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역사적 맥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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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유럽 무대의상의 사적 분석 (Historical Evolution of Stage Costumes in Europe since the Second World War)

  • 나인화;이규혜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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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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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61-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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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시각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 혹은 상징적 연출효과를 기대해서이던 간에 무대의상 제작에 있어 인위적 과장은 무대 위의 연출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표현 기술 중 하나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무대의상의 역사를 공연예술사에 나타난 다양한 무대연출의 극적 효과를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보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나타난 연출사조를 무대의상의 소재연출과 제작기술을 통해 이해해보는 것이다. 무대의상을 단순한 장식과 시각적 표현도구로 바라보지 않고 연출의 의도를 극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표현 도구로 보는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확연히 드러나므로 본 연구범위는 무대 의상의 위상이 단순한 장식뿐만 아니라 극적표현력까지도 포함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 말까지 제한하였다. 연구방법은 먼저 무대의상 제작 시 사용되었던 소재의 간단한 사적 고찰을 살펴보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유럽의 공연예술 사조를 대표할 수 있는 다섯 개의 무대연출 사조를 심미적, 창조적 기여도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선별하였다. 1) Jacques Copeau의 단순화된 무대, 2) Bertolt Brecht의 정형화된 무대, 3) Grotowski의 본질적인 무대, 4) Robert Wilson의 측정된 무대 the Master, 5) Philippe $Decoufl\'{e}$의 포스트 드라마틱 무대. 각 사조별 사회문화적 맥락과 활용 가능한 소재의 발전과 무대의상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에 따른 무대의상의 소재연출과 제작기법의 다양화 등을 분석해 보았다. 무대의상은 연출의 의도에 따라 무대미술에서 차지하는 그 중요성이 때론 부각되기도 때론 감소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Copeau의 단순화된 무대를 위한 의상:배우의 제스처를 강조하기 위해 의상의 단순성 부자 2) Brecht의 정형화된 무대를 위한 의상: 의상의 인위적 정형성은 배우의 연기와 거의 동등한 중요성으로 인식 3) Grotowski의 본질적 무대: 무대 위 배우의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의상이 거의 사라짐 4) Robert wilson의 측정된 무대: 무대 미술 구성 요소들(조명, 음향, 소품, 배우, 극본) 중 의상은 구체적 구성 요소 중 하나로서 배우의 몸과 동등하게 격상됨 5) $Decoufl\'{e}$의 포스트 드라마틱 무대: 멀티 테크놀로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의상의 다기능성으로 배우의 몸을 대체할 수 있게 됨. 본 연구의 결과 무대의상의 위상이 연출의도를 추론 해 볼 수 있을 정도의 독립적 공연예술 작품으로 인정됨을 알 수 있었으며 무대의상의 위상이 변함에 따라 의상 제작가의 위상 또한 연출자의 의도대로 옷을 만드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고도의 지식과 경험을 요하는 만능 예술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춰야하는 것으로 점점 바뀌어 가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광주 폴리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비판적 재고 - 제 1차 광주폴리를 중심으로 - (A Critical Reconsideration on the Function and Meaning of Follies in Gwangju - Focused on the First Gwangju Follies -)

  • 한성미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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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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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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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조성된 폴리는 역사성과 장소성을 강화하고, 공동화 되어가는 구도심을 활성화하는 도시 재생적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옛 읍성 터 가장자리에 조성된 10여개의 폴리는 주변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보행자에게 불편을 초래하며, 활발한 이용 대신 방치되어 있는 등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부정적 현상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 폴리와 주변공간을 활성화하여 도시재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결과, 각 폴리들 간의 물리적 통일감을 부여하는 맥락이 없으며, 각각의 독립된 작가 중심의 작품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폴리 형성과정에서 시민과의 교감이 부족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폴리조성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결정적 해법으로써 폴리에 인간의 활동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도출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인간 활동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효과적 방안으로 스트리트 퍼포먼스(street performance)를 제안하였다. 원래 폴리라는 시설물은 어떠한 특정 활동이 정해진 공간이 아니나, 현재와 같이 그것이 이용되지 못하고, 외면 당하거나 방치될 때 스트리트 퍼포먼스의 적용은 부정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광주폴리에 새로운 관계맺음, 창의적인 활동의 무대, 일상의 공간 등의 영역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광주시가 최근 선보인 2차 폴리는 도서관, 화장실과 같은 명확한 목적을 가진 구조물 및 소규모 이동식 포장마차 등으로서 1차 폴리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러나 1차 폴리는 개관을 앞 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동이나 철거가 되지 않고, 일부 폴리는 직접 아시아문화전당을 전망할 수 있는 설치물임에 따라 이들 폴리에 대한 지속적이며 효율적 활용이 필요하다. 또한, 향후 계속될 100여개의 폴리 설치계획에 의미 있는 지침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의미간의 유사도 연구의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인지 의미론적 관점에서의 고찰 (The Need for Paradigm Shift in Semantic Similarity and Semantic Relatedness : From Cognitive Semantics Perspective)

  • 최영석;박진수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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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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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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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개념간의 의미적 유사도 및 관계도(Semantic Similarity/Relatedness)를 구하는 연구는 고전적인 연구에서는 데이터 베이스 통합이나 시스템 통합, 그리고 현대의 연구에 있어서는 태그 및 키워드 추출, 연관 단어 추천 등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어 온 연구이다. 그 연구는 역사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영정보와 컴퓨터 공학, 계산 언어학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져왔던 연구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개념간의 관계도 계산 방식은 미리 만들어진 사전이나 참조할 수 있는 다른 시맨틱 네트워크(Semantic Network)를 이용하여 계산하는 방법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접근 방법의 경우, 개념간의 의미적 관계가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보 기술의 발달과 빠른 사회변화는 개념간의 의미관계 등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나, 문화적 변화 등이 개념간의 의미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물론이며, 이러한 변화가 정보 통신 기술의 도움으로 빠르게 공유되고 있다. 이렇게 개념간의 의미 관계가 시간이나 맥락에 따라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개념간 의미적 유사도 및 관계도에 대한 연구들은 이러한 '의미관계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개념간의 유사도 연구에 있어 지금까지 있어왔던 '정적인 의미간 관계도 패러다임'에서 '동적인 의미간 관계도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의 필요성과 그 당위성을 인지 의미론적(Cognitive Semantics)의 관점에서 역설하고자 한다. 인간이 인지하는 개념간의 의미관계가 변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인지 의미론에서 찾아봄으로써, 패러다임 변화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추어 개념간의 의미적 유사도 및 관계도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연구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관련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

재미작가 홍언의 몽유가사$\cdot$시조에 나타난 작가의식 (A Study on Korean-American Writer Hong-Eun($1880\~1951$) focusing on Mong-yu siga(Traditional Korean Poetry, gasa and sijo of strolling in the dream))

  • 박미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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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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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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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문학작품은 선행 작품 혹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창작되고 있다. 당대의 문단활동을 통해서나 작가 자신의 소양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인 텍스트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작가의 의식에 적절한 반응양식이 선택하여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양식 또한 시대적, 개인적 필요성에 의하여 이런 과정을 속에서 되풀이된다.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홍언은 미국 초기 이민자이며 재미 한인신문 $\lceil$신한민보$\rfloor$의 발행에 오랜 기간 종사한 언론인이자 문인이다. 지면을 책임지고 있는 발행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비교적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문단과의 직접적인 교류나 활동은 없었고 미국 현지에서 함께 할 독자가 적은 가운데 시가만 400여 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본 연구에서 홍언의 다양한 작품활동 가운데 1935년,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는 몽유양식을 활용한 시가$\cdot$몽유가사$\cdot$몽유시조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다. 1935년과 1947년으로, 두 차례 $\lceil$신한민보$\rfloor$의 <사조>난에 몽유가사와 몽유시조를 싣는다. 홍언은 미국이라는 만리타국에 와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것을 모두 포기할 만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였으며 항시 조국의 현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창작된다. 첫 몽유시가는 1935년 4월 25일에 <이강산>을 필두로 1935년 5월 9일 부터 1935년 7월 4일까지 동회슈부라는 자신의 필명으로 <꿈에 고국에 가셔>라는 제목 하에 연작시가 8편을 차례로 연재하는 것이다. 이는 개화 가사의 형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향수와 1900년 전후의 조선 상황에서 정체된 역사의식을 담고 있어 중세적 이념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 몽유시가는 1947년 9월 25일 발표한 <나라와 고향>을 서시로 1947년 10월 2일부터 1947년 11월 6일까지 6 편을 연재하는 <꿈속에 강산>이다. 여기서 선택한 시형은 시조이며 그 시상의 전개가 1차 시도와 비슷하여 1차 시도를 의식하여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직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외적 장애요인이 제거되었는 데도 고국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를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서, 조국을 '살지 못할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몽유양식은 꿈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좌절된 욕망을 달성하고자 의도적으로 취하는 양식이다. 홍언은 이민 후 일제치하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 후에는 개인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국방문을 하지 못했다. 고국방문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홍언은 몽유양식을 활용하였다. 이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우언의 한 양식으로 즐겨 사용했던 전통 양식이자 개화기 지식인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다양한 글쓰기 방식의 일환으로 선택되어 문학사적 사명을 다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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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카이브(Archives of everyday life)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소론 (A Study on a Paradigm Shift to Archives of everyday life)

  • 곽건홍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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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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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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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우리 사회는 각 분야에서 아카이브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과 함께 아카이브 소장 기록 또한 매우 편향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당대사를 표상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하더라도 극히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아카이브에 소장된 기록은 보통사람들의 삶의 기록은 거의 없다. 아울러 아카이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어떻게 아카이브 문화를 창출해 갈 것인지에 대한 전략도 없다. 따라서 '보통의 시민들'의 삶과 직결된 아카이브를 만들어 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상 아카이브란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미세한 영역으로 범주화하며, 개인(집단)의 행위와 경험을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개인(집단)의 일상적 삶을 기록화 하는 것은 물론 인문적 관점에서 기록을 수집 평가 선별하여 보존하는 조직 또는 이를 위한 시설 장소'를 의미한다. 일상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는 한국근현대사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보통사람들의 행위와 고통'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재현해 하는 작업이며,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일상성 속에 숨겨진 억압적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기록공동체는 권위주의시대와 대비되는 민주주의시대 기록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논의해야 한다. 또 보통사람들의 관점에서 어떤 기록을 생산해야 하는지, 어떤 기록을 선별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지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기록과 아카이브 내용을 문제 삼음으로써 민주주의시대의 시대정신을 창출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가야 한다. 이러한 논의는 기록공동체가 민주주의시대를 한 걸음 앞당기는 데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아카이브 성격의 변화를 추동하는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 연간에 조성된 궁궐 후원 다용도 공지(空地)의 활용양상 (A Study on the Status of Multi-functional Vacant Ground at the Palace Rear Garden during the Era of King Kojong)

  • 정우진;권오만;심우경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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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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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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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후원에 위치한 다용도 공지의 조영역사를 구명하고, 이와 내적 맥락을 같이 하는 고종 연간의 다용도 공지를 고찰한 것으로서, 중건 경복궁 및 경운궁 임어기에 후원 공지를 조성한 배경과 그 이용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궁궐 내의 다용도 공지는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자, 국가운영의 기반시설이 되었다. 조선이 성립된 후로 창덕궁에서 왕실의 행사를 거행하는 공지로는 광연루(廣延樓)와 해온정 사이의 공터, 열무정(閱武亭) 일대, 서총대와 춘당대(春塘臺)가 조사되었으며, 여기서 활쏘기, 과거시험, 군사훈련과 다양한 연회가 이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중건 경복궁에 경무대(京武臺)가 조성되었고, 경운궁에 환어한 고종 34년 뒤에는 경희궁이 영외 후원처럼 사용되었다. 두 공간의 특징으로,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의 경무대는 창덕궁의 공간구성이 이입된 특성이 있으며, 경희궁의 경우 원활한 공간 연계를 위해 운교(雲橋)가 설치되었다. 특히 고종 시대 후원 다용도 공지는 과거시험이나 시사(試射)와 같은 이전에도 있었던 국가적 행사장의 의미를 넘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 되는 시점에서 일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다용도 공지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관병식(觀兵式) 등의 군사조련장으로 주로 활용된 사실은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로 간주된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리인식(地理認識)과 문인(門人)들의 지지편찬(地誌編纂) 의의 (Yeoheon's Recognition of Geography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ompilation of Geographical Records by His Disciples)

  • 최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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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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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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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여헌 장현광(1554-1637)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면서 우주론과 자연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저술한 사람이다. 조선조 유학의 지리적인 학맥에서 여헌은 남명 조식과 한강 정구의 학풍을 이어받으면서 풍수와 지지편찬을 계승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여헌은 주자학에 영향을 받았지만 역학(易學)의 기틀을 견지하였으며, 사변적인 공리공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용적 경세학(經世學)으로서의 지리를 인식하였다. 여헌의 지리인식 방법은 역학(易學)의 체계와 구도 상에서 이루어졌다. 여헌은 자연에 대한 인간 본위(本位)의 인식태도를 드러내며, 따라서 인사의 공능이 지리의 조건보다 우선되는 준칙이었다. 여헌에게 산수와 자연은 비덕(比德)의 공부대상이었고, 자연공부 방법은 대상물의 관찰을 통해 생명의 이치를 자득하고, 무심한 경지를 통해 천지의 마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유학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여헌에게 있어서 낙토(樂土)는 안분자족(安分自足)함에서 얻어지는 것이었다. 여헌에게 지리인식의 의의는 생활의 실용적인 이익 됨에 목적을 둔 필수적인 지식정보였다. 여헌은 은거지의 생활현장에 자신이 견지한 유학적 우주관과 세계관을 '우주사업'의 일환으로 구현하였다. 이러한 의식과 태도는 주거지의 장소경관과 자연경물(自然景物)을 북극성과 주위 28수의 별자리로 상징화하여 명명하고 우주적 중심 공간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경영에서 비롯된 유학자들의 동천구곡(洞天九曲) 전통은 조선시대에 유행되었지만, 여헌의 장소 구성 체계는 여타의 형태와 방식을 뛰어넘은 우주적 구도의 독창성이 있다. 여헌의 장소 명명 의식에는 선현을 본받고자하는 태도, 자연물의 형용과 성정에 대한 비덕(比德), 그리고 은거(隱居) 의식의 반영이 나타난다. 여헌의 국토관 및 국토이해는 지형개관, 산수이해, 도읍입지, 지역이해, 풍토론, 현실인식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드러나고 중국의 지리적 조건과도 비교되어 파악되었다. 그의 국토인식과 이해방식은, 국토의 유기체적인 인식, 주자학의 자연관이 반영된 기적(氣的)인 국토인식, 산천 인식과 도읍 입지의 풍수적 이해, 지역구분을 통한 비교론적 이해, 인물과 풍속에 대한 풍토론적 이해 방식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헌은 역의 포괄적인 사상체계 범주에서 풍수도 수용하였다. 그가 풍수를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명과 한강을 계승하는 학풍에서 연유되는 바가 있었다. 여헌은 풍수지식을 활용하여 주거지의 입지를 정하기도 하였고, 고향 연고지의 여러 곳에 대해 풍수적 견지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풍수관을 보면, 묘지풍수에서 형세론적 이치는 수긍하고 있지만 장례기일을 미루는 발복 목적의 행위는 비판하였다. 그리고 고을의 풍수에서 숲의 조성을 통한 비보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풍수관은 문도(門徒)들의 지지편찬에도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여헌 학풍에서 주목할 만한 지리학적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지지(地誌)의 편찬이다. 이것은 남명과 한강의 치용(治用) 정신과 경세적(經世的) 실천을 계승한 학풍이기도 했다. 여헌은 지지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면서 문인들에게 편찬을 독려하였다. 고을의 통치자나 지식인으로서 지역의 역사와 옛 일을 잘 알아야하고, 권면하고 징계하는 기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헌의 견해는 이후 문인들의 지지편찬 취지와 내용 구성에 지침이 되었다. 이 연구는 여헌의 지리인식에 관한 사실적인 면모의 정리와 지리적 학풍의 계승 맥락에 관한 고찰에 그친 한계가 있다. 다음에는 여헌 전후 유학자들의 지리인식과 지지편찬 전통이 어떻게 전승되면서 전개 발전되었고 질적으로 변천해 나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학계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조선 초 중기 유교지식인의 지리학사를 정립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연구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검토 (A Review Examining the Dating, Analysis of the Painting Style, Identification of the Painter, and Investigation of the Documentary Records of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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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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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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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용주사 <삼세불회도>에 대한 연구는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이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모두 일치되도록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용주사 <삼세불회도> 연구에서 제기된 19세기 후반 화승 제작설과 1790년에 제작된 원본을 1920년대에 일반화가가 서양화법으로 개채한 것이라는 소론은 실증성과 논리성이 결여되어 성립되기 어렵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祝願文)은 세자(世子) 책봉을 받지 않은 원자(元子)만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주사로 지우고 다시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자궁저하수만세(慈宮邸下壽萬歲), 왕비전하수만세(王妃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만세(世子邸下壽萬歲)"라는 특별한 내용과 예외적인 순서로 개서(改書)했는데, 이는 조선후기 불화의 축원문 형식과 내용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정조대 왕실의 전례(典禮)를 면밀히 분석해 볼 때, 현존하는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졌던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세불회도의 형식(形式)과 도상(圖像), 양식(樣式), 미감(美感), 화격(畫格) 등을 18~19세기 불화나 궁중화원 양식과 다각도로 비교분석해 보면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1790년경 전후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축원문(祝願文)에 대한 분석 결과와 일치한다. 특히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종교적 위상에 따라 존상의 크기가 결정되고 화면 구성도 근하원상(近下遠上)의 고식(古式) 원근법에 따라 관념적, 평면적 조형 위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 <삼세불회도>는 투시법적 원근법의 논리에 따라 구축된 입체적 공간 속에 존상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배치한 뒤 서양화(西洋畫)의 음영식(陰影式) 명암법(明暗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흰색 하이라이트와 그림자까지 표현함으로써, 마치 삼세불회(三世佛會)의 장엄한 세계가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투시법적 원근법의 내적 질서와 음영식 명암법의 외적 착시는 골육합체(骨肉合體)처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흰색 하이라이트만 떼어내서 후대에 개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 <삼세불회도> 같은 고도의 서양화법과 높은 화격(畫格)의 창의적 융합은 조선후기 회화사상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 같은 정조대의 궁중화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고도의 양식이자 화격이다. 용주사 주지 등운(等雲)이 창건 이래 용주사에 전해져온 기록을 토대로 『용주사사적(龍珠寺事蹟)』을 정리하며 김홍도가 <삼세불회도>를 그렸다고 기록한 것은 이것이 당시의 역사(歷史)이자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공식 기록인 『일성록(日省錄)』과 『수원부지령등록(水原府旨令謄錄)』에는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이 감동(監董)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의례 화승(畫僧)들이 그려왔던 불화를 관원 신분의 화원에게 그리도록 하는 것이 엄격한 관직 체제나 운영상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명분상 감동으로 발령한 뒤 실제로는 불화를 직접 그리도록 했던 데서 나타난 결과였다. 영정조대의 어진(御眞) 도사 과정에서 감동으로 불러들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과 강세황(姜世晃)에게 국왕이 직접 그릴 것을 요구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동(監董)'과 '집필(執筆)'은 경우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개념으로서 '감동'이 '집필'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주사사적』의 기록은 『일성록』이나 『수원부지령등록』은 물론 황덕순의 「닫집 원문」 기록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찾아 복합적으로 읽으면 각각의 맥락과 필요에 따라 동일한 내용의 표리를 다르게 기록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을 모두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