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late 14th century, korean confucian literati, sinjinsadaebe(新進士大夫), tried to reform korean society in the base of neo confucianism. after Joseon Founding, korean confucian literati modified a lot of confucian ceremonies in order to substitute buddhist ceremonies. at first, they titled confucian ceremonies as "gyu sik(regulation manuals)", "Eui mun(ceremonial manuals)", and "Eui je(ceremonial manuals)". but in the end, they titled confucian ceremonies as "Eui gwe(Ritual Protocol Manuals)". they also titled the reports on national occasions as "Eui gwe(Ritual Protocol Manuals)". among the confucian reforms, the most important reforms were auspicious ceremony. korean confucian literati tried to make perfect confucian auspicious ceremony. the first national achievement by confucian reformers was the five national rituals in annals of king sejong. and the second national achievement by confucian reformers was the five national rituals. the royal cart regulated in the five national rituals in annals of king sejong was cart decorated by ivory. but the royal cart regulated in the five national rituals was the sedan with cover. the reason of the change of royal cart were king sejo's political showmanship and diplomatic pretext toward ming(明) china. after the publishment of the five national rituals, the royal cart was represented by the sedan with cover.
유가의 문인은 자신의 성정을 수양하고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지고와 지선의 삶을 추구하며 예술을 통하여 열락의 경계에서 삶을 향유하였다. 유가 문인의 예술은 주로 문인화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시서화가 어우러진 문인화는 문인의 인품과 학문을 전제로 한다. 이는 보통 여기(餘技)와 묵희(墨戱)·석묵(惜墨)으로 인한 신사(神似)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유가 문인예술의 지향은 사의성(寫意性)의 추구(追求)·정신성(精神性)의 추구(追求)·유·도가미학의 혼융추구에 있다. 이는 유가 문인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고매한 정신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유가 문인의 선비정신은 우선 절의는 절개와 의리 그리고 충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의병활동과 구국을 위한 강학활동, 성정을 자연과 함께 한 풍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선비의 절의(節義)·충절(忠節)·의병(義兵)·강학(講學)·풍류(風流)등이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경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인화에 담겨진 화제이다. 여기에 유가 문인의 흉중을 바로 읽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비정신의 미의식은 풍류·충절·실학·애민·의리·사랑 등에서 그 미학을 새겨볼 수 있다. 선비정신의 예술적 구현을 위한 예술의 심미체험은 주로 감성지능에 의한 심미의 체험과 개인의 성향에 따른 심미체험이 있다. 이는 우리의 여러 문인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조 유가 문인예술에 드러난 선비정신은 정신 지향성이었으며 여유 지향성이었다. 나아가 사의 지향성과 실득 지향성이 있어 선비정신의 특질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족(士族)들은 시간, 공간, 인간의 삼간(三間) 차원에서 일상생활을 유교적으로 의례화하는 실천을 통해 삶을 성화(聖化)했다. 일상생활의 성화는 1) 시간적 차원에서는 『소학(小學)』의 규범을 율신제행(律身制行)의 의례화된 실천으로 철저하게 구현했다. 특히 이러한 실천은 특히 성리학적 수양과 공부를 시간에 따라 구별해서 실천하는 일과(日課)의 시간적 의례화로 전개되었다. 2) 공간적 차원에서는 서원(書院)이나 서숙(書塾) 등에서 강회(講會)의 상징적 강학(講學) 공간을 구성했고, 그에 따라 강회의 의절(儀節)을 의례화했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경독(敬讀)의 확대와 잠명(箴銘)의 독송(讀誦)을 통해 강학활동의 공간적 의례화로 발전했다. 3) 인간적 차원에서는 주기적인 제사나 집중적인 독서의 의례화된 실천이 강화한 경건한 의식[경(敬)]이 무의식적으로 심화해서 각각 가족 공동체의 상징적 중심인 선친(先親)과 유림 공동체의 상징적 중심인 선사(先師)에 대한 꿈으로 투사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의례화 양상은 유교적 가치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조선시대 사족의 일상생활을 성화했다.
조선 시대의 재지사족은 핵심적인 지배집단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한 중소 규모의 지주였으며, 유교적 소양을 보유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17세기 이후로는 곳곳에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현조(顯祖)를 내세우면서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지역에서의 실질적 주도권을 재지사족이 행사하는 예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제천 지역의 황강(黃江) 신동(新洞)에 정착한 안동 권씨 화천군파(花川君派) 문중은 대표적인 재지사족이었다. 이 집단은 1675년에 이뤄진 권상하 형제가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노론 정파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는 과거를 외면하고 황강에서 강학에 힘썼으며, 결국은 산림(山林)으로 초빙되어 좌의정으로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권상하의 사후에 그가 가르치던 곳에는 황강서원을 비롯한 기념 시설과 제사 공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권상하가 중시했던 삶의 가치를 후손들이 받아들이는데 이바지했고, 지역 사회에 숭명의리(崇明義理)에 토대를 둔 척사적(斥邪的)인 정서가 자리 잡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 화천군파가 제천 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또 다른 인물은 권상하의 조카인 권섭(權燮)이었다. 그는 권상하를 위한 여러 기념시설을 건립하고, 문중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규칙을 제정하였다. 아울러 황강을 넘어서 제천의 신동에 새로운 거주공간을 확보하고, 청풍 단양 문경 등지에 별서(別墅)를 장만하며 거주공간을 넓혀 나갔다. 각각의 공간에는 조상을 모시기 위한 제사 시설도 설치했다. 그 결과 권상하와 권섭의 자손들은 제천 일대에서 대표적인 성씨 집단으로 수백 년간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은 서울에 남았던 이들에 비하여 많은 엘리트 관료를 배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지사족의 성장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성장, 나아가 전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The essence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realization of a space that embraces nature and human integrating the openness and encloseness. The conc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that artificially furnishes natural elegance into urban areas coincides with the spiritual basis of Chinese literati-painting which subjectifies the scenery of objective world and entrusts personal feelings on that. In other words, the ultimate ideal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embodying the Utopia of confucian intellectual in a city. This paper has tried to shed a light on inter-relationship of literati-painting theory and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theory through comparing them. It is the identical spiritual basis they shared harmoniously that made landscape architecture, poetry and painting possible to meet.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1509-1561)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칠논변(四七論辨)의 단초가 된 "천명도설(天命圖說)"를 그린 당사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추만 정지운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학계는 물론 일반대중들도 깊이 있는 인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정지운에 대한 선행연구도 "천명도설(天命圖說)"의 내용 분석을 위주로 하는 미시적 방식을 취하는 데 머물러 있다. 정지운의 삶과 학문이 그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지운은 "천명도설(天命圖說)"를 지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논리적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밝혀 기묘사림(己卯士林)을 신원하고, 그들의 유지를 정연하게 체계화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성숙시키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의 성리학설이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사상으로 자리 잡는다는 점을 볼 때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를 두고 이황과 기대승 간에 벌어진 논변은 조선 성리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의 이해 수준에 머물러 있던 당시 상황에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본격화함으로써 조선 전기 성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황과 기대승은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를 중심으로 논변함으로써 조선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키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이때 정착된 사림파의 심학화(心學化) 경향은 명종과 선조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조선 정치사상사를 주도하는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는 그러한 정치사상사의 흐름을 견인한 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확인하게 된다.
This study aims to discuss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 represented by Zhang Zhicong(張志聰) via focusing on an academy of Chinese medicine named L$\"{u}$shantang(侶山堂). The teaching method in L$\"{u}$shantang(侶山堂) displays a representative feature of the Qiantang Medical School(錢塘醫派), but the foundation of the method consisting of lectures and discussions had already been laid by Lu Zhiyi(盧之頤) during the Ming-Qing transition period. The tradition was succeeded by Zhong Xuelu(仲學輅) in the Hangyuan Medical Board(杭垣醫局) even after L$\"{u}$shantang(侶山堂) was burnt down during a war taken place under the Qianlong(乾隆) period. That the function and the role of the local Confucian academies, which had been focused on the discussion of Confucian classics and local issues, were changed to adopt the education of medicine which had been treated as a lesser subject may be interpreted as a gradual change in the social perception of medicine. The change in the function of the Confucian academies combined with the tendency in which the literati elites of the period left the Confucian philosophy for medicine presents one of many examples showing the changes occurred during the Ming-Qing transition period. The education of medicine provided by the Confucian academies is regarded historically significant in that it was offered by ordinary civilians rather than the government before the formal school education system was established in the modern period. This educational traditio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bridging the Chinese medicine in the medieval times with that in the modern period.
예찬은 중국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시대적인 환경하(環境下)에서 자신의 독특헌 예술세계룰 구축하였다. 그의 화론인 흉중일기(胸中逸氣)는 동양 전통사상인 유(儒), 불(佛), 선의(禪) 영향으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산물이다. 일기사상(逸氣思想)은 도가적(道家的)인 청담(淸淡)이나 허무(虛無), 무위사상(無爲思想)의 영향으로 문인(文人)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일어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이는 세속을 초월하여 일어났으며 남종 문인화(文人畵)의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다. 예찬(倪瓚)의 일필(逸筆)은 흉중(胸中)의 일기(逸氣)를 그리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노력하고 실천한 가운데 얻어진 문인화 경계이다. 예찬(倪瓚)은 생활의 체험 속에서 깨달은 선의(禪) 오경(悟境)으로 시서일체(詩書一體), 시선일치(詩禪一致)의 높은 경지를 실현하였다. 그의 예술정신은 흉중일기로 대변되는 탈속원진(脫俗遠塵), 일소부주의 고답(高踏), 시서일체(詩書一體)의 높은 경지를 표출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는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화단에 독창적인 문인화(文人畵) 세계를 구축하였다.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대표 원림서(園林書) 가운데 하나인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장물지(長物志)"를 비교하여 한중 원림에 나타난 문인의 취향을 이해하고자 했다. 주요 비교 대상은 화목류이며,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강희안은 화목을 기르고 감상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완성에 두었지만, 문진형(文震亨)은 은일의 삶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화목을 이용하였다. 둘째, 강희안이 화목을 기르는 것은 성리학적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덕성 함양이지만, 문진형은 화목의 형태나 배식방법을 통해 '아(아취(雅趣))'를 구현하였다. 셋째, 양국 문인의 화목 선호도는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지만, 화목을 화분에 두고 감상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일례로 화분을 선택하거나 배치하는데 있어서만 하더라도 강희안에게는 소박함과 담백함이, 문진형에게는 화려함과 세련됨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문인 정신의 표본이 되었던 송대(宋代) 문인의 완상(玩賞) 취미에 비춰볼 때, 강희안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계승한 반면, 문진형은 '문인다움'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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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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