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orye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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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석(舃) 연구 (A Study on the Form of Seok(舃) in the Period of Joseon)

  • 최규순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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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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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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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Seok, shoes worn for rituals that originated in China, is worn as part of a formal dress in Korea. The Seok for men were worn with Myeonbok(冕服: kingly ceremonial costume) and Wonyugwanbok(遠遊冠服) and the Seok for Jeokui(翟衣: queenly ceremonial costume) and Jangsam(長衫). Myeonbok, Wonyugwanbok, Jeokui and Jangsam were ceremonial costumes of ancient times. This paper examines Seok, which has never been the focal point of a study, and focuses on the period of Joseon(1392~1897). It was possible to concretely identify its changes in each of the periods and genders by means of the literature and picture data. It turns out from this paper that a unique Korean style emerged in the days of Kings Yeongjo(英祖: 1694~1776) and Sunjo(純祖: 1790~1834). The Seok that were imported from China after the Goryeo period included a neck part, which was a departure from its original form. However, during this period, fences were added on the top of the shoes, and rings were added to thread laces in Seok from China. Women wore their Seok in this period with different ornaments in accordance with the different situations.

현대 패션에 표현된 저고리 스타일 연구 (A Study on Korean Jacket Style Expressed in Modern Fashion)

  • 이현주;채금석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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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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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5-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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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is study researches the form of the Korean jacket point through relic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hat have the traditional Korean style and grace of the Goryeo period as well as the form of the modern Korean jacket starting point. Several conclusions can be drawn from the Korean Image of the Korean jacket that can be classified into types expressed in the jacket style of modern fashion. Therefore, we will analyze traditional elements of Korean beauty through the "Korean image" on how to express it in modern fashion.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modern design creation and Korean culture. It is important to begin the world through the application of traditional elements to recognize Korean beauty as well as to utilize historical dress based on function and popularity to continue the effort.

한국사상사에서의 묵가(墨家) 비판 - 벽리단론(闢異端論)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 (The Critic on Mohism in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s Centered on the Theory of Rejecting Heterodoxy)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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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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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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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글은 선유(先儒)들의 묵가에 대한 비판을 개괄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고려말부터 시작하여 조선조 후기에 이르는 묵가 비판의 전개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 이전의 문헌에서는 묵가나 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를 명시적으로 배척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여말선초에 이르면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맹자의 벽이단론의 관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양주와 묵적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불교와 노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묵가에 대한 이해와 비판 양상의 특징은 묵가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로 다른 이념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말선초의 불교와 노자, 중후기의 문장학(과거학), 서학(천주교), 나아가 관료들의 부패 등이 포괄된다. 내용면에서 본다면, 묵가의 십대 주장 가운데 「겸애」와 「절용」(절장, 비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서 「명귀(明鬼)」와 「천지(天志)」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사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이념이 반영된 「비공(非攻)」이나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非命)」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인문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적극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었던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묵가 이념과는 별도로 묵자 개인의 묵수(墨守)와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후기에 이르면서 묵자서는 이념서가 아니라 유교 경전 내용을 고증하기 위한 사료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전개된 풍수와 불교의 교섭 (Fengshui's Interaction with Buddhism in Korea)

  • 최원석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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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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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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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연구는 한국에서 풍수와 불교의 교섭이 언제 시작되었고 정치주도세력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 및 풍수와 불교 상호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 글이다. 역사상에서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 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서 영향을 주었다. 풍수와 불교는 신라 하대에 선종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고, 나말려초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의 중앙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지배권에서의 불교와 풍수의 교섭은 쇠퇴되고 민간부문에서만 미약하게 유지되었다.

고려시대의 호남지역 신라계 석탑 연구 (A Study on Stone Pagodas with Silla Style in the Honam Region of Korea in Goryeo Period)

  • 탁경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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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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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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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제까지 호남지역의 석탑은 대체로 백제의 고토란 이유로 백제계 석탑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정문화재를 중심으로 검토한 결과 호남지역의 석탑은 94기이고, 이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제계 석탑은 15기, 신라계 석탑은 34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본 논문은 이제까지 백제계 석탑에 편중한 연구에서 신라계 석탑에 대한 검토를 통해 호남지역 석탑의 새로운 면모를 밝히고자 하였다. 석탑의 지역적인 배치를 통해 본 결과, 통일신라시대에는 전라남도에 치중하여 신라 석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호남지역 전역에 걸쳐 불국사 삼층석탑을 모방한 신라계 석탑이 건립된다. 이러한 점은 이전의 시기보다 신라계 세력의 호남지역에 대한 불교지배력이 강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는 김제, 정읍, 순창 담양, 영암 강진을 중심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호남지역 신라계 석탑의 기단부의 형식은 이층기단은 21기, 단층기단은 12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 석탑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인 이층기단을 계승하고자 했던 의도로 파악된다. 단층기단도 1매석, 또는 자연암반을 하층기단 삼아 단층기단으로 만들어진 탑도 2기가 있었다. 탑신부는 삼층석탑이 21기, 오층석탑이 12기이며, 1층탑신석을 1매석으로 만든 탑이 25기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3층탑신부와 탑신석 1매석 제작 전통을 잘 계승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옥개받침은 3단, 4단, 5단 등 그 구성방법이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이층기단을 가지고 있는 석탑 중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에 탱주가 있는 석탑은 16기 중 12기가, 삼층석탑은 21기 중 15기가 전라남도에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계 석탑의 정형성을 잘 계승하여 더 많이 유행한 지역은 전라남도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 하응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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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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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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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고려 왕실의 연례 문화와 청자 주기(酒器)의 상징적 의미: 왕권과 주기(酒器) (Sovereignty and Wine Vessels: The Feast Culture of the Goryeo Court and the Symbolic Meaning of Celadon Wine Vessels)

  • 김윤정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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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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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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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고는 조형적으로 일반 그릇과 차별화되는 청자 주기의 형태에 주목하여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조형적 상징성과 시기별 조합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서 확인되는 국왕의 재위별, 연례의 유형별 설행 횟수와 설행 목적을 통해서 청자 주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왕실 연례는 군신(君臣)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유대감을 구축하는 왕권 강화의 수단이자 왕의 업적과 성덕을 찬양하여 국왕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는 통치 행위이기도 하였다. 왕실 연례의 설행 횟수는 실제 왕권 강화를 시도했던 예종대(1105~1122), 의종대(1146~1170), 충렬왕대(1274~1308), 공민왕대(1351~1374)에 늘어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왕실 연례의 설행이 급증하고 연례 문화가 바뀌는 예종대와 충렬왕대를 기점으로 청자 주기의 기종 및 조형이 변화하는 상황에 주목하였다. 연례에서 국왕과 신하는 다양한 음주 행위를 통해서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거나 태평한 시절을 찬미하였기 때문에 술을 담고 따르는 주기의 조형은 시각적 상징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연례에서 음주 방법은 국왕이 신하에게 또는 신하가 국왕에게 직접 술을 따르기 때문에 주자와 잔의 조형은 참석자들에게 시각적으로 큰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12세기에 신선, 난(鸞), 귀룡, 어룡, 호로병 등의 도교적 소재나 황촉규와 같은 유교적 소재가 청자 주자와 잔으로 조형화되는 현상은 국왕에 대한 송축(頌祝)과 충성,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연례의 목적이 시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연례에서 부르는 헌선도(獻仙桃)나 환궁악(還宮樂)의 내용이 청자 주기의 조형과 일치하는 점이 주목되었다. 연례에서 사용하는 당악(唐樂)의 가사는 국왕의 불로(不老), 난로(難老), 장생(長生)을 기원하고 왕업의 번창과 태평성대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가사 내용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인물형 주자>나 시카고미술관 소장 <청자 승난인물형 주자> 등의 조형에 반영되었다. 주기의 조형에 연례 문화의 일면이 시각화된 사례는 고려청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주기의 조합은 연례의 분위기나 술의 종류에 따라서 시기별로 변화를 보인다. 고려가 몽골제국으로 편입된 이후에 새로운 술이 유입되고 연례 문화가 변화하면서 주기의 용도와 조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충렬왕대부터 원 황실의 영향으로 왕과 공주가 함께 연례를 개최하거나 몽고식 연회인 보르차연[孛兒扎宴]이 열리고 몽고 여인들이 쓰는 고고관(姑姑冠)을 쓰고 연회를 여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충렬왕대에 연례 문화가 변하기도 하지만 설행 횟수가 132회로 급증하는 것은 원 황실 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왕권 강화의 측면도 있다. 급증한 연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포도주, 동락(湩酪), 소주 등의 새로운 술과 함께 고족배(高足杯), 옥호춘병, 이(匜), 용두잔 등 신기종의 청자 주기가 등장하였다. 새롭게 나타난 청자 주기는 모두 원 황실이나 몽골제국의 일원인 칸국에서 사용된 금속기 등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이다. 고려 후기에 청자 주기의 변화는 기존 연구보다 시야를 확대하여 유라시아 일대에 위치했던 칸국들의 잔치 모습이나 주기와 비교하여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전에 없었던 고족배, 이, 용두잔, 옥호춘병 등 새로운 형태의 주기가 유입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맞춰서 청자 주기의 조합과 용도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청자 주기는 공간적, 지리적으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고려와 몽골제국의 칸국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본고는 청자 주기와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련성을 조명하였지만 이는 고려청자의 용례를 연구하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관점에서 청자의 사용처와 사용례를 밝히는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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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집권기 호위제도의 경호학적 고찰 (History of Guard System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Rule in the Goryeo Dynasty)

  • 이성진;조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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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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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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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고려전기의 궁중호위는 2군6위의 중앙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궁궐안의 호위는 내순검군이 담당하였으나,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군제는 문란해지고 왕실 호위는 무신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무신들은 왕의 지척에 있는 중방을 중심으로 문신들을 억압하고 왕권을 무력화 시킨 후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3거두였던 정중부, 이의민, 이고 등의 집권이 단명으로 끝나고 경대승이 집권자의 지위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백 수십인의 결사대를 문하에 두었는데, 이 조직이 도방(都房)이었다. 경대승이 병사함에 따라 도방이 폐지되고, 최충헌 집권시대에 신변보호와 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켜 보완한 6번(番)도방은 규모가 방대하고 더욱더 체계를 잘 갖추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에 6번 도방은 내외도방(內外都房)으로 확장, 강화되었으며, 손자 최항의 집권기에는 한층 더 발전하여 도방 36번제도가 확립되었다. 초기의 도방은 무신 중심으로 도방 주인의 신변안전을 목표로 하였지만 후기에는 문신이 참여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선발 경호의 활동을 하였고, 내도방에 해당되는 가병은 사후 위험 방지 역할까지 함으로써 개인의 호위에 만전을 기함은 물론 가문을 지키고 나아가 사회질서와 왕실과 조정을 장악하고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는 포괄적인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최 씨 정권은 사적 친위조직으로서 도방 이외에 마별초(馬別抄)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도방과 함께 기병과 보병(步兵)의 양쪽 날개를 이루었다. 삼별초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합해져 만들어진 것이다. 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는 별초군이 군사와 경찰, 형옥에 이르기까지 그 기능을 발휘하였다. 무신집권기의 호위 조직이었던 도방과 별초군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설경호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왕실 호위 기구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왕실이 도방의 보호를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설경호경비에 해당되는 현대의 민간경호경비는 영리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특성이지만 공적경호경비와 마찬가지로 범죄예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 집권시기의 가병이나 도방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신집권기의 경호조직은 처음에 개인의 신변 호위를 담당한 도방으로 출발하여 무신들의 참여와 확장으로 공공성을 띠어가게 되었고, 삼별초(三別抄)의 활약에 이르러서는 왕실 호위기구가 담당했던 역할에 근접하는 국가 사회 치안구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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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읍치 입지의 다양성과 전형성 -고려말 이후 입지 경향의 변화를 중심으로- (Diversity and Typicality of Eup-Settlements Locations in Gyeongsang Province,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 Focusing on the tendencies of location changes since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Period)

  • 이기봉;홍금수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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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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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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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본 논문에서는 읍치 입지의 구체적인 형태와 시대적 변화 경향을 경상도 71개 군현의 91개 읍치를 대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조선시대 읍치 입지의 구체적인 형태를 지형, 풍수, 뒷산 배경의 경관 이미지를 기준으로 분류하여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축조 연대가 분명한 읍성과 이동 시기가 확인되는 읍치를 중심으로 고려 말 이후 나타난 입지 형태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읍치 입지의 구체적인 형태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것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비전형적인 것도 상당수 존재하였다. 둘째, 고려 말과 1430년경까지 축조된 읍성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입지 형태와 거의 상관이 없었던 반면에 1430년경부터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입지 형태에 가까운 것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셋째, 1425년 이전에 입지했거나 신설된 군현의 구 읍치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입지 형태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1425년 이후에 새로 입지했거나 신설된 군현의 신음치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입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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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Quarter Century of Scientific Study on Korean Traditional Ceramics Culture: From Mounds of Waste Shards to Masterpieces of Bisaek Celadon

  • Choo, Carolyn Kyongshin Koh
    • Conservation and Restoration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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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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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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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first twenty-five years of scientific study within Korea on Korean traditional ceramics has been characterized as a bridging effort to understand the rich field of artistic ceramic masterpieces on one hand with analytic results gained from mounds of broken shards and kiln wastes on the other. First shard pieces were collected directly from the waste mounds, but most of the analyzed shards were provided by art historians and museum staffs directly involved in systematic excavations. The scientific study is viewed as one of many complimentary ways in learning about the multi-faceted ceramics culture, ultimately connecting human spirits and endeavors from the past to the present to the future. About 1350 pieces of analyzed shards have been so far collected and organized according to the production location and time period. From the experimental results of the analysis, the compositional and micro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bodies and glazes have been deduced for many kiln sites of Goryeo and Joseon dynasties. Except for a few local kilns, porcelain stone was used as body material in both dynasties. The principle of mixing a clay component with a flux material was used in Korean glazes as was in China. The clay component different from body clay was often used early on. In Gangjin a porcelain material appropriate for whiteware body was mixed for celadon glaze, and in Joseon Gwangju kilns glaze stone was chief clay material. The use of wood ash persisted in Korea even in making buncheong glazes, but in Joseon whitewares burnt lime and eventually crushed lime were used as flux mater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