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경주에서 출토된 유단식기와를 소개하였다. 그 다음 평기와제작기법과 각 유적의 공반유물인 연화문수막새, 미구기화, 평기와를 고려하여 편년하였다. 백제$\cdot$고구려암막새의 예를 소개하고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한 편년을 참고하였다. 그 다음 경주에서 출토된 유단식기와를 백제$\cdot$고구려암막새와 비교하여 그 성격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경주에서 유단식기와가 출토된 곳은 육통리와요지, 타경와요지, 황룡사지, 하구리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유단식기와는 7세기말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출토 유단식암막새를 고구려 장군총 출토의 지두문암막새, 백제 군수리 출토의 지두문암막새, 백제 구아리 출토의 유단식암막새와 비교한 결과 암막새의 문양면에서 확인되는 지두문, 횡침선, L자형 단이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삼국시대 암막새의 편년 서열을 상정하여 보았다. 고구려 지두문암막새(장군총 출토 지두문암막새)$\rightarrow$백저 지두문암막새(군수리 출토 지두문암막새)$\rightarrow$백제 유단식암막새(구아리 출토 유단식암막새)$\rightarrow$경주 유단식기와.
This paper is an architectural historical study on Chimi of Hwangnyongsa Temple. In this research, the shape and cross-section of the chimi are reviewed.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The chimi is a form in which the head part facing the maru is omitted, and the upper and lower body are separated. The upper and lower bonds are assembled into a two types of joint throughout the side of the torso, and then bound with an iron strap. Because of the absence of ridge line in the front, and the narrow curved surface which makes the side plate close to the plane, the entire cross-section is triangular, and the rear plate maintains the shape of the chimi. The naerimmaru connected to the side of the chimi has a slope, so it is clear that the chimi was used on the woojingak-jibung(hipped-roof), and the wing part and back of the chimi are erected on the side roof. The height of the yongmaru and chunyeomaru is about the same and the roofing tiles of those are in contact. The roofing tiles of chunyemaru should be cut to fit the angle of the contacting part. The maru is 30 stories high of roofing tiles as a result of the on-board survey. Based on reference on the shape and timing of the production of chimi, the height of chimi, and the maru is believed to have been built before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used in buildings with at least seven-kan frontage. Buildings corresponding to these construction conditions can be seen as Central hall and East hall in Hwangnyongsa temple.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에 의해 선덕여왕 13년(645)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략으로 사찰이 완전히 불타버리기 전까지 약 700년 동안 당시대인의 정신문화 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이자 호국불교의 구심체로서 존재하였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문헌기록과 발굴조사 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에 대한 구조와 전체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복원안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황룡사 목탑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탑지의 외형적인 형태와 단순한 목구조를 가정한 사각구층의 형태였다. 이는 관련 자료의 부족과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황룡사 창건 목탑의 기술적 계보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고대 대형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2005년부터 진행된 <황룡사 복원 연구>를 통해 정리된 목탑지에 대한 재분석 자료를 근거로 동아시아 고대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 속에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계보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황룡사 창건 목탑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적어도 두 번의 큰 중창을 겪는 동안 기단의 규모와 평면 형식 등이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상부 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에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구층목탑과 관련된 흔적은 현재 판축으로 조성된 기단토와 심초석 정도이며, 그외 초석과 기단 석재 등 대부분은 9세기 이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실질적인 구조는 당시 동아시아 대형 불탑의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하며, 기술적 계보는 북조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대형 불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에 표현된 9층 마애탑의 모습과 황룡사지 강당지에서 출토된 금동제 불탑 난간편 분석을 통하여 파악된 고고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이미지를 추정해본다면 외형상으로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순수한 목구조를 한 사각구층탑과는 다른 형태로 파악되는데, 아마도 실심체를 갖춘 이원 구조의 팔각구층탑일 것으로 파악된다.
최근 들어 삼국~통일신라시대 목탑지 발굴조사가 증가되고 목탑 조영과 관련된 자료들이 새롭게 확인되어 이 분야의 연구 진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 우리나라 목탑 연구는 평면형태, 축기부 축조기법, 사리장엄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러한 신자료의 확보를 통해 기단 구축과정 및 변천과정 더 나아가 목탑 복원 등의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동일한 맥락을 보이는 탑지가 조사되어 한 중 일 고대 목탑 비교 연구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 중 가장 많은 목탑이 조사 된 백제 목탑을 주요 대상유적으로 삼았으며, 목탑 가운데 심초와 사리기 봉안 장소에 대해 중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심초는 지하 ${\rightarrow}$ 반지하 ${\rightarrow}$ 지상으로 그 위치가 점차 변해가는 양상이 파악되었는데, 백제 목탑은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A.D. 567), 왕흥사지(A.D. 577) 목탑 조영시 기인 6세기 중반까지 심초가 지하에 안치되다가 이후 반지하식, 지상식으로 구축된 것으로 판단되며, 제석사지(A.D. 639)나 황룡사지(A.D. 645) 목탑 조영시기인 7세기 전반기에 지상식으로 고착화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사리기는 초창기에 심초 이외의 장소에 봉안되다가 점차 심초 내부인 사리공에 안치되는데, 사리공 안치 위치도 심초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던 것이 점차 중심부로 옮겨지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 왕흥사지 축조 시기인 6세기 중반에 가서야 심초에 사리공이 결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확인된 비조사(飛鳥寺 A.D. 588) 심초 보다 약 11년 정도 앞서는 것이며 중국에서 조사된 영녕사(永寧寺 A.D. 516)나 조팽성 불사(趙彭城 佛寺 A.D. 535~561) 목탑 심초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어 왕흥사지 심초가 이런 유형으로는 현재까지 가장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석탑은 한국석탑의 시원인 동시에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석탑이다. 따라서 이 둘의 특징을 살펴보는 작업은, 넓게는 한국석탑, 좁게는 백제양식석탑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백제의 뛰어난 건축술은 기록에도 전하듯이 아비지가 신라의 국가적인 사업인 황룡사목탑의 건립에 초청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석탑과 관련된 기술과 양식이 신라에 전파되었음도 짐작된다. 그러나 신라통일을 맞이하여 백제석탑의 양식을 공유하는 석탑들이 일순간에 단절되었다고 보는 것은, 문화와 예술이 계승 발전된다는 측면에서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현재 학계에서는 여타의 백제지역 석탑들을 모두 고려시대 건립된 백제계 석탑이라는 틀로 규정하여, 일률적인 편년 아래 두고 있다. 등장요인으로는 불교의 대중화, 지방 호족의 지원, 문화의 복고적 경향 등을 들고 있는데, 과연 이것만으로 백제양식석탑이 약 300년간의 공백을 깨고 한 순간에 등장할 수 있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물론 경주지역처럼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백제양식석탑이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전개의 시발점에 초점을 맞추어, 백제양식석탑이 미륵사지와 정림사지 석탑을 통해서 형성되고, 그후 왕궁리 석탑을 통해서 전개가 시작되었음을 고찰해 보았다.
This study tries to shed light on character and architectural features of the 2nd construction of Bunhwangsa temple in the mid-8th century. The site of Bunhwangsa Temple is divided into upper and lower areas based on retaining walls running from northwest to southeast, and the main area of the temple centered on Geumdang(the main hall) is located in the upper area. Space composition of the lower area including Wonji(a garden pond) and Gangdang(a lecture hall), is noteworthy in that Bunhwangsa Temple was constructed in a deviating way from rigorous constructional disciplines and used their space efficiently. The Geumdang in the 2nd construction was the largest worship hall with 7×6 bays. The hall was designed to divide its space into two ; the core space was surrounded by outer space. Each gap between columns in the hall was narrowed from center to outer. The main construction of the Geumdang was built as a stable structure with lead-to corridors. This was a much-advanced style than Geumdang at Hwangnyongsa Temple. The Gangdang is presumed to be a large building site as a typical Gangdang style in the Silla era. It was built in the late 9th century and was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the retaining walls. The composition of the middle gate and southern corridors were in double and long corridor style and they were located in front of the 2nd construction. This style coincided in the form of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Hwangnongsa Temple. The 2nd construction of the Bunhwangsa Temple was smaller than the Hwangnongsa Temple. However, it was a prestigious architecture.
지금까지 한국 고대 목탑에 대한 연구는 발굴조사와 사료를 통한 평면 배치계획, 사리장엄구, 복원 등에 중심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이에 비해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조사된 삼국시대 사찰 중 목탑지로 확인된 유구의 검토를 통해 각각 기단토 구축방법과 심초석의 형태, 안치 방법, 심주의 입주 등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목탑지 기단 구축방법은 지상성토형 굴광판축형 지상삭토형으로 구분되며, 심초석은 지하(반지하)와 지상에 안치되는 형식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심초석의 위치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상승함에 따라 심주의 위치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목조건물의 구조 변화에 따른 것으로 특히 7세기 백제 무왕(武王)대에 목탑이 대형화되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형화된 목탑의 조탑술은 신라 황룡사지 목탑, 일본 백제대사(百濟大寺) 목탑의 건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활발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영남지방에서 신라기와가 다량 출토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특히 경주에서 출토되는 신라기와와 동범관계의 기와가 확인된다. 이에 영남지역의 신라시대막새에 대해서 경주지역 출토품과 비교하여 문양구성 등이 동일한 막새 중 동범막새와 동형막새로 구분하고 검토해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유적은 인각사이다. 인각사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신라기와 중 연화문수막새를 포함한 당초문암막새 등 일부가 경주 월성과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되는 막새와 같은 틀로 제작한 동범막새의 관계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경주에서 제작된 막새가 각 지방으로 직접 이동한 경우와, 와범만이 이동하여 현지에서 제작된 경우, 와공이 이동하여 현지에서 제작한 경우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지방출토 신라기와는 인각사의 경우, 시기를 구분하여 나타나는 기와의 양상을 통해서 공존과 확장, 그리고 보수가 거듭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경주로부터 비단 한시적으로 공급된 것이 아닌 지속적 관계로 이해하는 단서로서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한편 신라기와가 경주에서 생산되어 각 지방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도 직접유입이 이루어졌다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육로운송 보다는 수로운송이 유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대상 유적이 크고 작은 강과 하천 부근에서 확인된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창산 김정기(昌山 金正基, 1930.3.3~2015.8.26)는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1959년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문화재와 인연을 맺으신 이후, 1987년 문화재연구소를 퇴직할 때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자료를 정리하며 2015년 영면하기 전까지 대학과 발굴 전문기관에서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창산은 국내의 기념비적인 고고학 발굴조사를 모두 진두지휘하고 초창기 한국 고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며, 한국 고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활동과 역할은 고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나 나름의 한계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활발히 조사되어 한국 고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기(1955~1972년)에 창산은 선사시대 패총유적이나 주거지와 같은 고고학 조사에 적극 참가하여 유적측량과 유구 실측을 비롯하여 사진촬영과 유물 제도 등을 맡아서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발굴기술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전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이루어진 그의 고고학조사는 학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창산의 견해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분에 있어 수릉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해에 "해미문화"라는 지역문화론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탁견이었다. 1969년 문화재연구실이 설치됨에 따라 그 책임을 맡은 창산은 미약한 규모인 연구실의 운영과 총체적인 책임을 맡아 찬란한 우리문화를 지켜내고자 조사와 연구에 고심하였다. 그는 불국사 복원공사와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의 발굴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황룡사지, 분황사, 미륵사지 등을 조사하며 삼국시대 불교문화와 가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창산이 기획하여 진행한 대형 발굴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다짐과 동시에 관련분야의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고고학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볼 때, 다양한 발굴조사법의 시도와 체계화, 고고학 전문 인력의 양성과 발굴조사의 대중화, 조사기록의 정형화 및 자료공개 활성화 등은 이 시기 창산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한편, 유적조사에 있어서 정확한 기록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발굴에 심혈을 기울인 발굴왕 창산도 유적의 성격을 밝히고 유구를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황남대총 주인공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것은 그의 역할을 재음미해볼 때 매우 아쉬운 한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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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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