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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도시 문화로서 창경원 야앵 -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를 중심으로 - (Changgyeongwon Ya-Aeng as Modern Urban Culture - An Interpretation based on Benjamin's Phantasmagoria -)

  • 권영란;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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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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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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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연구는 창경원 야앵이 근대 도시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여 도시사회적 관점에서 야앵을 해석하고자 했다. 야앵이 시작된 1920년대 경성의 사회적인 모습은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과도기였으며, 경성의 사회적 근대화 과정은 도시 문화로서 야앵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연구는 당시 경성 사회와 야앵에 만연했던 '판타스마고리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사점을 찾았다. 첫째, 경성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군중, 스펙터클, 체험의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야앵에서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에 의해 통제되는 근대 사회와 야앵이 동일한 매커니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앵은 축소된 경성이자 근대적 상품 세계 그 자체가 된다. 둘째, 판타스마고리아가 야앵의 경관을 구성한다는 점은 야앵에 특별한 보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주체들에게 야앵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근대 도시 경성과 이전부터 살아오던 삶의 공간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게 해 준, 근대적 보는 방식에 대한 학습 기제의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야앵의 판타스마고리아는 야앵의 지속적 소비를 부추기는 환상인 동시에, 일제의 영향이 지배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작동되는 도시 문화를 망각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 연구는 야앵을 창경원 내부의 이벤트에서 근대 도시 사회를 투사하는 도시 문화로 확장해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전통적인 상춘의 방식과 비교하여 퇴폐적이고 질 낮은 상춘 문화로 치부되었던 야앵에 도시사회적 맥락에서 새로운 시각을 투사했다는 점도 또 다른 연구의 의의라 할 수 있다.

중학생의 "과학자 되어보기" 멘토-멘티 프로그램 참여를 통한 과정으로서 과학의 본성 학습 경험 (The Learning Experience of 7th Graders on NOS (Nature of Science) as a Process in Research-Based "Becoming a Scientist" Mentor-mentee Program)

  • 정찬미;신동희
    • 한국과학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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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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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9-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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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연구 기반 '실제적' 과학 교육 프로그램이 맥락적으로 과정으로서 과학의 본성 학습을 촉진함을 밝히고자 한 사례 연구다. 이에 '과학자 되어보기'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7학년 6명에게 8개월간 적용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과학 교육 연구자인 멘토가 스캐폴딩과 코칭을 제공하며, 멘티 학생들은 연구 문제 선정, 연구설계, 자료 수집과 분석, 논문 작성 및 학회 발표에 이르기까지 과학연구의 전체 과정을 수행한다. 연구 문제는 1) 암묵적 과학 연구 프로그램의 참여자는 연구 단계별 학습 상황에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2) 암묵적 과학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은 각 학습 상황에서 '과정으로서 NOS'에 대해 어떤 관점을 구성하는가? 등이다. 수업 관찰, 사후 면담, 멘토의 성찰 보고서, 학생 산출물 등이 수집 및 분석되었다. 연구 결과, 참여 학생들은 1) 연구 문제 망각과 혼란, 2) 자료 오류의 처리와 파기, 3) 연구자 입장에 따른 자료 해석, 4) 전반적 연구 경험과 논문 작성, 5) 학술대회 발표장에서의 경험 등의 다양한 상황에서 연구문제의 역할, 측정값의 유효성, 자료 해석에서의 주관성, 과학 지식의 생성과 동료 심사, 학술 대회의 의의 등 과정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각자의 관점을 학습했다. 참여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학습한 NOS 관점은 현대적 인식론에 가까웠다. 본 연구는 과학 연구의 구체적 상황과 과정으로서 NOS 학습을 관련지어 보여줌으로써 NOS의 맥락적 학습이 가능함을 보였다. 본 연구에서는 과학자가 하는 일과의 유사성이 아닌 학습자의 주체성 및 의미와 관련지어 '실제성'을 정의했고, 이렇듯 상황학습론적 가정에 입각한 프로그램은 성공적인 NOS 학습을 촉진했다. 본 연구의 가정과 결과는 과학 교육에서 실제성의 의미와 실제적 과학 학습 환경의 구현 방식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연구 기반 과학 교육 프로그램에서 성공적인 NOS 학습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본 프로그램과 같이 1) 과학자가 하는 일의 주요 요소를 포함함으로써 풍부한 맥락을 제공하고, 2) 반구조화된 수업 설계를 바탕으로 학생이 연구의 주도권을 소유하도록 하며, 3) 과학 연구 내용이 연구자에게 관련되고 의미 있도록 해야 한다.

부산역(釜山驛) 상점가(商店街)의 패턴(II) (Pattern of Pusan Station Shopping District(II))

  • 김원경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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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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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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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도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면 누구나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화두(話頭)가 떠오르게 편다.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을 확장시켜 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도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도시적인 현상, 도시의 특징, 농촌과의 차이점으로 사고(思考)를 진행시켜 갈 것이다. 또한 화두(話頭)가 무엇인지 망각하면서 계속해서 도시를 연구하고 또 분석할 것이다. 이렇게 화두(話頭)와 사고(思考)의 방향이 서로 엇갈리게 되는 경우가 인간의 현상에 있어서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란 오묘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도시의 내부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구조에 영향을 비치는 어떤 공간적인 원리, 나아가서 법칙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도시지리학도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가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 뒤에 숨어서 그 현상을 존재하도록 하는 법칙일 것이다. 어떻게 그 법칙을 추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진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지리학에 있어서 '무엇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왜', '어떻게'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누적(累積)된 연구 성과의 중요성을 등한시 해서는 안된다. 선배들의 연구 업적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며, 또한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도 안될 것이다. 지리학도들은 미시적(微視的)인 공간에 적용되는 원리는 거시적(巨視的)인 공간에도 적용되며, 그 역(逆)도 성립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본 연구는 미시적인 지역에 대한 접근이다. 부산시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CBD를 비롯한 여러 계층의 중심지(상점가)에 대한 접근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부산시 전체의 공간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지난 10여년간 단계적으로 행하여 온 연구의 한 부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부산역 상점가는 부산시 내부에서는 온천장 상점가와 더불어 오히려 특수 기능 상점가의 하나이다. 이곳에 대해서 본 논문에서는 기능별 패턴의 일부, 층별 규모별 패턴, comer의 패턴, 가로별 패턴을 분석하여 부산역 상점가에 대한 접근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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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자아정체성 귀환과 사라진 타자의 이야기 (Return of Self-identity and Story of the Other which disappeared in Advaita Vedanta)

  • 박효엽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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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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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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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자기를 탐구하는 인간학이자 구원론인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는 '아뜨만'(자아)이고, '아뜨만이 아닌 것'(타자)과 관계하는 다른 모든 어휘들은 오로지 아뜨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아뜨만은 베단따의 형이상학, 인식론, 수행론을 모조리 성립시키는 단 하나의 어휘이기에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어휘'에 비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학파의 핵심 가르침은 개별자아가 본질적으로 아뜨만임을 깨우치는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거짓된 자아가 본래의 참된 자아에로 되돌아오는 자아정체성의 귀환 과정이다. 결국 베단따에서 아뜨만이 아닌 것들 즉 타자에 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결코 의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베단따에서는 타자의 담론도 충분히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가르는 '분별'의 특별한 의미, 진실(자아) 확립보다 더 중요한 허위(타자)의 타파, 깨우침 이전과 이후에 진실과 허위의 치환 등등은, 베단따에서 깨우침의 과정이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방식이 아니라 '정'(자아)과 '반'(타자)의 치환과 지속적 이항대립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타자는 그 방법적 역할을 완수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단지 숨겨질 뿐이고, 타자의 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베단따에서 망각된 어휘들을 되살리는 것은 담론의 중심을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함으로써 평가 절하된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시도에서 중요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은폐된 '노력'이라는 개념과 본래적 의미를 상실해버린 '탐구'와 같은 개념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자기 탐구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시나리오(잠정적 믿음)가 주어져 있고 그것을 중단 없이 체험 속에 활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다. 베단따의 잃어버린 서사를 복원하는 일은 '자아로서의 자아'보다 '타자로서의 자아'를 그 대상으로 삼는 자기 탐구의 역사를 베단따에 재기입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이성과 실존 사이에서 자기의식의 문제: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 아펠의 담론적 이성 이론, 그리고 에벨링의 저항의식 이론에서칸트의 자기의식 이론에 대한 변형들을 중심으로 (Das Problem des Selbstbewußtseins Zwischen Vernunft und Existenz: Im Zentrum auf die Transformationen von Kants Selbstbewußtseinstheorie in Heideggers Analytik vom Dasein, Apels Lehre von diskursiver Vernunft, und Ebelings Lehre von Widerstandsbewußtsein)

  • 김정주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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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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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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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주관 혹은 자기의식은 근대철학의 근본원리이다. 칸트에게 자기의식은 객관의식(통각의 종합적 통일)에서의 자기의식(명료한 자기관계로서 통각의 분석적 통일)이다. 이때 그는 자기의식의 반성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객관의식을 선험적 인식론의 본래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통각의 분석적 통일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체계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자기의식의 반성 구조에서 순환논증 및 무한반복의 이론내재적인 형식적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초기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의 전제들 아래 칸트의 전통 의존적 주관성 이론은 존재망각의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칸트의 자기의식 이론을 변형하고, 이 변형된 칸트 이론을 눈앞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 존재론의 주관성 이론적 정초로 해석한다. 그는 칸트의 자기촉발과 자기의식 이론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통해 현상학적 지평의식으로서의 자기의식의 모델을 시사한다. 그에겐 칸트의 '나는 사고한다'는 것은 시간 자체, 정확히 말해서 시간 자체의 한 양상인 현재화이다. 그리고 그의 전반성적이고 직접적인 자기관계의 모델에선, 주관의 사고하는 자기관계에서 나타나는 순환논증 및 무한반복의 난제들은 생기지 않는다. 아펠은 선험화용론에서 칸트의 자기의식적 통각 이론은 독아론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칸트 이론의 선험철학적 타당성을 논증하는 인간들의 상호주관성의 차원에서 완성하고자 한다. 여기선 칸트의 통각 혹은 의식 일반은 담론적 이성이 기능하고 있는 의사소통공동체로 대체된다. 그런데 주관은 항상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관계를 가질 수 있고 또 자기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주관의 자기의식 혹은 반성이 본질적으로 언어적으로 매개된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면, 주관의 사고하는 자기관계에서 나타나는 순환논증 및 무한반복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에벨링은 하이데거와 아펠의 칸트 변형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성의 자기비판이라는 칸트의 선험철학적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론과 아펠의 담론적 이성 이론을 통합하여, 보편적 죽음에 대한 저항의식의 기초화용론을 개진한다. 이 저항의식은 칸트의 자기의식에 대한 기초화용론적 변형이다. 이성의 저항의식은 독아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저항공동체 내에서 논증을 통해 보편화가능한 의식이다. 따라서 순환논증 및 무한반복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유민화가(遺民畵家)의 화풍(畵風)에 나타난 예술심미 - 팔대산인(八大山人)과 석도(石濤)를 중심으로- (An Aesthetic on painting style of Yumin Painter in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y - Focuse on the Paldaesanin and Seokdo -)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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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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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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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명말청초의 화단은 청(淸) 왕조에 충실하게 협력했던 정통파와 청(淸)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던 개성파가 대립한 혼란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왕조교체기에 국파가망지통(國破家亡之痛)의 한(恨)을 품고 현실을 초월해 산림에 은둔자적하였던 대표적 유민화가였던 팔대산인(八大山人)과 석도(石濤)는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개성적 표현 양식으로 어떠한 유파를 이루지 않았고, 작품을 통해서 흉중의 비참함과 현실에 대한 울분을 자신만이 느끼는 새로운 착상과 구도를 통해 광괴적(狂怪的)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의 화풍(?風)은 비분에 싸인 자아마저 망각한 반규범적이며 무위자연적 사유를 통해 간일(簡逸)하면서도 광견적 심미관을 형성하여 자신만의 개성미와 독창성을 야일(野逸)한 묵희(墨戱)로 발현하였다. 팔대산인(八大山人)은 저항정신과 비분강개가 함축된 기이한 그림을 독특한 발묵선염법을 통해 주로 그렸는데, 냉소(冷笑) 풍자(諷刺) 반어적(反語的) 표현으로 광방불기(狂放不麒)하게 묘사하였다. 한편, '차고이개금(借古以開今)'을 주장한 석도(石濤)는 "화어록(畵語錄)"에서 화리(畵理)와 필법(筆法)의 일치화를 일획(一劃)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일획론(一劃論)은 기존의 법(法)으로부터 벗어난 무법이법(無法而法)의 자율성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감각적 필묵과 색채미를 통해 유민의식에 기반한 흥(興) 욕(欲) 정감(情感)이 유희적(遊戱的)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들의 개성적 화풍은 이후 양주팔괴(楊州八怪)에 전해져 18세기 화풍을 선도하였다.

병자호란기 조선 피로인(被虜人)의 호지(胡地)체험과 삶 (A Study on the living and the experience from Captive's story of war during the Second Manchu's invasion in 1636)

  • 남미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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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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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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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에서는 17세기 병자호란시 호지(胡地)에 피로되었던 조선 백성의 피로담을 통해 전쟁과 백성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평민 김승경과 안추원은 어린 나이에 몽고 북경으로 포로로 끌려가 27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조선으로 탈출해 왔다. 김승경과 안추원은 전쟁으로 인해 뒤틀린 자신의 삶을 되돌려 놓기 위해 도망을 선택하였다. 탈출에 성공한 김승경은 고향에 가족들이 생존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었지만, 안추원은 가족의 생사조차 파악할 길이 없었고 그에게 정신적 경제적 지원을 해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다시 북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청과의 외교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김승경 안추원의 이야기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강한 의지로 극복하려고 했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보여준다. 피로체험은 피로인 당사자들에게는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겠지만, 이들에 의해 전해진 이국 문화와 풍습은 당대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 뜨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피로인의 수나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도망포로를 청으로 돌려보내야하는 송환규정을 어기고 자국민 보호를 위해 아주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조선 백성의 피로체험담을 통해 자주적인 역사를 펼쳐나가지 못한 17세기 조선사회와, 망각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는 현대사의 전쟁포로 문제 등에 대해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영화적 기억과 크로노폴리틱스 (Chronopolitics in the Cinematic Representations of "Comfort Women")

  • 박현선
    • 대중서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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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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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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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논문은 일본군 '위안부'의 영화적 재현이 어떻게 일상의 영역에서, 그리고 대중의 기억 속에서 '상상력'을 촉발하고 공통의 감각과 정동을 불러일으키는가 살펴보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는 오랫동안 망각되었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공공 기억의 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피해자들의 증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담론화를 가능하게 만든 국내외적 크로노폴리틱스(chronopolitics)가 존재한다. 이는 '시간의 정치학'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역사의 독특한 위상을 보여주는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영화적 재현은 역사적 크로노폴리틱스와 연속적이면서도 단절적인 이중성을 보여주며 새로운 시각적 크로노폴리틱스를 드러낸다.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크로노토프는 크게 4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990년대 이전 일본군 '위안부'의 극적 재현들, 둘째, 증언과 역사쓰기로서 1990년대 후반 다큐멘터리, 셋째, 2000년대 들어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이끌어낸 극영화들, 넷째, 애니메이션 및 기타 장르를 포함하는 매체의 확산이다. 이들 중에서 '위안부' 문제를 대중적 극영화(fiction film)의 범주에서 표상하고 있는 첫 번째 국면과 세 번째 국면에 집중해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990년 이전의 '위안부' 극영화들이 철저히 상업영화와 대중장르의 틀을 고수하며 일본군 '위안부' 역사의 성애화를 추구했다면, 2000년대 이후의 영화들은 대중영화의 양식 속에서 다양한 시도들을 실험해보고 있다. 특히, <귀향>, <아이 캔 스피크>, <허스토리> 등과 같은 2000년대 '위안부' 극영화들의 등장은 우리가 그간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본군 '위안부' 운동 등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이슈에 대하여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이에 대한 '문화적 재현은 어떻게 가능한지' 등의 여러 문제를 제기해주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2000년대 영화적 재현의 전략들에 주목하면서, 이 글은 멜로드라마의 대중 정치학, 피해자성과 폭력의 재현, 메타기억으로서의 일본군 '위안부' 극영화 등을 논의하고자 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상상이자 메타기억으로서, '위안부' 극영화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통과해야 할 역사적, 정치적, 미학적 관문들을 보여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최근의 극영화들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넘어서, 오래된 식민 구조를 해체하고자 하는 탈식민주의적 과제이자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이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트랜스내셔널한 프로젝트로 거듭나는 방식에 이 글은 주목한다.

『주역(周易)』을 통해 본 자연(自然)과 인간(人間) -환경윤리의 관점을 중심으로 - (Nature and Human Seeing Through I-Ching - Point of view of the Environmental Ethics)

  • 서근식;지준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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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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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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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논문은 환경윤리의 관점에서 자연(自然)과 인간(人間)과의 관계를 주역(周易)을 통해 살펴보았다. 주역(周易)은 환경문제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자주 언급되는 문헌이다. 주역(周易)에서 자연(自然)과 인간(人間)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살펴보고 인간(人間)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자연(自然)은 끊임없는 생성(生成)을 통해 소멸(消滅)하는 것을 보충한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생성(生成)함으로써 소멸(消滅)해 가는 것을 보충하여 자연(自然)을 유지·보존한다. 자연(自然)의 입장에서는 소멸(消滅)과 생성(生成)이 균등하지만, 주역(周易)을 지은 성인(聖人)은 모든 것이 소멸(消滅)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화(憂患)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생성(生成)의 측면에서 주역(周易)을 서술하였다. 자연(自然)은 항상 스스로를 유지·보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은 없다. 인간(人間)은 자연(自然)에 의해 만들어진 만물(萬物) 가운데 하나이지만 삼재 가운데 하나라는 지위도 부여받았다. 자연(自然)은 지위에 따른 책임과 의무도 부여하였지만 인간(人間)은 지위를 향유(享有)하기만 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삼재(三才) 가운데 하나라는 지위만을 향유(享有)하였기 때문에 자연(自然)을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인간(人間)은 지위를 향유(享有)하기도 해야 하지만 천지화육()天地化育을 돕는 책임과 의무도 다해야 한다. 자연(自然)을 파괴한 것은 인간(人間)이지만 자연(自然)의 생성(生成)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인간(人間)이다. 인간(人間)이 자연(自然)을 파괴한 것은 사욕(私欲)에 가려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 사욕(私欲)을 제거하고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면 자연(自然)은 다시 소생할 것이다.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본성적 '자아'와 우주 발생론 : 인도 신화를 중심으로 (Le Moi naturel et la cosmogonie chez Paul Valéry : au point de vue de la mythologie indienne)

  • 정광흠
    • 영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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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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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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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논문에서는 인도 신화의 우주적 감각의 세계관을 발레리가 과연 어떻게 물리적 현상으로 재현하며, 특히 어떻게 시간과 공간의 운동성을 우주와의 교감 작용으로서 묘사하는 지에 관하여 분석하고 그것의 신화적 근원을 밝히고 있다. 인도 신화의 근원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용의 인위적인 예술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춤의 행위는 발레리에게 자의적이든 아니면 비 자의적이든 시간과 공간 속에 복합적으로 내재하는 정신과 감각에 의한 유기적인 '운동성' 의 몇 가지 원초적인 영감을 제공해주고 있다. 나아가 발레리에게서 춤과 헤엄은 합리적 원칙의 운동성과는 달리 인간의 가장 심오하고 원초적이며 본성적인 감각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그리고 발레리가 상기하는 '우주의 물'은 모태 본능의 순순함 그 자체로서 완벽한 평화와 생명력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자궁이다. 그것은 지중해이며 곧 인도 신화의 주제에서 빌려오는 '우유의 대양'을 의미한다. 바로 이 '순수하고 깊이 있는 본질'의 '신성한 쓴맛'을 내는 영생의 신주를 마시는 것,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본성적 사랑을 비유하는 놀이, 그리고 어머니의 품속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적인 욕망의 표현, 즉 우주의 본질을 향한 영원한 회귀일 것이다. 여기서 발레리는 '자아'에 관한 인본성의 본질적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또 다른 회귀를 시도한다. 인도신화의 신비적 감각 세계를 재현하는 우주적 춤과 성행위는 자아를 소멸하여 우주의 에너지와 교감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브라흐만 철학과 불교 철학의 사고를 통 털어 신화적 깊이에 있어서 춤과 성행위는 무화의 절대적 상태로 들어가는 동일한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국 망각의 황홀경은 육체적 감각의 절정과 더불어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 우유의 대양에서 명상에 잠겨 잠들어 있는 '나라야나' 의 상징성의 본질은 발레리에게 영원한 평화의 안식처, 초월적인 '자아'의 우주적 감각을 발견케 하고 있다. 발레리는 인도 신화의 우주 발생론을 토대로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감각 조건을 만족시키는 심리적 원형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아니면 존재 그 자체에 있어서 '경이로운 불안감'은 예술의 창조 작업을 위한 숭고한 감감작용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