348L$ $gAFDW^{-1}h^{-1}$로 비교적 좁고 4시간 이후부터 크기의 증가에 상관없이 유사한 수치가 반복되었다. 밀도는 1.5ind. $L^{-1}$에서 $9.7{\mu}gL^{-1}$로 가장 낮은 엽록소 ${\alpha}$ 농도를 나타냈으며 그 이상에서는 밀도의 증가에 상응하는 섭식능의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밀도가 커짐에 따라 PFPs도 증가하였다. 먹이농도는 원수의 엽록소 ${\alpha}$농도가 $168.3{\mu}g\;L^{-1}$로 낮을 때 0.897L $gAFDW^{-1}h^{-1}$의 가장 높은 여과율을 보인 반면 PFPs는 $673{\mu}g\;L^{-1}$의 높은 원수 농도에서 25.85mg $AFDW^{-1}$를 나타내 먹이농도와 비례하는 결과를 보였다. 따라서, 국내산 논우렁이는 수표면에 부유하는 유해조류 제어에 효과적일 것으로 판단되며, 현장에서의 적용방법 및 생태계에서의 작용에 관한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

한성부 동촌(東村) 어의동지(於義洞池) 일대의 환경 특성과 장소적 의미 (A Study on Environmental Traits and Significance of Eouidongji Pond(於義洞池) Area in Dongchon(東村), Hanseong-bu(漢城府))

  • 길지혜;손용훈;황기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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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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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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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고지도에서 한성부 성내 동쪽인 '동촌(東村)'에 표기된 못의 환경 특성과 장소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러 문헌과 지도 자료를 검토하여 못의 명칭을 정리하였고, 연구에서는 그중 국가 공식기록과 지리적 명칭을 따라 '어의동지(於義洞池)'로 명명하였다. 연구 결과, 첫째, 입지 및 환경 특성을 보면 어의동지 일대는 도성 내에서 전원적 정취가 있는 지역이었다. 산자락 계곡부 물이 많이 모이는 지대에 있었고, 약 2천 평 정도의 필지 안에서 수위에 따라 못 경계가 변화하였다. 둘째, 조성 배경을 볼 때 어의동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을 국초 도성 내 수체계를 관리하면서 함께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유수지 역할과 함께 연(蓮) 관련 부산물을 진상하는 연지(蓮池)로 운영되었고, 인근에 별궁이 활발히 이용되면서 함께 관리된 것으로 판단한다. 20세기 초 이미 매몰된 상태였고, 연지를 다시 수축하고자 했으나 식민지기 학교 부지로 편입되며 소멸하였다. 셋째, 어의동지는 개인이 완상하거나 멀리서 조망하며 자연경관 일부로 감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동촌에 진입하는 가로 가까이 있는 진입경관이었고, 주변 다른 행락지와 연계해 방문하기 좋았다. 어의동지의 입지 및 환경 특성, 조성 및 소멸 배경과 시대별 운영 관리, 당대의 이용과 경관 감상의 특성을 고찰한 결과, 어의동지는 국가적으로는 도성 내 수체계를 보완하면서 국용 연 수확물을 제공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가 높은 못이었다. 또한, 도시환경 차원에서는 넓은 면적으로 펼쳐진 수평적 랜드마크이자 효과적인 경계지물이었다. 그리고 한성부 지역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 장소였고, 접근성이 높아 공공적 가치도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