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Neolithic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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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동위원소 분석을 이용한 당진 가곡리 패총 굴 (Crassostrea gigas) 의 채집 계절 연구 (Seasonality of shellfish gathering using oxygen isotope analysis of Crassostrea gigas from the Gagok-ri shell midden site, Dangjin)

  • 안덕임;이인성
    • 한국패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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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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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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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우리나라의 패총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패총을 주로 구성하는 굴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그러나 굴은 패각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특성으로 인해 완형의 패각 시료를 입수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산소동위원소 분석 및 고고학적 연구에 한계가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굴 채집 및 패총 유적 점유 계절성 연구를 위한 시론으로서, 패각 본체가 부서져도 비교적 단단한 조직을 갖고 있어 양호한 상태로 잘 보존되는 굴의 경첩 부위를 이용한 산소동위원소 분석을 시도하였다. 분석을 위한 시료는 당진 가곡리의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출토된 굴을 이용하였다. 분석 결과 가곡리 굴 시료의 산소동위원소 값은 - 2.02- -6.05‰의 범위 안에서 주기성을 보이며 계절적 수온 변화 주기를 나타내었다. 탄소동위원소 값도 산소동위원소 값의 증감과 유사한 변화주기를 보이고 있어 산소동위원소와 더불어 서식환경의 계절적인 영향을 잘 반영하였다. 이러한 동위원소 분석을 바탕으로 가곡리 굴 시료는 최고 수온기를 지나 수온이 하강하는 시점 즉 가을철에 채집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를 바탕으로 가곡리 패총은 가을철에 이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패총의 전반적인 점유계절에 관하여는 좀 더 많은 시료가 분석된다면 보다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굴의 경첩 부위를 이용한 산소동위원소 분석법은 고고학적인 계절성 연구에 적용 가능하고, 향후 고고학적인 문제의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경첩은 크기가 작아 분석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경첩의 작은 크기로 인한 시료 채취상의 문제는 미세채취기 (micromill) 를 이용한 고해상 (high-resolution) 의 동위원소 분석 방법을 이용하면 극복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韓國)의 전통적(傳統的) 식생활공간(食生活空間) (A Historical Study on the Achitectural Cooking and Storing Spaces in Traditional Korean Houses)

  • 주남철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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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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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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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
  • In the life style of the neolithic age, cooking and sleeping space was in one room dugout without differentiation of spaces, so to say one room system. Ro(a kind of primitive fire place) was used for both cooking and heating. However, in the early part of the Iron Age, the uses of Ro were separated into two major uses of cooking and heating. Especially, L-shaped Kudle(an unique under floor heating structure of Korea) was invented for the new system of heating, extending to Koguryo Period. The life style of Koguryo Dynasty could be seen through the mural paintings of tombs. For these mural paintings contain of cooking space(Kitchen), meat storage, and mill house drawing, we can recognize that houses were specialized many quaters according to their function. Also a kitchen fuel hole for preparing food was built without relation to L-shaped Kudle. But during Koryo Period, Kudle could be set up all over the room, the so-called Ondol(the unique Korean panel heating system) settled down. From this development of heating system, room could be adjacent to kitchen, and kitchen fuel hole and heating fuel hole be onething. This system was developed with variety, extending to Chosun Dynasty. In the period of Chosun Dynasty, a kitchen was made close to an Anbang(Woman's living room), and Anbangs Ondol was heated by the warmth of a cooking fireplace. Therefore Handae Puok, outer kitchen was used in summer. As for its storage space, it was seen that there were a pantry near the kitchen and a store house constructed as an independant building. In the latter, it was devided into a firewood storage, a Kimchi storage, and a rice storage, etc. Especially it is a unique feature that 'Handae-Duyju', an outer rice chest which keeps rice, was constructed as an isolated small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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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ized Seamless 라이프스타일 케어 스마트홈 서비스디자인 연구 : 포노 사피엔스 시대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Personalized Seamless Smart Home Service Design for Life-style Care in Phono Sapience era)

  • 박의정;김정우;최재붕
    • 한국IT서비스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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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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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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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Mankind has been attempting to live a happy and safe family life in a residential space. Due to the advent of the mobile phone in the 1990s and the smart phone in the 2000s, when the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age came, human life has been innovatively changed. The revolution of human civilization led to the Neolithic Revolution and the Iron Age, followed by a smart phone revolutionizing human life, and the revolution faces with the era of info-communication, smart phones became a daily life and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is an era of info-communication technology (ICT), creating a new paradigm across human life through technological developments such as artificial intelligence (AI), IoT, big data, mobile, and cloud. The smart home is actively researched in a direction to support the overall human life as a representative future residential culture paradigm. However, the study considering the needs according to the lifestyle, functional characteristics of each living space and human lifestyle of the Phono Sapiens era where smart phones live like daily life was relatively insufficient. In addition, research on smart home service design should be considered from the apartment residential space planning stage. Therefore, this study has significance in suggesting the direction of research on human-centered smart home service design considering the characteristics of each living space and resident's life-style in the smart phone era.

영종도 중산동 신석기시대 토기의 재료학적 분류와 물리적 특성 (Classifications by Materials and Physical Characteristics for Neolithic Pottery from Jungsandong Site in Yeongjong Island, Korea)

  • 김란희;이찬희;신숙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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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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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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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중산동 유적은 선캠브리아기의 석영편암층과 운모편암층에 걸쳐 분포하며, 풍화층에는 운모, 석영, 장석, 각섬석 및 녹니석 등 다양한 비가소성 광물이 다량 포함되어 유적지의 지반을 형성하고 있다. 중산동 유적 신석기시대 토기는 다양한 갈색계열을 보이며, 일부 시료는 속심과 내면을 따라 흑심이 발달하고 예리한 빗살시문과 손누름 자국이 관찰된다. 이들은 비가소성 입자의 조성과 입도 및 분급과 원마도가 다양하여 특징적 광물조성에 따라 4 유형으로 세분하였다. I-형은 장석질 토기로 장석이 주성분이며 석영과 운모를 포함하기도 한다. II-형은 운모질 토기로 녹니석화된 운모류, 활석과 투각섬석 및 투휘석의 조합을 이룬다. III-형은 활석질 토기로 미량의 석영과 운모를 동반한다. IV-형은 석면질 토기로 투각섬석과 미량의 활석을 포함한다. 중산동 토기는 내외면의 색상이 다소 불균질하다. I-형 토기군은 장석류 함량에 따라 적색 및 황색도에 차이가 있으며, III-형 토기군과 유사하다. II-형은 적색도가 다소 높아 IV-형과 유사하다. 유적지 토양은 토기에 비해 적색 및 황색도가 높다. 전암대자율은 0.088~7.360(${\times}10^{-3}$ SI unit)의 넓은 범위이나, 각 유형별 주성분 광물에 따라 구분된다. 토기의 부피비중과 흡수율은 1.6~1.7 및 13.1~26.0%의 범위를 보인다. 각 유형별 토기군은 I-형의 유기물 고착시료 < III-형 및 IV-형 < I-형 < II-형 (IV-형의 IJP-15 포함)의 순으로 공극률과 흡수율이 증가하며 뚜렷한 영역 차이를 보였다. 이는 비가소성 입자의 종류와 입도 등에 따라 물리적 성질의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산동 토기는 다양한 재료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유적지 토양은 중산동 토기가 갖는 모든 광물조성을 공급할 수 있는 지질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원료는 유적지 주변 석영편암과 운모편암의 풍화대에서 수급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구성광물, 입도 및 암편이 다양한 양상을 보여 원료 채취장소가 여러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에 따른 점토화 및 풍화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전의 식생 간섭사 (Vegetation Disturbance of Korea during the Pre-Chosun Dynasty Period)

  • 공우석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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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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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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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자연식생 간섭사를 시공간적 관점에서 복원하였다. 자연식생 간섭은 신석기시대에 본격화되었으며, 간섭은 초기에 저지와 해안에서 이루어졌으나, 후기에는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밭의 개간이 활발해지고, 특정 수종에 대한 선택적 이용에 따른 간섭이 있었다. 철기시대에는 밭농사를 위한 개간이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져 자연식생의 파괴가 계속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별채, 목재 가공, 철제 농기구 사용, 가축에 의한 땅 갈기 등이 도입되면서 경작지 확대를 위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개간이 장려되면서 다락밭이 조성되고, 땔감, 조선, 광업, 목판 인쇄, 개간 등으로 자연식생의 간섭이 심각해졌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주된 요인은 농경 및 벌채와 관련된 인간의 활동이었고, 그 외 일상생활과 산업에서도 산림 식생의 간섭은 발생했다. 신석기시대 전기의 괭이농사, 후기의 보습농사, 청동기시대의 가축에 의한 보습농사, 철기시대의 농기구를 이용한 농사와 삼림 벌채 등으로 농경에 의한 자연식생의 간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논농사와 밭농사, 신라의 밭농사, 통일신라 때 밭의 확대 개간, 고려 때 개간 장려에 따라 다락밭이 확산되면서 전국에서 산림 훼손 피해가 심하였다 벌채는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본격화되어 후기에는 섬이나 내륙으로 확산되었다. 밭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벌채는 계속되었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는 목공구가 발달하면서 자연식생의 제거가 쉬워졌다. 고구려의 밭농사, 백제의 앞선 목재 가공 기술, 신라와 가야의 광물 생산, 목재 가공, 개간에 따라 식생 파괴가 심했다. 고려 때에는 연료와 개간으로 나무가 벌채되었고, 대신 산에 소나무 등을 심으면서 마을 주변에서 소나무 숲 경관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자연식생 간섭을 가져온 기타 활동으로는 구석기 전기의 석기와 불, 신석기시대의 정착생활과 관련된 활동, 청동기시대의 제련, 철기시대 철제 생활용구 제작, 고조선의 온돌난방, 삼국시대의 아궁이·굴뚝을 갖춘 온돌방, 신라의 많은 숯 사용, 고려의 선박 건조, 전란, 목판 인쇄, 연료, 경제작물 재배, 전면적인 온돌난방 보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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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안 문암리 해안지층의 제4기 후기 퇴적층서화 환경 (Late Quaternary Stratigraphy and Depositional Environment of the Coastal Sediments along Moonamni, Kangwon Province, Korea)

  • 박용안;김수정
    • 한국제4기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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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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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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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신석기 유적지가 발견된 지역의 심부시추(기반암까지 시추됨) 자료에 대한 해안 퇴적층의 퇴적층서학적 연구를 실시하여 제 4기 후기의 퇴적환경을 규명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심부시추 지점은 3곳으로 해안에서 각각 200m, 400m, 600m 떨어진 곳이며, 이 논문은 해안선에서 약200m 떨어진 시추 지점(MA-1)의 중간 연구 내용의 일부로서 퇴적물의 조직 특성, 패각편과 미세화석의 함유와 동정 및 수소 이온 지수 측정을 근거로 한 퇴적 환경의 변화와 잠정적인 층서 퇴적 단위 해석을 시도하였다. AMS $^{14}C$ 연대 측정은 지표면(해수면보다 약 170cm 상위) 하위의 두 지점, 1,165cm와 2,085cm 깊이의 탄화된 토탄을 선택하였으며 각각의 연대는 36,700$\pm$900 yr. BP, 37,000$\pm$1000 yr. BP이다. 중간 연구 결과에 의하여 MA-1의 시추 퇴적층(25.5m)은 3개의 층서 퇴적단위와 부정합이 제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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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역의 전통마직물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Traditional Hemp-Textile in Kang-Reung Probvince Area)

  • 정완섭
    • 대한가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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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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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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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 In KOREA, the history of weaving is so long even in prinitive, there are the traces of fabric emmision using Spindle already in the Neolithic age. And coming up to the period of Three States, becoming active of cultivation of fibers, it can be known the variety of kinds and the production of fine products by improvement of new method of weaving using weaving machine. In the period of shilla state, there is a record of making the fine fabrics with 28 bracts. But wearing of silks fabrics was limitted for only the nobility and common people were wearing native thick hemp clothes. Also in the period of Korea state, they were wearing the hemp clothes by cultivation of hemp. The good quality products were worn by the King or the nobility and women in KOREA made their best with whole efforts to pay to the authorities with woven products of hemp clothes, so in the 14th year of King Chung- Ryul, King prohibited the presentation of fine hemp clothes by his order. By the end of KOREA state, before the production, common people was mainly wearing the hemp clothes. Coming up to the Kingdom of Chosun the sericulture was promoted by establishment of the sericulture encouraging low. Therefore the working hours of women were highly increased. The products of Song-do, Chin-ju for cotton clothes, those of Han-san-the same now as in old times-for ramie clothes, those of Han-Kyung province and An-dong for hemp fabrics were estimated as the best qualities. And the hemp clothes of Kang-won province is not so fine but is very useful and famous for mourning clothes and summer clothes for the farmer. It is true that our history of weaving was begun with hemp as a continous and precious friend of common people during all the historical periods-even though for a while it went backward because of chinese sil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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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지역 청동기시대 전기 생계자원(生計資源) 생산방식 (Patterns of Subsistence Production in the Early Bronze Age in the Seoul/Gyeonggi Region)

  • 이민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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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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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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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청동기시대 전기 생계경제는 문화유형, 환경적 요인 등에 의해 발현될 수 있는 생산방식의 다양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농경 수행의 강도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왔다. 이러한 상황은 신석기-청동기시대 이행을 얼마나 단절적으로 또는 연속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생계자원 생산방식의 점진적인 변화를 탐색할 수 있는 경로를 차단해 왔다. 본고에서는 청동기시대 생계자원의 생산방식이 연속·점진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청동기시대 전기 생산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다양한 요소에 따른 생산자원 생산양상을 복원해보고자 하였다. 청동기시대 전기는 문화유형과 생태적소가 다양하게 확인되는바, 특정 시기의 생계자원 생산방식을 복원하는 작업은 단편적인 한두 가지 분석으로는 달성되기가 어렵다. 따라서 생계자원 생산과 관련된 몇 가지 측면을 분리하여 분석·해석하고 종국에는 모두를 종합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적 경로가 될 듯하다. 구체적인 연구 방법으로 생계자원 생산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문화·환경적 요소-문화유형, 지리·지형적 요소, 토양생산성, 취락규모-에 따라 기능상 분류된 석제 생산도구 구성에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하였다. 분석 결과 서울·경기 지역의 청동기시대 전기 생계자원 생산양상에 있어 문화유형과 지리·지형적 입지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는 관찰되지 않는 반면, 취락규모와 토양생산성에 따른 생산도구 구성의 차이에서는 통계적으로도 제법 유의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취락규모와 종합생산토양 비율이 증가할수록 수렵·무구, 목가공구, 수확구가 증가하는 반면 어로구의 비율에 있어서는 그 반대의 양상이 관찰되었다. 취락규모나 작물재배의 생산성에 따른 수렵 혹은 농경에 대한 의존도 사이에 상관관계를 기대하게 하나, 취락규모와 토양생산성 비율 간의 회귀분석 결과에서는 상호 유의미한 관계로 해석되지 않았다. 즉, 이는 여러 요인에 따라 생산양상도 상이하며, 어느 단편적인 요소가 특정 취락의 생계자원의 생산방식을 채택하는데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전기 사회에서의 취락을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환경적 요소에 따라 생계자원 생산양상 검토가 필요하다.

십간십이지의 기원에 관한 문헌적 고찰 (The Literature Study about the Origin of Sipgan-Sipiji)

  • 나혁진;김기승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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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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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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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의 목적은 음양오행이 배속되어 있는 십간십이지의 기원과 의의에 대하여 고찰해보는 것이다. 십간과 십이지가 고대 중국 역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가설과 신화적인 기록이라고 할지라도 고전문헌에 기록된 자료의 내용,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자에 남겨진 기록 등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동양 인문사회과학에서 기필코 간과할 수 없는 십간십이지에 대한 시작점을 탐색해 나가고자 하였다. 십간십이지의 문헌적 고찰을 통해 이 부호체계는 신석기 후기 부계 씨족사회를 이끌던 황제와 그의 스승 대요에 의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본 연구자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제순시대에 남겨진 고대 천상대 유물이 십간과 연관된 10월력의 사용을 뒷받침하고, 갑골문에 나타난 십간이 신성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역법에 사용되었음을 볼 때 시간을 기록화하고자 하였던 역법의 시대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리학에 대한 이론체계의 논리성 담보, 그리고 통계적 사회과학 기법을 통한 증명 등 부단한 연구 노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근간이 되는 십간십이지에 대한 이 문헌적 고찰이 향후 관련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타두문화에 대한 일고찰 (A study in the Datuotou Culture)

  • 복기대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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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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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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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필자는 이 글에서 대타두문화에 관한 소개와 동시에 몇 가지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를 간단히 정리한다면 이 문화는 어느 문화의 한 유형이 아니라 독립된 문화로 볼 수 있다. 즉 경진지구와 장가구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발전한 문화로 당지의 후기 신석기문화의 전통을 이어받는 동시에 주변지역 문화영향을 흡수 발전시키면서 발전한 문화이다. 연대는 기원전 22세기 시작하여, 기원전 14세기 전후하여 결속된 문화이다. 이 문화의 전체적인 문화 요소를 볼 때 매우 복잡성을 띠고 있어 연구자들의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복잡한 문화 요소들이 이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는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 요소의 복잡성은 이 문화 요소가 처음 발견되면서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고학의 기본 이론과 인류학적인 이론에 대입해볼 때 하나의 독립문화로 보는데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전체적인 문화 성격을 볼 때 이 문화는 지역적으로 태행산이동쪽에서 발전하면서, 그 동북으로는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와, 서쪽으로는 중원문화권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지역간의 교차역할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현상을 역사적 사실과 연결시켜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역사에 있어서 당시 중원세력이었던 상나라가 현재의 북경지역까지 세력권이었다는 것으로 인식을 하는데, 이는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시기에는 중원세력은 아직 경진지구까지는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주지역 고대사와 결부시켜 볼 때 더욱 중요하다. 즉 당시 만주지역에 어떠한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으며, 그 문화는 어떠한 민족의 문화였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당시 대타두문화의 이웃 지역인 요서지역에서 이 시기에 발달한 청동기시대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이다. 이 하가점하층문화는 지역적으로 요서지역에서 발전한 문화이지만, 이 문화는 주변 지역의 동시대 청동기 문화에 큰 영향을 준 문화이다. 대타두문화에서도 이 문화의 영향은 매우 컷던 것을 본문에서 밝힌 바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복공은 대타두문화를 당지의 전통적인 신석기문화를 계승하면서 요서쪽의 하가점하층문화인 동이계통 문화, 그리고 중원지역의 문화가 결합된 문화로 보았다. 이는 전체적인 문화 요소와 그 성격을 볼 때 매우 타당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문화 관계를 고려해볼 때, 이 문화는 단순한 선사 고고문화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켜 볼 때 더더욱 중요한 지역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타두문화의 이해는 전체 동북아시아의 고대문화와 고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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