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등대의 역사는 일제가 국외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1903년 인천에 처음으로 등대가 설치된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항로표지시스템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제 항구의 도시로서 그리고 초량왜관의 도시로서 부산은 15세기 초 이래로 한일 외교관계의 중심지였다. 그렇게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부산에는 해상 국제교류를 위한 항만시설이 발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양에 관련된 역사자료가 부족하고 기초연구가 미비하여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최근 들어서 부산해관 고문서의 번역이 마무리 되었고, 초량왜관 관련 고지도들을 집성한 자료가 편찬되면서 보다 객관적인 부산의 역사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고지도와 문서들을 통하여 오래된 국제 항구도시 부산의 초량항에 초점을 두고 부산 등대의 기원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1678년에 설치된 초량왜관은 조선 역대왜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오랫동안 존치되었으며, 10여 만평의 기지를 배경으로 동관 삼대청과 서관 삼대청 그리고 외측사조가사 등이 복합된 양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200여 년의 존치기간 동안 창건공사와 21건의 수리공사가 이행된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조정은 조선의 땅에 세워진 왜인 거류지인 왜관의 감독과 관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왜관기지 내의 여러 건물을 조선측 조영건물과 일본측 조영건물로 조영주체를 구분하고, 차왜와 소통할 수 있는 역관을 감동관으로 삼아 양국의 의견을 조정하는 등, 일반적인 관아건축과 다른 인력조직과 공사체제를 편성하였다. 왜관창건공사에는 왜목수와 조선목수가 함께 동원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일 양국이 왜관을 통해 서로의 공사기술과 방법을 체험하고 교류하는 기회였음을 시사한다. 이에 녈 연구는 조선시대 왜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 존치기간이 길었던 초량왜관을 대상으로 왜관공사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모포왜관의 공사체제를 전례로 하는 창건공사와 공사의 체제정비가 이루어진 수리공사를 나누어 각 공사의 공사내용과, 집행정도, 역가지급, 공사주체를 살피고, 200년 동안의 추이를 살펴 왜관이라는 독특한 장소에서 이루어진 공사의 성격을 규명하여, 초량왜관에서 일어난 조일양국의 조영활동에 대한 교류를 건축생산사적 측면에 초점을 두어 고찰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등대의 역사는 일제가 국외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에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1903년 인천에 처음으로 등대가 설치된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항로표지시스템이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제 항구의 도시로서 그리고 초량왜관의 도시로서 부산은 15세기 초 이래로 한일 외교관계의 중심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부산에는 해상 국제교류를 위한 항만시설이 발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양에 관련된 역사자료가 부족하고 기초연구가 미비하여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최근 들어서 부산해관 고문서의 번역이 마무리 되었고, 초량왜관 관련 고지도들을 집성한 자료가 편찬되면서 보다 객관적인 부산의 역사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고지도와 문서들을 통하여 오래된 국제 항구도시 부산의 초량항에 초점을 두고 부산 항로표지의 기원에 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Choryang Waekwan was the biggest Japanese settlment to house the Japanese diplomatic mission and traders in Korea. Waekwan means Japanese Pavilion literally, but the reality of this Waekwan exceeded much the scale of single architecture. Since Choryang Waekwan was closed in the second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the site of this settlement grew rapidly as the downtown of Busan, which was the first port open to foreign countries in modern Korea. The formation of modern port owes much to the presence of Japanese settlment in Lee Dynasty as long as Choryang was officially designated as the trading port toward Japan and vice versa. Busan is the nearest city to Japan, in fact. Within a day ships could reach Tsushima Island, the island region north of Fukuoka, which played an intermediary role between Seoul and Edo. No architectural remain could be seen on the actual site of Choryang Waekwan. The site has become one of the busiest centers in Busan with quantify of office buildings and shops. The former Busan City Hall was located in this area. The field survey of the site as well as the analysis of historical documents, which were newly found both in Korea and in Japan, enabled to reconstruct the architecture and cityscape of Waekwan by way of computer graphics.
This study was prepared for the purpose of restorative consideration such as the construction background, scale, and location of buildings by comparing the historical materials of two countries, Korea and Japan, focusing on Choryanggaeksa. Choryanggaeksa was a building with a special purpose installed in Dongnaebu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was also a space exclusively for Japanese envoys. When Choryangwaegwan, the only place of diplomacy and trade with Japan in the late Joseon Dynasty, moved in 1678, Choryanggaeksa was also built and continued until its function ceased due to the modern opening of the port. As diplomacy and trade with Japan take place in the category of Choryangwaegwan, the existence of an interpreter takes an important place. Therefore, Seongsindang, a space for interpreters, was built near Choryanggaeksa. When the modern port opened in 1876, Choryanggaeksa and Seongsindang lost their original function, but the building remained. However, after the 1890s, a Superintendent office was built on the site of Choryanggaeksa, and a school was established on the site of Seongsindang. It was destroyed when the site of Choryanggaeksa and Seongsindang was converted during the opening of the port, and its remains cannot be found today due to urbanization.
Choryang-weagwan which was the largest international trading place between Joseon Dynasty and Tokugawa Shogunate had been maintained from 1678 through 1872 in Busan. Particularly, they had 21 times repairing constructions for 200 years since its establishment. It is noticeable that Joseon Dynasty permitted Tokukawa Shogunate to construct main pavilions and guesthouses as his style due to the good-neighbor policy between two countries, and Tokukawa Shogunate struggled to achieve his own culture in that place under the supervision of Joseon Dynasty. For satisfying his needs, the architectural craftsmen of Tokukawa Shogunate were mobilized by the chief of construction company which was called kumi-gasira in the most of cases. When they came to Busan for the construction, they brought their own architectural tools. On the one hand, the carpenters and workers of Joseon Dynasty were organized by the traditional construction superintendents which were called Gamdong-gwan and they had to carry out their responsibilities with Japanese technicians at the same workplace. Judging from this fact, the construction site of Weagwan was the good place for exchanging the architectural technology between two countries. This study especially focuses on Tokukawa Shogunate craftsmen who made the repairs of Dongwan-samdaechung in 1727 such as carpenters(Dai-ku), sawyers(ko-biki), and surveyors(Tsue-tsuki) and their tools such as Hatsuri(=Masakari) and Yo-ki(=Oh-no). The constructions in this period, there were not only the repairs of 3 major pavilions including the trading center, but also one of the most active repairing constructions comparing with other period, therefor these were important constructions to shows us repairing construction of Choryang-weagwan of those days.
The Municipal Building of Busan was the first western-style building of Korea in 1879. It was also the predecessor of Busan Metropolitan City Hall. On the other hand, the Municipal Building of Busan was a symbolic structure that shows the history of Busan. The Municipal Building of Busan has inherited the construction location and site, including the speciality of Choryangwaegwan, and is a good example of the process of inheriting the authority of the former space through the appropriation of the building. The Municipal Building of Busan was relocated to the edge of the coast in 1934 because a small and dilapidated building failed to function properly. The relocation of the Municipal Building of Busan in 1934 was the origin of changing the coastal space in downtown. As a result, landfill sites along the coast were in the limelight and developed into the downtown area of Busan after Korea's liberation.
This study concerns especially Choryang-Weagwan which was the largest Japanese House left in Pusan through Chosun Dynasty. Choryang-Waegwan was known to have been jointly constructed by Korean and Japanese carpenters. Therefore, Weagwan was a place for exchange of architectural tradition (special features such as sliding door and straw mat) between Korean and Japan. Judging from this point of view, It is certain that mutual influences helped to shape architecture of Choryang-Weagwan. After establishment Choryang- Weagwan was gradually extended, owing to the prosperity of trade with Japan. But since late 18th century government of Chosun did not give as much care to maintaining Choryang- Weagwan as a result of deteriorating condition of commercial and diplomatic relations with Japan. From the beginning of Choryang- Weagwan construction, Superintendents of the construction were called Hun-do and Byl-cha, who acted as official interpreters as well. And, during construction works, they were called Gamdong-gwan, At the start of construction, Weagwan was built partly in Japanese-style by the carpenters from Tokugawa Shogunate. But as time passed, the participation rate of Japanese carpenters diminished gradually. After 1831, Japanese technician vanished extremely and repairing construction was continued by the Korean workers only.
이 연구에서는 부산항이 개항장으로 거듭나면서 조선과 일본을 비롯한 국가 간에 체결한 조약과 조선과 일본이 부산항에 설치한 기관과 그 기관이 생산했거나 관련된 기록들, 그리고 부산항의 개발과정에서 생산하거나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봄으로써 개항기와 식민지 시기 부산항을 중심으로 부산에 관한 로컬리티를 재현하는 데 필요한 맥락을 분석하였다. 일본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해 가면서 부산항을 중심으로 일본인의 활동범위를 확대하고 초량왜관을 전관거류지로 함에 따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영사관, 상업회의소 등을, 조선은 동래감리서, 개항장재판소 등을 설치하였다. 부산항의 개발과 관련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 등에 당시 상황들이 잘 나타나 있으나, 관련 기록이 규장각과 국사편찬위원회와 부산시민도서관에도 상당량이 소장되어 있었다. 개항 이후 부산항의 개발과 변모에 관련된 기록들을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망라적으로 수집하여 생산기관별 기록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역전(驛前) 상점가(商店街)'는 도시 내부에 있어서 자연적 혹은 유기적인 중심지의 계층구조에 의해서 결절된 중심지가 아니다. '기차역'이라고 하는 특수한 기능의 견인력에 의해서 그 부근에 형성된, 오히려 특수 상점가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개항(開港) 이전에는 왜관(倭館)이 있었던 곳이며, 개항 후에는 왜관이 일본인 거류민지로 승격하게 된다. 또한 지금은 점차 쇠퇴하고 있긴 하지만 '차이나 타운'이라고 하여 중국인의 거주지가 이 지역의 서부지대에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 이곳과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에 '텍사스 타운'이 있어서 과거부터 주한미군(駐韓美軍)과 외국인 선원들을 고객으로 하는 환락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곳은 '러시아 타운'으로 변하여 가로의 대부분의 간판은 러시아어로 되어 있다. 이 가로를 따라서 가면 러시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 상점가와 인접하여 '초량시장'이 위치하고 있어서 과거부터 인근의 주택지를 serve하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9년 6월 10일에 새로운 역사(驛舍)가 준공되고 부산역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오면서 과거의 기능에 기차역이 견인하는 기능이 부가하게 된다. 크게 보면, 이러한 두 가지의 속성이 현재 부산역 상점가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역사(驛舍)가 있는 동부지대와 전통적으로 형성되어 왔던 서부지대는 그 토지이용과 구조면에서 않은 차이가 있다. 동부지대는 업무관리기능이 집적하고 있는 반면에 소매업 중에서도 상점가의 계층을 결정할 수 있는 중심성 상점은 전혀 입지하지 않고 있다. 이 지대는 대형의 고충건물이 많은 업무지구이다. 이것은 도심의 축소판으로서의 경향을 오히려 부도심보다도 더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부산역 상점가에 대해서 그 기능구성과 분포를 중심으로 패턴을 밝히려고 한다. 이 연구는 부산시 전체의 내부공간 구조를 밝히려는 일련의 연구의 한 부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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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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