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study of ancient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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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에 대한 지명 재고(再考) (Reconsideration on the Place Name of the Scenic Site No.1 「Myeongju Cheonghak-dong Sogumgang」)

  • 노재현;김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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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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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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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국내 명승 제1호 "명주 청학동 소금강"의 지명 유래와 변천과정 등에 대한 오류 검토의 일환으로, 관련 고지도, 지리지, 유산기 등의 고문헌 그리고 바위글씨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확인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리지 분석 결과 '소금강'이란 지명은 17세기 중반의 "여지도서"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20세기 초반 발간된 "증수임영지"에서 재현되고 있으나 고지도에서는 청학동 청학산 청학사 등의 지명 이외에 소금강이란 지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청학산'이란 지명이 최초로 발견되는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지만, 지명으로서의 최초 기록은 율곡의 "유청학산기"로 이 기록에는 소금강'이란 지명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청학산'이란 지명만 확인될 뿐이다. '이후 이순인의 "고담일고", 허균의 송별기, 허목의 "청학동구룡연기", 윤순거의 "파동일기" 그리고 이원조의 서간(書簡) 등을 볼 때 약 3세기 이상 이곳은 '청학산' 또는 '청학동'이란 지명으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소금강'이란 지명이 확인되는 최초 기록은 18세기 중반 작(作)인 강재항의 시이다. 또한 금강사 앞 이능암(二能巖)에 새겨진 '소금강(小金剛)'이란 바위글씨의 주체는 크기, 서법, 전체적인 배치구도와 마모 정도 그리고 지리지의 기록 등을 고려할 때 1870년 또는 1930년에서야 동일한 주체인 이능계원(二能契員)에 의해 새겨진 것으로 보임에 따라 이곳 지명 유래의 탄탄한 근거였던 '소금강(小金剛)' 바위글씨를 율곡의 글씨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할 때, 율곡의 "유청학산기" 이후 이곳은 줄곧 '청학산 청학동'으로 불려왔으며 '소금강'이란 지명은 18세기 중반 이후 "입재선생유고" 중 "오언고시조"와 "여지도서"를 시작으로 "동유일기" 등 유람기 등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소금강이란 이칭(異稱)이 일반화되면서 혼용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기존 명승 제1호 지명에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율곡의 유람과 관련된 명소로서의 장소성을 부각시키는 측면에서는 '청학동 소금강'보다는 '청학산 청학동'이란 지명이 보다 합당한 지명인 것으로 판단한다. 아울러 본 연구과정에서 확인된 1664년 윤선거 일행이 현 식당암에 각자한 '청학산(靑鶴山)', '경담(鏡潭)'의 지명 바위글씨는 고전적 유람 텍스트로서의 "유청학산기"의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증표이자 기호학파 선비들의 율곡에 대한 숭모와 추념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표식으로 보존이 요망된다.

말액에 관한 연구 (The Study on the Marek(말액))

  • 강순제;전현실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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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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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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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Marek(말액) is the headgear, which is a form of hempen hoods[Geon(건)] and the origin of it is Pa(파) of band form. A history book of an old Chinese country Post-Han $\ll$ History of HouHan (후한서)$\gg$ had recorded that a soldier wore a red band around his head that was called Pa(파). In the Han dynasty(한대), Pa had been transformed into Chaek(책) or a kind of a hemp rap(건) while e headgear had still remained as the band form and called Marek from e Tang era(당). The literatures of the Tang era had referred the red Marek of soldiers, and other literatures of the later period had recorded that of the previous headgears of the band form were related with Marek. Since the Tang era, white or yellow Marek except red one fer soldiers had been were by soldiers, musicians, dancers and singers in Yuan(원) and Ming(명) of China. The colors was recorded in red on documents mostly, this red implicated soldiers for symbol of terror. This fart was documented in an old history book $\ll$The history of 25 Eras(이십오사)$\gg$, On the other side, a wall painting in Princess Jeonghyo(정효공주)'s tomb of the Parhae(발해) period described the portraits of twelve persons, and among them, two Siwui(시위) put on the red Marek. Quoted from the record of a history book of the Tang era system , a history book of Three Kingdoms(삼국시대) of ancient Korea $\ll$Samguksaki(삼국사기)$\gg$ described that four dancers of Kogryo(고구려) wore Marek on their heads with the costumes of Koguryo, one of those Kingdoms. In consideration that the book of $\ll$Tongjun$\gg$ was the literature of the Tang era so that Marek mentioned in this book was followed by their name, the Marek of Koguryo dancers shown in the history book $\ll$Samguksaki(삼국사기)$\gg$ might be a kind of Koguryo style hemp cap[Geon(건)]. The Marek of Parhae had succeeded to the headgear of Koguryo and the identity was on Koguryo.

고문헌(古文獻)의 보존처리(保存處理)에 관한 사례연구(事例硏究) -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 사천왕상(四天王像)에서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권25)를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Conservation Treatment of Ancient Documents - Focusing on the 「Wolinsukbo」(Vol.25) from the Four Devas of Borimsa, Buddhist Temple at Jangheung County -)

  • 노기춘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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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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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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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장흥 보림사는 신라 경덕왕 18년(759)에 원표(元表)대사에 의해 화엄종찰로 개창되었으나 체징(體澄)이 헌안왕 2년(858)에 가지산사로 이석함으로서 선종사찰의 중심 도량으로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단히 번창하였던 사찰이다. 이 연구는 1995년 장흥 보림사의 사천왕상에서 발굴된 복장불서 가운데 보물 제745-9호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권25)를 대상으로 서지학의 관점에서 지류문화재의 보수 및 보존처리 과정을 다룬 연구 논문이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보존처리 전 형태적 특징을 보면, 책의 크기는 가로 22cm, 세로 32.3cm, 책의 두께는 2.8cm, 오침안정버법(五針眼訂法)의 선장(線裝)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총 142장(3~144장)이 발견되었다. 책의 상태는 사천왕상에 빗물이 스며듦으로서 책의 일부분이 규칙적으로 얼룩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앞부분과 뒷부분의 장은 부식으로 인한 손상이 심한 상태며, 중앙부분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보존처리 과정은 1) 제1차 세척과정, 2) 판본 보완 및 보수 과정, 3) 제2차 세척 및 보존처리 과정, 4) 재단 및 제책과정, 서투 및 표갑의 제작 등으로 나누어 실행하였다. 보존처리 후 책의 외형은 가로 22.5cm, 세로 32.7cm, 두께 3.2cm로 가로 0.5cm, 세로 0.4cm, 두께 0.4cm 등의 외형적 변화가 발생하였으며, 장수(張數)는 총 151장으로 표지를 포함하여 9장의 매수가 증가하였다.

주요 고농서를 통한 조선시대의 도작기술 전개과정 연구 I. 문제 제기, 연구방법 및 범위 설정 (Tranisition of Rice Cultured Practices during Chosun Dynasty through Old References I. Setting of Topics, Methods, and Scopes)

  • 이숭겸;구자옥;이은웅;이홍석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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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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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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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도작은 동아 습윤지 농작물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고금을 통하여 국가의 재정과 식량원을 조달하는 주역의 위치를 차지해 왔었다. 또한 이러한 위상은, 물론 동남아 제국을 포함하여, 중국대륙과 한반도 및 일반열도로 이어지는 지역을 중심으로 기술교류와 이해관계를 맺어오면서 형성되어 왔음에 틀림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두드러진 교양적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고, 더우기 문화적 교체는 물론 외침과 내환을 수없이 겪는 동안 농업조건은 개간과 황폐 및 회복을 거듭하였고, 이 위에서 도작과 도작기술의 수용발전은 칠전팔기하여 왔음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역사는 왕조실록을 중심으로한 조정의 기록은 풍부한 반면에 지방과 농촌의 기록은 지극히 비약한 것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도작과 도작기술의 변천상을 알 수 있는 길 또한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결국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던 농서들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검토하고, 다시 종합적으로 비교고찰하면서 맥락을 더듬는 도리밖에 없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도작기술이 여말까지 직수입 되었던 고대중국의 한전식 기술로 부터 어떻게 우리의 실정에 맞추어 성립될 수 있었고, 또한 이들로부터 독창성을 찾아 재정립된 기간은 무엇이며, 이들이 조선시대의 파란많은 내외란을 통하는 동안 어떻게 존속되고 변천해 왔으며, 이들 결과가 선말에 이르러 존속 발전하면서 치루어낸 역할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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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숭어과 어류의 어명 및 자원 활용에 대한 고찰 (Review of Fish Name on the Fishes of the Family Mugilidae in Korea and Resource Utilization)

  • 고은영;박종오;이경선
    • 한국해양생명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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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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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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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숭어과 어류는 연안에서부터 담수역까지 서식하고 있는 대표적인 광염성 어류이다. 이들의 형태적인 유사성 때문에 분류학적인 면에서나 명명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다. 숭어과 어류 중 국내에서 주로 소비되고 있는 어종은 숭어(Mugil cephalus)와 가숭어(Chelon haematocheilus)로, 일반적으로 숭어와 가숭어를 구별하지 않고 숭어라 불리기도 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국내의 학술적인 자료 및 옛 문헌을 조사하여 국내에서 혼용되고 있는 숭어류의 학명 및 어명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숭어의 학명은 M. cephalus로 사용되고 있지만, 가숭어는 Chelon, Mugil, Liza 속명이 혼용되고 있다. 숭어류의 어명에 대해 국내사전에는 숭어와 가숭어를 구별하지 않고 있으나, 일어, 영어, 중국어사전에서는 숭어와 가숭어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옛 문헌에서는 숭어류를 '치어' 또는 '수어'라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숭어와 가숭어의 구분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으나, 자산어보에서는 가숭어를 치어(참치어)로, 숭어를 가치어로 기록하고 있어 '가(假)'자의 붙임이 현재와 달리 사용되고 있었다. 가숭어는 양식되고 있는 종으로 앞으로 산업적인 활용이 모색되고 있는 단계에서, '가'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고려하였을 때 가숭어라는 어명 대신에 '참숭어'로의 어명 변경을 제안한다.

고문헌의 보존처리에 관한 사례연구 -장흥 보림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금강경삼가해』를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Preservation Treatment of Ancient Documents -Focusing on the "Keumganggyung-samgahae" from the Four Devas of Borimsa, Buddhist Temple at Jangheung County-)

  • 노기춘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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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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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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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이 연구는 1995년 장흥 보림사의 사천왕상에서 발굴된 복장불서 가운데 보물 제745-9호로 지정된 $\boxDr$금강경삼가해$\boxUl$를 대상으로 서지학의 관점에서 지류문화재의 보수 및 보존처리 과정을 다룬 연구 논문이다. 보존처리 전 형태적 특징을 보면, 책의 크기는 가로 25.3 cm, 세로 38.9cm 두께 1.5cm 전체 면수는 58장, 지질은 황갈색의 고정지로 확인되었다. 보존처리 전 $\boxDr$금강경삼가해$\boxUl$의 상태는 사천왕문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사천왕상에 빗물이 스며듦으로서 책의 바깥부분에 해당하는 장은 비교적 오염이 심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일부 장은 갈색으로 부식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며, 전체적으로 판심의 하어미와 서근 부분이 일정한 모양으로 박락 현상을 보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boxDr$금강경삼가해$\boxUl$의 보존처리를 하는데 있어서 수리방침의 주안점은 본지의 현상 유지를 우선원칙으로 삼되, 반드시 후세에 재수리가 가능하도록 수리방침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세부방침을 정하였다. $\boxDr$금강경삼가해$\boxUl$의 보존처리 과정은 1) 제1차 세척과정, 2) 판본 보완 및 보수 과정, 3) 제2차 세척 및 보존처리 과정, 4) 재단 및 제책과정, 서투 및 표갑의 제작 등으로 나누어 실행하였다. $\boxDr$금강경삼가해$\boxUl$의 수리 결과, 수리 전 책의 외형은 가로 25.3cm 세로 38.9cm 두께 1.5cm, 판본 58장(본문 57장, 보조지 1장)이었으나, 수리 후 가로 25.8cm, 세로 39.4cm, 책의 두께는 1.9cm, 판본 64장(본문 57장, 보조지 1장, 겉표지 앞과 뒤 각1장, 보호지 앞과뒤 각2장)으로 가로 0.5cm, 세로 0.5cm, 두께 0.4cm, 판본 6장이 증가하는 등의 외형적 변화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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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천문역법(天文曆法)과 물시계(漏刻) 복원연구 (Astronomical Calendar and Restoration Design of Clepsydra in the Silla era)

  • 이용삼;정장해;김상혁;이용복
    • Journal of Astronomy and Space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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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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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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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당나라 때 사용하던 역법들과 우리나라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시대에 사용한 역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특히 신라역법에 결정적 영향을 준 당(庸)나라 역법들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고 신라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역법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주로 신라시대 사용한 역법은 인덕력(麟德曆), 대연력(大衍曆), 선명력(宣明曆)등이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당시 누각전(漏刻殿)에서 사용한 누각(漏刻)의 복원설계를 위해 삼국사기와 중국과 일본의 누각 관련 자료를 찾아 살펴본 결과 통일신라시대는 사급보상식부전루를 사용함을 알게 되었다. 중국 문헌과 일본 아스카사(비조사, 飛鳥寺)에 복원해 놓은 물시계 모델을 참고하여 신라시대에 사용한 물시계 종류와 구조를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사급보상식루각 설계를 위해 파수호의 관을 통해 공급되는 물의 양과 관의 직경에 따른 변화를 알아보는 유속 측정기를 직접 제작하여 실험하였다. 그리고 이 장치를 소개하고 실험 방법에서 얻어진 결과를 제시하고 신라시대 물시계의 사급보상식루각(四級補像式漏刻)의 개념 설계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의 역법에 근거하여 당시에 사용한 부전(浮箭)과 함께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보존 현황 및 과제 (Preservation of World Records Heritage in Korea and Further Registry)

  • 김성수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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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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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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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논문은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에 대하여 먼저 그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하고, 이들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보존 관리 및 그 현황을 조사하며, 한국의 기록유산을 디지털화 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모색하고, 추후 한국의 기록유산 중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기를 희망하는 4종의 기록물들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고찰한 연구이다. 본 연구의 상세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2장에서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고찰하였다. 먼저 세계기록유산의 선정기준과 절차 등을 먼저 파악하고,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에 대하여 각각 그 가치와 의미를 분석하였다. 둘째, 제3장에서는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보존 관리 현황'에서는 세계기록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 <간송미술관>의 기관별로 그 보존 관리 현황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 이 3기관 모두 세계기록유산 보존 관리 현황은 '매우 우수하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즉, 1)그 세부적인 보안대책이 완벽하다. 2)그 보존방법에 있어서도 항온 항습의 특별한 서고를 별도로 마련하고, 이 서고 내에서 다시 '오동나무 상자 서장(書欌)'을 설치한 후, 이들 상자와 서장 속에 세계기록유산을 납입하여 보존하고 있다. 3)방화장치와 서고조명 및 소독 등에도 철저를 기하고 있음 등을 파악하였다. 셋째, 제4장에서는 '한국의 기록유산 디지털화 과제'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고찰하였다. 그 결과, 한국 기록유산의 디지털작업 및 DB구축에서 '디지털화 표준'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디지털화(Digitization)에 대한 총체적이고 표준적인 시스템의 개발이 시급함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국가기록관리시스템을 개발한 경험이 있는 <국가기록원>과 한국학 고기록물의 디지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진 <문화재청>이 공동으로 노력하여, 한국학 관련 기록유산의 디지타이제이션(Digitization)에 대한 총체적이고 표준적인 시스템의 개발이 요구됨을 파악하였다. 넷째, 제5장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추후 희망하는 한국의 기록유산'에서는 한민족의 기록유산 중에서 차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를 희망하는 4종 즉, 1)<해인사 고려대장경 경판>, 2)"동의보감", 3)"삼국유사", 4)"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기록물에 국한하여, 그 어떤 의미에서 세계적인 가치와 의의가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조경기사 필기시험 중 한국조경사 문제의 출제 경향 (The Tendency of the Written Test Questions for the History of Korean Landscape Architecture in National Qualification Test of a Landscape Engineer)

  • 소현수;임의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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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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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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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축적된 국가기술자격검정 조경기사 필기시험 중 조경사 과목의 문항을 대상으로 하여 한국조경사 문제의 출제 경향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제공한 출제기준은 조경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최근 '서양의 조경'에 대한 문항의 출제 비율이 낮아진 반면에 '한국의 조경'에 대한 문항의 출제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둘째, '한국의 조경'에 대한 문항에서 약 30여 종의 전통수종과 11가지 유형의 전통조경 시설물이 포함되는 전통조경요소가 다루어졌다. 또한 역사서, 지리서, 실학서, 원예서, 문집 및 기타, 정원도 및 회화자료로 분류되는 전통조경 관련 기록물 25개가 제시되었다. 다음으로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원의 조영 시기와 관련된 왕, 별서의 조영자나 소유자, 기록물의 저자, 중국 문인으로 구성되는 인물들이 문항에 등장하였다. 셋째, '한국의 조경'에 대한 문항 중에서 선사시대와 발해시대에 해당하는 문제는 없었으며 조선시대에 집중 분포되었다. 이에 조선시대로 한정하여 고찰한 전통공간 사례지는 별서가 가장 많았고, 도성 궁궐, 주택, 누 정 대, 서원 순서였으며, 읍성과 사찰의 사례지는 낙안읍성과 용주사뿐이었다. 넷째, 조선시대 전통공간과 관련하여 사례지의 조성 시기, 조영자, 입지 특성, 건축 구조, 평면 형태, 정원 구성 요소에 대한 세부적 내용 파악이 요구되었다. 또한 한국조경사 교재 9권으로부터 문항에서 추출한 전통공간 사례지의 출현 여부를 검토한 결과 동춘당, 풍암정사, 십청정, 곡수대, 유상대, 심곡서원은 등장하지 않았다. 연구 결과를 통해서 보편성이 결여된 지엽적 사실에 대한 정보를 묻는 문제, 조경사 교재에서 파악하기 어려운 정보와 대상지가 포함된 문제 등과 같은 한국조경사 기출문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허주(虛舟) 산수유첩(山水遺帖)에 표현된 반변천(半邊川) 십이승경(十二勝景)의 어제와 오늘 (Yesterday and Today of Twelve Excellent Sceneries at Banbyeoncheon Expressed in Heojoo's Sansuyucheop)

  • 김정문;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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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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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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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의 대상인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은 고서벽(古書癖), 탄금벽(彈琴癖), 화훼벽(花卉癖), 서화벽(書畵癖) 그리고 주유벽(舟遊癖) 등 오벽(五癖)을 가진 인물인 고성 이씨 11대 종손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이 1763년 4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18명의 친인척들과 임청각에서 시작해 양정(羊汀), 칠탄(七灘), 사빈서원(泗濱書院), 선창(船倉), 낙연(落淵), 선찰(仙刹)과 선유정(仙遊亭), 몽선각(夢仙閣), 백운정(白雲亭)과 내앞마을(川前里), 이호(伊湖), 선어대(鮮魚帶)를 거쳐 귀착지인 반구정(伴鷗亭)에 이르기까지 '안동팔경' 또는 '임하구곡'으로 불리우는 반변천(半邊川) 주변의 절경지를 선유(船遊)하며 남긴 십이폭의 화첩이다. 산수유첩에 표현된 장소 및 경물 그리고 식물요소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경관 및 풍물에 대한 물리 생태적, 시각 미학적 변화에 주목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산수유첩의 표현된 맑은 강물과 하얀 백사장 그리고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시회(詩會), 거문고 소리에 귀 기울이는 선상(船上) 풍류는 조선시대 상류층의 선유(船遊) 놀이문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아쉽게도 임하댐과 안동댐 건설로 초래된 심대한 시각적 변화와 생태적 변동으로 인해 양정과범(羊汀過帆), 칠탄후선(七灘候船), 사수범주(泗水泛舟), 선창계람(船倉繫纜), 낙연모색(落淵莫色), 망천귀도(輞川歸棹), 이호정도(伊湖停棹)의 경관상은 본래의 정취를 전혀 느낄 수 없으며, 단지 화폭에 묘사된 그림을 통해 당시의 풍광과 정취를 가늠할 수 있다. 허주부군산수유첩의 제1도(동호해람(東湖解纜))와 제11도(선어반조(鮮魚返照))에는 회화나무나 시무나무 또는 느릅나무 등 낙엽활엽교목으로 판단되는 수목들이 표현되었고, 제9도(운정풍범(雲亭風帆))의 '개호(開湖)'라 불리는 솔숲을 운천공이 1617년에 소나무를 식재해 형성한 숲이다. 그 외 승경도에서는 자연지형과 조화를 이룬 소나무 등의 상록침엽수와 정자나 건물 주변에 식재된 낙엽교목류가 표현되고 있다. 허주부군산수유첩과 신암의 동유십소기(東遊十小記)의 비교 고찰한 결과, 임하구곡의 일곡의 백운정으로부터, 이곡 임천과 임천서원, 사곡 사수의 사빈서원, 오곡 송석, 육곡 선창의 수석, 칠곡 낙연현류, 팔곡 선찰사와 선유정, 구곡 표옹 유허로 재차 확인되었으며, 모호했던 삼곡은 마천과 칠탄으로 추정된다. 허주부군산수유첩은 조선 후기의 낙동강 최대 지류인 반변천 연안의 경관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댐 건설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선인들의 선유 풍류와 경관요소들을 음미할 수 있는 도형사료로써의 가치를 확인한 것이 본 연구의 작은 성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