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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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전통식 소례복 연구 (Study on the Evolution of the Traditional-Style Soryebok in Korean Modern Dress)

  • 이경미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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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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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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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is study focuses on Korea's traditional-style soryebok, in terms of its foundation, progression, and structural features. The research methods employed here include literature analyses of relevant laws and an official daily gazette, and practical analyses of artifacts and photographic documents. Especially, the artifacts of heukdannyeong(black uniform for officials with a round neck) in the form of chaksu(tight sleeves) were examined, which was regulated as soryebok in Eulmiuijegaehyeok. The term "soryebok" firstly appeared in "使和記略"(Sahwagiryak) written by Park Yeong-hyo, a foreign envoy to Japan, in 1882. Emperor's invitation written in the book asked him to wear daeryebok at the ritual and soryebok to the banquet. Soryebok was not adopted in Gapshinuijegaehyeok in 1884. However, several illustrated documents of the modern banquets at that time reveal that sabok, which was included in the 1884 reform, was used as soryebok. According to the Gapouijegaehyeok in December 1894, courtiers were required to wear heukdannyeong as daeryebok, and add juui(topcoat) and dapho(sleeveless coat) as tongsangyebok when they visited the royal palace. In Joseon's first daeryebok system, the term "tongsangyebok" that had been used in Japan was employed before soryebok was used. According to Eulmiuijegaehyeok in August 1895, the term "soryebok" originated from a costume ritual for courtiers of the Joseon Dynasty. Soryebok featured heokbannyeong chaksupo, samo (winged hat for officials), sokdae(belt), and hwaja (shoes for officials). There are around 24 artifact pieces of heukdannyeong in the form of chaksu(tight sleeves) in the following locations: garments of Prince Heungwangun and Wansungun, the court artifacts, Korea University Museum, Yun Ung-ryeol's family housed at Yonsei University, and Kyungwoon Museum. Artifacts have mu(godet) pulled back and a topcoat-like triangular mu. In conclusion, heukdannyeong, traditional-style soryebok ha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modern dress because streamlined traditional clothes and newly introduced Western dress system were able to be combined.

조선후기 궁실건축에 사용된 격식기법의 유형과 변천 (The Architectural Crafts as a Code of Manners and Their Historical Changes in Palatial Buildings and Royal Residenc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 안소현;전봉희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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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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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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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grade of East Asian architecture is generally classified by the size, the shape of the roof, and the type of bracket set. The craftsmanship of columns, beam, purlin, stylobate, column base stone and paintwork is also a contributing factor for such classifications. These classifications can be found not only in historical documents such as 「Oksajo(屋舍條)」 of 『Samguksagi(三國史記)』 but also in 「house details regulations of residential architecture(家舍規制)」 of Joseon Dynasty. However, there are differences in detailed designs among the same grade of architecture regardless of the classification. In this research, the Palace, the Royal Residence(宮家), and the Jaesil(齋室) are considered as the Palatial Buildings and Royal Residences. And the advanced architectural o details which appear only in the Royal Architectures are defined as the 'The Architectural Crafts as a Code of Manners'. The Architectural Crafts as a Code of Manners is detailed design, which can be seen as fabrication of materials and supplementary factors. The Architectural Crafts as a Code of Manners used in the Palatial Buildings and Royal Residences reveal the types and their historical changes. This research will present a basis for the repair and restoration of cultural heritages to be carried out in the future, and also prevent them from further damages, thus help to preserve the cultural heritages.

Detection Trend of Helminth Eggs in the Strata Soil Samples from Ancient Historic Places of Korea

  • Seo, Min;Chai, Jong-Yil;Kim, Myeung Ju;Shim, Sang Yuk;Ki, Ho Chul;Shin, Dong Hoon
    • Parasites, Hosts and Dis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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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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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5-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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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For several years, we have conducted a series of studies on the patterns of ancient parasitism prevailing in the soil of rural and urban areas of past Kingdom of Korea. Actually, during our survey of paleoparasitology in archaeological sites of Korean peninsula, numerous ancient parasite eggs were discovered in the samples from the city districts of Hansung (Joseon) and Buyeo (Baikje), the palace moat at Gyeongju (Silla), shell-midden site at Bonghwang-dong (Silla to Joseon), and the reservoir found in Hwawangsansung fortress (Silla). By the paleoparasitological studies, with respect to parasitism in the high-density populations of ancient towns and cities, we have managed to catch glimpses of the patterns prevalent therein: a serious parasitic contamination of the soil in ancient urban areas, but not in rural areas of the past. Our historical research also proposed the plausible mechanism of parasite infection very serious indeed among urban populations in Korean history. Although city dwelling doubtless has accrued significant benefits for people and populations with agriculture, it can be equally supposed that living in such highly populated areas might have facilitated the spread of parasite infection.

경복궁 아미산의 조영과 조산설(造山說)에 관한 고찰 (Studies on the Construction and the Artificial Mountain Theory of Amisan in the Gyeongbok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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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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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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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사료 및 도상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경복궁 교태전 북쪽의 아미산 화계가 인공산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재검토하고 반론을 제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경회지를 판 흙으로 아미산을 조산했다는 논리는 그간 정설로 여겨졌으며, 의심 없이 대부분의 경복궁 관련 논저와 단행본에서 반복되어 기술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사료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아미산 조산설에 대해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기존 주장에 내재된 논리적 모순, 경회지 축조시기와 교태전 건립 시점의 불일치, 영조와 고종 연간에 제작된 도형사료에서 나타난 백악산과 아미산을 잇는 산줄기의 존재, 아미산 북쪽에 있는 흥복전에서 동쪽 담장을 경계로 높은 위차를 보이고 통행기능이 없다는 점, 중건 당대에 아미산을 풍수적인 아미사(蛾眉砂)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세종 연간에 경복궁 주산논쟁 결과 조치된 경복궁 내맥의 보존에 관한 주장이 그것이다. 아울러 본 연구에서는 교태전 북쪽의 언덕이 아미산으로 불러지게 된 기원과 잘못된 조산설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규명하였는데, 풍수용어 아미사가 음변되어 아미산이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중국 사천에 있는 도불(道佛)성지인 아미산을 모방한 의경의 조성과 천연두신을 퇴치하기 위한 벽사적 의미의 아미산 조영관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아미산 조산설은 천지조산(穿池造山)식 조경법식을 경회지와 아미산에 소급시킨 것으로 보이며, 1980년대를 전후로 주장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조사 되었다. 백악산과 아미산을 잇는 용맥은 일제가 1915년 경복궁에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를 기점으로 상당부분 절토되었으나, 교태전 동북쪽에 위치한 탐방로를 따라 낮은 둔덕이 약 70m 가량 이어져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이 지맥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표고분석 결과 녹산에서 아미산까지 불연속적인 언덕이 일정한 축을 이루는 것이 발견되어 아미산의 용맥을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아미산 용맥에 관한 기초연구를 통해 향후 경복궁 지형복원의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려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평정모(平頂帽)의 명칭 검토와 제작방법 (Name Review, and Production Method of Pyeongjeongmo, Housed by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 이은주;진덕순;이정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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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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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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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점의 '평정모' 유물에 대한 명칭을 검토하여 그간 사용해 온 '평정모'라는 명칭의 오류를 바로 잡고 유물을 토대로 제작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유물 재현에 활용하거나 궁중의례 재현용 관모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평정모'라는 명칭은 '평정건'에서 유래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녹사(錄事)는 유각평정건(有角平頂巾)을 쓰고, 서리(書吏)는 무각평정건(無角平頂巾)을 쓴다고 하였으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평정모 유물은 녹사나 서리가 사용하였던 평정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히려 세자궁 빈궁의 별감(別監)이나 수복(守僕) 등이 사용하던 흑주두건(黑紬頭巾), 또는 조건(?巾)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유물 조사를 통해 재단 방법과 바느질 방법, 완성된 형태와 접어 보관하는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정모의 구조는 동일하나, 접었을 때 정면에 드러나는 형태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평정모는 한 조각으로 평면 재단하여 접는 방법으로 입체적인 모자로 만들었는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조를 이루었다. 머리둘레는 55~59cm이며, 높이는 19.4~21.5cm이다. 1장으로 재단하기 위하여 머리둘레에 해당하는 부분을 식서 방향으로 재단하였다. 유물 <창덕 23820>을 토대로 재료 준비, 배접하기, 중심 장식 만들기, 바느질하기, 접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재현품을 제시하였다. 미리 계산된 독특한 형태로 재단된 흑색 주(紬) 겉감에 삼베를 배접하여 재단을 마무리하였다. 머리 윗부분은 검정색 실로 징궈 주었고 뒤 중심선은 소색 면사를 사용하여 3.5~4cm 간격의 블랭킷스티치로 고정하여 형태가 완성되었다. 앞 중심의 접힌 부분 안쪽에는 착용 시 앞쪽 형태를 곧게 유지하기 위하여 대나무 심을 넣고 흰색 면사로 일정한 모양의 스티치를 해서 고정시켰으며 뒤쪽에는 망건에 고정할 수 있는 길이 2.5cm, 너비 0.6cm 크기의 대나무 첨자(籤子)를 달아 착용 시 벗겨지지 않도록 하였다.

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로 살펴본 창덕궁 후원의 원형경관 탐색 (Study on the Prototype of the Rear Garden in Changdeok Palace through Gang Sehwang's "Record of Strolling with King in the Forbidden Garden")

  • 정우진;오이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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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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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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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를 통해 정조 연간 창덕궁 후원의 원형적 물상과 전후 변화상을 고찰한 것으로 옥류천, 만송정, 망춘정, 존덕정, 폄우사, 태청문 일대를 대상으로 하였다. "호가유금원기"에서 묘사한 옥류천 영역의 특징으로는, 소요정을 두른 담장, 부벽준의 회화 기법처럼 입체적인 산을 표현한 위이암의 형상, 태극정 앞의 지당이 있었다. 강세황이 포착한 태극정 앞의 지당은 "동궐도"에서도 확인되며,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칭경예식 때 원유회장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옥류천의 정비과정에서 철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후원 꽃구경의 명소였던 망춘정 일대의 특징으로는 조각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담장 내부에는 육면정의 구조를 하고 있는 망춘정이 있고, 그 초석은 백옥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천향각으로 추정되는 낭무가 망춘정과 인접해 있었다. 강세황은 폄우사의 행각, 태청문과 이를 두르고 담장도 자세히 묘사하여 "동궐도"에 나타난 공간구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조선시대 궁궐정원의 원형경관 복원을 위한 제안 (A Proposition on Landscape Restoration of Joseon Dynasty's Palace Gardens)

  • 안계복;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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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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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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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궁궐의 원형 복원문제와 관련된 논리적 판단의 준거들을 추출하고, 이를 경복궁과 창덕궁에 적용시켜 봄으로써, 그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있다. 또한 궁궐의 원형 복원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 방향을 제안하는데 의의가 있다. 우선 원형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로는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의 6 개념을 추출하였다. 현재 경복궁은 1888년을 시대성 기준으로 복원하고 있지만, 1395년의 시원성을 갖는 원형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현재 경복궁의 복원은 건물 위주로 복원하고 있지만, 추후 연구에서는 근대 촬영된 경복궁 사진을 밑바탕으로 경복궁의 원형경관이 복원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창덕궁 존덕정 일원은 약 240년 동안 통시적 불변성을 지닌 원형이 1884년경에 변형된 것이다. 1884년이라는 시대성보다는 통시적 불변성을 더 중요하므로 동궐도의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창덕궁 연경당 일원 원형에 대한 문제는 효명세자의 시원적 원형과 고종 때의 시대적 원형이 동일한 지역에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이므로 복원을 위해서는 새로운 해결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옥류천 지역은 1636년(인조 14년)에 시작하여 숙종, 정조를 거치면서 적어도 1884년(고종 21년)까지 약 250년간 불변성(不變性)과 통시성이 돋보이는 원형이다. 1884년 이후 옥류천 지역에 이루어진 변형은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옥류천 지역의 원형 회복을 위해서는 동궐도를 기준으로 변형된 경관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 밖에 옥류천을 건너는 다리, 샘, 담장, 초가들도 동궐도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해야만 한다.

효명세자 대리청정시기 창경궁 연향공간의 건축변화 연구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Change of Banquet Space in Changgyeonggung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 석진영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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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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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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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The planning acumen led by the crown prince stands out during the banquets that were held continually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around the late Joseon period from 1827 to 1929. If we examine the changes in banquet space during the period that Crown Prince Hyomyung ruled by proxy, the Jagyeongjeon(慈慶殿) in Changgyeonggung Palace, which was built during the time of King Jeongjo was repaired after the in 1827 during the reign of the crown prince and appeared in its changed form in Muja Jinjakin 1828. It is believed that the Jagyeongjeonwas expanded and repaired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to conduct banquets for important guests. Jagyeongjeon which was repaired during the crown prince's reign, is a space where banquets were continuously held during the three years that he reigned, and we can see that it is an important space for royalty where the authority of King Sunjo, Queen Sunwon, and Crown Prince Hyomyung was reflected. Yeongyeongdan(演慶堂) was a structure built in 1828, which is after the period when the Jagyeongjeonwas changed in 1827, and it is a space that emerged during the reign of the crown prince. Hwanchwijeong(環翠亭), which was constructed during the time of King Seongjong was changed after 1827 during the reign of Crown Prince Hyomyung and appeared in its changed form in Muja Jinjakin 1828. Hwanchwijeongwas the place where the Crown Prince Hyomyung stayed and planned banquets and it was repaired along with Jagyeongjeonin 1827. During his reign, the political intent of the crown prince was reflected not in superficial political spaces but in spaces where banquets were held and accordingly the main spaces for banquets and their related royal palace locations were changed or newly established. You need to briefly explain what this and Muja Jinjak are. New information is not provided in this paragraph. You have already established why the crown prince renovated the banquets and its significance in the first two paragraphs. You could just add "Jagyeongjeon(慈慶殿), Yeongyeongdan(演慶堂), and Hwanchwijeong(環翠亭) in Changgyeonggung Palace during his reign were changed and renovated during the time when the royal banquets of the 19th century were getting established. It was spaces that reflected the royal family and royal authority" to the end of the second paragraph and it would convey your intended meaning.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의 정비과정으로 살펴본 전통의 남용과 발명 (The Abuse and Invention of Tradition from Maintenance Process of Historic Site No.135 Buyeo Gungnamji Pond)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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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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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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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한국 전통 연지의 시원으로 평가되는 궁남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무왕의 연지 축조 기록, 사비왕궁으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 및 화지산 이궁지 남쪽에 위치한 지리적 정황에 의해 궁남지로 비정되는 한편 사적으로 지정 복원되었다. 본 연구는 궁남지의 복원정비 과정에 나타난 진정성 왜곡과 전통의 발명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되었으며, 연구의 요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마래방죽[마천지]으로 불려왔던 궁남지는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3만여 평의 광대한 자연 저습지의 상태로 존재했다. 궁남지 복원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홍사준은 1940년대만 해도 마래방죽에 백제시대 궁남지 유적으로 추정되는 섬과 석축시설이 남아있었고 그 위에 전각 및 정원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또한 화지산 이궁터의 조사 후 서동설화와 연관시켜 마래방죽을 궁남지와 동일시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이는 궁남지 복원정비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특히 홍사준이 제시한 스케치 도면 및 부여도엽에서 마래방죽의 형태와 규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방죽의 형태는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 속 상황과 근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2. 궁남지의 축소정비는 1960년대 추진된 경지정리사업에 의해 농경지로 불하되고 남은 잔여의 면적이 수습된 결과였다. 1965~67년에 있었던 최초 복원공사 이래 수차례 시행된 궁남지 정비를 통해 드러난 문제는 고고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후대의 시각으로 추정복원 되면서 경복궁 향원지의 구성을 그대로 복제한 데 기인한다. 구체적으로, 연못 안에 섬과 정자를 놓고 교량으로 섬과 육지를 연결시키는 구성은 궁남지가 경복궁 향원정을 모델로 만들어졌음을 방증해 준다. 하지만 교량설계에 참조된 취향교 조차도 조선시대의 형식으로 보기 어려운바 당시의 잘못된 복원설계의 동기와 발상이 궁남지의 가치를 크게 저하시켰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전통조경의 소재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디자인 전범을 그대로 모방한 것은 경복궁이 갖는 미적 표상과 기호를 지향한 것으로서, 궁남지가 그와 유사한 장소 권위를 획득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3. 궁남지는 애초부터 진정성이 결여된 채 정비된 사적이었기 때문에 정비 과정에서 경관의 왜곡과 전통성의 남용을 통해 유적의 역사적 맥락이 과감히 표방되어 갔다. 이러한 역사 재료의 무비판적인 활용과 왜곡을 불사한 정비방식은 1960~70년대 박정희 체제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문화정책과 맞닿아 있다. '만들어진 전통담론'의 맥락에서, 박정희 시기의 문화정책은 국민의 기억에서 이상화된 과거를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가시적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이전의 유적을 보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이 부각된 사적지가 전국 곳곳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궁남지가 초기에 순수한 보존의식으로 축소되어 정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본래 공간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건조물들이 들어서고 기형적으로 확장 정비되어 갔던 사실은 그러한 국가주도 문화정책의 영향이 컸다고 판단된다.

조선왕실(朝鮮王室) 태실석함(胎室石函)의 현황(現況)과 양식변천(樣式變遷) (Taesil Seokham Styles of the Joseon Royal Family)

  • 심현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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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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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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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고는 조선시대 왕실의 태실에 유존하는 태실 석함(이하 태함)의 현황을 살펴보고, 제작연대를 바탕으로 형식을 분류하여 고고학적인 태함의 양식을 설정하고 그 편년을 시도한 것이다. 태함은 태실을 처음 조성할 때 매납하는 유물이지만 명문이 각자되지 않으므로 태함 자체만으로 연구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태실 조성 시 함께 제작하는 태지석과 아기비의 명문을 찾아 살펴보고 문헌기록을 대조하여 그 제작시기를 밝힘으로 인해 태함의 제작시기도 밝혀 낼 수 있다. 먼저, 편년의 결정적 요소는 태함을 구성하는 함개와 함신 모두임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태함의 변화와 양식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조선 왕실의 태함의 변화는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상자형으로 만들었으나, 15세기 중 후엽에 과도기를 거쳐 15세기 후엽에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이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6세기 후엽에는 앞 시기의 양식에서 발전하여 태함에 돌기가 부착되는 등 장식성이 가미되나, 이는 예술성보다는 기능성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이 다시 17세기 초에 재현되며, 17세기 중엽 후부터는 함개에만 돌기가 있거나 무보주의 원추형 함개 또는 절구형의 함신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과도기의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다시 보주가 부착된 원추형 함개라는 새로운 양식이 18세기 전엽~18세기 중엽 초에 출현하며, 이것이 다음 시기인 1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나, 함신의 감실이 일단벽호형의 방형으로 바뀐다. 계속해서 18세기 중엽에는 함개는 앞 시기의 양식을 유지하나 함신은 감실이 다시 한 면이 ㄷ모양의 열쇠구멍형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와서 다시 가장 전형적인 양식인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의 태함이 재출현하여 태함의 양식이 이 형태가 가장 정형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중엽에는 함개가 반원형에서 상부가 편평한 장방형의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여 쇠퇴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를 다시 양식상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 초에는 태함이 아직 정형화되지 않아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았으나(I단계; 1401~15C 중엽), 15세기 후엽부터는 자체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정형화되고(II단계; 1477~1641), 시기가 지나면서 다시 일부 돌기나 보주가 부착되는 등 장식성이 가미되나(III단계; 1660~1754), 결국 18세기 말에는 정형화된 양식이 재출현하다가 조선 말기인 19세기 중엽에는 간략화되어 쇠퇴과정을 겪게 되는 것(IV단계; 1790~1874)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함의 양식과 편년 결과는 문헌기록이 부족한 상태에서 앞으로 태실지에서 태함만 확인되더라도 그 조성시기와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