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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문화재 보존·관리에 있어서 원형개념의 유입과 원형유지원칙의 성립, 그리고 발달과정 (The Introduction of the Concept of "Original Form" to the Heritage Conservation and Management and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Principle of "Maintaining the Original Form")

  • 이수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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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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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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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원형'과 '원형유지'는 국내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에 있어서 철학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적인 개념이자 원칙이다. '원형'은 20세기를 전후한 근대기에 국내에 그 용어가 유입된 이후 구체적인 의미에 대하여 심도 있는 논의나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던 탓에 여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을 지닌 용어로 남아있다. 또한 용어에 대한 개념이 구체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1999년 문화재보호법에 '원형유지' 조항이 신설되어 문화재를 보존 관리하는 기본원칙으로 명문화되었지만 유효한 원칙으로 실무에 적용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첫 단계로 원형개념이 유입되는 과정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원형유지의 원칙이 문화재 보존 관리 및 활용의 공식적인 원칙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문헌검토와 사례연구를 통해 개념이 유입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양식'을 중심으로 원형개념이 고착화되는 경향, 그리고 시대 중에서도 최초의 시기, 또는 가장 이른 시기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그로인해 고정된 시점에 맞추어 문화재를 보존관리하면서, 원형이 지녀야 하는 다양한 측면의 속성들을 간과해 온 결과 원래의 재료 등 원형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손실된 채 문화재를 보존하는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태도와 경향이 문화재를 다양한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 특히 그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와 흔적을 담아내는 물질적 산물로 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시대적인 역사인식이 단층적이며, 원형유지의 원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원칙의 타당성에 대하여 보존철학적 관점에 근거한 심도있는 논의가 부족하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원형에 대한 개념정의는 문화재가 지닌 다양한 가치를 고려하여 그 개념이 다면적 다층적으로 재설정되어야 하며, 문화재의 종류별 특성을 고려한 원형개념이 정립되어야 하고, 원형유지 조항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을 검토하여 실제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제언하였다.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의 1837년 「혼수발기」 속 관복(冠服) 고찰 (A Study on Nam Nyeong-wie Yun Uiseon's Gwanbok Described in the List of Wedding Gifts in 1837)

  • 이은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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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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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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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혼수발기[婚需件記]"는 1837년 8월 순원왕후가 부마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에게 내린 혼수품을 기록해놓은 물목이다. 노란 종이에 궁서체로 작성된 이 발기에는 4종의 관복과 평상복, 장신구 등 55종의 복식류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9세기 전기 남자 관복, 부마 관복, 1품 관복 등을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녕위에게 보낸 "혼수발기"의 복식 기록을 통해 19세기 전기 관복제도를 파악할 수 있었고 "덕온공주가례등록"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기록임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남녕위는 순원왕후로부터 네 종류의 관복을 받았는데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사비(私備) 관복, 즉 조복과 상복 흑단령, 시복 홍단령과 함께 국가에서 제공하였던 공비(公備) 관복, 즉 공복 일습이 포함되어 있었다. 공복은 부마의 명복(命服)으로, 관례복과 혼례복으로 사용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관복이었다. 셋째, 조복으로 금관, 대홍항라조복, 폐슬, 패옥, 후수, 항라백삼, 목화, 상아홀, 서대가 마련되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1837년 당시까지는 조복용 중단으로 백삼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넷째, 공복으로 대홍항라공복과 남설한초더그레, 남생경광주창의, 초록왜항라쿠리매가 마련되었다. 이 기록을 통하여 관복의 안감이 더그레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공복 안에 창의와 쿠리매, 즉 두루마기를 입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섯째, 상복으로 사모, 금치쌍학흉배, 유록운문갑사관대, 남운문갑사더그레, 남쌍문초창의와 당자적화문사쿠리매가 마련되었는데, 특히 금치쌍학흉배를 통해 일반 관원과 차별화된 부마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섯째, 시복으로 분홍광사관대, 남광초더그레가 마련되었다. 시복용 단령은 무늬 없는 분홍색 광사를 소재로 사용하였고 안감으로 남색 더그레를 사용하였다. 일곱째, 의류 소재는 가례 시기인 8월에 적합한 항라, 왜항라, 설한초, 쌍문초, 광초, 갑사, 화문사, 광사, 생경광주 등을 사용하였다.

수막새의 동범와(同范瓦)에 대한 검토 - 월성해자 출토 단판연화문 수막새를 중심으로 - (An Examination on Dongbeomwas if Convex Roofing Tiles)

  • 이선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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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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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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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경주 월성은 파사니 사금(婆裟尼師今)때 축조된 신라의 왕성으로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적이다. 그러한 월성을 에워싸고 있는 월성해자는 전시(戰時)에는 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는 방어적 역할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조경의 역할을 담당한 시설물이다. 월성해자 유적의 발굴은 1985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다량 다종의 수막새들은 신라 초기부터 통일기를 거쳐 그 이후 시기까지 신라시대 막새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그 가치는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기와는 왕궁(王宮), 사찰(寺刹), 산성(山城) 등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진 건물에서부터 일반적인 기타 건물지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수량에서도 다른 유물들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가장 취약한 분야로 남아있으며,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이 무궁하게 남아있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최근 수많은 발굴을 통한 기와 수량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반적인 문양의 계보와 제작과정 등에 한정되어 진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여기서는 월성해자 출토 단판연화문 수막새를 대상으로 동범와에 관한 판별을 하고자한다. 그 동안 유사와(類似瓦), 동형와(同形瓦)등으로만 판단되었던 막새들의 세부적 특징을 비교해 "동범와"임을 정확히 확인하고자 한다. 동범와에 관한 정확한 판단방법, 동범와로 묶인 형식의 시간적 순서 배열과 동범와가 출토되는 위치 등을 파악함으로써 동범와 판별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결과 다종의 수막새에서 하나의 범(范)으로 찍어낸 막새, 즉 동범와를 판별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동범와들은 출토위치에서 다시 하나로 묶이는 공통점이 확인된다. 동범와의 출토위치를 통해 월성해자의 시기적인 변천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와 주변유적인 안압지와의 연관성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와범이 확인되지 않아 역으로 막새들의 세부적 특징을 비교해 동범와를 파악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 다. 하지만 여기서는 동범와라는 용어사용에 있어 동범요소의 정확한 확인 후에 사용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월성해자 동범와를 통해 월성해자의 지역별 시기를 알아보았다.

스마트공원 개념 정립 및 공원 이용자 인식에 관한 연구 - 대구 IoT See 시범사업 공원 이용자를 대상으로 - (A Study on the Concept and User Perception of Smart Park - Focused on the IoT See Park Users in Daegu City -)

  • 이형숙;민병욱;양태진;엄정희;김권;이주용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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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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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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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신 정보통신기술이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면서 우리의 일상은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스마트시티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반면, 조경분야에서는 기술진화에 의한 사회변화에 대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스마트공원의 개념을 정립하고, 공원 관련 스마트 기술 도입 현황을 파악하며, 기존에 조성된 스마트공원의 서비스에 대한 이용자의 인식과 활용도를 파악함으로써 향후 스마트공원 조성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관련 문헌 및 선행연구 고찰, 전문가 토론, 국내외 사례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국내 최초로 스마트공원 시범사업이 시행된 대구시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의 이용자를 대상으로 스마트공원에 대한 인식 정도와 서비스 만족도를 조사하였다. 연구결과, 스마트공원이란 다양한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이용자의 공원 체험을 향상하고, 효율적으로 공원을 유지 관리하며, 도시가 직면한 사회 및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지속가능한 공원으로 정의할 수 있다. 현재까지 공원에 도입된 스마트기술은 인공지능 CCTV, 스마트 가로등, 미세먼지 알림장치 등 주로 안전 및 환경 분야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이러한 기술이 도입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 홍보 부족 및 관리인 편의 중심의 기술도입으로 인하여 실제 이용자의 인식 정도는 매우 낮은 편이었다. 특히 역사성 있는 공원의 역사정보 전달을 위한 AR서비스 활용이 가장 저조한 반면, 태양열 벤치나 WiFi 등의 시설의 활용도가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향후 스마트공원 조성 시 안전 및 환경 관리, 편의성 증진을 위한 서비스 뿐 아니라, 이용자가 체감할 수 있고, 이용자 요구에 맞는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병기체제(兵器體制)의 연구(硏究) (This Study of the Arms Used in the Three Kingdoms)

  • 김성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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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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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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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In order to unravel the characteristics of arms used in the 'Three Kingdoms,' Kokuryo, Silla and Paikje. the classification and the developing procedures of the arms should be first discussed. At first, the basic arms of the soldiers of Three Kingdoms were iron swords, iron spearheads, and bows. During that period, swords attached a ring pommel were commonly used. But after 5A. D. a sword with a decoration pommel appeared. Infantry generally used iron spearheads. From the late 4A. D. the long spearheads were broadly used in cavalry battles. In the late 6A. D. infantry mainly used long spearheads, and this resulted in the foundation of long spearheads units. There were two kinds of bows: Short Bow whose arch is small and Long Bow whose arch is long. It is known that the Short Bow was widely used in Kokuryo and Paikje up to 5A. D. In the early era, infantry used Long Bow, yet it was vastly used after 6A. D. when a castle's strategical value was great and defending a castle was. significant. Above mentioned, as basic combat weapons, iron spearhead and bow were fundamental. In particular, the spearhead was the essential weapon to a soldier. Yet, arrow gun and hook-shape cutters were important weapons. Especially, after 6A.D., when a castle became strategically pivotal in military, the arrow gun became the important weapon. This resulted in the foundation of arrow gun units. Hook-shape cutters were used to snatch horsemen or to climb up to fall the castle. Yet, the cutter was not the Three Kingodoms' basic weapon. In addition, the three stages of arms development in the Three Kingdoms are formation stage, development stage, and settlement stage. The formation stage was the period when premitive military unit appeared in the Three Kingdoms. It ranged from 1B. C. to the mid 3A. D. At that time according to regions. there were two weapon systems operating: North area including Kokuryo and the northern part of Paikje and South area including Silla, Kaya and the southern part of Paikje. ln North area a sword with a ring attached at the end of the holder, iron spear with neck and mid-size flat holder and iron arrowhead with an extension to fix, were used. In this period, during a war calvary units were mostly used and their weapon systems seemed possibly to succeed in that of Kochosun. In the development stage, when LoLang's influence on surroundings became weak, Koguryo, Paikjae and Silla had directly contacted each other. In the late 3A.D. to the early 6A.D., Silla achieved a drastic improvement in weapon system. This was the period when Kokuryo played a leading role in arms race. Kokuryo's arms manufacturing techniques passed onto Silla, Kaya and Paikje. In combat strategy a joint operation between infantry and calvary prevailed even if their military tactics were different. In a calvary battle heavily armed horsemen played import roles at this period. The horsemen and even horses were heavily guarded with iron armors. After all, the appearance of fully armed horsemen implies the very need of powerful destructive forces in weapon system. At that time, basic weapons were a big sword with a ring attached at the end of the holder, swallow's tail-shape spear with neck, and iron spearhead with neck and an extension. The settlement stage began at the mid 6A.D., when it was the revolutionary period in the arms development history. Of course, actual proofs and picture documents were not sufficient enough to penetrate full scale of the weapon system. But, according to historical circumstances and historic records, it is very certain that this period was the peak in arms development. In this period special military units, such as infantry-calvary companies, Archery units and Long spear units, that executed particular duties with special weapons, were founded. This becam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ttlement stage.

독일 통일과정에서 문화유산 조사와 보존관리 - 고고학 조사와 유적 보존을 중심으로 - (Research on Cultural Heritage and Its Conservation in the Process of Unification in Germany - Focusing on Archaeological Investigations and Site Conservation -)

  • 김종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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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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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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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20세기 초반까지 독일 고고학에서는 유물 유적에 대한 객관적이고 섬세한 관찰을 중시하는 연구 경향과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 혹은 자민족 우월주의의 입장에서 물질문화의 연구를 통해 과거의 민족 혹은 종족의 자취를 찾아 그들의 시공간적 범위를 확정하려는 시도가 공존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구 서독에서는 전통적인 독일 고고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유물 유적의 관찰과 목록화, 그리고 편년과 분포의 확인에 집중하였다. 구 동독에서는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의 합법칙적 발전 과정을 물질 자료를 통해 입증하려는 시도와 함께 과거의 문화유산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를 사회주의의 이념에 충실하거나 혹은 그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평가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서독과 구 동독의 고고학은 분열 이전의 독일 고고학의 전통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었다. 분열 이후에도 고고학자들의 교류가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었고 구 동독의 고고학이 구 서독의 고고학, 그리고 유럽 고고학 전체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의미 있는 나름의 연구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동 서독 고고학의 통합이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어느 한쪽에 의한 일방적인 통합이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비교적 단시일 내에 통합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고고학 연구와 문화유산 보존의 측면에서는 공통의 연구사적 전통을 공유하고 상호 교류(공동 조사와 학술 교류 등)에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다. 비록 맑시즘과 주체사상에 의거한 형식화된 해석이라 하더라도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필요한 경우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을 통해 남북한 고고학 및 문화유산 보존의 간극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는 작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사례는 이러한 작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데 나름의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온라인 신문 아카이브 연구 국내외 구축 사례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Online Newspaper Archive : Focusing on Domestic and International Case Studies)

  • 송주형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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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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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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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신문의 역할은 정부의 비판과 감시다. 공공의 문제에 해설과 논평을 하는가 하면 다양한 여론을 형성하고 전달한다. 메타데이터가 확실한 사진 기록물을 담고 있으며, 지역신문의 경우 로컬리티 확보의 중요한 도구다. 신문에 실린 광고와 신문의 편집 역시도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신문의 기록학적 가치 때문에 도큐멘테이션 전략을 수립할 때도 신문은 늘 우선적으로 수집이 고려되는 기록물이다. 신문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한 신문 아카이브는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이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의 연구를 위한 자료로도 활용이 된다. 신문의 교육적 활용인 NIE에도 이용되지만 신문 아카이브는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디어 자산을 통합 관리하는 MAM의 핵심에 아카이브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신문 제작뿐만 아니라 신문사 경영 등 전 영역에 걸쳐 새로운 역할을 온라인 아카이브가 하게 될 거라는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1991년 기사통합 DB인 KINDS가 서비스를 시작했고, 네이버에서는 뉴스 라이브러리라는 온라인 신문 아카이브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KINDS의 경우 초기에는 뜨거운 반응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용률이 저조한 상태이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신문사가 빠져 있고, 이용자 인터페이스도 불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공예산이 투입되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나, 지방지에 대한 접근성 등은 큰 장점이다. 고신문의 경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지속적으로 디지타이징을 하고 있다. 개별 신문사들의 경우도 아카이브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자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의회도서관에서 국립인문기금과 함께 역사적 신문을 디지타이징 하는 'CHRONICLING AMERICA'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각 주의 대학과 역사협회, 공공 도서관에 기금을 줘 매년 10만 페이지의 지역신문을 디지타이징하고 있다. 영국 역시도 국립도서관이 중심이 되어 'The British NEWSPAPER Archive'라는 온라인 신문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는데, 미국과 달리 유료로 운영된다. 이곳 역시도 합동정보시스템위원회의 공공예산이 투입되었으며, 지금도 구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개별 신문사들은 아카이브 솔루션을 구매해 온라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ProQuest Archiver, Gale Cengage-NewsVault가 대표적인 아카이브 플랫폼으로 신문 자체가 표준화되고 규격화되어 있는 만큼 이를 통한 아카이브 구축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국내의 온라인 신문 아카이브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과감한 투자 등이 요구된다.

국가지정기록물 관리현황과 개선방안 연구 (A Study on Management Present and Improvements of National Records Designation System)

  • 최재호;이영학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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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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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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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한국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공공 및 민간기록물이 훼손되고 유실되었다. 2007년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법률"로 전면 개정되면서, 민간에 소산되어 있는 주요 기록물을 파악 보존하기 위해 '국가지정기록물'을 지정하는 제도가 보강되었다. 중앙기록물관리기관에서 일정한 기준과 범위를 정하여 '국가지정기록물'을 지정하여 소장기관을 후원함으로서 공공기록물의 한계를 보완하고 한국사회의 역사상을 풍부히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 기대하고 만든 제도이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총 14건의 기록물이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되었다. 본고에서는 어떠한 기록물들이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되었으며, 소장처들은 국가지정기록물을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해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국가지정기록물 지정제도의 관리현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더불어 '국가지정기록물' 소장기관의 담당자를 면담하여 국가지정기록물 소장처의 기록물 관리현황과 서비스 현황 및 국가지정기록물 지정 효과를 살펴보고, 국가지정기록물 지정제도의 개선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의성 사촌리 가로숲의 현황 및 천연기념물 명칭에 관한 고찰 (Current State of the Roadside Forest in Sachon-ri, Uiseong and the Perspectives on the Name of the Natural Monuments)

  • 최재웅;김동엽;김미희;강방훈;정명철;조록환;김상범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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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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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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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전통마을숲인 당산숲 비보숲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서, 수백 여년 전 마을주민들에 의해 조성된 후, 현재까지 주민들에 의해 보전 관리되고 있는 국가적 문화자산이다. 천연기념물 제405호(명칭: 의성 사촌리 가로숲(義城 沙村里 街路숲))로 지정되어 있는 경북 의성군 사촌리 전통마을숲은 당산숲으로서, 사촌리 입향조에 의해 600여년 전 조성된 유서 깊은 숲으로 알려져 있다. 숲에서 지내던 당산제는 1700년대에 기령산 자락의 당집으로 옮겨 지내게 되었고, 현재도 이 당집에서 지낸다. 숲 안에서 지내던 당산제가 숲 밖으로 바뀌어졌다고하여, 당산숲으로서의 성격, 위상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파악된다. 그러나, 현재 이 숲은 당산숲으로서 이해되지 않고 있으며, 가로숲이라는 이름으로 비보숲으로서만 소개되고 있다. 문화유산이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문화유산의 크기와 특색의 관계를 바꾸는 새로운 축조, 파괴 또는 변형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부여된 의미, 가치가 변형되지 않아야 한다. '의성 사촌리 가로숲'은 약 $920{\times}90m$ 규모로서, 건개천인 하천변 양쪽에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회화나무 위주의 낙엽활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학자수(學者樹)로 알려진 회화나무 거목을 통해 이 숲의 역사, 유래가 유교문화(儒敎文化)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촌리 당산숲은 하천변 수변림(水邊林, riparian buffer)으로서 현재의 명칭인 가로숲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명칭인 '의성 사촌리 가로숲'은 '의성 사촌리 당산숲'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 이곳은 현재 가로숲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당산숲으로서 올바로 명명되어 전통문화 유산으로서의 위상과 가치가 보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피 헌원(軒轅)에 바치리라" -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청말(淸末) '네이션(민족)' 구조의 확립 - (The Myth of Huang-ti(the Yellow Emperor) and the Construction of Chinese Nationhood in Late Qing(淸))

  • 심송교;조우연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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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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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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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고에서는 청말(淸末)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전통적인 황제(黃帝)전설과의 괴리를 살피고, 나아가 근대중국 '네이션(민족)'구조 형성의 역사과정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또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사회적 충돌에 대해 살피고자 하였다. '네이션(혹 민족)'은 일종 '상상(想像)의 공동체'로서 근대적인 창조물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상'을 하는 행위자들은 항상 그 시선을 아득히 먼 과거에로 돌리고자 한다. 즉 민족의 기원에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황제(黃帝)'라는 존재가 바로 이러한 청(淸)왕조 말기라는 시대상황의 수요에 의해 '중화민족'의 시조로 정립되었던 것이며, 20세기 중국 민족의 기호[심볼]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제(黃帝)라는 이 기호[심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민족의 창조는 청(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자 한 반만혁명(反滿革命)이라는 현실 정치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혈연적인 연관성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공동체 구성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에 관한 '상상'은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논란의 초점으로 된 '황제기년(黃帝紀年)'과 '공자기년(孔子紀年)'의 논쟁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민족관념의 충돌이었다. 또 일부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황제(黃帝)'의 종족개념을 확대하여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로써 '소민족주의(小民族主義)'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일부 만주족(滿洲族) 출신의 학자들도 '황제(黃帝)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역사기억을 새롭게 쓰고자 시도하게 된다. 결국 근대 중국의 민족구조를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분석해봤을 때, 지극히 구조적인 기호[심볼]로써 '황제(黃帝)'관념은 사실상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하나의 치열한 투쟁의 장(場)이었던 것이다.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은 역사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성적(理性的)인 접근보다는 항상 민족주의라는 감성적(感性的)인 목소리를 앞세우곤 한다. 특별히 중국은 경제대국화와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중화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 형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러한 시도가 극에 치달을 경우, 자칫 동아시아에 커다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 역자(譯者)로서는 이러한 서양에서 이미 거의 폐기되다시피 된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일변도의 접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나남출판, 2002)가 한국 학계에 널리 소개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특히나 중국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관한 본고가 가져다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물론 본고 역시 이론의 틀은 "상상의 공동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이론의 틀에 '중국민족의 형성' 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끼워 맞춰 봤을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한 시도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틀에로의 대입이,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검토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람에서 본고를 번역하여 학계에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