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oseon Dynasty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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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경관의 사회 구성론적 해석 (An Interpretation of the Insa-dong Landscape from a Social Construction Viewpoint)

  • 김연금;김해경;최기수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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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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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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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에서는 인사동 경관을 사회구성론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이는 경관의 가시적인 측면만을 중요시하거나 경관경험에 근거한 주관적 인식을 다루는 기존의 연구와는 달리 경관 변천의 역동적 과정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관을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의 사회적 주체의 역할과 경관과의 상호작용을 중요시 다룬다. 선행연구를 통해 볼 때 물리적 환경, 제도, 이미지는 경관 구성의 주요 요소가 된다. 조선조의 관인방과 대사동에서 연유한 '인사동'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 골동품을 판매하는 전통문화공간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획득하였고, 이후 현대적 화랑이 입점하면서 '문화'의 의미가 화장되었다. 아시안 게임,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적 행사 시, 서울의 차별성이 있는 장소로 정비되고 홍보되면서 전통문화의 거리로 공식화되었다. 이는 내부인의 자발적 동기보다는 국가권력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 말 2000년 초 골동품 산업의 쇠락에 대처하기 위해 인사동의 내부인들은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임대료 상승 및 인사동의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던 전통업종과 문화업종이 감소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문화지구지정, 지구단위계획 같은 제도를 이끌어냈다. 과거의 경관은 인사동에 '전통'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전통'이라는 이미지 활용과 유지를 위해 경관이 재구성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재구성된 경관을 인사동의 전통경관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구성 과정은 여러 행위자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근래 장소마케팅 등 경관과 사회와의 상호작용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빈번한 만큼, 경관과 사회적 행위자들의 역학관계에 대한 파악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경관이 사회적 변화에 열려 이에 대응하면서 재구성된다는 관점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구체적 사례 연구를 통한 연구의 심화는 경관을 매체로 다루는 조경 분야에 다양한 실천적 가능성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편 「산천(山川)」 항목에 수록된 수경(水景) 요소의 특징 (Typological Characteristics of Waterscape Elements from the Chapter 「Sancheon」 of the Volumes Gyeongsang-province in 『Sinjeung Donggukyeojiseungram』)

  • 임의제;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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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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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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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용어의 개념과 차이점을 명료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전통 수경(水景) 요소의 쓰임을 고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문헌분석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조선 전기 관찬(官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편 "산천" 항목에서 수경과 관련된 지명을 발췌하여 다양한 수경 요소를 파악하고, 사전적 정의와 원문에 대한 해석 및 유사 사례 고찰을 통해서 수경 요소별 특징을 도출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산천" 항목에 수록된 수경은 22개 요소였으며, 이를 입지와 물 흐름의 방식에 따라서 하천경관, 호소(湖沼)경관, 해안경관으로 분류하였다. 2. 자연적 물 흐름을 항시 유지하는 하천경관은 물줄기의 위계와 관련된 선적(線的) 형태의 '수(水)', '강(江)', '천(川)', '계(溪)'와 감입곡류하천 특성으로 인해서 형성되는 점적(點的) 형태의 '탄(灘)', '뢰(瀨)', '폭(瀑)', '저(渚)'로 구성된다. 3. 일정 구역에 모인 물 형태를 갖는 호소경관은 '강'의 중하류에 형성된 넓고 잔잔한 지점을 일컫는 '호(湖)', 하천 중상류 유로 상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연(淵)', '담(潭)', '추(湫)', 평지에 모인 물로서 '지(池)', '당(塘)', '택(澤)', 그리고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샘을 지칭하는 '천(泉)', '정(井)'으로 구성된다. 4. 해안경관에는 육지와 섬, 혹은 섬과 섬 사이 공간을 지칭하는 '량(梁)'과 '항(項)', 바다를 향해 돌출된 '곶(串)', 바닷가 모래사장 형태의 '정(汀)', 그리고 도서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이 반영되어 높은 출현 빈도를 보인 '도(島)'가 포함된다. 연구 결과를 통해 전통 수경 요소의 다양성을 파악하였으며, 이들이 입지적, 경관적, 기능적으로 차별화된 특징을 반영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도출하였다. 이를 통해서 선조들의 자연경관에 대한 관심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형성된 자연에 대한 심미안이 인공을 최소화하고 자연이 주체가 된 우리 전통정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음악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간보 창안의 주체 (The Subject of Jeongganbo Invention from the Viewpoint of Music Education)

  • 임현택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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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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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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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2015년 9월 23일 교육부는 초 중등교육법 제23조 제2항에 의거하여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지향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였다. 이에 따라 음악과 교육과정 또한 일부 개정되었는데, 그 큰 틀은 2009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악과의 영역 안에서 정간보는 초등학교 3~4학년의 교육과정에서 이미 노출되고 있기는 하지만, 정간보의 명칭 유래 및 창안 배경을 비롯한 악보 읽는 방법, 음높이 및 음길이 나타내는 방법 등에 관한 학습 내용은 5~6학년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정간보는 15세기 중엽 조선조 세종에 의해 창안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유량악보로 알려져 있으며, 현전하는 악보 중 가장 오래된 악보인 "세종실록악보"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악 관련 전문서적은 물론이거니와 음악교과서에서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한 주체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근거에 입각하여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하였다고 주장하는지 가려낼 필요가 있겠다. 본고에서는 먼저 초등학교 5~6학년 음악교과서에서 소개되는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하였다'는 명제에 대한 근거를 세종의 신악 창제, 세조의 정간보 창작, 세종의 한글 창제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2009 개정 음악과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발행된 초등학교 5~6학년 6종 검정교과서를 대상으로 정간보 창안의 주체가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그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바람직한 음악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세종의 신악 창제, 세조에 의한 1행 16정간의 정간보 제작, 세종의 한글 창제 등 역사적 기록 및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세종이 정간보의 창안 주체임이 현재로서는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만으로 명확하지 않은 일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교육하는 음악학계의 태도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정간보 창안의 주체자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드러나기 전까지 "세종이 정간보를 만들었다" 또는 "창안하였다"는 내용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정간보는 세종조에 창안되었다" 또는 "정간보는 세종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추정된다"로 바꾸어 기술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동궐도상의 존덕정 영역에 나타난 무편액 건물의 조영사적 고찰 (Historical Studies on the Nameless Buildings at the Jondeokjeong Area in Donggwoldo)

  • 정우진;심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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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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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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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창덕궁과 창경궁이 공유하는 후원인 동궐 후원은 조선왕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기술과 사상이 집약된 후원으로서 단연코 한국 조경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휴식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상징적 의례와 인재양성의 장이 되었던 동궐 후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훼철되어 과거의 면모가 일축되었다. 창경궁 북쪽의 후원권역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어, 현재는 주합루에서 옥류천에 이르는 몇 개소의 영역이 후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중에서 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존덕정 영역은 인조 연간에 옥류천 개발이 완료된 직후부터 화원(花園)으로 조성된 정원으로서, 심추정, 척뇌당, 폄우사, 망춘정, 천향각, 청심정 등의 정자가 존덕정을 중심으로 승경의 요점지에 자리 잡은 화목류와 연지 중심의 공간이었으나 현재 존덕정과 심추정, 폄우사만이 남아 있고, 그 외의 정자들은 멸실되거나 변형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각 건축물에서 감상되는 수요소, 식생, 점경물 등을 분석함으로써 원형적인 조영의도를 구명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동궐 후원의 진정성 있는 복원 정비와 조경 시설물을 둘러싼 환경의 보전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정보 구축을 위하여 존덕정 영역의 정자인 심추정, 망춘정, 척뇌당, 천향각, 청연각의 5개 정자의 역사적 기록과 조영실태가 고찰되었다. 이들은 "궁궐지"와 실록에는 명칭이 언급되어 있지만 "동궐도"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데, 관련된 문헌자료가 망라되어 고증이 시도되었다. 이중 척뇌당과 심추정은 동궐도상에서 추정 건물을 뚜렷하게 밝힐 수 있었고, 존덕정 서북쪽에 위치한 용도가 불분명한 건물은 천향각 내지는 망춘정이었다고 추정하였으며, 태청문의 담장이 본래 청연각에 둘러쳐져 있었던 담장이었다는 가설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제껏 동궐도와 동궐 후원연구에서 난관으로 여겨졌던 창덕궁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용도와 명칭이 불분명한 건물일곽에 대해서는 연산군과 숙종이 사용했던 기록이 발견되었고, 궁궐 사람들 모르게 유희생활을 하는 임금만의 별당이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조선후기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 고찰 -대보름 연작형(聯作型) 세시기속시를 중심으로- (A study on Sesi Keesokshi in the late Joseon Period -Focusiong on Serial Sesi Keesokshi-)

  • 양진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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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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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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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한시(漢詩)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민간의 풍속과 민중의 생활 상을 상세하게 다룬 일련의 연작형 기속시(紀俗詩)가 다수 창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속시는 그 소재(素材)와 내용에서 특정 지역의 풍토, 지리, 기후, 물산(物産), 인정(人情), 세태(世態), 생업과 노동 등 민중의 생활 현장 전반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특징에 따라 기속시는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반영하고, 토속적 정서와 민중이 생활 감정을 중점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기속시중 소재적 측면에서 민중의 연중행사인 세시풍속을 읊은 시를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라 하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명절이나 세시 절기에 벌어지는 세시풍속만을 소재로 연작형을 이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이는 실학의 발전과 민족의식의 고조, 신분질서의 동요와 민중 역량의 성장,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예술사 전반의 변모와 함께 특히 한시사(漢詩史)에 나타난 '조선시(朝鮮詩)' 정신의 대두(擡頭)등이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다양한 체험과 견문, 민족과 민중의 생활감정을 중점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기속시 중 소재적 측면에서 민중의 연중행사인 세시풍속을 읊은 시를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라 하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명절이나 세기 설기에 벌어지는 세시풍속만을 소재로 연작형을 이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이는 실학의 발전과 민족의식고조, 신분질서의 동요와 민중 역량의 성장,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예술사 전반의 변모와 함께 특히 한시사(漢詩史)에 나타난 '조선시(朝鮮詩)' 정신의 대두(擡頭)등이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다양한 체험과 견문,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 등 작가적 체험과 의식성향이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 창작의 중요한 배경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연작형 세시기속시는 584수(首)로 확인되며, 그중 대보름 풍속을 소재로 한 시는 178수(首)로 전체의 1/3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절기(節氣)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전래민속을 한시의 소재로 직접 수용함으로써 민족의 생활양식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기층민의 현실생활현장에 밀착하여 그들의 질박하고 활기찬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분방 발랄한 민중상을 창조하고 민중의 염원과 삶의 애환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싸움', '노구반공양'이라는 풍속을 소재로 삶았던 것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베트남의 고려인삼 인식에 대한 소고 (The history of awareness for ginseng in Vietnam)

  • 옥순종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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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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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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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역사상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의 교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한중일 동북아 중심의 역사 서술과 지리적으로 멀어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 중에 베트남은 한국 사신들과 교류가 많았다. 유권 문화권, 한자 문화권으로 정서가 통하고 언어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서로 관심을 보여 왔으며 사신들의 활발한 접촉으로 국교 수립과 관계없이 문물이 전파되고 우호적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전반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꼽히는 민망시대에 고려인삼은 지금의 한류처럼 인기를 끌었다. 142명의 자손을 둔 민망황제의 정력이 인삼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민망황제는 공을 세운 신하나 연로한 신하에게 선물로 인삼을 하사하여 충성을 유도했다. 이같은 전통은 후대 황제에게 까지 이어졌다. 또한 태국, 캄보디아, 프랑스와의 전쟁에 파견된 장군 및 병사들에게도 인삼은 지급되었다. 베트남은 국가 이념강화에 인삼을 적극 활용했다.이 같은 전통으로 고려인삼은 베트남에서 프리미엄 인삼으로서 인식되었다. 인삼의 베트남 유입은 1) 중국 황제의 하사 2) 북경으로 조공을 간 베트남 사신의 구매 3) 사무역 4)국제 무역이 활발했던 류큐, 일본의 중계무역 5) 조선-베트남 사신의 교유 등 5가지 경로를 유추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인삼을 본격 구매하기 전에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으로서가 아니라 양국 사신들의 교유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북경에서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 선비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1760년 북경에 온 베트남 고관 여귀돈이 조선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고려인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은 18세기에 이미 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확인해준다. 양국 사신의 교유를 통해 상대 나라의 풍습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황실에서도 인삼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경으로 사행을 간 사신들 중에 인삼에 조예가 깊은 서거정, 서호수 등 실학자들이 많았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베트남에서는 신라 시대에 인삼에 대한 인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중반 안남도호부의 책임자로 파견돼 베트남을 10년간 통치했던 당의 고병은 신라인 최치원과 친밀한 관계로 고병이 인삼에 대한 지식을 베트남 상류층에 전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베트남의 인삼인식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멀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베트남의 인삼 인식시기 추정은 양국의 접촉 과정에 유추한 가설로서 이를 문헌으로 실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베트남의 역사서와 문집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고전 시문과 회화를 통해 본 연(Nelumbonucifera)의 활용과 애호 행태 (Utility and Care Patterns of Lotus Shown in Classic Poetries and Proses, Painting)

  • 김명희;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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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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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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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의 목적은 옛사람들이 '연'이라는 식물소재를 활용한 방법과 그로부터 취하고자 했던 가치와 의미, 감상 태도 등에 대한 실제적 사례들을 고찰하는데 있다. 이를 위한 연구의 방법은 연에 대한 감상과 관념세계가 반영된 시문과 회화를 고찰하고 해석하는 기술(description)적 연구방법이 사용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의 관상 가치는 대규모 집단식재와 부지규모의 소규모 식재, 분연(盆蓮)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특히 대규모 면적에 집단적으로 식재된 연은 여타의 초화류와 차별화되는 독특한 경관을 제공하였다. 별서와 후원 등 사적인 공간에 연지를 조성하고, 연을 애호한 여러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소는 연이 개화할 무렵에 아회의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작은 연지조차 조성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분지를 이용하여 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또 꽃과 잎, 줄기와 연밥 등 세부요소 모두의 관상가치가 뛰어난 점은 연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둘째,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향원익청(香遠益淸)'으로 표현된 향기는 연의 중요한 매력 중 하나이다. 전통정원에 있어서 연은 향기를 제공하는 후각적 요소로 활용되었다. 옛사람들은 연의 향기를 단순히 즐기는 것에 더해 '군자의 품격'에 비유되는 상징물로 여겼으며, 이를 시문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셋째, 연은 청각적 요소로도 활용되었다. 즉, 수면과 넓은 연잎에 빗방울이 어우러져 내는 소리를 '연당청우(蓮塘廳雨)' 또는 '하당야우(荷塘夜雨)'라 하여 운치 있는 소리로 즐겼다. 넷째, 연꽃을 구경하는 여름놀이를 '세속에 오염된 마음을 씻는다'라는 의미의 세심(洗心)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류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왕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계층이 즐겼다. 이 밖에 연과 관련된 풍류로 큰 연잎과 속이 빈 줄기의 특징을 이용하여 술을 마시는 방법인 '벽통주(碧筒酒)' 혹은 '하심주(荷心酒)', 상비주(象鼻酒)가 있다. 또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연밥과 '채련곡'은 남녀 간의 연애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기호(記號)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많은 '채련곡'이 전해지며, 남녀 간의 애정을 묘사한 여러 풍속화에는 연당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은 고대 이래로 사상과 종교 등 문화적 배경을 초월해 폭 넓은 계층이 애호하여 왔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연이 갖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사찰 등 종교시설과 관련된 식재 사례를 다각적으로 고찰하지 못한 점은 본 연구의 한계이며 추후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의학필담 형식과 내용의 상관성 및 변천에대한 연구 - '~ 록(錄)', '~ 의담(醫談)', '~ 필어(筆語)'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ncern and change of form and matter in medical conversation by writing)

  • 김형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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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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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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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조선후기 통신사 파견을 통해 일본에 현존하는 필담창수집(筆談唱酬集)은 과거 한일 양국의 성신교린(誠信交隣)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이다. 그 중에는 당시 양국 의원(醫員)들 간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필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본 연구자는 제목에 '~ 록(錄)', '~ 의담(醫談)', '~ 필어(筆語)'가 포함된 필담창수집 중 의학필담을 중심으로 형식과 내용이 어떤 상호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 록'은 중요 사실을 기록한 다른 텍스트의 부록이거나 해당 텍스트 내용 일부분에 의학필담을 부수적으로 담고 있다. 이들 텍스트는 양국간 생생한 교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의학필담도 핵심적 내용만 짧은 분량으로 요약되어 그 사료적 중요성이 크다. '~ 의담'은 당시 양국 의원을 중심으로 진행된 의학적 담화 내용만을 본격적으로 정리한 의학필담집이다. 이들은 일본 의원의 치험례 정리 및 확인으로부터 의론(醫論) 강화를 통한 적극적 의견 개진으로 변화되는 각 시기 의학적 주요 관심사의 변천 흐름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 필어'의 특성은 현장감 강화를 위한 대화 방식이다. '필어'의 의미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신변잡기적 내용까지 빠짐없이 기록하여 현장감이라는 필담의 성격을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약물과 병증중심의 의학 관련 필담과 박물학적 내용 위주로 구성되어 있고, 시문(詩文)은 의원들과 관련된 작품들만 수록함으로써 '록'의 기록성과 '의담'의 분화적 성격을 함께 지닌 특성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능원(陵園) 정자각(丁字閣)의 첨차초각(檐遮草刻) 변화에 대하여 (A Study on the Change of the Cheomcha-chogak of the Neungwon-Jeongjagak)

  • 전종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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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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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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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첨차초각은 부재의 장식을 위한 그림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문양의 그림은 봉정사 극락전에서 보이는 덩굴문양 단청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봉정사 극락전의 첨차에서는 단청뿐만 아니라 하단에 연화두식을 새기면서 비로소 첨차초각이 시작되었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초기적인 덩굴초각을 가진 첨차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부재 표면에 직접 초각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후 덩굴초각은 오랫동안 전통 목조건축에서 중요한 첨차의 장식 기법이 되었다. 정자각은 임란 이후부터 조선 말까지 지속해서 조영된 건축물로서 대부분 덩굴초각을 새긴 첨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첨차초각은 처음에는 초각줄기가 주두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모양(상향형)으로 시작되다가 종래에는 재주두를 기점으로 그 줄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하향형)으로 변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과정과 그 원인을 살펴보았는데, 상향형이 하향형으로 변화는 과정 중에는 방향성과 연관이 없는 새로운 초각의 연결 방식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기간은 경종의릉과 인조장릉의 정자각이 지어지던 시기로 화반초각에서도 연꽃이 사라지기 직전의 과도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첨차초각의 방향성이 변한 원인으로는 이익공의 내부에 두 단에 걸쳐 새겨지는 덩굴초각이 주두를 기점으로 상하 양방향으로의 분리가 일어났는데 이는 초익공 내부에 하향형 초각을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변화된 초익공의 덩굴초각은 나아가 첨차초각의 방향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게 되었다. 이 글은 2018년 투고한 「능원 정자각의 화반초각에 대하여」의 후속된 글로서 정자각에 있는 여러 부재 중 하나인 첨차라는 부재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에 나머지 초각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전경(典經)』 「제생(濟生)」편 연구- 강증산의 권능(權能)·지혜(智慧)와 관련하여 - (A Study on the Chapter 'Saving Lives' from The Canonical Scripture: Regarding the Power and Wisdom of Kang Jeungsan)

  • 고남식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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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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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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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제생」편은 총 44절 1개 장으로 강증산(姜甑山, 1871~1909) 성사(聖師)의 권지(權智)에 기반한 내용으로 병의 치료에 대한 구절이 대부분이며 이외에 자연 재해(災害)로부터의 구제, 일상 인사(人事)에서의 갈등의 해소, 제생을 위한 인간 각자의 지혜의 계발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실에서 세계가 팬데믹 병겁을 겪기도 했지만, 병의 치료는 당대 하층민들이 겪는 병고(病苦)를 긍휼히 여겨 치료해준 내용들이다. 강증산은 권능과 지혜로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로 인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순조롭지 않은 현상으로부터 민중이 겪는 피해들을 구원하고 구제해주었으며, 인간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소해주었다. 또 「제생」편에 지혜라는 것은 세상을 보는 높은 견해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정의 하에 기록된 내용은, 지혜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해 나갈 수 있고 나아가 남을 구제해 줄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제생」편 구절들의 특성을 바탕으로 『전경』 각 편에 나타난 강증산의 제생 양상을 찾아본 후 구절의 변이를 『대순전경』 6판과 비교해 본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강증산의 제생은 조선 말기의 일상에서 위정자들의 폐해로 고난 및 고통에 처한 당대 일반 민중들을 구제하는 전무후무한 절대적 행적임을 볼 수 있다. 둘째, 『전경』 일곱 개의 편에 천지인으로 용사(用事)된 강증산의 권능에 의한 제생 관련 구절들이 분포되어 각 편의 제목이 나타내는 의미를 이루고 있다. 셋째, 「제생」편은 단지 치병만 기록된 『대순전경』 6판과 다르게 자연재해로 인한 민중들의 생활의 어려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며 일상사에서 겪는 당대 정치사회적 현실과 관련된 고난과 고충을 구원해준 것이 특질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범주에서 구원과 구제의 내용을 『전경』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병만을 치료해준 일을 담고 있는 『대순전경』의 치병 장과 구분되는 면으로 『전경』 「제생」편만이 갖고 있는 특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