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신라고분(新羅古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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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의 출현과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묘제 전개 (The Emergence of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 and the Changing Nature of Tombs at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 of Gyeongju in the Early Silla Phase)

  • 최병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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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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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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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고대국가 신라가 성립하고 발전한 신라 조기와 전기에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전체의 중앙의 중심고분군으로 기능하였다.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신라 고분문화 변동의 진원이었으며, 따라서 신라 고분문화 전개과정의 이해는 월성북고분군에서 조영된 고분과 묘제들에 대한 실상의 파악이 그 출발점이다. 이글은 월성북고분군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에서 전개된 신라 전기 고분문화의 전개과정을 살피려는 작업의 시작으로 작성되었다. 사로국 후기부터 목곽묘가 축조되어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 된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 석재충전목곽묘의 발생에 이어 신라 전기에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여 그 중심 묘제가 되었다. 적석목곽분은 매장주체부인 목곽, 목곽 주위의 사방적석에 더해 목곽의 뚜껑 위에 가해진 상부적석과 호석으로 보호된 고총 봉토가 묘광 내 목곽과 사방적석, 그 위의 저봉토로 이루어진 석재충전목곽묘와 차별화 된 것이다. 신라 전기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지상적석식과 상부적석식의 두 유형으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신라 조기 이래의 석재충전목곽묘와 점토충전목곽묘, 토광묘도 공존하였고, 신라 전기에 새로 발생한 수혈식석곽분도 축조되었다. 그러나 그 중 고총으로 조영된 것은 적석목곽분 뿐이었으며, 묘제들 사이에는 그 외 고분의 입지, 묘곽 형식의 분포, 구조 각부의 축조기법과 규모에서도 차등이 있었다.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부터 진행된 묘제 사이의 위계화가 신라 전기에는 한층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경주분지의 고지형과 대릉원 일원 신라고분의 입지 (Paleotopography of the Gyeongju Basin and the location of the Silla Tombs of Daerungwon)

  • 심현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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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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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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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주분지 내에는 신라 지배층의 핵심묘역인 중심지고분군(소위 월성북고분군)이 있다. 대체로 평지로 알려진 이 일대 고분의 입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고분군의 조영과정과 방향 등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고분군이 위치한 곳을 포함한 주변일대의 지형양상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고분군이 위치한 경주 분지 내의 고지형을 최대한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 고지도, 일제강점기 지적원도, 각종 지형도, 1950~60년대 항공사진 등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분석하여 고분군 조영당시의 지형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분군이 위치하는 곳은 선상지의 선앙 말단부나 선단부에 해당하며, 이 일대에는 다수의 용천천과 습지가 분포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용천천과 습지로 이뤄진 곳은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해당하며, 지표면에 수분이 많아 고분을 조성하기에는 부적합한 지대이다. 이러한 지형특성은 고분군의 분포양상과 직접 관련되며, 고분은 용천천과 습지를 완벽히 피해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고분군은 용천천과 습지에 의해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 되며, 각 구역 내에서도 경계부분의 돌출되고 독립된 곳에는 대형분들이 입지하는 특징을 가진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남천변의 오릉일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대릉원 일원에 위치하는 신라고분의 입지와 분포양상은 경주분지 내의 미세한 지형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며, 그 핵심요인은 바로 용천천과 습지이다.

일제강점기의 신라고분조사연구에 대한 검토 (An Study on Cognition and Investigation of Silla Tumuli in the Japanese Imperialistic Rule)

  • 차순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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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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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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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근대 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를 비롯한 일본인 관학파 연구자들은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의 문화유적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와 자료수집활동을 했다. 이들은 초기에는 메이지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한국이 식민지화된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와 유관기관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고고, 미술, 건축, 인류학, 민속학 등 전 분야에 걸친 조사를 하였다. 이들이 신라고분을 비롯한 한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한 목적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와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역적으로 편중되고 왜곡된 시각이 나타나기도 한다. 1886년부터 한국의 고분과 출토유물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방한 조사가 계속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1904년 세키노가 한국에서 조사한 건축조사 보고서인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는 오릉을 비롯한 여러 고분에 대한 내용이 간단하게 소개되었고, 1906년에는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최초로 소금강산에 위치한 '북산고분(北山古墳)'과 황남동 남총(南塚)에 대한 발굴조시를 한 후, 적석목곽분(積石木樹墳)과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의 구조에 대한 초보적인 인식이 이루어졌다. 1909년 건축학을 전공한 야츠이 세이이치(谷井第一)는 서악동 석침총(石枕塚) 발굴조사에서 작성한 석실의 평면도와 단면도는 한국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최초로 제작된 유구실측도면으로 수치가 표현된 점에서 이전의 스케치된 그림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또한 이후 발굴조사에서는 이러한 유구 실측도면의 작성은 계속 이어진다. 이마니시와 야쯔이는 신라고분의 입지적 특징, 분구의 형태와 규모, 출토유물 등에 대한 조사 결과에 근거하여 적석목곽분과 횡혈식석실분은 서로 연대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에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규정"을 시행하고 고적조사위원회와 박물관협의회를 설치했다. 박물관이 활동하게 되면서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유적을 조사하는 사업들은 모두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됐다. 1921년에는 금관총(金冠塚)이, 1927년에는 서봉총(瑞鳳塚)이 각각 발굴조사되면서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은 화려한 출토유물로 주목을 받게 되지만, 전국 각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여러 고분들에 대한 보고서 발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근 몇몇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미발간 보고서가 간행되었지만, 서봉총과 같이 중요한 고분들에 대한 보고서가 아직 출판되지 못한 점은 당시의 한계로 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노모리 켄(野守健)이 지적도를 기초로 제작한 경주고분 분포도는 현재 통용되고 있는 155기의 고분의 규모와 위치를 명기한 자료로 시내에 소재한 여러 고분의 전체 모습을 확인시켜준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930년대부터 아리미츠 쿄이찌(有光敎一)와 사이토 타다시(齋藤忠)는 다수의 적석목곽분과 횡혈식석실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한 묘제에 여러 가지 형식의 분묘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특히 복잡하게 중복된 모습으로 노출된 적석목곽분에 대한 발굴조사경험은 이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와 보고서간행 등에 있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에 지난 근대~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된 신라고분에 대한 발굴조사 내용을 살펴본 결과, 이때 조사된 여러 유적들에 대한 조사내용을 재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는 한국고고학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실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신라문화권 지역에서 산성대기오염물질 침적량 추정 (Estimation for the Reduction of Atmospheric Deposition of Air Acid Pollutions in Silla Culture Region)

  • 이승일
    • 한국대기환경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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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대기환경학회 2002년도 추계학술대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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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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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고도로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국내 최대의 역사도시이자 유적도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문화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 석굴암, 남산 및 고분군 등의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특히, 경주시 지역에는 다보탑, 석가탑, 석굴암 및 불상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조문화재가 고 밀도로 분포되어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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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샘유적 신라고분 분포양상과 목곽묘의 성격 (The Distributional Patterns of Silla Burial Grounds and the Character of Outer Coffin Tombs in Jjoksaem Site, Gyeongju)

  • 윤형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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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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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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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쪽샘유적은 사적 제512호 대릉원 일원에 속하는 신라고분군으로 학계에서는 월성북고분군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2007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는 마을이 들어서며 파괴된 신라고분의 현황을 파악하여 고분공원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루어 졌다. 조사결과 일제강점기에 확인한 155기 고총고분 외에 700여기 이상의 새로운 고분들이 확인되었으며, 적석목곽묘 이외에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의 소형묘 출토 비율이 70%에 달한다. 쪽샘유적 출토 목곽묘를 분석한 결과 묘광의 모양은 대체로 세장방형에 가까워 기존의 경주식목곽묘의 특징은 인정된다. 또한 묘광의 평면면적을 분석하여 대형, 중형, 소형의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일 묘제 내에서의 무덤간 위계 차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목곽묘 중 가장 이른 것은 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3세기 대까지 올라가는 등 적석목곽묘 축조 이전에 쪽샘유적 곳곳에 목곽묘가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기가 되면 선대 무덤들의 정체성은 존중받지 못한 채 파괴되기도 하는데, 이후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등장과 소멸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 후대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묘역에 의해 입지가 제한되는데, 죽은이의 신분에 따른 묘역 선정의 차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적석목곽묘는 미고지에, 목곽묘는 저지대에 입지한다는 기존 견해는 쪽샘유적 발굴조사 결과 선입견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석목곽묘 호석 최하단석과 목곽묘 등의 굴광 어깨선은 유의미한 레벨 차이가 없으며, 44호 적석목곽묘와 같이 해발이 낮은 곳에 입지하는 적석목곽묘나 B지구 목곽묘와 같이 미고지에 위치한 목곽묘등도 다수 확인된다. 목곽묘는 사로국에서 국가단계의 신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필수 연구자료로서 향후 쪽샘유적에서의 발굴조사 성과가 기대된다.

신라 금관의 성분 조성 분석 (A Scientific Analysis of Gold Crowns in Silla)

  • 신용비;유혜선;윤은영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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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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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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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신라시대 고분인 교동, 황남대총 북분, 금관총, 천마총, 금령총,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 6점의 합금비를 분석하여 고분별로 성분비를 비교하였다. 분석결과 신라 금관 6점은 모두 금과 은으로 합금되어 있고 입식 금판의 순도는 교동 89.2wt%, 황남대총 북분 86.2wt%, 금관총 85.4wt%, 천마총 83.5wt%, 금령총 82.8wt%, 서봉총 80.3wt% 순으로 함량이 낮아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금관의 순도와 금관 형식에 따른 편년을 비교해 보면 금관 중에서 가장 고식(古式)인 교동 금관의 순도가 가장 높고, 5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황남대총과 금관총의 순도는 교동 금관보다 낮으며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천마총, 금령총, 서봉총 금관의 순도가 가장 낮았다. 즉 빠른 시기의 고분일수록 금관의 순도가 높은 경향을 나타내었다.

문화재 발굴 조사·연구 과정의 개선 방안 연구 - 신라 고분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Improvement of Excavation and Research Process - With a Focus on Building a Silla Ancient Tombs Database -)

  • 정익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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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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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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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글에서는 문화재 발굴과 연구를 연결된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 설정하고 그 개선 방안을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과정 통합의 관점에서 문화재 발굴 과정을 살펴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개선 방안으로 보고서의 형식 변화와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신라 고분 발굴과 연구의 개선 모델을 그려보았다. 현재 문화재 발굴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사와 연구가 일원화되지 못하고 '행정 절차로서의 조사' 혹은 '조사를 위한 조사'에 그치며 이는 궁극적으로 연구성과 달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조사자 또는 기관마다 보고서의 구성이나 서술 방식에 차이가 있어, 보다 상위 차원에서 자료를 통합하고자 할 때 어려움이 있다. 셋째, 현재 보고 자료의 형태가 책이나 PDF 등의 아날로그에 머물고 있어 연구 단계로의 연속성과 효율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의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개선 방안은 보고서를 전산화하여 디지털 형태로 전환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보고서 형식의 전환은 발굴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인 발굴 자료의 형태가 아날로그에 머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발굴과 연구를 하나로 연결하는 관점에서 개선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다른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그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둘째, 데이터베이스는 신라 고분을 대상으로 구축 모델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다른 분야의 사례를 살피고 목적과 기대 효과, 대상, 추진, 속성과 범주, 인터페이스를 고찰하였다.

강릉 초당동 제1호고분 (江陵 草堂洞 第1號古墳)

  • 김병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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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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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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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
  • 상술(上述)한 것을 요약(要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형식(形式)은 대형(大形)개석(蓋石)을 덮은 일봉토(一封土) 일석실(一石室)로서 폭(幅)은 아래가 넓고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양형(樣形)에다가 무이도(無羡道)라는 것과 동침(東枕)이라는 점. ② 토기(土器)는 엇갈린 이단투창(二段透窓)의 고배(高杯)와 구연(口緣)이 외반(外反)된 유태장경호(有台長頸壺)를 중심(中心)으로 적색토기(赤色土器), 마구철도(馬具鐵刀), 토추(土錘), 방추차(紡錘車) 등과 함께 유리옥(玉)도 출토(出土)되었다. ③ 초당동(草堂洞) 주변(周邊)에는 신라토기편(新羅土器片)을 찾아볼 수 있는 고분군(古墳群)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