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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Hope Found in Suffering: Focusing on the Book of Job and the Theology of J. Moltmann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에 대한 신학적 성찰 : 욥기와 몰트만 신학을 중심으로

  • 임민균 (가톨릭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 Received : 2020.08.31
  • Accepted : 2020.09.09
  • Published : 2020.09.28

Abstract

This study reflects on suffering, a theme of anthropology, from a Christian theological point of hope. It suggests that suffering is not a negative experience, rather a medium of hope that can be a positive driving force in life and an opportunity to reach personal maturity. It aims to deepen the content of anthropology regarding the meaning of suffering by discovering a new harmony within the relationship between pain and hope. The book of Job denies the theodicical concept that justifies suffering as punishment for human sins and opens a new horizon of understanding the suffering as a space of hope, where men can experience the Love of God in the relationship with God. In his theology of suffering, Moltmann broadens and deepens the horizon of understanding as the book of Job discovered. First, he interprets the history in the hope of an eschatological future when the resurrected Jesus Christ will bring the final victory over evil and suffering. Then he invites men to proactively resist the absurdity and suffering revealed through this interpretation. Second, Moltmann reflects on the problem of suffering in the concept of the Trinity of God who endures active suffering with love for men shown in the crucifixion of Jesus Christ. He offers another hope that enables men to overcome the suffering in God's love. Therefore, the Christian faith can confess that we can hope in suffering.

본 연구는 인간학 주제 중의 하나인 고통에 대하여 기존 철학적 접근을 넘어 그리스도교 신학적 입장에서 성찰하여, 고통이 부정적 경험으로만 남지 않고, 삶의 긍정적인 원동력으로서 인격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고통과 희망의 관계 안에서 조화'라는 새로운 의미 지평을 발견함으로써 고통의 존재 이유와 의미에 관한 인간학 콘텐츠를 심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욥기는 고통을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써 정당화하는 신정론적 개념을 부정하고,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희망의 공간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 신학자 몰트만은 고통의 신학에서 욥기가 발견한 지평을 두 가지 측면에서 심화시킨다. 첫째,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악과 고통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올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 안에서 현재 역사를 해석하고, 이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와 고통에 실천적으로 저항하도록 초대한다. 둘째, 고통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발견되는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 인해 능동적인 수난까지 감수하는 삼위일체론 속에서 성찰하고, 그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은 고통과 희망이 대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희망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Keywords

I. 서론

모든 인간은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와 목표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여러 순간들을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삶의 여러 경험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 바로 ‘고통’이다. 어떤 이들은 고통을 삶의 긍정적인 원동력으로 받아들여 인간적 성숙에 도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할 만큼의 슬픔과 낙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 같은 고통이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상황이나 태도에 따라 그 고통의 무게가 상이할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한 판단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처럼 고통의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더 나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고통의 의미는 더욱 세분화되는 이유로, 모든 경우를 아우르는 ‘고통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단순 명료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하다[1]. 이와 같은 인간이 처한 고통의 실존적 상황에 직면하기 위하여, 이 논문은 인간학 콘텐츠의 주요 주제 중에 하나인 ‘고통의 문제’를 ‘희망’이라는 긍정적 전망으로 성찰할 수 있는지를 그리스도교 신학적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구 약성경에서 ‘무죄한 이의 고통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욥기와 신약성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해 ‘고통’의 관점에서 많은 신학적 성과를 남긴 개신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신학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서, 과연 겉으로 보기에는 대립적으로 보이는 ‘고통’과 ‘희망’이라는 용어에서 상호적 관계맺음을 넘어 조화라는 새로운 의미 지평을 발견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교 신학적 성찰이 제시하는 ‘희망’이라는 지평이 단지 종교적 영역에 한정 되지 않고, ‘고통’이라는 인간 실존 문제와 관련한 인간학 콘텐츠의 심화와 발전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한다[2].

II. 욥기의 고통 이해

그리스도교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서 고통을 해석하는 가장 일반적 기준은 바로 ‘인간의 죄에 대한 벌’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의 창조주인 하느님은 인간의 선악에 따른 말과 행위를 상선벌악의 원칙으로 공정하게 판결하는 심판관의 이미지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창세기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 창조사업에 협력하도록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지만, 인간이 이 자유를 하느님 뜻에 맞지 않게 남용하여 지은 죄에 대한 벌로써 고통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고, 이로써 인과응보에 입각한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해석한다[3].

고통을 인간이 하느님께 지은 죄의 벌로 이해하는 기준은 인간이 자신의 명백한 탓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의 상황에서 문제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어떤 죄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지만 확실한 해답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죄한 이의 고통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성찰을 담은 책이 바로 ‘욥기’이다. 하느님 앞에 결백한 욥이 이유 없이 찾아온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 답변을 구하고자 시도한 고통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들은 ‘하느님이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심판한다면, 무죄한 이들의 고통은 왜 세상에 존재 하는가?’와 ‘악인들은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계속 번성하는데, 왜 선인들은 계속 고통 받고 있는가?’ 등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욥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통이 죄에 대한 벌이라는 인식을 극복함과 동시에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찾게 되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어떻게 고통 속에서 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지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세 친구의 신정론

하느님의 허락으로 사탄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가혹한 고통의 상황에 놓인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들이 방문한다. 하지만 그들은 욥의 무죄함을 인정하고 그의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기 보다는, ‘고통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토대로 각자만의 방식으로 하느님께 범한 (인지하지 못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는 욥을 단죄하고 그의 고통을 정당화한다(욥 4-25)[4].

우선 엘리파즈는 “죄 없는 이 누가 멸망하였는가? 올곧은 이들이 근절된 적이 어디 있는가?”(욥 4,7)라는 말을 통해, 욥이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과거에 범한 죄로 인해 하느님의 정당한 벌로써 고통을 겪고 있음을 주장하며, 하느님의 의(義)와 결백을 변호한다. 한편 빌닷은 “아무려면 하느님께서 공정을 왜곡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정의를 왜곡하시겠나?”(욥 8,3)라며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음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초파르는 인간에게 심판을 내리는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영역임을 강조한다(욥 11,7-12)[5].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은 신앙 안에서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분이라기보다는, 인간 세상과는 유리되어 저 천상에서 자신의 선성(善性)을 유지한 채 죄악이 가득한 인간 세상을 고통이라는 벌로써 통제하는 냉정한 심판관으로만 인식될 위험이 있다[6]. 또한 “절망에 빠진 이는 친구에게서 동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네.”(욥 6,14)라는 욥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세 친구의 논리에는 욥이 직면한 고통의 실존 상황에 대한 아무런 공감 능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리하여 욥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동기 부여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2. 하느님 체험으로 깨달은 고통의 의미

2.1 고통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욥은 자신에게 가해진 이유 없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이 믿는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선악에 따라 보상 또는 응징을 하는 윤리적 개념 안에서만 이해되는 분으로 한정하는 통념에 대해 반기를 든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러한 태도를 굽히지 않고 하느님과 대면을 위한 소송을 시도한다. 계속적인 욥의 소송 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 감추었던 하느님이 드디어 폭풍 속에서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의 고통의 이유에 대한 답변 대신 인간을 포함한 세상 전체를 사랑으로 돌보는 자신의 놀라운 창조 업적을 펼쳐 보여준다(욥 38,4-39,30). 이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의 선악을 판결하는 심판관을 넘어선 세상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창조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욥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으로 통치하는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한다[7]. 그리하여 욥은 하느님과 마주한 인격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무죄한 고통의 의미를 찾는 대신 창조 업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기회를 갖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직면하고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비록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 앞에서 자신은 미약한 존재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은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 남지만, 하느님이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사랑으로 항상 지켜보며 그의 아픔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하느님을 고통 속에서도 인간과 사랑의 관계가 가능한 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욥의 고통에서 밝혀진 하느님 사랑의 면모는 장차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을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8].

그리고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은 직접 자신에 대하여 세 친구가 아닌 욥이 올바로 말했다고 확인한다(욥 42,7-8). 이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가 인과응보의 윤리적 틀이나 악과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하느님의 정의를 변호하려는 신정론(神正論)적 틀을 뛰어넘는 것임을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틀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처벌이 두려워 강제된 신앙 안에 가둬둘 것이고, 신정론적 틀은 하느님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나머지 정작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욥기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 사랑에 기초한 새로운 하느님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욥 자신에게는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신앙을 견고히 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9].

2.2 고통 속에서의 희망 가능성

그렇다면 욥은 이러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자기 책임 없이 부당하게 대면하게 되는 고통의 상황에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어떠한 명확한 이성적 해답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적 차원으로도 불가능한 신비이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포기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하느님께 질문하였고, 이는 자신의 신앙을 포함한 인격적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욥은 이 질문과 탄원 끝에 마주하게 된 하느님 체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한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자신이 직면한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이제 자신의 무죄한 고통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고통 속에서 체험한 하느님 사랑으로 ‘희망’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11]. 여기에서 고통에 대한 물음은 이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어떻게 직면하고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이고 실천적인 물음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고통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주시는 하느님의 치유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12].

무죄한 고통 속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발견한 희망의 가능성은 이제 체험 당사자로 하여금 같은 고통의 상황에 놓인 이웃에게 그 체험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올바른 실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에 대한 섣부른 예단이나 상선벌악의 윤리적 판단은 물론 신정론적 해석에 의한 단정도 조심해야 한다. 그 대신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함께 아파함’의 마음으로 말 보다는 침묵으로 함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그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더 나아가 고통 속에 있는 타인에게 그 고통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할 수도 있다[13].

III. 몰트만의 고통 이해

물론 욥기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을 토대로 한 인격적 관계 가능함을 밝히고 있지만,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로만 규정되어 있고, 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유지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계시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그분의 십자가과 부활은 욥기가 밝힌 고통의 신비를 더욱 발전 심화한다. 물론 ‘고통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고찰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매우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사랑’과 ‘희망’이라는 해석 지평으로 분석하여,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는데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그리스도교 가르침과 실천 방안을 제시한 몰트만이 신학 특히 ‘고통의 신학’ 분야에 남긴 공헌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몰트만은 인간이 어떻게 고통 중에 희망할 수 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 희망의 정체는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1. 고통의 신학을 향한 신학적 여정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몰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이다. 특히 16세 되던 1943년 징집의 명령을 받아 투입된 부대에서 곁에 있던 동료가 폭탄으로 참혹한 죽음을 맞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영국에서 3년간 전쟁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경험한 몰트만은 자연적으로 ‘과연 고통 속에서 하느님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신앙적 질문에 몰두하게 된다.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 그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외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에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포함한 전쟁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해줄 수 있고, 그 전쟁의 상흔과 고통으로부터 무감각해진 삶에 내적 ‘희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분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몰트만은 신학자로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한다[14].

몰트만은 자신의 ‘고통의 신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성찰하고, 그 결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미래의 종말적 영광의 시각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독특함을 보인다. 시간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보다 앞서고,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십자가 사건의 우선적 중요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전쟁의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동기와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부활에 기초한 ‘희망’이라는 긍정적 전망을 그들의 삶과 역사에 우선적으로 제공할 필요를 절감했다. 이러한 이유로 몰트만은 먼저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을 통해 고통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올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이라는 역사에 대한 해석 지평을 제시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Der gekreuzigte Gott)』에서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에서 고통의 문제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함으로써, 현재의 고통을 하느님 사랑 체험으로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하는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15].

2. 『희망의 신학』

2.1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이라는 신학적 전망

1964년 출간되어 신학계에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몰트만의 첫 대표 저서가 바로 『희망의 신학』이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은 인간 실존과 역사의 해석에 집중하는 ‘실존신학’과는 달리, 몰트만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국에 가져올 영광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관점에서 역사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데 집중하는 신학의 방법론적 혁신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신학의 무게 중심을 ‘실존’에서 ‘미래’와 ‘희망’으로 옮겨야 함을 주장한다 [16].

몰트만은 신학계에서 지금까지 종말론을 그저 세상 최후의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서술 정도의 수준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이 종말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관계는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 신앙과 역사적 현실에 미칠 수 있는 교훈적이면서도 비판적 영향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결과 교회는 종말론적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혁신을 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을 분리시킴으로써 현실 권위 유지에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7]. 이러한 이유로 몰트만은 종말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종말은 희망의 대상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희망까지 포괄하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종말론이요, 희망이며, 앞을 바라보는 전망(展望)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현재의 타개(打開)와 변혁이기도 하다[18].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 종말론은 신학의 마지막이 아닌 ‘시작’이고, ‘주체’이며, 해석의 ‘열쇠’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결코 현재가 목표 없이 진행되어 도달하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현실을 이해함과 동시에 이 부활한 예수가 종말에 가져올 미래의 가능성과 능력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이제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미래적 종말론이 어떻게 현재의 고통에 직면하고 있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희망’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밝혀야할 과제가 남게 된다[19].

2.2 고통의 문제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실존신학의 대표 주자 바르트(K. Barth)의 “하느님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과 불트만(R. Bultmann)의 “인간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이 주장하는 ‘현재적 종말론’을 비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취할 종말에 대한 희망을 강조하는 ‘미래적 종말론’을 주장한다. 우선 바르트는 하느님 말씀의 초월적 주권을 강조하며,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져야만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고, 따라서 이 계시가 주어지는 매순간을 종말로 받아들이는 ‘하느님 중심’의 현재적 종말론을 말한다. 한편 불트만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이해는 인간 실존과의 관련성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종말론은 인간 실존의 구원, 즉 진정한 자아가 드러날 때 실현된다고 강조하면서 바르트와는 구분되는 ‘인간 중심’의 현재적 종말론을 주장한다[20]. 하지만 이러한 역사성을 무시한 현재적 종말론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올 종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의 역사를 이 미래의 희망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이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부조리와 고통에 맞서는 실천적 저항의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21].

한편 몰트만이 제기하는 ‘미래적 종말론’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한 미래의 희망이 십자가로 대표되는 현재의 고통의 역사에 선포될 때 ‘신적 계시’가 이루어진다고 해석한다[22]. 그리하여 계시된 희망이 지금 고통의 상황에 놓인 이들에게 삶의 회피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며, 현재의 고통을 부활한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극복하도록 인도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오는 희망은 그의 십자가를 기초로 세워졌기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는 물론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의 힘도 제공하기 때문이다[23].

몰트만은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이 고통의 현실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강요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통의 현재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저항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적 미래’가 아닌 ‘인간적인 미래의 환상’에 의지하게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의 신학』의 단계에서 몰트만은 비록 고통 속에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 체험이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과연 고통이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오히려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은 현재에는 볼 수 없는 악과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현재 역사를 향해 오고 있기 때문에 고통 중에서도 희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보았다[24].

하느님의 신적 계시가 현재에 아직 존재하지 않은 ‘약속’의 형태로 주어지는 종말론적 경향성을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약속된 종말론적 미래를 성취할 하느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현재의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현재의 십자가’를 지는 실천적 저항을 통해 그 약속이 성취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25]. 그리하여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고통의 현실에서 비록 완성은 아닐지라도 구체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증거할 수 있다[26].

3. 십자가 신학

3.1 『희망의 신학』에서 십자가 신학으로

몰트만이 『희망의 신학』에서 거둔 신학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드러나는 몇 가지 한계들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먼저 몰트만 신학의 일방성 문제로 인하여 악과 고통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서의 종말론적 ‘희망’을 강조한 나머지, 고통의 현재를 실존적인 하느님 ‘사랑’ 체험으로 직면할 수 있는 ‘신앙’의 힘을 간과한 결과, 신앙과 사랑에 근거한 희망의 내용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보인다[27]. 또한 ‘미래’에 대한 강조는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온 ‘십자가’를 포함한 ‘과거’ 생애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이 생애가 부활에 미친 영향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현재를 단지 미래를 향한 임시적 과정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고통의 ‘현재’에 하느님의 실존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한계를 드러낸다[28].

몰트만도 『희망의 신학』에서 ‘희망’과 ‘미래’를 강조한 나머지 신학의 일방성에 따른 절대화의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신학적 여정의 중심 테마인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비해 십자가 사건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1972년 출판된 또 다른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의 서문에서 ‘십자가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내적 규범임과 동시에 자신의 신학적 사고를 이끌어 가는 중심임을 확인한 뒤, 『희망의 신학』에서 선포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미래가 어떻게 십자가 수난의 역사에 구체화되는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임을 밝힌다. 그리하여 구원의 사변적 영역에 한정되어 논의되었던 기존의 십자가 신학의 한계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분의 부활과의 관계 안에서 성찰하고, 더 나아가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새로운 개념을 밝혀 ‘고통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자 한다[29].

3.2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정체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되게 하는 독특함을 규정하는 사건이다. 특히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십자가 신앙은 먼저 ‘개인적 차원’에서 고통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성숙으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신앙으로 빠지지 않도록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는 비인간화 문제로 고통을 야기시키는 잘못된 사회 구조를 변혁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매개체의 역할을 수행한다[30]. 십자가 신학이 이와 같은 이중적 차원에서 고통의 대면과 극복을 지향하는 ‘실천’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제 이 실천으로 이끄는 힘을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지 밝혀낼 과제가 남는다.

이 과제 수행의 첫 단계로 몰트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분의 ‘신원’을 밝혀내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역사적 현실 차원’과 동시에 그분 부활에 기초한 ‘종말론적 신앙 차원’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이 두 가지 차원에서 그분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이 고통의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 하는데 상호 보완적인 도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31].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 그가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된 원인들(causae crucis)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역사적 예수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주동으로 ‘하느님 모독자’로서 처형을 당한다. 구약성경 전통에서 이스라엘을 로마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아는 죄인의 심판자, 정치적·군사적 영향력 있는 지도자 개념 안에서 이해되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그리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에서 찾았다(루카 4,18-19). 문제는 하느님께만 유보된 죄 용서의 권한을 예수가 하느님 나라 선취에 대한 표징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율법과의 충돌은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이끈 중요한 요인이 된다[32]. 둘째로 예수는 로마제국 전복을 도모한 정치적 운동의 ‘선동자’의 형벌로 십자가 죽음을 맞는다. 종교적 상황과 정치적 상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당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라 선포 활동과 이에 뜻을 같이 하는 군중 세력은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안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운동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33].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 모독자’, ‘선동자’로서의 역사적 예수가 그의 십자가 죽음의 모든 원인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셋째로 예수는 그가 선포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십자가에 달린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친밀 관계를 유지했던 바로 그 하느님으로부터의 버림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침을 가장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여기에서 그의 죽음의 특수성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서 단지 역사적 예수의 ‘개인적 실존’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투신했던 아버지 하느님의 신성에 관한 모든 선포의 ‘신학적 실존’까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외적 사실에 머물지 않고, 십자가 사건을 ‘하느님 자신 안에서 예수와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하고, 그 의미에 대해 ‘신학적 고찰’을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신학적 고찰은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느님이 ‘부활’에서 도달한 신비적 ‘일치’를 하느님 자신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하느님 개념’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하여 현실 고통의 문제를 함께 공감하고 극복하기를 원하는 십자가 신학은 이 하느님 개념으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전망을 찾게 된다[34].

3.3 십자가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고통의 문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사건 안에서의 삼위일체 하느님 개념을 성찰하기에 앞서, 몰트만은 이 개념 논의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 그리스도교 신앙의 뿌리에 근거하지 않은 전통 희랍철학에 근거한 선(善)자체인 유신론적 하느님은 고통 받을 수 없고, 죽을 수 없다는 사고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하느님 개념을 파악할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낸다[35]. 특히 무죄한 이의 고통 앞에서 이러한 유신론적 하느님은 아무런 위로나 극복 을 위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하느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저항적 무신론의 원인이 되고 만다[36]. 이러한 이유로 인간 고통 문제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과연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해야만 그리스도교만이 가능한 고통 속에서의 ‘희망’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 여기에 덧 붙여 몰트만은 전통 플라톤 사상에 입각한 하느님의 불변성 개념을 피조물의 결함에 따른 변화와는 구분되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고, 따라서 하느님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권리를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앙 진리에서 출발하여, 십자가를 하느님이 고통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능동적인 변화, 즉 ‘사랑의 고난’을 받아들이고, 이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분임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통 받을 능력이 없는 하느님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분이기 때문 이다[37].

이러한 사전 정당성 작업을 마치고, 몰트만은 이제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사적 장소에서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 하느님 개념은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로마서 8장 31-32절과 갈라티아서 2장 20절에 등장하는 “내어주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밝혀진다. 먼저 “[...]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 습니까?”(로마 8,31-32)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어’ ‘아들의 죽음을 고통당하는 분’으로,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해’ ‘죽음을 경험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의 죽음’으로 이해된다. 한편 “[...]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 죽음에 흔쾌히 자신을 내어주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을 위한 사랑의 내어줌이라는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가 아버지와 아들이 가장 깊이 ‘분리’되고 있는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다. 바로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과 아들의 일치에서 발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며, 이 성령이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소외됨 없이 체험하게 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삼위일체 하느님 신비가 결정적으로 계시되는 역사적 현장이 되고, 이 하느님의 단일성을 세신적 인격들의 일치에서 발견함으로써 역사적 삼위일체론이 완성된다[38].

고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고통의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신정론의 질문들이나 고통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변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의 고통 안에서 그 고통에 참여하는 하느님 사랑의 실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로 힘들어하는 이들과 함께 하느님께 도움을 울부짖는다. 이에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이 자신의 품 안에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고통 받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 위로받고 고통을 극복할 ‘희망’을 발견한다[39].

III. 결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이라는 실체의 존재 이유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고통에 있어서 더욱 절실한 문제는 이 고통을 어떻게 대면하고, 극복하는지에 대한 영성적·실천적 해답을 찾는 것이다. 욥기가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전통적 신정론 개념에 따른 고통 이해를 넘어서 고통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면,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능동적인 고난을 감수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함으로써,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고통을 품어 안는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도움으로 고통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한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십자가로 시작된 삼위일체 하느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최종적으로 정복할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40]. 그리하여 고통 속에서 하느님 사랑 체험을 ‘희망’할 수 있고, 종말론적 미래의 ‘희망’을 소유한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대면하고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자신의 주변 이웃들에게 ‘실천’으로 증거하게 된다. 십자가 중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41].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은 이제 ‘고통’과 ‘희망’이 서로 대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희망할 수 있음을 고백할 수 있고, 고백해야 한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요즈음 그리스도교가 바이러스 전파의 주체로 비판받고 상황은 교회가 이 논문에서 밝힌 ‘고통 속에서 발견한 희망’의 지평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을 경우 어떠한 잘못된 결과에 다다르게 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절대화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인간을 향한 무조적인 사랑을 고통에 처한 사회에 실천으로 증거할 책임이 있음을, 더 나아가 이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을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할 자신의 소명을 간과 할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본래 의도한 종교를 초월한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위험성이 있음을 교회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통 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자신의 삶에서 드러낼 수 있도록 지속적인 쇄신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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