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민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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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연출 완판창극의 창극술 연구 - <흥보전>(1982)과 <흥보가>(1984)를 중심으로 - (A Study of the Wanpan-changgeuk(完板唱劇) directed by Hur Gyu : Focusing on Changgeuk Dramaturgy)

  • 김향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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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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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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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허규의 완판창극 <흥보전>(1982)과 <흥보가>(1984)의 창극술과 그 의의를 논한 것이다. 판소리 <흥보가>가 두 편의 완판창극 <흥보가>로 구현되는 과정에서의 창극술과 그 의의를 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극술'은 창극의 양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을 통해 어떠한 미적 의식을 드러내는지를 논하는 것으로 연출가가 완판창극을 통해 지향하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허규의 완판창극 <흥보가> 창극술은 우화적이고 신명나는 놀이의 정서 속에서 '가난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몸을 파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학적으로 드러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인 연극성'과 '한국적인 놀이성'을 융합시킨 창극술을 통해 '형제 간의 우애'라는 주제의식을 넘어서 '가난으로 인한 서러움'이라는, 당대 및 동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흥보의 '나누는 삶'을 통해 한국 전통연희의 '놀이성'을 단순한 기예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의 삶'을 추구하는 '신명'의 정서로 구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논문에서는 허규의 '민족극'론이 당대에 드물게 서양 연극술과 전통연희의 무대화라는 융합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연출가 의식으로 인해 새로운 주제의식을 만들어내면서 관객과의 공감대를 확장하려는, 즉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창극술'이 구현되었음을 논한 의의가 있다. 완판창극이 단순히 공연시간만이 길어진 형식의 것이 아니라 허규의 '민족극'론을 토대로 한, 융합적인 인식을 토대로 하는 창극술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힌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음반 창극 <사명대사>(1971)의 형식적·내용적 특징과 자료의 의미 (The formal and intrinsic characteristics of the Changgeuk album (1971) and the meaning of the material)

  • 송소라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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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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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7-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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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1971년에 음반으로 제작, 발표되었던 음반 창극 <사명대사>를 대상으로 자료가 갖는 형식적·내용적 특징을 살피고, 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음반 <사명대사>는 '창극'을 표제어로 제작, 발표되었지만 해설과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하고 판소리 창은 부분적으로만 쓰였다는 점에서 무대극으로 다루어지는 창극의 양식과는 차이를 갖는다. 1930년대 무대극으로서 창극의 양식, 이른바 '판소리 음악을 중심으로 하여 판소리 창자가 중심이 되어 꾸민 연극'이 성립되기 이전, 그리고 이후 유성기 음반과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방송, 나아가 현대의 창극에 이르기까지 창극의 양식은 매우 다채로웠다. 판소리 음악만이 중심이 아니었고, 등장인물로서 전통연희자가 주요 구성원이지만도 않았다. 음반 창극 <사명대사>의 형식적 특징은 1950~60년대 낭독극, 라디오 드라마의 성행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나타난 새로운 시도이다. 본고는 20세기 중·후반 음반과 라디오를 통해 다루어진 '창극'의 실질적 형태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서 <사명대사>가 갖는 의미를 조망하였다. 더불어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와 매체 속에서 창극이 행한 다양한 양식적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명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였다. 음반 창극 <사명대사>의 내용적 특징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이종익의 장편소설 사명대사(1957)를 수용하되, '사명대사'의 일대기적 삶에 중심을 두고 서사를 전개했다. 그리고 원작이 추구한 사명대사의 구도자적 삶과 구국 충신으로서의 삶을 80분의 음반에 담아내려 노력했다. 이러한 내용적 구성은 이 음반을 제작한 소리꾼 이용배의 창작 의지와 당대 구국의 역사 영웅을 무대로 소환하는 역사극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소리꾼 이용배는 사명대사의 구도자적 삶을 통해 탐욕과 자만심이 가득했던 창극 배우로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대사의 인격적, 사상적 면모에 큰 감화를 받았다. 1971년에 음반을 발표하고 약 30년이 지나서는 사명대사를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공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으로 창극 <사명대사>는 1970년대 민족과 국가, 민중의 담론 아래에서 국란의 민족영웅을 소설과 극, 영화, 등의 매체로 소환하는 과정에서 음반과 전통극도 이에 함께 응한 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중' 영웅을 강조하는 역사극이 대두되는 흐름을 볼 때, <사명대사>는 좀 더 이른 시기에 '민중' 영웅으로서 사명대사를 극으로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리고 전통의 소리와 음악으로 이를 구현하여 전통음악의 가치 역시 드높이고자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사회문화적 의미가 있다.

"나의 피 헌원(軒轅)에 바치리라" -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청말(淸末) '네이션(민족)' 구조의 확립 - (The Myth of Huang-ti(the Yellow Emperor) and the Construction of Chinese Nationhood in Late Qing(淸))

  • 심송교;조우연
    • 역사민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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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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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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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고에서는 청말(淸末)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전통적인 황제(黃帝)전설과의 괴리를 살피고, 나아가 근대중국 '네이션(민족)'구조 형성의 역사과정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또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사회적 충돌에 대해 살피고자 하였다. '네이션(혹 민족)'은 일종 '상상(想像)의 공동체'로서 근대적인 창조물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상'을 하는 행위자들은 항상 그 시선을 아득히 먼 과거에로 돌리고자 한다. 즉 민족의 기원에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황제(黃帝)'라는 존재가 바로 이러한 청(淸)왕조 말기라는 시대상황의 수요에 의해 '중화민족'의 시조로 정립되었던 것이며, 20세기 중국 민족의 기호[심볼]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제(黃帝)라는 이 기호[심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민족의 창조는 청(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자 한 반만혁명(反滿革命)이라는 현실 정치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혈연적인 연관성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공동체 구성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에 관한 '상상'은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논란의 초점으로 된 '황제기년(黃帝紀年)'과 '공자기년(孔子紀年)'의 논쟁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민족관념의 충돌이었다. 또 일부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황제(黃帝)'의 종족개념을 확대하여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로써 '소민족주의(小民族主義)'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일부 만주족(滿洲族) 출신의 학자들도 '황제(黃帝)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역사기억을 새롭게 쓰고자 시도하게 된다. 결국 근대 중국의 민족구조를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분석해봤을 때, 지극히 구조적인 기호[심볼]로써 '황제(黃帝)'관념은 사실상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하나의 치열한 투쟁의 장(場)이었던 것이다.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은 역사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성적(理性的)인 접근보다는 항상 민족주의라는 감성적(感性的)인 목소리를 앞세우곤 한다. 특별히 중국은 경제대국화와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중화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 형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러한 시도가 극에 치달을 경우, 자칫 동아시아에 커다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 역자(譯者)로서는 이러한 서양에서 이미 거의 폐기되다시피 된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일변도의 접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나남출판, 2002)가 한국 학계에 널리 소개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특히나 중국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관한 본고가 가져다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물론 본고 역시 이론의 틀은 "상상의 공동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이론의 틀에 '중국민족의 형성' 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끼워 맞춰 봤을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한 시도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틀에로의 대입이,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검토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람에서 본고를 번역하여 학계에 소개하고자 한다.

애니메이션<나의 붉은 고래, 2016>에서 재현된 푸젠성 토루의 상징성 (The symbolic representation of Fujian tulou in the animation )

  • 구쉐핑;이현석
    • 한국콘텐츠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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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콘텐츠학회 2018년도 춘계 종합학술대회 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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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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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애니메이션 영화 <나의 붉은 고래, 2016>는 처음으로 전통 건축인 토루가 영화와 직접 연관 지어 제작된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토루가 갖는 역사성, 민족성, 전통사상은 극의 서사와 배경구성에 긴밀히 결합되어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이에, 본 논문은 푸젠성 토루의 상징적 역사적 의미와 문화가 어떻게 애니메이션 <나의 붉은 고래, 2016>에서 재현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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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향토가극'의 형성과 특질 연구 - 안기영 작곡 가극 작품을 중심으로 - (Study of the rise and the characteristic of 'Hyangto Gakeuk' - focusing on the Composer Ahn Ki-Young's works)

  • 유인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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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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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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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이 논문은 '근대 뮤지컬의 형성' 혹은 '한국적 뮤지컬의 뿌리'라는 관점에서 일제 말에 발흥한 향토가극의 공연 현황을 재구하고 양식적 경향 및 특성을 분석한 다음, 이를 근거로 향토가극의 공연예술사적 위상을 고찰하였다. 향토가극은 클래식 음악에 근거한 서양 오페라와도 구별되고, 일본풍 대중가요에 기반한 신파조 악극이나 유흥적인 소녀가극 유형과도 달랐다. 특히 안기영이 작곡한 가극은 제재상 주로 전통설화와 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형태상 민요풍의 창작곡이나 오페레타 수법을 운용하여 창작된 향토색(=민족색) 짙은 대중적 음악극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향토가극의 대상으로 안기영이 작곡하고 라미라가극단과 반도가극단에 의해 제작된 <콩쥐팥쥐>, <견우직녀>, <은하수>, <에밀레종>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설의식 작사, 서항석 극본, 안기영 작곡의 <콩쥐팥쥐>, <견우직녀>, <은하수>, <에밀레종>은 라미라가극단과 반도가극단에 의해 식민지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일반 대중에게 장기간 향유되었다. 특히 <콩쥐팥쥐>와 <견우직녀> 전·후편은 경성중앙방송국 라디오로 중계될 정도로 대중적으로 주목받는 작품이었다. 향토가극의 양식적 경향에 대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향토가극은 노래와 대사가 절반씩 섞이고 춤도 곁들인 대중적인 음악극, 즉 뮤지컬의 형태에 가깝다. 다양한 음악재료들이 혼합된 음악성, 성악가와 대중가요 가수의 동반 출연으로 인한 창법의 이질성, 기본 형상수단으로서의 무용은 향토가극을 근대 오페라보다는 뮤지컬의 한 갈래로 분류하게 만든다. 향토가극운동이 일관되게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했고, 일본통치에 대한 내면화된 저항 의식을 견지했다는 평가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콩쥐팥쥐>와 <견우직녀>는 일제와 공유될 수 있는 설화 소재이기에 일본순회공연과 전조선방송이 가능했다. 해방공간에서 향토가극의 극작·연출가인 서항석은 악극과 오페라 연출자로 활동했고, 한국전쟁 이후 향토가극의 작곡가 안기영은 북한에서도 가극을 창조하여 향후 '민족가극'과 '혁명가극'의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향토가극 활동에 참여한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1960년대에 예그린악단 단장으로서 창작 뮤지컬의 기획·제작을 진두지휘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향토가극은 남북한의 대중적 음악극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향토가극에 대한 연구는 근대 악극의 갈래 분화 양상과 사회문화적 의미, 한국 뮤지컬의 정체성 수립, 분단시대 남북한 음악극의 동질성 해명 내지 연극사를 복원하는 의의를 갖는다.

무언극 <빈손>을 통해 본 진도씻김굿의 연극화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Making a Play out of Jindo Ssitgimgut through the Pantomime Empty Hands)

  • 김미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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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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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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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강원도 춘천에 있는 마임하우스에서 펼쳐진 무언극 <빈손>을 보고 진도씻김굿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무언극 <빈손>은 마치 진도씻김굿을 무언극의 형태로 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마임이스트 유진규(柳鎭奎 58)가 펼치는 연기적인 요소들은 진도씻김굿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극의 내용 면에서도 무속을 기반으로 하는 굿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필자는 이런 무언극 <빈손>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원형이 가지고 있는 문화콘텐츠 개발의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런던마임축제의 예술감독 Helen Lannaghan은 춘천마임축제 컨퍼런스에 참가하여 공연을 보고 한국적 색채가 강하면서도 미니멀하고 모던한 무언극 <빈손>을 런던마임축제에 초청하였다. 한국적 오브제, 동양 사상과 사물놀이, 서양의 현대마임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2000년 프랑스 미모스 마임축제, 2001년 폴란드 마임축제, 2002년 몽골 마임축제, 2003년 벨기에 국제 마임축제 등 해외 축제 초청 공연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무언극 <빈손>은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런던마임축제 공연을 통해 다시 한번 세계로 발돋움 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는 한국을 상징하는 우리의 몸짓을 유감없이 발휘한 마임이스트 유진규의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다. 필자는 이런 무언극 <빈손>을 통해 앞으로 진도씻김굿 같은 대한민국의 문화원형을 활용한 연극 공연이 세계적인 공연문화 콘텐츠로써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런 견지에서 무언극 <빈손>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될 수 있었던 요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진도씻김굿이 공연문화 콘텐츠로 어떤 치밀한 스토리텔링을 활용해야 세계적인 공연 무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것인지 그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무언극 <빈손>은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발돋움 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호동왕자 서사의 근대적 재현 양상 연구 (The Modern Representations of Prince Hodong stories)

  • 유인혁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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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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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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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근대 이후 호동왕자의 서사가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정리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12세기에 『삼국사기』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현재 TV 드라마, 영화, 소설, 희곡 등 다양한 갈래에 걸쳐 재생산되고 있는 대중적이며 민족적인 서사이다. 흥미로운 점은 『삼국사기』를 제외한 근대 이전의 문헌 속에서 호동왕자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호동왕자는 1935년에 이르러 윤백남에 의해 최초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으며, 비로소 현재와 같은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즉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근대에 들어와 발견(명)된 '전통'의 표상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윤백남을 필두로 이태준의 『왕자호동』, 유치진의 『자명고』로 이어지는 글쓰기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의 성격들을 주조했다. 윤백남은 정사(情死)의 모티프를 삽입하여 낭만적 연인으로서의 호동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이태준과 유치진은 낙랑을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으로 설정함으로써 민족(국가)주의적 컨텍스트를 삽입했다. 이 두 양상 모두 『삼국사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위 작가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삽입된 성격들은 각 텍스트들이 생산되었던 시기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윤백남의 경우 과거를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근대적 미의식을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태준의 경우 총동원체제를 (반)내면화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사유체계를 보여 주고 있고, 유치진은 해방 공간 속에서 역사적 인물을 통해 민족의 남성성을 상상해내는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렇게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소환되고 전유된 호동의 표상들이 모여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동왕자'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전통 이념과 극단 민예극장의 '전통' (A Study on Traditional Ideology and the 'Tradition' of the Theatre company Minye in 1970s)

  • 김기란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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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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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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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글의 목적은 70년대 국가권력에 의해 소환되었던 전통 이념이 '전통의 현대화'라는 명목 아래 당대 한국연극 현장에 수용되었던 양상과 그 함의를 밝히려는데 있다. 이는 다른 한편 70년대 전통 논의를 둘러싼 한국연극계의 자기검열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민족극을 창안하는 방식으로 70년대 한국연극계의 전통 논의를 선점했던 극단 민예극장의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에 대한 평가는 전통의 계승과 변용을 내세운 허규의 연출 작업을 바탕으로 공연예술적 성취 여부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70년대 국가가 주도한 문화정치의 장(場)에서 구성된 전통 이념과 그것이 작동된 양상은 예술적 성취라는 측면에서만 평가할 수 없다. 무릇 전통을 전유하려 한 주체의 선택적 기준에 따라 전통 이념은 선별되고, 선별된 전통 이념의 선택 과정에서 특정 대상들이 배제, 폐기, 재선별, 재해석, 재인식된다. 70년대 비문화로 호명되었던 서구적인 것이나 퇴폐불온한 것과의 차이 속에서, 전통이 전유되었던 70년대의 상황도 이로부터 멀리 있지 않다. 국가가 주도한 70년대의 전통 논의는 전통의 특정 이념을 안정된 가치로 합법화했는데, 그것을 작동시킨 한 방식은 국가의 문예지원이었다.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은 당시 연극 위기론의 구체적 대안으로 선택되었던 전통의 현대화를 바탕으로 민족극을 지향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전통연희의 계승과 변용이라는 방식으로 구현되었는바, 특히 극단 민예 극장의 대표 연출가 허규에게 전통은 거부할 수 없는 안정적 가치였고 그것의 계승과 변용은 의심할 바 없는 소명으로 내면화되었다. 그 결과 허규가 연출한 극단 민예극장의 공연은 일정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전통연희의 관습들로 채워진 숙련된 장인술로 귀착되었다. 70년대의 전통 이념은 80년대 들어 새로운 전유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1986년 극단 민예극장의 핵심 단원이었던 손진책, 김성녀, 윤문식 등은 민예극장을 탈퇴하여 극단 미추를 만든다. 극단 미추는 연출가 손진책을 중심으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마당놀이를 선보이며 전통의 대중화를 끌어냈다. 전통연희에 내재된 민중의 저항정신을 전통적 가치로 전유했던 대학가의 마당극처럼, 손진책의 마당놀이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위압적인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조롱함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70년대 전통 논의의 자장 안에서, 민중의 저항정신을 전통적 가치로 전유하며 자생한 마당극이나 전통의 대중화를 성취한 극단 미추의 마당 놀이는 예술적 성취로써만 평가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통의 계승과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이 성취한 것 역시 70년대 전통이 소환되었던 맥락을 제외하고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70년대 국가 주도의 전통 논의에 대응한 한국연극 평단의 시각이 예술성을 바탕으로 한 공연예술의 질적 성취에만 집중된 대목이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런 맥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당대 한국연극계의 전통 논의와 그 실천 양상을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의 활동이 한 계기로 작용했을 대중적 마당놀이나 민중저항의 마당극은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이 전통을 전유하는 방식, 곧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과의 '차이' 속에 정립되었다. 계기는 되었으나 그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지 못한 점, 이것이 극단 민예극장의 '전통'이 70년대 한국연극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이자 한계이다.

드라마 속에 재현된 외국인과 한국의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and Representation of Racial Others in Korean TV Dramas)

  • 주혜연;노광우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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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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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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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국내 거주 외국인 100만 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미디어에 등장하는 외국인의 비율도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미디어에서 인종 소수자인 외국인을 정형화된 모습으로 재현할 경우, 이를 보는 한국인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 연구는 지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8년간 한국의 지상파 3사 드라마에서 외국인이 얼마나 등장하고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는지를 유형화해 한국 드라마의 민족적 정경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지상파에서 외국인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전체 드라마의 6.4%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외국인의 극 중 역할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조연이나 단역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극 중 역할을 유형화한 결과 크게 동경집단과 동정집단, 근접집단, 기타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동경집단에는 미국 유럽 출신의 백인과 백인혼혈인이 속했는데, 대다수가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성들로 호감을 주는 외모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반면 동정집단은 베트남, 필리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유색인종과 흑인혼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여성의 비율이 높고 사회 하류층으로 재현되는 경향이 있었다. 근접집단의 경우 우리나라와 역사적 관계가 깊은 일본과 중국 출신의 인물들이 속해 있는데, 일본인의 경우 경제적인 부(富)와 한국인과의 경쟁 및 우호관계가 강조되고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를 종합해본 결과, 한국 드라마에서 특정 인종과 민족에 대한 고정관념이 상당수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일부 드라마에서 고정화된 이미지를 탈피해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외국인의 삶을 재현하고자 했으나, 이런 시도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한국사회가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외국인의 면모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분석해 한국인에게 내재된 고정관념을 밝히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다문화주의를 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 한국의 뮤지컬 수용 역사와 문화제국주의 (Acceptance History of Korean Musical Theatre in 1960s and Cultural Imperialism)

  • 이계창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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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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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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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뮤지컬은 유럽의 오페라로 대표되는 서구 음악극 전통에서 시작된 대중예술 장르로서 20세기 미국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연예술 분야에서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상업예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장르의 특성 상 드라마의 전개나 캐릭터의 표현 등은 말이나 몸짓이 아닌 음악을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며, 그 음악의 스타일은 특정 계층이 아닌 대중의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대화는 곧 서양화이고 일본이 조선의 개화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 이데올로기 및 문화를 강제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일본에의 협력과 순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보통교육 창가집"을 교재로 한 식민주의 음악교육은 한민족의 음악적 정체성이 일본음악 및 서양음악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냉전체재 하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에 따른 친미적 남한 정부 수립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메커니즘과 더불어 '미8군 쇼 무대'와 '영화'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문화, 이 두 가지 요소들의 유입으로 인한 비가시적인 '문화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국악'이라는 단어에 갇혀 '과거의 음악'이라는 의미로 한정되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으로 뮤지컬을 접하게 되었고,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를 통한 '건전한 문화'의 보급을 지향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 기조에 따라 '한국적 뮤지컬'을 지향하는 '예그린악단'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예술을 기반으로 현대화 된 공연예술을 만들고자 했던 계획은 1966년 <살짜기옵서예>의 성공으로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후 정권 실세의 후원 중단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주체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상실한 관변단체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하면서 무산되고 만다. 일제의 식민주의 음악교육과 해방 이후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문화제국주의 책략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한국 뮤지컬의 태동기에 우리의 전통연희 양식이 서양 음악과의 교류, 확장을 통한 자주적인 민족예술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1960년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을 서구 라이센스 뮤지컬이 주도하게 된 배경이며, 아울러 서양음악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창작 현실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