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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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창건과 철불 조성 연구 (The Establishment of Seongjusa Temple and the Production of Iron Buddhas)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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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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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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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성주사(聖住寺)는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한 사찰이다. 무염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잠시 수도 경주에 머물다 김인문(金仁問, 629~694)의 후손들이 관리하던 사찰에 주석하였다. 이곳에서 무염은 불타고 남은 사찰을 중수하여, 847년에 선종사찰 성주사로 개창하였다. 이후 성주사는 사세가 번창하였고, 사역 내 여러 전각이 들어서며 대규모 가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지역 내 성주사의 영향력은 「숭암산성주사사적(崇巖山聖住寺事蹟)」에서 살펴볼 수 있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성주사에 건립된 불전은 모두 73간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기록은 '전단림구간(栴檀林九間)'이다. 전단림구간은 '전단으로 지어진 건물이 9간' 혹은 '전단을 보관한 곳이 9간'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성주사에 전단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전단은 유향목재(有香木材)로 동남아시아 자바나 수마트라에서 생산되었다. 장보고 사후, 서남해안일대를 장악한 군소 해상세력이 동남아시아 전단을 대량으로 입수하여 성주사에 시주한 것으로 보인다. 문성왕대 김양(金陽, 808~857)은 무열왕계인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 명망이 높았던 무염의 성주사를 후원하여 왕실과 성주산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원성왕계 왕실에서는 성주사를 지방 거점사찰로 삼아 반왕실적인 기운이 남아있는 지역에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무염은 사찰을 수호하고, 민심을 교화하고, 나아가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 문도가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세가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성주산문의 중심사찰인 성주사에 봉안된 철불은 지역의 민심을 결집하는 하나의 존상(尊像)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성주사 철불은 모두 2구로 확인되며, 현재 전하는 철불편과 대좌의 크기로 볼 때 각각 금당과 삼천불전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에 봉안된 철불1은 2m가 넘는 대형 철불이고, 삼천불전에 봉안된 철불2는 1m가 넘는 중형 철불로 판단된다. 「숭암산성주사사적」을 보면 '개창선법당오층중각(改創選法堂五層重閣)'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성주사 개창시 철불1과 같은 대형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중층식 금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철불1은 「성주사비(聖住寺碑)」와 손가락편의 모양을 통해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결한 불상으로 추정된다. 성주산문은 동시기의 실상사(實相寺), 보림사(寶林寺), 삼화사(三和寺)와 같이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존불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무염이 초년에 화엄을 수학하였고 귀국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신라하대 왕실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의 복고적인 경향이 선종사찰 성주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 무량사(無量寺)의 17세기 재건(再建)과 조영 계획(造營 計劃) (Reconstruction and building plan of Buyeo Muryangsa Temple in the 17th century)

  • 오세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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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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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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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부여 무량(사無量寺)의 17세기 재건(再建)과 조영 계획(造營 計劃)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본고는 임진왜란 이후 무량사의 재건 과정과 후원 세력 등을 검토해 보았다. 아울러 재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극락전의 건축적 특징과 의장 계획 등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무량사의 재건 과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량사의 1624~1636년까지 1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중창 순서를 재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기존에 알려진 극락전의 재건시기를 1633년에서 1624년으로 조정하여 전체적인 무량사의 불사 순서가 1624년 극락전 중창, 1627년 괘불 조성, 1636년 소조삼존불 조성, 1636년 범종 조성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둘째, 무량사 재건은 일반 사찰에 비해 1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진행되고 있어 강력한 후원 세력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특히 완주 송광사 불사를 주도적으로 이끈 진묵대사가 무량사 불사에 영향을 미친 것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진묵대사의 불사를 지원했던 송광사 후원 세력인 왕실 신씨 일가의 영향이 무량사까지 미친 것으로 보았다. 셋째, 무량사 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극락전의 건축적 특징을 검토해 보았다. 무량사 극락전을 다른 중층 불전과 비교를 통해 건축형식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특히, 공포와 가구의 특징을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무량사 극락전과 완주 화암사 극락전이 동일한 계통의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극락전을 조영하는데 사용한 309mm의 용척을 중심으로 건물의 의장 계획을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극락전은 일반 조선후기 중층 불전에 비해 완벽한 비율이 확인되고 대체로 1 : 1.41의 황금비율이 건물의 곳곳에 남아있다. 또한 극락전의 안정적인 의장은 조선후기 무량사 재건 당시 이미 전체적인 가람의 조영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조선시대 봉은사 수륙재의 역사적 전개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water and land ceremony performed by Bongeunsa temple in Joseon Dynasty)

  • 탁효정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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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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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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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봉은사의 기원과 조선시대 봉은사에서 설행된 수륙재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한 연구이다. 봉은사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학당동(오늘날의 선릉 능역 내)에 위치했던 견성암이라는 이름의 암자였다. 견성암의 창건시기는 불분명하나, 조선전기에 광평대군의 재암(齋庵)으로 지정되면서 크게 중창되었다. 광평대군부인 신씨는 남편의 무덤 근처에 있던 견성암에 70결의 대토지와 1000여 구의 노비를 시주하여 대찰(大刹)로 중창하였다. 이후 견성암은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450년 성종의 능(선릉(宣陵))이 광평대군묘와 견성사가 위치한 곳에 들어서면서 광평대군묘는 인근의 대모산 자락으로 이장되었다. 하지만 견성사는 그대로 남아 성종의 능침사로 역할하게 되었고 절 이름은 봉은사로 개칭되었다. 1562년 중종의 능(정릉(靖陵))이 선릉 부근으로 이장되면서 봉은사는 선 정릉의 능침사를 겸하게 되었다. 1563년 순회세자가 요절한 뒤에는 세자의 원당이 봉은사 내에 마련되었다. 견성암 때부터 봉은사로 개칭된 이후까지 이 절에서는 수륙재가 계속 설행되었다. 하지만 수륙재의 성격은 시기별로 조금씩 달라졌다. 세조대부터 성종대까지 견성암과 견성사에서 설행된 수륙재는 광평대군과 세종,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의 성격과 왕실 및 사부대중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중법회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후 연산군~명종대에 이르러 선정릉의 능침사로 역할할 당시 봉은사에서 설행된 수륙재는 왕의 천도재 성격이 강했다. 조선후기에도 봉은사는 순회세자의 원당으로 역할하였기 때문에 봉은사는 왕실 수륙재도량으로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봉은사는 남한산성에서 전사한 희생자들을 위무하는 국행 수륙재도량으로도 역할하였다.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의 추진요인과 유인요인에 관한 연구 - 강원도 소재 국립공원 내 사찰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Push and Pull Factors of Temple Stay in Korean National Parks - Focused on Temples in National Parks in Gangwon-Do -)

  • 김정민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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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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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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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관광동기로서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의 추진요인과 유인요인을 규명하고자 실시되었다. 강원도에 소재한 오대산국립공원 내 월정사와 치악산국립공원 내 구룡사의 2개 사찰의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152명을 대상으로 국립공원내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이유(추진요인)와 참여결정시 영향을 주는 요인(유인요인)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분석에 이용된 표본의 인구통계학적 특성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탐방객 특성과 유사성을 보였다. 요인분석결과 추진요인으로는 '자아실현', '건강추구', '자연동화감', '관계고양', '종교적 체험', '여가체험'의 6개 요인이, 유인요인으로는 '휴식성',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질', '사찰의 특성', '이용 편리성', '관광체험거리', '접근성과 교통' 등 6개의 요인이 각각 도출되었다.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리커르트 5점 척도를 기준으로 4.71점으로 매우 높게 나타났으며,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에 적합한 지역으로는 강원도가 89.2%로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자연관광과 문화관광, 종교관광의 성격을 아우르는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 참가자의 다원적 참여동기를 파악함으로써 보다 경쟁력있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개발과 마케팅 전략 수립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확인된 자연환경 기반의 국립공원 내 템플스테이가 지닌 웰니스지향적 추진요인과 유인요인들은 향후 보다 정교화된 후속연구를 통해 일반화될 것이 요망된다.

신라사천왕사(新羅四天王寺) 건립과정(建立過程) 재고(再考) (Reconsideration on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 이정민;미조구치 아키노리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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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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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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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was completed in 679, just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In recent years, we have been critically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chronology bas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which has emerged through the research report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t is the one to reconsider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centering on the re-interpretation of the construction time and the character of the first stage of the foundation which was confirmed from within the Geumdang site.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 1)The "Chang(創) of Sacheonwangsa temple" in [Three Affairs that Queen Seondeok had already known] that it is presumed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which was designed by Anham before 640 years ago, will convey the fact that the first of the King Munmu's reign (661 ~) has been finalized after the initial discussion. 2)Although the theories after excavations are predicat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 lasting predecessor building with roof and pillar walls on predecessor buildings is considered to have been built. The foundation was associated with the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以彩帛營寺)" i.e. 'Jochang(祖創)' in 670 years before the construction plan was formally finalized. However, it is presumed that the remains of the platform construction on the premise that it will be used on the construction of Geumdang. 3)The decision to 'rebuilding( ??)' based on a formal construction plan is determined to be from 670 to 672 years. The maintaining of the original cathedral axis line, to the north on the boundary of the southern limit of the foundation flat portion, the result of developing and embodied the relative position of the Geumdang in the newly determined cathedral unfold and embody, the center of the building base and Geumdang, it is presumed that the centers of them are divided into North and south. 4)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679 is understood as the conclusion of 'rebuilding' to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 i.e. 'Jochang' in 670 years. The pent roof of the Geumdang was initially considered not to be in the plan, but it is judged to be before 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템플스테이 체험관광 참가동기와 선택요인이 만족 및 재방문의도에 미치는 영향 (The Effects of Temple-stay Experienced Tourism Motivation of Participation and Choice Factors on Satisfaction and Revisit Intention)

  • 윤선영
    • 서비스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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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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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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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체험 관광 상품으로써 정신적 휴식 제공과 다양한 체험활동으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템플스테이의 참가동기와 선택요인이 만족 및 재방문의도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서울 근교 템플스테이 운영 사찰 두 곳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2015년 6월부터 8월 사이에 진행하였으며 총 270부의 설문지 중 유효표본 251부를 최종 분석하였다. 통계분석은 SPSS 18.00을 사용하여 빈도분석, 요인분석, 신뢰성 및 타당성 검증, 회귀분석을 실시하였다. 실증분석 결과, 템플스테이 체험관광 참가동기와 선택요인은 만족에 유의한 정(+)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참가자의 템플스테이 체험관광 만족은 재방문의도에도 유의한 정(+)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를 통하여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템플스테이 체험관광의 질적 성장과 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체험 관광 상품으로서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일반 고객들의 사찰음식 대중화에 대한 인식도 조사 분석 (A Survey Analysis of Perception about Popularization for Temple Food based on Consumers)

  • 황은경;안용근;김병기
    • 한국식품영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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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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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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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perception about the popularization of temple food, known as health food and adult disease prevention food as an object of total 248 residents in Youngnam region. From the result of this research above, it may be summed up as follows. This study has found out that the advantages of temple food showed the statistical significant difference according to the gender, age, and size of family (p<0.01). The reason 'because of health food' (66.7%) had such high percentage. The necessity of popularization of temple food had big difference according to the gender and age (p<0.01). In addition, this study has shown the statistical significant difference in the cooking form for popularization by age, and future improvement for popularization by age and size of family (p<0.001). And, this study has found out that the 'traditional way as it is' (57.3%) was high in the cooking form, and 'use of various materials' (27.4%) in the improvement. Furthermore, the necessity of using meat for temple food had significant difference according to the gender and age, and 'need' (33.9%) showed rather higher tendency. The necessity of using osinchae, five forbidden pungent roots like garlic, green onions, Korean leeks, wild chives, and asafetida had significant difference according to the gender, age and size of family (p<0.05, P<0.001). The 'need' (61.3%) was considerably high. Based on the above results, general customers thought that the need for popularization of temple food and use of osinchae was very positive.

정림사지 창건시기 재고 (Reconsideration of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Jeongnimsaji Temple Site)

  • 탁경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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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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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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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It was believed that Jeongnimsa temple was built after the capital was moved from Gongju to Buyeo. It was confirmed that it was built A.D. $625{\pm}20$ by conducting a paleomagnetic analysis on the fireplace, which was recently found at the bottom of Jungmunji(middle gate). Consequently, it is assumed that the temple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unlike the previous point of view. Therefore, this study evaluated if the fireplace at the bottom of Jungmunji was found at the geological stratum representing the Jeongnimsa temple. Moreover, the study examined when the fireplace at the bottom of Jungmunji was constructed on the soil stratum. It is possible that the fireplace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as shown in the paleomagnetic analysis. However, when we compared the soil strata of the Jungmunji and the existing five-story stone pagoda, it showed that the ground was prepared differently and they were built over a fairly long period of time. Furthermore, I discovered that there was a wooden pagoda under the five-story stone pagoda by examining the soil strata map. Therefore, previous studies evaluated the arrangement of auxiliary buildings of Jeongnimsa temple and concluded that it was built in the early 7th century. It is hard to determine when the temple was built based on the arrangement of auxiliary buildings, because it takes a long time to build a temple and auxiliary buildings can be relocated during this long construction period. Rather, we have to admit that there are various arrangement patterns through minor changes in buildings from the one pagoda and one main building(Geumdang) arrangement.

선운사 입지의 공간구성과 가람 배치 (Space Composition and Layout of the Location of Seon-Un Temple)

  • 배영한;박정해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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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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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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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고창 도솔산(兜率山) 선운사(禪雲寺) 입지에 대한 풍수적인 특징을 현장조사와 문헌고찰을 통해 형세론적 관점과 이기론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이다. 풍수가 갖는 특징적인 요소는 자연과 조화를 최우선 하며 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입지선정의 기준점으로 삼았다. 신라시대 입당승들은 형세풍수가 처음 나타난 강서지역에 유학을 하였는데, 강서지법의 형세풍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사찰의 입지선정과 가람배치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운사는 도솔산 아래에 입지하여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었고,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도솔천(兜率川)과 도솔암(兜率庵)을 통한 불교적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의 실천이었다. 따라서 고창 도솔산(兜率山) 아래에 자리한 선운사 입지에는 다양한 풍수적 특징이 반영되었는데, 특히 도솔산 선운사의 입지에는 풍수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의미를 논리적으로 사용하였고, 불교의 가장 신성한 의미를 갖는 불교 교리와 사상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과 하나되는 모습을 실천하였다.

사찰림 관리자와 일반인의 인식조사를 통한 불교수목원 조성방안 (Establishment of a Buddhist Arboretum through a Survey of Temple Managers and Laypersons)

  • 이영경;이병인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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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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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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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오늘날, 산림자원은 생물종 다양성과 관광 및 휴양을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대두되고 있다. 사찰림은 우리나라 산림의 1.3%를 차지하고 자연생태가 매우 양호하나, 관리가 미비한 실정이다. 근래 불교계 내부에서는 사찰림의 지속가능한 관리에 기여하면서 산림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활용대안으로서 불교수목원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불교수목원의 조성방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사찰림 관리자 105명과 일반인 130명에 대한 인식조사를 수행하였다. 조사결과를 요약하면 불교수목원을 통해 사찰림 관리자는 불교문화 홍보와 사찰의 이미지 향상에 대한 관심이 더 높고, 일반인은 휴양과 교육에 대한 기대가 더 높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두 집단 모두 전통사찰의 유산가치 보존과 사찰림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특히, 두 집단 모두 불교수목원의 필요성을 시급성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사찰림 관리를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두 집단 모두 불교수목원은 배타적이지 않은 이용을 도모하고 사찰지역의 자연생태적 특성을 감안하여 조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요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불교수목원의 계획방안이 제시되었다. 첫째, 불교수목원은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하면서 불교 내부 구성원의 공감대 형성과 일반인에 대한 교육 및 홍보를 진행하여야 한다. 둘째, 사찰림 보전을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설정하며, 이와 함께 휴양과 교육기능을 강조하여야 한다. 셋째, 배타적이지 않은 이용을 도모하기 위해서 불교수목원은 다양한 계층의 이용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혼합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이용 만족을 높이고 교육효과를 달성하여야 한다. 넷째, 불교경전 식물 등 불교와 관련있는 식물을 통해 불교적 정체성이 있는 수목원을 조성하도록 한다. 다섯째, 식물수집에 있어서도 사찰의 이미지와 자원특징을 중심으로 하여 기존 사찰림의 보존 및 관리에 기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불교수목원은 보존 수집형 수목원과 전시 교육 휴양형 수목원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