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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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기 지식인의 지리학 이해 : $1905{\~}1910$년의 학보를 중심으로 (An Understanding on the Geographical Knowledge of the Educated in the HAKBO from 1905 to 1910)

  • 강순돌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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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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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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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논문은 1905년에서 1910년까지의 학보에 나타난 지식인의 지리학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을 위해 학회 발간의 학보에 게재된 지리학 관련 자료를 이용하였다. 이 시기는 애국계몽운동이 가장 긴박하게 일어났던 시기로서, 학회는 학보로써 국민을 계몽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던 때이다. 이 운동은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든 생존경쟁의 시대에 적자국으로, 우승국으로 변신을 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런 노력은 학보에 묻어나고 또 거기에 실린 지리학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이 지리학은 주로 세계적 지리지식을 소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또 지리학의 연구 방법으로는 자연과 인문의 관계, 타 지역과의 비교라는 계통 지리 방법과 자연을 기술하고 난 후 인문을 기술하는 헤트너식의 지지 기술 방식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로써 학보에 실린 지식인의 지리학은 애국계몽이라는 목적 아래 서구의 근대 지리학을 소개하고, 또 그 지리학 방법을 이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량치차오와 최남선의 계몽 기획 관련 양상 (Aspects of Liang Qichao and Choi Namsun's Enlightenment Project)

  • 문대일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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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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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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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근대시기 한중 양국에서 제기된 계몽 기획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작동했다. 그 중에서 '소년'은 계몽의 주체로, '바다'는 매계체로 등장하였다. 구체적으로 '소년 담론'을 통해서 량치차오는 궁극적으로 '신민'을 위한 나라를 상상했으며, 최남선 역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고 나아가 '신대한'이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길 고대하였다. 량치차오는 소년담론을 통해 '소년 국가'와 '노년 국가'의 개념을 제창하고, '실력양성'을 통한 '소년 국가'로의 발전을 기원한다. 최남선 역시 량치차오의 소년담론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미래가 '소년'에 달려있다고 인식하였으며, 조선이 '소년 국가'가 되기 위해 실력 양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량치차오와 최남선은 시 창작을 통해 '소년 담론'을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량치차오는 바다와 관련된 시 창작을 통해 세계 지리와 역사 등에 대해서 소개함과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로써 바다를 인식하고 이를 개척하고자 하는 도전의식을 고취시켰다. 최남선 역시 '바다'와 '소년'을 직접적으로 연관시킨 시를 창작함으로써, '해상에서의 모험심', '바다와 소년의 진취적 정신' 등을 진작시켰다.

근대 민족주의의 형성과 개화기 출판 (The Publishing and the Emergence of Nationalism in Modern Korea)

  • 채백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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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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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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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이 논문은 개화기 한국 사회에 근대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출판매체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분석하였다. 특히 1901년경부터 애국계몽운동이라는 흐름 속에서 출판매체가 활성화되는 시기에 새로운 연활자와 인쇄술을 사용하여 이루어진 출판매체들 중 계몽서적과 역사서적, 전기류 등이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는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계몽서적들은 타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중화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서는데 기여하였으며 당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근대 국가의 건설 방향에 대해서 중요한 지침을 제시해 주고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요건들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서구의 근대 문물을 도입하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 것에 대한 관심도 새로이 일어 고전을 재출간하는 작업을 통해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서적들은 민족 공통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는 역사를 재구성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고대의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 전통의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공간적으로는 만주를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전기류는 그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영웅들이 나타나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해 왔음을 웅변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광범위하게 배포되는 인쇄매체를 통해 새롭게 확인되는 언어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케 함으로써 근대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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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화(安鍾和)의 <수학절요(數學節要)>에 대한 고찰 (A study on An abridged version of the Joseon Mathematics (Su-Hak-Jeol-Yo), a mathematics book written by Jong-Hwa AN)

  • 이상구;이재화;변형우
    • 한국수학교육학회지시리즈E:수학교육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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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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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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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한말 국학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안종화(安鍾和, 1860. 11. 9-1924. 11. 24, 본관은 경주(廣州)-경능(廣陵), 호(號)는 함재(涵齋), 자(字)는 사응(士應))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1894년 식년 문과에서 이상설(李相卨, 1870-1917)과 같이 합격하였으며, 두 분 모두 수학책을 저술하였다. 대만의 수학사학자인 홍만생(洪萬生)은 규장각의 조선 산서를 비교 검토하던 중 안종화의 <수학정경절요괄집(數學正徑節要括集), 약칭(略稱) 수학절요(數學節要)>을 처음 발견하고, 이 책의 잠재적 가치에 대하여 크게 평가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안종화가 1882년에 저술한 현재까지 발굴된 조선의 마지막 전통수학책인 <수학절요>에 대하여 최초로 소개한다. <수학절요>의 목록을 살펴보면 이 책이 기본적으로 <구장산술(九章算術)>의 내용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산학정의(算學正義)>와 <수리정온(數理精蘊)>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승법은 포지금(鋪地錦)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계산되어 있다.

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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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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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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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