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정조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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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연간 팔달문 현판의 단청 복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Paintworks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during the Jeongjo er)

  • 김석현;구본능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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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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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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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Paldalmun gate was built in 1794 as the southern gate of Suwon Hwaseong. The signboard's paintworks of Paldalmun gate was applied to the signboard of the state-run building in the 18th century.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as repainted along with the building when repaired in 1969. In that time, the signboard's paintworks during the reign of Jeongjo era was transforme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tore the image of Jeongjo era paintworks on the Paldalmun's signboard, which has been modified since the 1960s due to modification. For the purpose of the examination, we examined the traces of paintwork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and examined several state-run signboards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similar as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which made around the 18th century. Through the above-mentioned researches, typical color features were identified in the decorated with 'Yukhwamoon' paintings on signboard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In addition, the type of pigment used in the signboard's paintwork of Paldalmun gate was verified through the 『Hwaseong Seongyeok Uigwe(華城城役儀軌)』 and the 『Han-gul Jeongri Uigwe(한글整理儀軌)』, while analyzing the characteristics of age-related deterioration according to the type of paintworks in various traces of pigment coatings remaining on the signboard of Paldalmun gate.

정조연간의 백색복식(白色服飾) 착용풍습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Wearing Practice of the White Costumes during King Jeongjo's Reign)

  • 최지희;홍나영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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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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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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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Historically, white clothes have been passed down through the generations as the symbol of the Korean people. This study was motivated after coming across a text written by Lee Ok(李鈺, 1760~1815), a wri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Lee wrote that "Koreans mostly wear blue clothes." This raised questions regarding the wearing practice of the white clothes at the time of King Jeongjo's reign(1776~1800), and led to further studies on the matter. The results show that discussions were held about changing the color of the government official's changui(氅衣) from white to blue. An order was also given replacing white boots with black boots. Therefore, it is supposed that blue clothes phenomenon was influenced from the blue changui policy. However, this change was temporary as later generations wore preferred white with the exception being women's skirts. Women preferred blue skirts to white skirts for a long period. Detailed analysis of the white changui showed that people were burdened by high dyeing costs, and this was a big factor as studies indicated a large gap in wealth disparity. In a society that put funeral and ancestral rites as one of its priorities, the white clothes could have been favored due to its multi-functional use. Also, the noblemen who set importance on Gija(箕子) Joseon connected white clothes custom to Gija. This connotes that the reason for wearing white clothes differed depending on the class. And as white clothes were widely worn, people developed different ways of wearing the clothes for aesthetic purposes.

광릉 전나무 식재기록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Planting Records of Needle Fir in Gwangneung)

  • 김은경;이해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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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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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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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고문헌을 통하여 광릉 전나무 식재의 사적 근거를 밝히고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의 식재기록을 분석하였다. 선행 연구와 산림생태조사 및 도복된 전나무 연륜을 통하여 현재 광릉 전나무의 수령을 추정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능제는 가장 보수적인 체제로 광릉 조성 과정 중 식재는 전례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건원릉을 시작으로 능침수목 식재기록을 통하여 소나무, 잣나무, 버드나무가 식재되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둘째, 조선후기 능침 작벌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조 22년 무오년 수교가 반포되었으며, 이후 봄 가을로 정기 식재가 이루어졌다. 정조 23년 기록을 통하여 조성 및 관리 연한이 오래된 9개 능을 대상으로 식재 주수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광릉에는 잣나무와 잡목이 식재되었다. 셋째, 무오년 수교가 고종 치세 31년간 지켜지고 있으며, 예조별단을 통해 구체적인 식재 수종, 식재 장소, 식재 주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종 22년부터 25년까지 4년간 광릉에는 지속적으로 전나무가 식재되었으며 잣나무를 식재한 곳은 광릉이 유일하였다. 넷째, 도복된 전나무 연륜을 통하여 수령 파악이 가능했으며, 현존 광릉 전나무 식재 시기는 철종 10년 이후부터 고종 연간으로 판단하였다.

정조.순조연간 관영공사에서 별간역(別看役) 정우태(丁遇泰)의 조영활동 (Special Technician Jeong Woo-tae's Activity and Role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and King Sun-jo of the Joseon Dynasty)

  • 김동욱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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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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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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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Jeong Woo-tae(?-1809) was a military official who had worked as Byeo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during the late 18th century through the early 19th century. Byel-Gan-Yeok, literally a special technician, was an official post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works that carries specific technical tasks from the mid 18th century. Over 30 years, Jeong Woo-tae had devoted himself in the construction of various royal tombs, city walls, and palace buildings. He showed superb and various techniques in the works of stone carving and architectural details. After finishing the construction of the tomb of King Jeong-jo's father successfully, he was appointed as a governor of a rural town. Being on duty of the governor, he used to participate in the construction works as a technician. He also made a couple of innovative devices in the field of construction, like a carrying apparatus, Byel-Nok-No. His works secured the setting up of the post of Byel-Gan-Yeok in the governmental construction system in the 19th century. But his technical achievement remained as his own private works rather than developing to the universal growth of the craftsmen's skill. This might be a limitation of the Byel-gan-Yeok's role, whose position was remained in the midway between official and craft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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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로 살펴본 창덕궁 후원의 원형경관 탐색 (Study on the Prototype of the Rear Garden in Changdeok Palace through Gang Sehwang's "Record of Strolling with King in the Forbidden Garden")

  • 정우진;오이천;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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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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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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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강세황의 "호가유금원기"를 통해 정조 연간 창덕궁 후원의 원형적 물상과 전후 변화상을 고찰한 것으로 옥류천, 만송정, 망춘정, 존덕정, 폄우사, 태청문 일대를 대상으로 하였다. "호가유금원기"에서 묘사한 옥류천 영역의 특징으로는, 소요정을 두른 담장, 부벽준의 회화 기법처럼 입체적인 산을 표현한 위이암의 형상, 태극정 앞의 지당이 있었다. 강세황이 포착한 태극정 앞의 지당은 "동궐도"에서도 확인되며, 고종황제 즉위 40년을 경축하는 칭경예식 때 원유회장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옥류천의 정비과정에서 철거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후원 꽃구경의 명소였던 망춘정 일대의 특징으로는 조각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담장 내부에는 육면정의 구조를 하고 있는 망춘정이 있고, 그 초석은 백옥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또한 천향각으로 추정되는 낭무가 망춘정과 인접해 있었다. 강세황은 폄우사의 행각, 태청문과 이를 두르고 담장도 자세히 묘사하여 "동궐도"에 나타난 공간구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의 양학(養鶴) 사례 (A Cases of Crane Breeding(養鶴) in the Palace of the Joseon Dynasty Period)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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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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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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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궁궐에서도 학을 길렀는가에 대한 확인과 함께 그 사례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조선 시대이며 공간적 범위는 외전, 내전, 궐내각사, 궐외각사 등 궁궐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본 연구를 위한 문헌 자료는 일부 원문 자료를 발췌·번역하여 고찰하였으며, 이와 함께 한국고전번역원 데이터베이스(http://db.itkc.or.kr)에 탑재되어 있는 고전번역서를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시대 최고 관부인 의정부에서는 전기 때부터 학을 길렀다. 임진왜란 이후 위상 변화와 청사의 훼철로 인해 의정부에서의 양학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시대에 경연과 언론 기능을 담당하며 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홍문관에서의 양학은 조선 전기 중종 대부터 임진왜란 이후 정조 대에까지 이어졌다. 셋째, 정조 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학문의 중추기관으로 새롭게 설치한 규장각에서도 학을 길렀다. 당시 규장각에는 여러 쌍의 학을 기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의정부, 홍문관, 규장각 등 조선의 핵심적 관부에서의 양학 행위는 그 기관의 위상이나 성격 등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상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 홍문관 등 궁궐에서 기르는 학은 관례적으로 황해도 배천군 등에서 충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례는 영조 대에 이르러 중앙 관서와 지방 관아 간에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이후 정조 연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에서는 대부분 국역 자료에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가 있다. 추후 자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가 더욱 축적된다면 보다 풍부한 사례를 확인할 있을 것이다. 또 지방의 관아, 사찰 등에서의 양학 사례 등 보다 심화된 후속 연구도 필요하다.

조선시대 한양 동부(東部) 함춘원(含春苑)에 관한 연구 (A Study on Dongbu Hamchunwon in Hanyang during the Joseon Dynasty)

  • 오준영;김영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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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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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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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는 한양 도성의 동부(東部)에 조성되었던 왕실 원유(苑?) 함춘원(含春苑)을 대상으로 조영 사실과 운용적 특징의 규명에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성종(成宗) 연간에 창경궁이 건립된 이후 대비(大妃)들의 이어(移御)가 예정되면서 통망처(通望處)를 중심으로 논의된 차폐용 수목 식재가 동부 함춘원의 시원적 형태로 추정된다. 동부 함춘원은 창경궁 동측 궁장(宮墻)에 부속된 월근문(月覲門)부터 선인문(宣仁門)에 이르는 구간의 건너편 일대에 조영된 종방향의 원유(苑?)이었으며, 오늘날 서울대학교 병원 신축 본관의 서측 일대에 해당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궁궐 내부에 조성된 원유만이 금원(禁苑)으로 불렸지만, 궁궐 외부에 조영되었던 동부 함춘원도 금원에 비견되는 상징적 위계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동부 함춘원의 입지처(立地處)는 한양의 풍수지리 체계에서 내청룡(內靑龍)에 해당하는 요지(要地)였으며, 내청룡의 지맥(地脈) 보호를 위해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인조(仁祖) 연간에 이르러 동부 함춘원의 일부는 마장(馬場)으로 분할되었다. 마장 일대는 마동산(馬東山), 방마원(放馬苑)으로도 불리었고, 휴식과 유락(遊樂)의 장소로 이용된 개방적 성격의 공간이었다. 동부 함춘원의 조성 초기에는 창경궁으로의 조망을 차폐하기 위해 속성수(速成樹)가 식재되었지만, 경모궁(景慕宮) 건립 이후에는 내청룡의 지기(地氣)를 보완하기 위해 대대적인 식목(植木) 공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정조 연간에 유근문(?覲門)과 유첨문(?瞻門)이 건립된 이후 동부 함춘원은 궁궐(창경궁)-원유(함춘원)-사묘(경모궁)로 이어지는 전배(展拜) 동선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창덕궁 태액지의 조영사적 특성 (Historical Studies on the Characteristics of Taeaek Pond at Changdeok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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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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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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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궁원의 복원 및 창덕궁 태액지의 원형경관 규명을 위한 기초연구로 창덕궁 주합루 일대에서 시대상이 투영되어 형성된 독특한 경관과 한국 전통수경관의 특수성을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창덕궁 태액지는 인조 연간에 용지(龍池)라는 명칭으로 축조되었으며, 숙종 이후 태액지로 개칭되어 불려졌다. 태액지에는 신선도를 의미하는 섬과 청서정, 택수재, 부용정의 수경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가 조영되었으며, 방지라는 형태적 특징에 의해 사방에는 건물군락이 비대칭적 균형구조로 배치되었다. 이 일대의 배치에는 정형적 축선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열고관 개유와, 정자, 다리, 섬, 어수문, 주합루가 남북 중축선상에 위치하고, 섬과 어수문은 동서축을 이루는 분기점이 된다. 본 연구에서는 태액지 섬과 정자의 변천과정을 분석하여 섬과 정자를 조영하는 방식에서 일정한 규칙성이 제시되었다. 또한 태액지 일대의 이용분석에서는 조망에 의한 정적인 감상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정조 시대에는 직접 지당에서 다양한 뱃놀이와 낚시하는 동적인 유희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태액지의 공간구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 당시 배를 타는 행위가 비중 있게 행하여지자 배의 운행을 위해 태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철거되었고, 섬의 크기도 작아지게 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태액지 일대에 표현된 상징체계는 어변성룡과 군신주합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공간구성요소로 택수재, 물고기 조각, 어수문, 주합루 등이 도출되었다.

광역친환경 농업단지에서 재배된 벼의 시기별 생장과 무기성분 비교 (Comparison of Growth of Rice and Nutrient Concentration in a Season in Large-scale Environment-friendly Agricultural Districts)

  • 정지은;최현석;정석규
    • 한국유기농업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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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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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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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전국 광역친환경 농업단지 중 전남 장흥과 순천 그리고 충북 옥천 3개소를 대상으로 논에서 재배된 벼의 시기별 생장과 무기성분을 조사하였다. 장흥 농가는 기본 시험구와 기본 시험구에 N(질소)를 20% 추가한 유박 추가 시비구를 포함하였다. 6월 토양의 pH와 EC 그리고 K 농도는 유박 추가 시비를 포함한 장흥 농가에서 유의성 있게 높게 나타났다. 토양 1kg당 시기별 무기태 N는 이앙 후 6월에 장흥 농가가 다른 농가보다 80 mg 이상으로 많았으나 재배시기가 경과함에 따라 감소하였다. 시기별 벼의 T-N농도는 최고 분얼기에 장흥 농가에서 높았으며 수확기에는 유의성 있는 차이가 관찰되지 않았다. 벼의 P 농도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처리 간에 별다른 차이가 관찰되지 않았다. 초장은 순천 농가에서 재배된 벼가 101 cm로 작았으나 건물중은 72 g으로 높게 나타났다. SPAD는 장흥 농가에서 높은 수준을 보였다. 외래품종인 밀키퀸을 재배한 옥천 농가는 완전립이 93%로 정조중과 현미, 백미 모두 ha당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여서 연간 조수입도 2,671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그러나 옥천 농가는 대량의 퇴비 시비로 수확 후 토양에 잔존하는 양분수지(T-N + P + K)가 ha당 900 kg 이상으로 높은 수준을 보인 반면에 장흥 농가는 300 kg으로 낮은 수준이 관찰되었다.

조선조의 공문서 및 왕실자료에 나타난 장류 (Jang(Fermented Soybean) in Official and Royal Documents in Chosun Dynasty Period)

  • 안용근
    • 한국식품영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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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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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8-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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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및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를 통하여 문집,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의궤, 공문서 등의 문헌에 나타난 33가지 장의 종류 및 소요량, 장에 의한 백성의 구제, 장 관련 제도 등을 밝혔다. 우리나라 지명에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콩(豆)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 만주지역과 우리나라가 콩의 원산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조에서는 콩과 소금, 메주를 세금으로 받거나, 공납 받아 장을 만들었다. 현종 5년(1664) 호조의 콩 저장량은 90,000여 섬(16,200 $k{\ell}$), 1년 소요량은 42,747섬(7,694 $k{\ell}$)이었다. 영조 32년(1756) 재해에 콩 10,000섬(1,800 $k{\ell}$)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영조 36년 (1756) 재해에는 전국의 세두 85,700섬(15,426 $k{\ell}$)을 감면하여 주었다. 조선조의 장 담당 관청은 내자시, 사선서, 사도시, 예빈시, 봉상시 등이고, 총융청(경기군영)의 장은 973섬(175.14 $k{\ell}$), 예빈시의 장은 1,100여 섬(198 $k{\ell}$)이다. 장을 담당한 직책은 장색, 장두, 사선식장 등이 있다. 정조 때(1777~1800) 왕실에서는 메주를 가순궁, 혜경궁, 왕대비전, 중궁전, 대전에 연간 20섬(3.6 $k{\ell}$)씩 공급하고, 감장은 가순궁 74섬 5말 1되(13.41 $k{\ell}$), 혜경궁 95섬 7말 2되 6홉(17.23 $k{\ell}$), 왕대비전 94섬 9말 5되 4홉(17.09 $k{\ell}$), 중궁전 84섬 11말 3되 4홉(17.17 $k{\ell}$)을 공급하였다. 장독은 어장고에 112개 있고, 남한산성 장창고에 690개가 있는데, 연간 15섬(2.7 $k{\ell}$)씩 장을 담갔다. 백성들이 굶주리면 나라에서 장으로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대량 구제 기록이 20여 차례 있다. 세종 5년(1423) 굶주린 사람들에게 콩 2천섬(360 $k{\ell}$)으로 장을 담가주고, 세종 6년(1424)에는 쌀, 콩, 장을 47,294섬(8,512.92 $k{\ell}$)을 주고, 세종 28년(1446)에는 콩 46,236섬(8,322.68 $k{\ell}$)으로 장을 담가주었다. 조정에서는 장을 급료로도 주었다. 상을 당하여 장을 먹지 않고 참으면 효행으로 표창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은 19종류로 장(108), 염장(90), 말장(11), 육장(5), 감장(4)의 순이다. 승정원일기에는 11종류로 장(6), 청장(5), 말장(5), 토장(3)의 순이고, 일성록에는 5종류로 장(15), 말장(2), 감장(2)의 순이다. 의궤 및 공문서에는 13종류로 감장(59), 간장(37), 장(28), 염장(7), 말장(6), 청장(5)의 순이고, 시로는 전시(7)와 두시(4)가 있다. 이 중 육장 외에는 모두 콩만으로 만드는 장이다. 문집, 조리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의궤 및 공문서 여섯 자료에 가장 많이 수록된 장류는 장(372), 염장(194), 감장(73), 청장(46), 간장(46), 수장(33), 말장(26) 등 콩으로 만든 장으로, 조리서에 존재하는 중국계 장은 문집과 왕실자료에는 없다. 따라서 조선시대 백성들과 왕실, 조정의 식생활에서는 콩으로 만든 전통 장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