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이 글의 목적은 이란의 청년감독 사미라 마흐말바프 (Samira Makhmalbaf)의 작품과 영화 세계를 분석하는데 있다. 사미라 감독은 자신의 여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사실주의 스타일로 재현하는 21세기 이란 영화의 새로운 흐름(new Iranian Cinema)을 대표하는 여성 감독이다.
이란(Iran)은 한반도 8배 크기의 국토에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인구 8,500만 명을 가진 이슬람 국가이다. 종교지도자 이맘(Immam)을 최고지도자로 신봉하는 시아파(Shiis) 이슬람 국가로 종교지도자가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는 신정체제 국가(theocratic state)이다.
이란 최초의 극영화는 1930년 오바네스 오가니안스 감독의 <아비와 라비>를 기원으로 삼고 있으며, 초창기에는 필름 파르시(Film Farsi)로 알려진 상업영화가 만들어졌다. 이란 영화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다리우스 메르지(D. Mehrrju) 감독의 1969년 작품 <암소(The Cow)>가 베를린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던 1970년대부터이다. 이란 영화사는 1979년 발발한 이란 이슬람혁명(Islamic Revolution)을 기점으로 새로운 분기점을 맞는다. 서구화를 지향하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에 기반한 신정체제가 구축되었다. 샤흐라(Shahla Mirbakhyar)는 이란 영화사를 1979년 이전의 제1기 (1969년–1979년), 1979년 혁명 이후 제2기(1980년– 1997년), ‘차일드 시네마(children cinema)’ 중흥기인 제3기(1997년–2007년)로 구분한다[1]. 차일드 시네마 (children Cinema)란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 영화계는 검열이 강화되면서도 정부로부터 산업적 지원을 받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자, 검열을 우회하면서도 비판 정신을 유지하는 독특한 차일드 시네마가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영화로 키아로 스타미(A. Kiarostami)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자파르 파나히(Jafar Panahi)의 <서클 (The Circle)>(2000년), 마지드 마지디(Majid Majidi)의 <천국의 아이들>(1999년)이 있으며, 이란 영화를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 글의 연구 대상인 사미라 감독은 제2기와 제3기의 사실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강렬한 사회비판 정신과 독자적인 영화 스타일로 새로운 이란 영화의 장을 열고 있는 21세기 이란 뉴웨이브를 상징하는 대표적 감독이다. 그녀는 <사과(The Apple)>(1998년), <칠판 (Blackboards)>(2000년), <2001년 9월 11일 (September 11)>(2002년), <오후 5시(At Five in the Afternoon)>(2003년), <두 발로 걷는 말(Two-legged horse)>(2008년)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총 5편의 영화를 연출하였다. 이 글에서는 그녀의 대표작 3편 <사과>, <칠판>, <오후 5시>을 구체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아, 사미라 감독의 작품세계와 영화 철학을 분석하고 당대 이란의 사회 현실과 맺는 사회맥락적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그녀의 작품세계 및 영화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란 영화와 사미라 감독에 대한 한국 영화계의 선행 연구는 아직 미미한 편이다. 이란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인 최병학의 저서[1]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을 분석한 논문[2],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을 분석한 변혁과 신정범의 논문[3], 릴리 아미푸르 감독을 분석한 장건재의 논문[4] 등이 있으나, 이 글의 연구 대상인 사미라 감독에 대한 직접적인 선행연구는 전무하다. 다만 해외에서는 단행본 일부에서 사미라 감독을 소개한 패트리샤 오웬의 저서[5], 사미라 자매를 소개한 하임 브레시쓰(Haim Bresheeth)의 논문[6], 사미라 감독을 직접 분석한 나스린 라히미에(Nasrin Rahimieh)의 논문[7]과 마린 카르미츠(Marin Karmitz)의 논문[8] 등이 있다. 따라서 사미라 감독에 대한 이 글은 한국 영화계의 이란 영화와 중동영화에 대한 선도적 연구가 된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이 글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II장에서는 사미라 감독의 영화 역정과 연혁을, III장에서는 대표작 3편의 영화를 살펴보고, IV장에서 작품세계의 특징과 사회맥락적 의미를 심층 분석한 다음, V장에서 이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영화사적 의의와 남겨진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II. 영화역정과 연혁
사미라 감독은 1980년 2월 15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태어났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녀는 이란 영화계를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모호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딸이기도 하다. 모호센 감독은 첫 부인 파테메 (Fatemeh Meshkini)와 결혼하여 사미라(Samira), 메이삼(Meysam), 한나(Hana)라는 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사미라 감독은 그의 첫째 딸이다.
사미라 감독의 영화 인생에서 아버지의 영향은 지대하다. 저명 감독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고 찍으며 성장했다. 그녀는 7살 때인 1987년 아버지의 영화 <사이클리스트(The Cyclist)>에 연기자로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다. 모호센 감독에 따르면 <사이클리스트>에서 사미라의 연기는 “서구적인 눈을 갖고 있지만, 오리엔탈의 전통 연기를 잘 보여줬다”고 말한다[9].
사미라 감독은 자유와 감성을 존중하는 아버지의 교육철학 속에 14살 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설립한 ‘마흐말바프 영화학교(MFH, Makhmalbaf Film House)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하였으며, 20살에는 영국 런던 로햄턴대학(Roehampton University)에 진학하여 심리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14살 때 학교를 그만 둔 이유에 대해, “나는 학교를 싫어했다. 학교는 오로지 정해진 답을 강요했다. 질문과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9].
MFH에서의 영화교육과 아버지의 철학은 이후 그녀의 영화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MFH에서의 영화 교육 속에 사미라 감독의 전 가족은 모두 영화인이 되었다. 어머니 마르지예 매쉬키니는 모호센 감독을 도와 편집과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으며, 여동생 하나, 남동생 메이삼까지 모두 영화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이하게 사미라 가족은 공동 영화 제작을 해왔다. 아버지는 딸의 영화를 위해 시나리오를 쓰고, 남동생은 촬영을 맡고, 어머니는 딸의 영화의 조 감독을 한다. 사미라 감독의 <오후 5시>(2003), 어머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2000), 남동생 메이삼 감독의 <사미라는 어떻게 ‘칠판’을 만들었나>(2000), 여동생 하나 감독의 <조이 오브 매드니스(Joy of Madness)>(2003)가 이런 작품들이다. 이란의 하산 솔주 감독은 <아빠의 영화학교: 모흐센 마흐말바프(Daddy’s School)>(2014년)에서 MFH에서의 자유와 사랑의 영화교육과 가족 공동제작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아 전 세계에 상영한 바 있다.
이러한 가족환경과 영화교육 속에 성장한 사미라 감독은 자연스럽게 아버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 모호센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고(故)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카메라를 든 성자(聖 子)이자 구루(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모호센 감독은 1957년 이란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이슬람 급진파로 반정부 활동을 하며 사형선고를 받고 4년 5개월간 수감생활과 고문을 겪었다. 초창기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가치를 담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행상인>(1987년)을 전후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 시선으로 현실 비판적인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마르게와 엄마>(2019), <어느 독재자>(2017)를 연출한 이란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감독이다. 모호센 감독은 강렬한 사회비판의식 외에 휴머니즘의 실천으로 유명하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중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을 보게 되자 촬영을 접고 제작비 모두를 난민 구호에 사용하고 이란으로 돌아간 일화를 너무나 유명하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사실주의 스타일과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회비판과 실천을 강조하는 모호센 감독의 영화 철학은 지금까지도 사미라 감독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MFH의 교육 속에 사미라 감독의 영화 재능은 일찍부터 꽃피었다. 아버지의 영화학교에 다니던 1998년 17살의 나이에 그녀의 첫 번째 영화연출 데뷔작이자 직접 시나리오를 쓴 <사과(The Apple)>를 연출하였다. 이란의 하타미(Khatami) 대통령 체제에서 일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 개방 분위기 속에 제작한 이 영화는 1998년 칸느 영화제를 비롯하여 전 세계 100여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사미라 감독은 일약 국제적인 청년감독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사미라 감독은 이후 2000년에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역에 사는 쿠르드족을 배경으로 <칠판 (Blackboards)>을 연출했고, 그해 칸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2002년에는 자신이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2001년 9월 11일(September 11)>을 연출하였고, 2003년에는 미국의 침공과 탈레반 내전을 겪은 아프가니스탄에 여성의 고단한 삶을 다룬 <오후 5시(At Five in the Afternoon)>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2008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녀의 다섯 번째 영화인 <두 발로 걷는 말(Two-legged horse)>을 연출했다. 그녀는 영화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실제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왔다. 2008년 <두 발로 걷는 말(Two Legged Horse)> 촬영 현장에서는 테러집단의 수류탄 공격을 받아 촬영 중이던 말이 죽고 스탭들이 부상을 입는 등 수차례 죽을 뻔한 위기와 협박을 겪었다. 당시 사미르 감독은 “거리의 어린이들이 쓰러지고 길거리는 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겠구나는 생각을 했다” 고 회상한다[10].
사미라 감독의 독특한 실험정신과 과감한 사회비판 정신은 국제 영화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8살 때 만든 <사과>는 칸느영화제에 처음 초청되었고, 런던 영화제에서 서덜랜드 상(Sutherland Trophy)을 수상했다. 2001년 <칠판>과 2003년 <오후 5시>는 칸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로 지명되었고, 그 중 <칠판>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베니스영화제에서 유네스코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영국 가디언(The Guardian)가 뽑은 현존 최고의 영화감독 40인 안에 선정되기도 했다. 사미라 감독은 칸느영화제 수상 소감에서, “이상은 이란에서 더 나은 삶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을 가지고 있듯이, 미국은 미국의 탈레반이 있고, 이란은 이란의 탈레반이 있다”고 말한다[11]. 이처럼 사미라 감독은 이란의 사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21세기 뉴 이란 시네마의 대표주자이며, 여성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는 실천적 영화인이다.
표 1. 사미라 마흐말바프 감독의 영화연표
III. 연구대상
1. <사과(The Apple)>(1998년, 86분): 속박된 자유와 탈주하는 욕망
이 영화는 감독이 MFH에서 영화교육을 받던 17살에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데뷔작이다. 사미라 감독은 TV에서 쌍둥이 딸을 출생 이후 12년간 집안에 감금한 한 노인의 뉴스를 접하고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 영화로 만든다. 감독은 아버지와 눈먼 아내, 두 딸과 직접 만나고 11일 동안 이들의 집에 기거하며 하루 일과를 카메라에 담아 아버지의 입장, 두 딸과 아내의 심리를 재구성했다.
65세 아버지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다. 그는 자신의 눈먼 아내와 쌍둥이딸 자하라(Zahra)와 마수메 (Massoumeh)를 집에 가둬놓고 매일 장사하러 나간다.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결국 정부의 복지국 직원이 찾아와 두 딸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그 노인을 집안에 감금하여 딸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 노인은 딸과 아내를 감금한 것이 이슬람 종교 교리에 입각하여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였음을 주장하고, 눈먼 아내는 바깥에 나가기를 거부한다.
실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허구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객관적 거리두기와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촬영하였다. 등장인물 또한 실제 당사자들이다. 비디오캠의 거친 입자, 현장음이 담긴 녹음기, 등장인물들과의 인터뷰는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드러낸다.
사미라 감독은 이슬람 사회 체제의 전통 가치관이 어떻게 일상의 삶과 현실 속에 침투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억압적 기제로 작동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재현한다. 감독은 이란 사회의 종교적 경건주의가 억압된 관습으로 변질된 가정의 현장을 카메라로 고발하면서, 자각하는 여성 정체성을 기반으로 여성의 탈(脫) 속박적 자유와 해방을 욕망한다.
2. <칠판(Blackboard)>(2000): 생존의 희망으로서의 글과 교육
이 영화는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감독의 아버지 모호센 감독이 시나리오를 맡았다. 영화는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대에서 칠판을 등에 지고 외진 마을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쿠르드족 교사 리부아르와 싸이드의 여정을 다룬다. 두 교사는 국경을 넘나들며 밀수품을 운반하는 소년들과 국경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노인 일행을 만나다. 리부아르는 같은 이름을 가진 밀수꾼 소년 리부아르에게 이름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동행한다. 싸이드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쿠르드족 노인들을 만나고, 호두 40알을 받고 이들을 국경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싸이드는 안내 중에 죽기 전에 과부 딸을 시집보내는 소원을 가진 노인을 위해 할랄레와 얼떨결에 결혼하고 그들 모자에게 글을 가르친다. 두 교사는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글에 집착하고 글을 가르친다. 국경을 경비하는 군인들이 염소 떼 사이로 숨어 있는 소년들에게 총을 쏘고 소년 리부아르는 “제 이름을 썼어요”라고 말하며 죽는다. 싸이드와 쿠르드족 일행은 총격을 피해 무사히 국경을 넘고, 싸이드는 억지결혼을 한 할랄레가 고향가기를 원하자 서로의 길이 다른 것을 확인한 싸이드는 이혼하고 위자료로 칠판을 주고 헤어진다. 그 칠판에는 “사랑해”라고 적혀 있다.
이 영화에서도 감독 특유의 다큐멘터리식 사실주의 스타일이 두드러진다. 국경을 넘는 군중들 속에 카메라를 밀착하여 사람들의 움직임과 험난한 고통의 여정을 현장감 넘치게 생생히 보여준다. 사미라 감독은 촬영을 위해 쿠르드족 주민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안내 속에 지뢰가 묻힌 장소를 피해가며 4개월 동안 촬영했다. 매일 아침 트럭을 마을로 보내 연기 경험이 없는 마을 노인과 아이들을 영화 현장으로 데려와서,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영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쿠르드족의 고통과 삶을 다룬다. 쿠르드족은 이란과 이라크 전쟁 이후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공격받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쿠르드족 마을의 현실을 그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년)을 연출한 이란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에 따르면, “쿠르드족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맞대는 얼굴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불타는 집과 사지가 잘려나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제일 먼저 배운 말은 엄마 아빠가 아니라 ‘달아나!’라는 말이다”. [10] 사미라 감독은 전쟁과 가난으로 소외받고 있는 이란의 쿠르드족 주민들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면서, 휴머니즘의 시선에서 평화와 생존의 희망을 보낸다.
3. <오후 5시(At Five in the Afternoon)>(2003, 106분) : 부르카에 갇힌 여성의 꿈
이 영화는 2003년 탈레반 정권이 물러난 직후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다. 2001년 9.11 테러 발발 직후, 미국은 빈 라덴을 체포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순니파와 시아파 간 내전까지 겪으면서 탈레반 정권은 무너진다. 포화가 가득한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은 사미라 감독에 따르면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가는 곳, 악마와 같은 곳이다”.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과 아기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뢰로 팔다리가 잘려 나간 사람, 이슬람 근본주의 교육을 받고 전쟁터로 나가는 소년들, 부르카 속에 억압 여성들의 모습 등 당시 수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촬영 당시 탈레반 정권이 우상숭배를 배척한다는 이유로 인류문화유산인 세계 최대의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였다, 이곳에서 <칸 다하르>를 촬영하던 모호센 감독은 ‘바미안의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는 유명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 노흐레(Noqreh)의 시선과 심리를 따라가며 처참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보여준다. 온몸을 가린 이슬람 전통 여성복 부르카를 입고 학교에 다니는 노흐레의 꿈은 여성 대통령이다. 노흐레는 추락한 비행기에서 마차꾼 아버지, 과부가 된 오빠의 아내, 어린 조카와 가난하게 살아간다. 여성 대통령이 꿈인 노흐레는 프랑스 군인, 이웃남성 등 만나는 사람마다 여성 대통령이 있는 나라를 물어본다. 노흐레는 학교에서 부르카를 벗고 춤을 추거나, 서양 양산에 하이힐을 몰래 신으며 혼자만의 자유를 누린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아버지는 “여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타락을 해서 떠나려” 사막 지역으로 이주한다. 가난과 굶주림에 지친 노흐레 가족 일행은 마차를 타고 사막으로 길을 떠난다. 하늘 위로 전투기와 헬기가 날아다니고 어린 조카는 도중에 죽는다. 마차를 끌던 말도 쓰러져 죽고, 아버지가 마차를 끌지만 이내 쓰러진다. 마침내 노흐레는 마차를 불태워 버린다.
영화는 탈레반 붕괴 직후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야외 촬영과 자연조명을 활용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아프가니스탄 사회상을 날것 그대로 재현한다. 가난하고 황폐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과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는 노흐레의 꿈은 극명히 대비된다. 영화의 제목이자 스페인 시인 로르카(Lorca)의 <오후 5시> 싯구절처럼, “그것은 오후 5시였네, 나머지는 죽음, 오직 죽음뿐이다”. 이 영화는 사미라 감독의 작품 중에서 여성 정체성과 현실비판 의식이 가장 극렬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IV. 작품의 특징과 사회맥락적 의의
1. 메타포(metaphor)에 틈입된 리얼리티(reality)
사미라는 영화와 현실, 메타포와 리얼리티,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사실주의 스타일을 선호한다. <사과>에서는 영화의 소재가 되는 실제 사건이 발생한 집에 거주하고 사건 속 실제 인물인 아버지, 눈먼 아내, 두 딸과 교류하며 이들을 등장인물로 그대로 기용하며 재구성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캐스팅과 스토리 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특히 <사진 1>의 집안을 잠근 창살 프레임과 <사진 2>의 바깥 세계의 자유를 상징하는 사과를 대조적 메타포 장치로 활용하면서, 메타포의 클로즈업 이미지를 통해 현실세계의 속박과 바깥 세계의 자유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칠판>에서는 쿠르드족 마을 주민들을 영화 속 등장인물로 그대로 활용하며 현실세계와 영화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사진 3>과 같이 쿠르드족 두 교사가 짊어지고 가는 ‘칠판’은 쿠르드족의 희망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칠판’ 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국경 군인들의 총격을 막는 보호막으로 사용하고, 주민들의 빨래를 말리는 요긴한 일상품으로 사용하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아이의 부목이나 부상당한 노인을 위한 구급대로도 이용하고, “사랑해”라는 글로 싸이드의 사랑을 고백하는 소통의 증표로 이용한다. 두 교사가 짊어지고 가는 ‘칠판’은 쿠르드족 사람들의 가난하고 힘겨운 현실을 보여주는 메타포이자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오후 5시>에서는 전쟁 직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거리의 실제 현장을 그대로 영화에 담았다. 비전문적인 아마추어 연기자, 길거리 촬영을 적극 활용하여 아프가니스탄 사회 현실을 온전히 영화 속으로 가져온다. 아프가니스탄 사회에서 현지 여성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사미라 감독은 교사로 일하는 아겔레(Agheleh Farahmand)를 직접 찾아가,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위한 일이며, 당신의 미래도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말로 겨우 설득하였다고 밝힌다[6]. <사진 4>의 부르카(burgah)를 입고 있는 실제 학생들의 클로즈업 장면과 <사진 5>의 노흐레의 하이힐과 양산의 인서트 이미지의 대조는, “우 아한 하얀색의 하이힐을 클로즈업하며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을 대조시키며 상호작용” 효과를 부여한다[12]. 이슬람 전통복장 히잡(hijab)은 꾸란에서 언급한 것으로 얼굴만 내놓고 상체를 가리는 두건 복장이며, 부르카(burgah)는 눈 부위만 망사천을 대어 시야를 확보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쓰는 통옷으로 속박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13].
사미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메타포와 리얼리티 (metaphor and reality)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영화의 첫 번째 이미지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시작하지만, 영화 속으로 몰입하다 보면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나는 이 방식을 선호한다. 그것은 사회적이며, 철학적이며, 시적(詩的)이다. 많은 메타포 속에서 당신은 리얼리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버 지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내가 다음 영화를 고민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몇 장의 종이를 건네주면서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어떻게 쿠르드족의 삶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그 리얼리티를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캐스팅을 하고 제작을 시작한다. 메타포는 사랑을 만들어 나가려는 예술가의 상상과 삶의 현실 속에서 태어난다고 확신한다. 수백 명의 쿠르드족 노인들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서 죽기를 원한다. 이것은 상상이자 사실이다. 실제 고향을 잃은 쿠르드족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실이다. 영화 속 칠판을 매고 가는 사람들은 상상과 사실의 조합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난민(refugee)이고, 교사라면 칠판을 매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상상이면서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14]
이처럼 사미라 감독의 영화 속 메타포는 삶의 현실 속에서 나온 상상이며, 그것을 통해 메타포에 틈입된 리얼리티를 찾아갈 수 있다, 사미라 감독은 그것이 곧 사랑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정신이라고 말한다.(*사진 1, 2, 3, 4, 5, 6은 저자가 직접 영화에서 캡쳐한 것임)
<사진1>
<사진2>
<사진3>
<사진4>
<사진5>
<사진6>
2. 자각하는 여성정체성과 자유
사미라 감독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과 여성 정체성에 기반하여 여성인권과 자유를 향한 강렬한 현실비판 정신을 보여준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의 이란 사회는 이슬람 신정일치에 근거한 ‘샤리아(Sharia)’와 ‘가족 보호법’에 의해 이슬람 종교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샤리아’는 꾸란에 기반한 이슬람의 법체계이자 전통 가치관으로 종교생활부터 정치, 경제,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세계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누구나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신을 향한 길’이다. 강고한 종교 이데올로기는 일상이나 가정에 침투하여 왜곡된 폭력이나 억압의 기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여성들의 자유연애나 남성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은 명예살인과 같은 방식으로 처벌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남성 가부장적 속박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한다[15]. 사미 라 감독의 영화 철학은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여성 인권(women’s rights)으로 집약할 수 있다. <가디언> 과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성문법이나 관습법에서 속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점점 나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민주주의 운동이 지속되고 있고, 영화를 제작하며 기존의 관습을 깨뜨려 나가고 있다. 이란의 여성들은 강고한 속박 속에 살고 있지만, 만약 스스로를 표현할 기회를 얻는다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다. 그들은 속박을 겪으며 더 깊고 나은 방법을 발견해 나가고 있다”고 말한다[16].
<사과>에서는 집안에 갇힌 두 딸이나 이웃 여성이 빨래하는 장면은 창살 프레임 속에서 보여줌으로써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억압받는 이란 여성의 굴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사과를 먹고 싶다”며 반복적으로 말하는 두 딸의 욕망은 바깥세상에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문을 잠그는 아버지와 바깥에서 사과를 먹고 싶어 하는 두 딸의 대립을 통해 이슬람 사회 체제의 여성에 대한 왜곡된 관습이 일상 가정에 어떻게 침투하여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아버지는 “종교적 교리에 근거하여, 여성인 눈먼 아내와 두 딸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잠그고 출근”하고 있으며, 아내와 딸은 아버지에게 순응하고 복종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눈먼 아내와 두 딸은 이슬람 사회체제와 전통 가치관이 강요하는 종교 이데올로기의 직접적 피해자이며, 순박하고 성실한 아버지 또한 종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란 사회의 보통 남성상을 상징한다. <칠판>의 마지막 장면에서 싸이드와 할랄레가 이혼하는 장면은 전통관습을 넘어서는 파격성이 들어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헌법과 가족 보호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첫 아내의 동의하에 4명의 여성과 결혼할 수 있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으며, 남성은 조건 없이 이혼할 수 있으나 여성은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이나 버림받을 경우에 한정하여 이혼이 가능하다. 싸이드는 할랄레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와 살기를 원하자 배려와 존중의 이별을 선택하고 그 증표로 칠판을 내어준다. 사미라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상호 간의 배려와 합의로 이혼하는 비전통적이며 현대적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전통과 현대의 가치관을 충돌시키며, 전통 가치관은 무너지고 시민으로서의 여성 인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실천적 개입을 시도한다[7].
<오후 5시>는 감독의 여성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저항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가난, 전쟁, 젠더의 억압이라는 3중적 질곡(桎梏) 속을 살아가는 여성의 욕망과 내면을 충실히 재현한다. 사미라 감독은 “<오후 5시>는 탈레반 체제 붕괴 이후 만들어진 첫 번째 영화이다. 나는 리얼리티를 보여주길 원한다. 미국이 람보를 보내 아프가니스탄 민중들을 구원했다는 식의 클리세가 아닌. 탈레반 체제는 사라졌지만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전통과 문화에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여전히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커다란 차별이 존재한다”고 영화의 제작 동기를 밝힌다 [17]. 굉음처럼 대형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슬람 기도문은 “신을 경건히 섬기는 자들이여, 여성을 응시하지 말지어다”,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 “여성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죄악이다”고 반복되고, 영화 속 여성들은 학교에서 부르카를 입고 전통 가치관에 복종하는 교육을 받고 있지만, 노흐레는 부르카를 벗고 춤을 추기도 하고, 서구식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쓰는 것으로 체제와 관습에 도전한다. 또한 여성 대통령을 꿈꾸며 새로운 변화와 미래를 욕망하는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사미라 감독은 가난과 속박 속에서도 부르카에 대한 거부, 교육과 계몽에의 열정, 여성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노흐레의 강인한 여성성을 통해 이슬람 사회 체제의 문화권력과 여성과의 관계를 다시 쓰고(re-writing),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외친다.
3. 반전과 평화에 대한 갈망
사미라 감독은 전쟁이나 내전을 겪는 현실 공간을 영화적 배경으로 사용하여 반전과 평화를 내세운다. <칠판>은 전쟁과 분쟁으로 고향을 잃고 고통받는 쿠르드족의 귀향 행렬을 보여주며 전쟁 없는 세상과 평화에의 갈망을 표출한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지역의 분쟁 속에서 쿠르드족 노인들은 총격이 난무하는 국경을 넘어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가난한 소년들은 군인들의 총격을 뚫고 밀수품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 간다. 국경 지역은 매복된 지뢰, 군인들의 총격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감독은 <사진 3>, <사진 6>과 같이 다큐멘터리식 사실적 기법으로 이러한 국경 상황의 비참한 현실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 기법으로 등장인물과 카메라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동화시키고, 현장 속 군중들의 고통과 혼란을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으로 노출시키는 효과를 부여한다. <오후 5시>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이후의 수도 카불의 상황을 공간적 배경으로 차용하며, 폐허가 된 거리에서 굶주리고 떠도는 노인과 어린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으로 탈레반 체제는 붕괴되었지만 여전히 최대의 피해자는 노인, 어린이,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노흐레의 아버지는 내전과 전쟁으로 아들 셋을 모두 잃었고, 과부가 된 며느리와 어린 손자는 가난하게 살아간다. 거리에는 총을 찬 외국 군인들이 넘치고, 공중에는 비행기와 헬리콥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노흐레 가족은 말 한 마리에 의지하여 마차를 타고 새로운 터전을 향해 떠나지만 내전의 여파는 이것마저 가로막는다. 말은 죽고, 굶주린 아이는 소리 없이 죽어 간다. 사미라 감독은 전쟁과 폭력으로 상처 입은 노인, 여성, 어린이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며 전쟁의 참혹성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반전과 평화에의 갈망을 표현한다. 아버지 모호센 감독은 “큰딸 사미라가 2008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발로 걷는 말>을 찍을 때, 촬영 현장에서 폭탄 테러로 인명사고가 난 적이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막내딸은 이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한동안 바깥출입을 못했다. 그럼에도 두 딸들의 평화에 대한 신념은 변함이 없다”고 말한 다[18].
4. 소외계층에 대한 연민과 연대
사미라 감독은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 노인, 어린이에게 휴머니티(humanity)에 기반한 연민과 공감의 연대를 보낸다. <사과>에서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속박당하는 여성장애인과 어린이들의 삶을 연민과 공감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당시 17살이던 사미라 감독은 “TV에서 그 사건을 보았을 때, 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를 그 소녀들의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나도 소녀이고 같은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나의 자매와 다름없었고, 나는 그들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가 그녀들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나는 그를 비판하지 않고, 다만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었다”고 말한다[19]. 이 영화에서는 특이하게 가해자 아버지를 폭력적 인물로 묘사하기보다는 이슬람교에 충실한 순박한 인물로 종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시스템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 폭력에 가담하는 가련한 아버지로 묘사한다. <칠판>에서는 가난하고 척박한 삶의 환경으로 제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불법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린이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공감을 보낸다. ‘칠판’의 존재는 연민과 공감에서 기인한 연대(solidarity)의 메타포이다. 쿠르드족 교사인 리부아르와 싸이드는 끊임없이 칠판과 글에 집착하며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들에게 글은 가난과 미신에서 벗어나 계몽과 합리적 이성으로 가는 통로이자 도구이며, 쿠르드족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희망의 상징이다. 리부아르와 싸이드는 끊임없이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묻는다. “너 영원히 고생하고 싶어?”, “책을 읽게 되면 직장을 구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영화에서 ‘칠판’은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도구가 아닌, 희망의 메타포이다. 총알을 막는 보호막이자, 부러진 발을 지탱하는 부목대이자, 부상당한 노인을 운송하는 구급대이다. ‘칠판’은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이겨내는 생존의 도구이자 미래의 희망이다. 이처럼 사미라 감독은 가난, 억압, 전쟁 속에서 위태한 삶을 살아가는 소외된 약자들에게 연민과 공감의 연대를 보낸다.
5. 서구 민주주의와 휴머니즘
사미라 감독은 이슬람 사회 체제를 둘러싼 속박과 폭력의 본질적 원인을 이슬람 사회체제와 시대에 맞지 않은 전통 가치관에서 찾는다. <사과>에서 순박하면서도 충실한 아버지의 폭력적 감금행위의 근원은 남성과 여성의 차별적 관계를 규정한 이슬람 교리의 원리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다. 집안에 여성을 감금한 남성의 이야기는 개별적 일탈행위로 보이지만, 사실 이슬람 사회체제의 종교 이데올로기가 이란 사회의 일상에 틈입하여 작동한 결과이다. 가해자 아버지는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한 무슬림일 뿐이며, 여성에 대한 종교 이데올로기의 ‘일상의 폭력’은 또 하나의 ‘악의 평범성’이다. 사미라 감독은 이 폭력의 배후이자 근원을 시대에 맞지 않은 원리주의적 종교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 <오후 5시>에서는 부르카, 복종, 순결, 기도와 같은 이슬람의 종교이데 올로기가 교육과 제도를 통해 재생산되고, 사회적 폭력으로 변질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노흐레는 자신을 속박하는 종교 이데올로기와 종교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충돌한다. 학교에서 부르카를 벗고 춤을 추고, 착용이 금지된 서구의 하이힐과 양산을 입고 경직된 종교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브레시스에 의하면, 사미라 감독의 영화 세계 핵심은 “이슬람 세계관과 서구 세계관의 충돌”에 있다[6]. 그녀는 서구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에 입각한 인류 보편적 가치관(젠더, 인권, 자유)와 이슬람 사회체제의 가치관(코란, 신앙, 종교 체제)을 서로 충돌시키며 균열을 촉발시킨다. 서구의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을 비판의 도구로 삼아 중동 이슬람 사회 체제의 경직성과 모순을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 방식은 신정체제와 종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이슬람 사회체제의 경직성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은닉된 일상의 폭력을 드러내는데 적합하다. 하지만 서구적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 이슬람 사회체제의 가치관을 대체할 수 있는 보편적 잣대가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이슬람교라는 개별성에는 인류 보편적 가치인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슬람 문화권을 지배하면서 형성해온 나름의 독특한 순기능과 특수성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사미라 감독의 서구식 민주주의에 근거한 영화적 비판의식은 이슬람 종교 가치관이 갖는 사회적 순기능과 부합하는 측면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 체제의 특수성을 배제한 채 서구식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프레임에 근거한 이항 대립적 비판으로 자칫 서구의 욕망과 시선 속에 갇힐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사미라 감독의 서구 식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비판의식이 과연 이슬람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방법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럼에도 사미라 감독의 비판의식은 이슬람 사회 체제의 종교적 도그마와 시대에 맞지 않은 변질된 일상의 폭력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데 유용한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가 더 크다.
V. 나가며
지금까지 사미라 감독의 대표작 <사과>, <칠판>, <오후 5시>를 중심으로 작품세계와 사회맥락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미라 감독의 영화 세계는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이란 사회의 전통 가치관과 관습에 대해 저항하거나 충돌하면서 형성되어 왔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여성, 빈곤, 소외, 평화와 같은 이슬람 사회 체제의 문제를 영화적 소재로 적극 끌어들이고,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시선에서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촉구한다. 사미라 감독은 “정치를 직접 언급한다는 점에서 나의 영화는 저널리스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는 피상적이며,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저널리스트보다 더욱 깊고 오래 살아 있다. 나는 영화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확신한다”며 영화를 통한 현실참여와 실천을 강조한다.[18] 특히 여성의 인권과 차별 철폐를 향한 ‘여성의 재역 사화(The Re-historicizing of Women)’ 작업에 실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란의 여성영화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란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영화감독이 될 수 없다. 영화계는 여성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이러한 영화 환경에 도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변화를 던지고 싶다. 이란에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출현은 더욱 많은 여성 감독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고 말한다[8].
그런 점에서 사미라 감독은 21세기 이란 영화의 새로운 진보와 변화(progress and change)를 상징하는 여성 감독이다. 그녀는 이란의 제3기 ‘차일드 시네마’의 사실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영화적 메타포 속에 리얼리티를 틈입시키는 독특한 사실주의 미학으로 이란 영화의 전통을 초극하려는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사미라 감독은 아버지 모호센 감독과 마찬가지로 이란의 검열과 탄압을 피해 사실상 망명 중이다. 이슬람 사회체제의 전통관습과 교리에 맞서고 비판하는 행위는 일종의 배교 행위로 간주되며, 사미라 감독은 목숨을 건 영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란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속박, 전쟁과 폭력을 유발하는 종교이 데올로기를 허물어 가는 사미라 감독의 영화적 실천은 이란 영화사의 새로운 진보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의가 크다.
이 연구는 사미라 감독에 대한 국내외 문헌 자료와 전체 영화 작품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연구의 성과가 있지만, 언어 소통의 한계 속에 이란 현지 문헌 자료의 수집 및 해제에 한계가 있어 연구에 직접 반영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연구가 시발점이 되어 향후 후속 연구에서는 이란 현지 문헌자료와 인터뷰가 반영된 보다 심층적인 이란 영화에 대한 연구 성과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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