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an of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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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도덕원리와 칸트 (Confucian Moral Principles and Kant's Categorical Imperative)

  • 임헌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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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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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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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는 유가에서 도덕원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선(善)은 무엇이며, 그 선에 근거를 두고 제시된 도덕법칙은 어떻게 정식화되는 지를 살피면서, 유가의 도덕원리와 도덕법칙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 정초』에서 제시된 학적 윤리학의 성립요건을 어떻게 충족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유가 윤리학에서 선(善)의 문제를 살피면서 유가에서 선의 본원은 하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늘의 명령은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한다(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는 점에서, 인간의 본성이 도덕법칙의 원천이 된다고 하는 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선한 인간 본성이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맹자의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譬喩)」를 통해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본고는 유가의 도덕법칙의 함의를 풀어내고, 그 함의를 칸트가 제시한 학적 윤리학이 성립하기 위한 요건과 연관하여 대비적 분석을 하였다. 유가에서 도덕법칙의 근거로서 인간의 인(仁)한 본성은 인간의 자기정립의 근거이자,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이 마땅히 실현해야 할 의무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仁)의 구현방법으로 유가는 '충서(忠恕)'를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道)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충서(忠恕)'의 도(道)에서 제시되는 도덕법칙(역전환성의 원리, 동등고려의 원리, 자율의 원리 등)을 사서(四書)에 근거를 두고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의 도덕법칙은 칸트가 제기한 1) 보편법칙의 정식, 2) 목적 자체의 정식, 3)자율의 정식과 연관하여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을 논구하였다. 나아가 우리는 칸트가 제기한 황금률 비판을 살펴보면서, 칸트의 이 비판은 유가의 도덕법칙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그 대답을 추구하였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로리타(1962)>에 나타난 의상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ostume and the inner Symbolic Meaning expressed in the Stanley Kubrick's film )

  • 김혜정;이상례
    • 패션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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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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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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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By virtue of the development of mass media, the cinema, the composite space art taking the visual and auditory elements together, exhibits the actual life of the realities, thereby having a mutually close relationship to social, cultural and economic fields and continuing to generate the fashion code as well as reflecting the image of the times. Especially, fashion style in movies delivers their image and atmosphere and becomes the means for containing the personality, spiritual world and inner thinking of the characters in the movie and inducing its plot. Therefore, this study was intended to make clear that fashion fuses and shares with a diversity of genres such as movies and the like, becomes the cultural model that proceeds to create a new culture in relation to daily life and induces and presents the trend of contemporary fashion. For this purpose, this study attempted to analyze fashion style in the movie. Lolita is the fiction published by the Russian?American writer Vladimir Nabokov($1899{\sim}1977$) in 1954. It is the fiction that portrays the unethical love between Humbert, a middleaged man, and Lolita, a girl in her 10s. It was cinematized by the director Stanley Kubrick for the first time in 1962 and revived by the movie director Adrian Lyne in 1997. The character of Lolita has a younger look like a girl and looks immature in the movie directed by the movie director Stanley Kubrick and the movie director Adrian Lyne. But the character of Lolita has the commonality that she showed an incomplete female image of having a sexually freewheeling thinking. Thereby, this study sought to prove that the created fashion style of the character in the film not only became the clue to enable us to know the time and space background in the film but also helped the film develop effectively by performing a role of portraying the character in the movie. And it attempted to present that it becomes both the foundation for leading the fashion trend shown in contemporary fashion and the code of mass culture. Fashion style of Lolita in the movie appears to be reflected diversely in mass culture as well as fashion style in the contemporary times.

천수만 퇴적물에서 미량금속의 지화학적 특성 (Trace metals in Chun-su Bay sediments)

  • 송윤호;최만식;안윤우
    • 한국해양학회지: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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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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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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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에서는 미량 금속의 농축 가능성이 제기되는 천수만 퇴적물에 대하여 미량 금속의 조절 요인과 농축 정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천수만 전역에 걸쳐 27개의 표층 퇴적물을 채취하였으며, 입도, 비표면적, 유기탄소 및 탄산칼슘 함량과 주성분 및 미량 금속(Al, Fe, Na, K, Mg, Ca, Ti, Mn, P, S, Ba, Sr, Li, Co, Cr, Ni, Cu, Zn, As, Cd, Cs, Sc, V, Sn) 농도를 분석하였다. 퇴적물의 총 금속 농도는 크게 3 가지 요인(석영, 희석, 탄산칼슘, 굵은 모래 혹은 정장석)에 의해 조절되었는데 V, Co, Cr, Ni, Cu, Zn, As, Cd는 석영 희석 효과(quartz dilution effect)에 의해 Mn 및 As는 석영 희석 효과와 정장석(굵은 모래) 함량의 복합적 요인에 의해 조절되었다. 농축 인자(enrichment factor) 및 약산(1 M HCl) 용출 실험 결과 천수만 퇴적물에서 미량 금속은 농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으며 금속의 농도는 퇴적물의 지화학적 특성들로 잘 설명되었다. 특징적으로 As는 조립질 퇴적물에서도 세립질 퇴적물과 유사한 농도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조립질 퇴적물 내 Mn 산화물(용출 부분) 및 정장석(잔류 부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퇴적물 중 As의 농축 정도를 평가할 경우, 모래질을 포함하는 시료는 모래질 부분을 따로 분리하거나 $16{\mu}m$보다 작은 세립질 퇴적물의 함량이 10% 이상인 시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명암(明庵) 정식(鄭栻)의 한시(漢詩) 연구(硏究) (A Study on Chinese poetry of Myeongam Jeong-Sik)

  • 정시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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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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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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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고는 18세기 영남 지방의 선비였던 명암(明庵) 정식(鄭?)(1683-1746, 숙종9-영조22)의 시작(詩作)에 나타난 은일지사적(隱逸之士的) 특성에 대한 입체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지절(志節)에 있어서 대단히 강개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청나라가 들어선지 약 40년 후 출생했으나, '명암(明庵)'이라는 그의 호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명나라를 숭모와 추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데 변함이 없었으며, 평생 동안 벼슬을 거부한 채 초야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지사(志士)로 살다 갔다. 당시 명암이 살던 진주(晋州) 권역은 남명 이후 실천적 도학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지역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은거는 명암이 택한 실천적 행동의 한 양상이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명암의 시에 대해서는 여러 방향에서 논의가 가능한데 본고에서는 다음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째,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 즉 은거라는 측면과 관련해서 작품을 살폈다. 둘째, 시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은거시를 검토한다는 평면적인 관점에 머물지 않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무애인(無碍人)의 기상, 한거(閑居)에 내재된 자기 연민과 우울의 감정, 그리고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정감(情感)의 표출이라는 세 항목이 서로 유관(有關)함을 밝히고, 이들 각각에 대해 차례로 탐색하는 입체적인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원대(元代)의 왕역(王繹)·예찬(倪瓚) 합작 <양죽서소상(楊竹西小像)> 연구 (A Study of Portrait of Yang Zhuxi housed in the Palace Museum in Beijing)

  • 장준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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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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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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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양죽서소상>은 1363년이라는 분명한 연대를 지닌 원대의 희소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 최초의 초상화 이론인 "사상비결(寫像秘訣)"의 저자이자 중요한 초상화가인 왕역(王繹)의 유일한 현존 작이라는 점, 대표적 산수화가인 예찬(倪瓚)과의 합작이라는 점, 그리고 산수인물화 형식 초상화의 이른 사례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본래 원대의 고관대작 양우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명대 이일화(李日華)의 오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피사인물은 송강지역의 은거 문인으로 강남의 문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양겸이다. <양죽서소상>은 소식(蘇軾)과 같은 은자의 도상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은거 문인 양겸을 표현하는데 있어 적절한 선택이었다. 또 예찬이 그린 바위와 소나무는 군자, 문인이라는 전통적 상징성과 맞물려 작품의 의미를 강화시켜 주었다. 양식적으로는 백묘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동시기의 여타 초상화들과 차별화된다. 그러나 안면 표현의 경우 채색이 배제되었음에도 오히려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준다. 반면 신체의 표현에 있어서는 단아하고 절제된 서예적인 선묘를 구사함으로써 작품의 격조를 높이고자 하였다. <양죽서소상>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의적 성격이 강한 여타 초상화들과 달리 감상적 성격이 강하다.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열람, 감상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로간의 교유적인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피사인물 자신과 친구들의 심회를 담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

누항도(陋巷圖)와 누항록(陋巷錄)을 통해 본 이만부의 공간철학과 식산정사의 원형경관 (A Study on Lee, Man-Bu's Thought of Space and Siksanjeongsa with Special Reference of Prototype Landscape Analyzing Nuhangdo(陋巷圖) and Nuhangnok(陋巷錄))

  • 강병선;이승연;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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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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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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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식산 이만부가 1700년에 건립한 식산정사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산정사와 관련한 이만부의 생애와 은일관을 알아보고, 그의 정사경영의 결과물인 「누항록」과 《누항도》를 분석해 정사의 풍수적 입지와 영역성 및 원형경관을 추정하고, 은거한 선비가 자신의 공간에 담고자 했던 철학을 고찰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식산 이만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은둔형 유학자이다. 정사의 이름이자 이만부의 호인 '식산'은 마을의 뒷산(主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는 생각(思), 몸(躬), 말(言), 사귐(交)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다난했던 숙종년간 남인 집안의 이만부는 '식산'이라는 호를 통해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상하였다. 둘째,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입지, 공간구조, 건축물 및 조경시설물, 수목, 주변경관, 이용행태 등을 「누항록」에 기록하였고, 《누항도》화첩을 남겨 원형에 가까운 식산정사 복원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셋째, 이만부는 외노곡이 밖에서 보면 사면이 두로 막혀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깊숙하며 멀리까지 내다보인다는 풍수적 지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노곡마을 전체를 일컬어 식산정사라 했는데 이는 명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영역을 형성·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식산정사의 공간구성은 연식공간, 교육공간, 후원공간, 휴식공간, 채원 및 약초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과 루, 연지로 구성된 연식공간은 개인적 공간으로 호연지기, 천인합일의 흥취, 군자의 도리, 인을 생각하는 이만부의 거처이자 강학을 베풀던 공간이다. 다섯째, 양정재 영역은 교육공간으로서 양정재는 주역 몽괘에서 취한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의 학문과 덕이 크고 밝게 성장하기를 기원한 이름이다. 여섯째, 간지정, 고반대, 세한단 등으로 구성된 후원공간은 식산정사 가장 안쪽의 숲이 우거진 곳을 정리하고 자연 입석과 고송을 병풍삼아 작은 정자를 지을 축대를 쌓은 곳으로, 멈춤의 미덕과 은자의 여유, 군자의 지조 등에 관한 뜻을 담고 있다. 일곱째, 식산정사 담장 밖 동쪽 시내 건너 고목이 우거진 곳에 단을 조성하여 영귀사라 하고 괴석을 쌓고 화초를 심어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여덟째,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채소와 약초의 효능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이만부는 정사 내에 채원과 약초밭을 가꾸었다. 아홉째, 식산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각 공간별 건축물과 조경시설물에 대한 명명을 통한 의미 부여와 고사(古事)를 따른 식재를 통해 자신의 정사에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선박의 항해속도 연구 - $\ll$고려도경$\gg$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ailing Speed of Ancient Ships - especially on the average speed and the effect of the wind, the tide, and the man-power at the oar -)

  • 윤일영
    • 안보군사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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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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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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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Xu-Jing(徐競) an official of the Song(宋), a medieval Kingdom of China, wrote a book titled $\ll$Koryo Tu Jing(高麗圖經)$\gg$ which explains his travel to the Koryo as a member of diplomatic mission in 1123. $\ll$Koryo Tu Jing$\gg$ is the record of his personal experience in Koryo with many explanatory illustrations and especially contains 5 months' voyage record of his diplomatic fleet. His fleet set sail at a port located in the Ding Hai Xian(定海縣), Ming Zhou(明州) via a few islands of Koryo [Hyup Kye San(俠界山) , the Kun San Do(群山島) , the Ja Yon Do(紫燕島) , the Keup Su Mun(急水門) in Kang Hwa Gun(江華郡) and the Hap Gul(蛤窟) ] and finally arrived the Port Ye Song Hang(禮成港) . According to the Xu-Jing's record his fleet sailed the sea with the help of the favorable seaward winds and tides as the usual way of ancient sailing. The Xu- Jing's Fleet sailed the sea between the Mei Cen(梅岑), Ming Zhou(明州) of China and the Hyup Kye San(俠界山) of Koryo from about 5:00 a.m., May 24th(of the lunar calendar) to about 5:00 p.m., June 2nd. At this section, the average speed of the seaward winds was 19.45km/h and the average speed of the fleet which sailed only by the power of the winds was 6.29km/h. This means that 32.3% of the favorable seaward winds' speed was equal to the speed of the ancient fleet which sailed only by the power of the favorable seaward winds. The fleet sailed the sea between the Ja Yon Do(紫燕島) and the Keup Su Mun(急水門) from about 9:00 a.m., June 10th to about 1:00 p.m., the same day. At this section the fleet sailed by the power of tides in addition to the favorable seaward winds without oaring. The average speed of the winds was not different from that of former section and the average speed of the tides was 1.937km/h. And at this section the average speed of the fleet increased by 0.41km/h than that of the former section. This means that 21.1% of the speed of the tides was equal to the increased speed of the ancient fleet by virtue of the tides. The fleet sailed the sea between Keup Su Mun(急水門) and the Hap Gul(蛤窟) from about 1:00 p.m., June 10th to about 3:00 p.m., the same day. At this section, there were no seaward winds and the fleet sailed only by the powers of tides and oaring. And at this section, the tide increased the average speed of the fleet by 0.3114km/h and the fleet could sail at the speed of 4.3km/h. So we can conclude that the average speed of ancient fleet without any influences of the seaward winds and tides was 3.98 km/h. We can make use of the various sailing speeds of ancient fleets when judging their maritime activities. If we make use of the various sailing speeds of the ancient fleets as calculated in this article, we will be able to get various important informations about the certain ancient fleet's maritime maneuver. For example, we can infer the sailing routs of a certain fleet and the time when the fleet passed a certain spot by making use of the various sailing speeds of the ancient fleet. In this article I did not take account of the shapes of ships that consist of the ancient fleets and the sizes of the various ships and fleets. It was because that such factors would not change the foresaid conclusions serious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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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연원과 전개, 철학사상과 현실인식 (An origin and development, the thought and understanding of actual world of Noron)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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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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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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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노론(老論)은 숙종대에 결성된 이후 조선의 정국을 주도한 집권 세력으로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의 정국을 주도했다. 노론의 학문과 사상의 전개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17세기 후기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숙종대의 붕당 정치 시기, 둘째 18세기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영정조대의 탕평 시기, 셋째 19세기 이후의 세도 정치 시기, 넷째 19세기 후기에서 구한말에 이르는 시기 등이다. 이렇게 구분하여 노론의 연원과 전개 양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노론의 전반적인 특징은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 송시열을 존숭하였고, 존주자 양이적을 추구하는 조선중화론에 의한 군자당론을 주장하였으며, 일도설(一途說)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관한 학설에 대해 율곡 성리학을 보완적으로 계승하였고, 이단 배척과 정학 수호를 중시하여, 결국 천주교 탄압으로 표출된 양상으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노론계의 특징적인 학자로는 학문과 정치 양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1641~1721),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 등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17세기 이후의 치열한 권력 쟁탈 가운데에 사상적 맥락이나 학문사상이 정국 변화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광조의 지치주의 이후 조선시대 공론(公論)은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논의를 지칭하지만 사림이 분열한 이후에는 당파적 이해를 반영하는 당론(黨論)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송시열을 추숭한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존주자(尊朱子) 양이적(攘夷狄)을 기치로 삼고 왕이나 권세가들의 권력 남용을 제어하고 강력한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도의(道義)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17세기에 수립한 당시의 정치적 동기와 목표는 상실하고 결국 탕평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정조(正祖) 사후에 세도정권(勢道政權)을 만들어 내면서 정국을 장악하고 권세를 전횡하는 폐해로 귀결되었다. 노론의 현실 대응 논리와 행적은 정학일치(政學一致)라는 한국 도학정치의 특성이 극단화되어 표출된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진주 용호정원(龍虎庭園) 무산십이봉의 경관의미와 축산효과 (A Study on the Meaning and Mount Effect of Twelve Peaks of Musan in Yongho Garden, Jinju)

  • 이현우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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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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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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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경남 진주시 용호정원에 조성된 무산십이봉이 전통적 축산(Mount)의 원형이자, 지형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변화와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설계요소라는 전제 아래 시작되었다. 또한 연구 결과가 축산되는 유사공간의 재현 및 현대적 변용에 필요한 자료 및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또한 크다. 무산십이봉 축산을 통해 조영자가 추구하고자 했던 12봉우리의 상징성과 공간구성원리 그리고 시각구성상의 기능 및 효과를 조망경관적 측면에서 분석 또는 해석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용호정원의 핵심인 용호지는 비보 풍수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인공혈구의 전형적 사례로 풍수형국의 완결을 위한 비보(裨補)의 장치이자 용과 관련한 지명의 연계를 통해 온전함을 강화시키고자 했던 산물이다. 축산의 크기는 높이 2~3.5m, 지름 약 6~12m정도의 오성상 금성산형을 하고 있으며, 봉우리의 높이는 1.9~3.2m, 평균값은 2.5m로 밝혀졌다. 봉우리의 면적은 $35{\sim}138m^2$의 범위에 있고, 면적 평균값은 $73.4m^2$로 나타났으며 이에 비례한 체적은 $30.7{\sim}115.0m^3$, 그 평균값은 $62.5m^3$으로 추산되었다. 용호정과 소선 그리고 본채 터 및 용산재의 일치된 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과 속의 의미 부여를 통해 용호지를 피안의 세계로 상정하였으며, 조영자는 무산십이봉의 형상을 구현시키기 위한 의도로 호두 자리에서 대응되는 지점과 교차되도록 용의 골격을 형상화한 12개의 봉우리를 축산하고, 그 중심에 '여의주를 문 용이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형상'의 무산십이봉과 용호정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무산십이봉 주변 중경권역은 남북으로 금성산형의 산봉으로 둘러싸여, 용호지를 중심으로 동질감을 유지한채 다층의 층위구조를 보이는 바, 이는 유사 형태조화에 기인하며 무산십이봉의 조성 시 기획된 축산의도라 사료된다. 무산십이봉 축산에는 은폐와 노출을 통한 점진적인 경관연출과 전망-은신처이론 그리고 틀에넣기 기법 등의 공간 질서가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데, 이는 무산십이봉 각 봉우리의 노출과 둘러싸임 정도의 다양함, 전망과 시선차단 조합의 다채로움을 통해 경관의 심도와 기대감을 높이고자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산십이봉에 의해 '닫힌경관'은 흥미롭고 생기 있으며 매력적인 경관인식을 배태(胚胎)하는데, 특히 축산은 용호지와 용호정 주변에 관한 경관의 심도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지형설계적 차원에서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고 있다. 더불어 용호정에서 조망하였을 때 섬을 통해 또 다른 섬이 보이도록 하는 중층적 노출효과를 의도해 특수한 위치를 배려한 경관짜임의 결과인 12개 봉우리의 묶음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폐포대식세포의 부착에 의한 산소유리기 분비능 활성화 및 그 기전 (Adhesion-induced generation of oxygen free radical from human alveolar macrophages and its mechanisms)

  • 정만표;유철규;김영환;한성구;심영수;한용철
    • Tuberculosis and Respiratory Dis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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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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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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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
  • 식세포인 호중구나 단핵세포는 생체외실험에 사용하기 위한 세포분리법인 플라스틱 표면부착만으로도 세포활성화가 일어나 이후의 실험결과에 영향을 주고 이 과정에 부착분자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의 주된 면역세포인 폐포대식세포도 대부분 플라스틱 표면부착에 의해 세포를 분리하므로 사람의 폐포대식세포가 표면부착 자체에 의해 활성화되는지 알아보고 세포활성회에 부착분자와 같은 기전이 관여하는지 밝히기 위해 적어도 한 쪽 폐가 정상인 사람에서 기관지폐포세척술을 통해 얻은 폐포대식세포를 대상으로 표면 부착이 미치는 영향을 과산화수소 분비량 측정으로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1) 폐포대식세포는 플라스틱 표면에 부착되면 부착 자체에 의해 과산화수소 분비능이 증가하고 이런 상태에서는 PMA나 fMLP와 같은 추가적인 화학자극물질에 의해 과산화수소 분비가 증가되지 않았다. 2) 여러가지 표면중 A549세포단층에 부착될 경우에만 이후의 PMA와 fMLP자극 모두에 의해 과산회수소 분비가 증가하였다. 3) PMA는 세포 부착여부에 관계없이 과산화수소 분비를 자극하지만 fMLP는 폐포대식세포가 표면에 부착된 상태에서만 자극효과가 나타났고 이런 부착세포에서의 fMLP에 의한 과산회수소 분비 효과는 단백합성억제제인 cycloheximide, G단백차 단제인 일해독소와 $\beta_2$ integrin 부착분자에 대한 항체인 항CD18 단세포항체 3가지 모두의 의해 차단되었다. 이상의 결과로 사람의 폐포대식세포는 플라스틱 부착자체에 의해 활성화되므로 부착 이후의 자극물질에 대한 효과가 반감되지만 폐포상피세포와 같은 생물학적 표면에 부착될 경우에는 이후의 세포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PMA는 세포 부착여부에 관계없이 세포를 자극하는 반면 fMLP는 세포 부착상태에서만 자극효과가 나타나며 이런 부착세포에서의 fMLP에 의한 산소유리기 자극효과는 G단백결합 수용체를 통한 새로운 단백합성 과정으로 이루워지면서 $\beta_2$ integrin을 통한 폐포대식세포와 폐포상피세포의 부착에 의존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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