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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원의 지식정보 전개와 수용 - 15~19세기 편찬된 정원 및 화훼 관련서적을 중심으로 - (The Development and Acceptance of Knowledge Information in Garden of Joseon Dynasty - Focusing on the Garden and Flowering Books Compiled from the 15th and 19th Centuries -)

  • 김동현;이원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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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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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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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15~19세기 편찬된 조선시대 정원 및 화훼 관련서적을 대상으로 통시적 분석을 통해 시기별 정원에 대한 지식정보가 전개되는 특징을 도출하고, 그 요인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정원 및 화훼 관련서적을 편찬한 저자들의 관계성을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 실학의 계보와 유사한 특성을 보이고 있었다. 강희안의 실학적 면모는 후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수광은 연행의 경험을 통해 정원 관련 지식을 축적하였다. 이후 중농학파 홍만선의 이념은 남인 계열의 유박과 관련이 있으며, 서유구 또한 중농학파의 경세론과 중상학파의 인물들과 교류를 통해 실학을 통합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류중림은 『산림경제』를 증보하면서 중농학파와의 관계성이 나타났다. 둘째, 『양화소록』과 『지봉유설』 「훼목부」, 『산림경제』 「양화」, 『증보산림경제』 「양화」, 『화암수록』, 『임원경제지』 「예원지」에는 정원 식물의 특성과 재배법, 관리방법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임원경제지』 「이운지」, 「상택지」, 「섬용지」에는 정원의 입지선정과 시설 배치, 조성방법, 재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정원 관련 서적의 서술방식은 개론이 55%로 가장 높았고, 방법론의 제시(42.8%), 이기론(15.5%), 분류(12.4%), 제도(1.9%) 순으로 확인되었다. 셋째, 정원 관련 지식정보의 비중을 기준으로 시기별 정원 관련서적들을 분류한 결과 17세기 이전 편찬된 『양화소록』과 『지봉유설』을 전기, 18세기 편찬된 『산림경제』와 『증보산림경제』를 중기, 19세기 편찬된 『임원경제지』가 후기로 분류되었다. 정원 관련서적들은 전대에 수록된 중국 고서와 저자의 경험, 의견들이 후대 정원관련서적에 인용되었으며, 저술 당시 발달한 농업기술과 전문지식을 반영한 정원 관련 지식의 보강이 이루어졌다. 넷째, 시기별 정원 지식정보의 전개와 수용양상을 분석한 결과, 전기에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훼를 다루고 있었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방대한 정원 관련 지식정보가 유입되어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지식 섭렵의 일환으로 정원 조성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였으며, 이를 통해 정원에 대한 전문성이 확장되었다. 19세기 정원 조성의 유행에 대응하여 그간에 집적된 정원 관련 지식정보를 바탕으로 전문서적이 저술되면서 초기 정원 식물의 수집과 관리에서부터 정원 조성의 당위성, 조성방법, 향유방식, 자아실현 등의 체계가 정립되었다.

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 (A Study on Glass Mirror Trade and its Characteristics of Craft after Joseon Dynasty)

  • 박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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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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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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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유리거울을 서양경(西洋鏡), 양경(洋鏡), 파리경(玻璃鏡), 파려경(玻瓈鏡), 석경(石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고, 이를 경험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과 교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 청·러시아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유리거울이 수입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금지 품목에 포함되는 등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문물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으로 더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18~19세기의 유리거울은 개인이 용모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관한 시각적 충격과 경험들을 글로 남겼고, 유리거울에 대한 유용함은 조선의 소비 욕구로 이어져 유리거울의 수입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유리거울은 조선의 청동거울을 빠르게 대체하였고 유리거울을 이용한 새로운 공예품들이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내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으로 일체식 유리경갑(一體式 琉璃鏡匣)을 개발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던 빗접과 함께 이용해 편리하였다. 당시 경갑의 인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비롯해 조선시대 풍속화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기형으로 볼 수 있는 경대(鏡臺)도 조선에서 많이 제작했는데 서랍 개수와 크기, 상자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러 형태의 경대를 살필 수 있다. 또한 휴대용의 작은 면경도 조선만의 미감으로 표현한 길상 문양, 장식 기법을 통해 품격 있는 공예품들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도 유리거울을 수입했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일본식의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일본 명치~대정시대에 유행했던 유리경대가 수입되었고 대형의 유리거울을 이용한 공예품들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경병의 경우 응접실처럼 큰 공간에 진설하거나 연회를 위해 중국·일본으로부터 수입했으며, 서양식으로 거울을 벽에 걸거나 부착해 공간의 밝기를 조절하고 외부의 풍경을 들여와 실내를 장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17세기 고악보 소재 시조 담론의 특징적인 국면(局面) (Distinctive Aspects of Sijo Discourse in 17th Century's Old Music Scores)

  • 박상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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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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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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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17세기 고악보 소재 시조를 개관하고 이를 토대로 이 시기 시조의 특징을 악보 편찬, 곡조의 변화, 노랫말의 변모상과 더불어 풍류, 일상성, 소통 중심의 담론 측면에서 한번 살펴본 것이다. 논의 대상이 된 고악보는 "양금신보(梁琴新譜)", "백운암금보(白雲庵琴譜)",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 "연대금보(延大琴譜)", "금보고(琴譜古)" 등 5개이다. 먼저 "양금신보(梁琴新譜)"에는 4곡에서 노랫말이 발견되며 이 중 <오나리~>가 17세기 이후부터 중대엽, 초중대엽, 이중대엽 등에 얹혀 불리거나 시조시형에 맞추려 한 흔적을 보여주고, "백운암금보(白雲庵琴譜)"에는 3수가 있는데, 악조의 기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고 시조 말구가 생략된 작품이 특이하게 발견된다. "연대금보(延大琴譜)"에는 9수 모두가 중대엽에 얹혀 불렸고,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에서는 4수가 삭대엽에 얹혀 불린 정황을 볼 수 있다. "증보고금보(增補古琴譜)"에는 또한 고려속요 <가시리>를 시조 시형에 맞게 개작한 작품도 발견되고 있어 두 갈래 간 연관성을 밝혀낼 단서로서 주목된다. "금보고(琴譜古)"에는 3수가 있고 이 중 일부는 다른 악보에도 보여 이 시기에 중대엽에 주로 얹어 부르는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고악보를 통한 17세기 시조 연행과 담론의 특징은, 우선 금보(琴譜)의 성행과 풍류의 측면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금보(琴譜)는 국가적인 교화 담론의 목적에서라기보다는 새로운 음악 수용자층이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는 데 참고하거나 익숙한 곡을 악보로 남겨 풍류 현장의 흥을 고취하려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편찬된 결과이다. 또한 이 시기는 17세기 초반에는 중대엽의 평조(平調)에만 노랫말이 얹혀 불리다가 17세기 중, 후반부터는 평조(平調) 이 외의 곡조 및 삭대엽의 곡조에도 노랫말이 얹혀 불린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곡조상의 변화 속에서 악보별 나름의 일상성 담론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미 형성되어 버린 레퍼토리로 근대성과 연결된 진정한 의미의 일상성 담론이 노랫말에서 발견되지는 않았다. 또 이 시기는 악조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랫말에서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지만 창자-청자 간의 소통과 공감 형성이 중시되는 가창 공간 자체는 노랫말의 변화 및 소실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악보를 통해 시조 담론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은, 시(詩)로서 뿐만 아니라 가(歌)적인 성격도 지니는 시조를 보다 잘 이해하고 동시에 가집(歌集) 중심이던 기존의 연구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보완하는 토대 작업이라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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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가곡의 사설시조 가창 양상 (Saseol-sijo singing aspect of current Gagok)

  • 김영운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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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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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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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시조는 조선 후기 한국의 문학작품 중 단형시가를 대표하는 문학 장르이다. 시조의 기본형식은 3장 6구 12음보의 형식을 갖춘 평시조로, 평시조 한 수의 노랫말은 45자 내외의 길이를 지닌다. 그러나 시조의 한 종류인 사설시조는 노랫말의 글자 수가 많이 늘어나 100여 자를 넘는 작품도 있다. 이 같은 사설시조 중에는 한문 어휘를 많이 사용하고, 심지어는 한시에서 몇몇 구절을 차용한 '엄숙하고 우아한 느낌'의 작품도 있으나, '외설스럽고 노골적인 내용'의 작품도 많이 있다. 문학작품인 시조는 가곡과 시조창이라는 성악곡의 노랫말로 사용되는데, 동일한 시조시가 가곡과 시조의 노랫말로 활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성악곡인 가곡 중에서 사설시조를 노랫말로 사용하는 악곡 중에는 '외설스러운 작품'은 거의 부르지 않고, '엄숙한 느낌'의 노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논문은 현재 전승되는 가곡 중에서 사설시조를 노래하는 악곡은 대부분 '엄숙하고 우아한 느낌'의 노랫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외설적이고 노골적인 내용'의 사설시조를 가곡에서 노랫말로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러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불규칙하게 늘어나는 노랫말과, 그에 따르는 반주 때문으로 보인다. 가곡은 악보에 기록되어 전하는 정해진 선율을 다수의 악기가 반주 한다. 따라서 사전에 선택된 노랫말에 따라 일정하게 만들어진 노래선율과 반주선율에 의하지 않으면 연주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문학작품의 감상은 개인적인 독서활동을 통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가곡은 다수의 인원이 열린 공간에서 공개적인 연주를 통하여 연행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 속에서 신분이 다른 남녀가 함께 모여 외설스럽고 노골적인 노래를 부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사설시조의 문학적 특성으로 일컬어지던 서민적이고 통속적인 성격은 가곡으로 불려진 사설시조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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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린-미하일로프스키의 『조선설화』에 나타난 '수달 전설'의 결합 양상과 청에 대한 인식 (The Aspects of Type-Combination of 'Otter Legend' in 『the Joseon tale』 and recognition of the Qing Dynasty and the Joseon Dynasty)

  • 하은하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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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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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3-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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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19세기 말 가린-미하일로프스키에 의해 채록된 "조선설화" 속 수달 전설의 특징과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선설화"에 수록된 64편의 설화들은 1898년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채록된 것으로 이른 시기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전승되던 설화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이후 선행 연구를 통해 "조선설화"의 대체적인 성격과 연행 과정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별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아직 미흡하다. 이에 본고에서 조선과 만주의 기원을 다루는 설화 <수달에 관한 전설>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의 형식적 특징을 살폈고, 나아가 이야기 속에 형상화된 누루하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의 대결 양상에 개입하고 있는 서술시각의 의미에 대해 논의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수달에 관한 전설>의 형식적인 특징은 '야래자 유형'과 <물 속 미륵 귀에 건 아버지 유골>, 눈 빛 강한 이인, 정충신 일화처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설화 유형이나 화소를 재구성하여 새로운 혼합형 설화로 만들어냈음을 밝혔다. 각각의 서사 논리를 지닌 기존의 설화들을 재배치하면서 <수달에 관한 전설>에는 여러 변형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변형을 가로지르는 일관된 논리는 누루하치 가문과 이성계 가문 간의 비교와 대결을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개별 설화를 활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청나라의 기원이 되는 누루하치 가문의 신성성은 확대되고 구성원들의 인품도 높여졌다. 반면 조선의 기원이 되는 이성계 가문은 누루하치 가문에 비교해서 비범성이 떨어지고 능력도 떨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청나라에 대한 선망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나라와 조선의 혈통은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한반도 북부에서 채록된 설화에 담긴 인식은 청나라에 대한 재조명인 바, 청은 조선의 또 다른 혈통이기 때문에 청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던 경험을 조선 또한 공유해야 한다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것은 후일 금나라의 역사를 민족사의 관점에서 포섭하고 만주와 조선을 단군대황조의 후예이며 한 겨레로 보는 대동(大東)사관과 닮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고전문학의 향유방식과 교육; 과거, 현재, 미래 (Accepting Method in Classical Literature and Education ; Past, Present, and Future)

  • 손태도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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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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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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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문학활동은 이를테면 '문학생산' 활동과 '문학수용' 활동으로 양분된다. 고전문학의 향유방식은 고전문학의 수용과 관계된다. 그러나 문학수용 활동은 사실상 문학생산 활동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문학의 향유방식에 대한 논의에는 문학수용 활동 외에도 문학생산 활동에 대한 논의도 흔히 같이 다뤄진다. 오늘날 현대의 시, 소설 등과 같은 문자문학의 경우 '문학생산 : 문학수용'은 '쓰기 : 읽기'로 비교적 간단하다. 그런데 고전문학에서는 시가문학, 소설문학, 구비문학, 한문학 등에 있어 그것은 '가창, 음영, 구연, 공연, 강독(講讀), 쓰기 : 듣기, 읽기'의 방식들이 있다. 또 현대의 시, 소설 등의 문자문학은 문학만으로 이뤄진 이른바 단독예술이지만, 가창, 공연되기도 하는 고전문학은 음악, 연극 등이 수반된 복합예술들도 많다. 이러한 고전문학의 향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는 문학' 외에 '듣는 문학'에 대한 문학적 소양도 가질 필요가 있고, 문학 외의 음악, 연극 등에 대한 시각도 필요하다. 고전문학의 향유방식들과 관계해서 오늘날에도 연구할 만한 과제들이 많이 있다. 고전시가에는 신라시대 불교의 향찬(鄕讚)으로서의 향가, 가곡과 무가(巫歌)의 관계, 가곡 한바탕에서의 가곡창사들의 순서, 시용향악보에 실린 무가(巫歌)들은 국가의 별기은(別祈恩)과 같은 국행 굿에서 불린 사실, 가사 장르의 향유방식으로서의 '창조로 불림' 등이 오늘날에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연구과제들이다. 고전소설의 경우에는 지금에라도 전통사회의 소설 강독에 대한 현지 조사들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구비문학에는 전문 이야기꾼에 대한 조사와 그의 구연 영상물 제작이 이뤄져야 한다. 한문학에는 시창(詩唱), 한문 사(辭) 부(賦) 문(文)의 '창조로 불림', 한문경서(經書)의 성독(聲讀) 등에 대한 조사,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오늘날 고전문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전문학의 향유방식에 입각한 여러 시각들도 가질 필요가 있다. 구비문학과 같은 '듣는 문학'에는 '구전공식구(formular)'(일반적 언술), '핵심적 주제(theme)'(일반적 주제), '즉석변개작법'(improvisation) 등과 같은 A. 로드의 '구전공식구 이론(formular theory)'에 대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특수한 언술', '특수한 내용', '원전비평'을 중시하는 현대의 시, 소설 등의 문자문학과 정반대되는 면이 있다. '읽는 문학' 외에 '듣는 문학'이 많은 고전문학은 구비문학의 이러한 문학적 방식을 기본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려가요나 실창 판소리들에 있는 과도한 음란(淫亂) 지향의 경우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개방된 공간에서의 연행이란 문학 실현 공간 설정에 대한 시각이 필요하다. 한편 문학수용에 있어 '읽기'만 있고 예술적으로도 단독예술로 문학만 있는 현대의 시, 소설 등의 문자문학과 달리, '듣기'도 있고, 고전시가나 구비문학에서처럼 문학 음악, 문학 연극 음악, 문학 연극무용 음악 등의 복합예술로도 있는 고전문학은 역시 '듣기'로 수용되고 문학 음악, 문학 연극 영상 음악 등의 복합예술로 있는 대중가요, 영화, TV 드라마 등과 같은 현대의 매스미디어 문학의 이해, 연구에도 분명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연구와 문학교육은 물론 문학 곧 문학사설 그 자체를 가장 중시한다. 그러나 향유방식에 의해 그 문학사설들이 결정되는 면도 분명히 있다. 특히 '읽기' 외에도 '듣기'에 의한 향유가 많았고, 문학 단독 외에 문학이 음악, 연극, 무용 등과 같이 향유된 면들이 많은 고전문학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고전문학의 향유방식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고려는 고전문학의 이해, 연구, 교육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굿을 중심으로 본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학습 방법의 의미 (The Meaning of Learning Methods for Education to Transmi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s Seen with Seoul-gut)

  • 홍태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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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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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5-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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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서울굿을 중심으로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 전수교육 학습 방법의 의미를 살핀 글이다. 최근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원형'을 대신하여 '전형'이 전승의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전형의 개념에 대해 학자들 간에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정된 틀을 지켜야 하는 원형 중심에서 벗어나 전승자에 따라 자유로운 변개가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 중 무당굿의 전수교육 학습 방법을 살펴보니 오히려 원형을 강조하거나 학습의 중점에 두고 있다. 국가 무형문화재 황해도평산소놀음굿, 서울틀별시 무형문화재 남이장군사당굿, 봉화산도당굿 등의 학습 방법을 예로 들어 이러한 실상을 제시했다. 최근 무당굿을 전수하는 학원식 교육이 널리 퍼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무형문화재로 인정된 여러 종목들은 무형문화재 지정을 앞세우면서 신문에 무당굿 학습을 알리는 광고성 기사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광고에 호응하여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 보존회에 와서 무당굿을 학습하려는 무속인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로운 무당굿 연행은 가능하지만, 고정되고 분명한 무당굿의 체계가 없어 이를 배우러 오는 것이다. 전형 개념이 들어왔지만, 무당굿의 무형문화재 종목에서 실시하는 원형 중심의 학습을 통해 고정된 틀의 학습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를 찾는 무속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원형의 전승이 굿의 생동력을 떨어트리면서, 오히려 기본적인 틀의 학습이 가능한 곳이라는 인식, 구체적인 무속 지식을 배울 수 있다는 인식을 주어 여러 무속인들이 굿 학습을 위해 찾고 있다. 따라서 무형문화재 지정 종목 무당굿에서는 이러한 변화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방식을 개발하여야 한다.

전통적 언어유희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 - 한국 재담(才談)과 중국 상성(相聲)을 중심으로 - (The Historical Transition and Current Meaning of Traditional Language Plays - Focusing on Korean Jaedam and Chinese Xiangsheng -)

  • 강소천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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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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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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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한국과 중국 전통 언어유희 가운데 하나인 재담(才談)과 상성(相聲)의 역사적 변천과 현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본 글이다. 한국의 재담과 중국 상성은 모두 웃음을 주기 위한 대표적인 언어유희이며 전통적인 공연예술이다. 재담과 상성의 기원은 우희(優戱)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희는 가장 전통적인 언어유희이며 우희를 전승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공연물이 파생되었다. 그 중에서 한국 재담과 중국의 상성은 비교적 우희의 전통을 잘 이어간 공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 재담은 독립적인 공연물로써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박춘재 등 전문적인 재담 연희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공연하였다. 20세기 초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면서 재담은 주로 극장 무대와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때 재담에서 새로운 공연물인 만담이 파생되었는데 만담은 재담보다 시사를 풍자하고 세태를 비판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만담은 한참 동안 인기를 끌었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현재까지 한국에 전승하고 있는 재담은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남아 있다. 한편 한국 재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19세기 중후반에 구축된 중국 상성은 처음에는 천민의 비속한 기예로 여겨졌으나 20세기 초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드디어 공연예술로써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20세기 중반 상성은 개혁을 통해서 사회를 칭송하고 교과하는 내용이 주로 다루는 신상성이 형성되었으나, 신상성에는 세태를 풍자하고 해학적인 내용이 축소되어 재미가 없어졌으므로 얼마 후 인기를 잃었다. 21세기 초 상성은 만담과 똑같이 소멸될 지경에 처했지만 전통을 부흥시키려는 젊은 상성 배우들의 노력을 통해 '전통'과 '소극장'으로 회귀하자는 또 한 번의 상성 개혁이 일어났다. 전통으로 돌아온 현재의 '전통 상성'은 다시 중국 관중들의 애호와 성원을 받고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역사와 연행양상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지만 현재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해 있다. 두 공연물의 내용이나 형식 측면에서 공통점도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중국 상성의 경우 전통 곡예 장르 가운데 하나로 현재까지도 중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중요한 전통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독립적인 공연예술로써의 재담이 소멸되어 가고 이제는 가면극 같은 전통연희에만 재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국 재담과 중국 상성은 전승과정에서 유사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재담이 사라진 반면 중국 상성은 잘 보존되고 전승되어 있는 이유를 본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춤사위 연구 - 시대적 변화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ance movements of Go-sung Five-Clown Leper Drum Dance - Focusing on the variation over time -)

  • 허창열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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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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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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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고성오광대 제1과장 문둥북춤은 양반의 자손으로서 조상들의 죄업으로 문둥병에 걸려 고통으로 괴로워하다 신명을 통해 극복한다는 내용을 대사 없이 춤으로만 표현한다. 고성오광대 문둥북춤의 문화재 지정 이후 현재까지 변화양상을 살펴본 결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둥북춤의 춤사위가 더 많아지고 동작이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5년 문둥북춤 춤사위부터 2000년 문둥북춤까지 춤사위가 5개에서 20개로 확장되고 이전보다 구체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문둥북춤에서 사용하는 소도구 북의 표현하는 방식이 65년의 경우 북을 치고 어르는 춤사위만 있었다면, 1988년의 경우 현재와 같이 북과 북채를 무대에 두고 등장하고 춤사위도 14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년 문둥북춤의 경우 문둥이가 북을 잡고 난 이후부터 신명나게 춤을 추며 자진모리장단으로 발전되는 형태는 이전보다 춤사위가 더 다양해지고 이야기 구조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성오광대의 대표적인 춤사위 배김새가 1965년엔 보이지 않고 1969년엔 한 방향으로만 배김사위를 하는데 1988년과 2000년 문둥북춤에서 보여지는 배김사위는 좌우로 대칭하여 한 번씩 연행해 현재의 배김사위와 같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 근대 '전통춤'의 발견 - 우라야스무(浦安の舞)를 중심으로 - (The discovery of the 'traditional dance' of modern Japan - mainly on Urayasu-no-mai Dance -)

  • 남성호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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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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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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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1940년 침략전쟁의 소용돌이가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일본에서는 '기원이천육백년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이라는 기념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국민총동원을 위한 정신적 통합과 정치에 대한 국민 불만과 전쟁에 지친 피로감을 해소시키려는 의도였다. 본고는 이 축전행사의 일환으로 일본 전국의 신사에서 연행된 우라야스무가 어떻게 창작되고 보급되었는가를 검토한다. 우라야스무는 일본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아악 형식의 음악과 미코마이(巫女舞)에 기초를 둔 새롭게 창작된 춤이다. 전시상황에서 창작 보급된 우라야스무는 '만들어진 전통'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또 우라야스무야말로 근대시기 창작된 전통이자 국가이데올로기의 선전도구로 이용된 불우한 유산으로 현재까지 온존하는 예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경위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오늘날 확산일로에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보다 가속화될 것이다. 즉,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창조된 우라야스무가 어느새 새로운 민속으로 자리매김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당시 흥아(興亞)의 기치를 내건 일본제국주의의 흐름 속에서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고 정치적 정통성 확보를 위한 국민총동원체제 구축의 일환으로 우라야스무를 창조 보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근대시기에 창작된 우라야스무는 각 지역의 신사에서 오랫동안 계승해온 고유의 제례악무를 대신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사회의 우경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화권력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오늘날 재생산되고 확산되고 있는 전통의 재창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