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late Q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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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전람도』 「조선도」의 모본(母本) 지도 형태 연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관동·관서지도』를 중심으로- (The Study on the Origins of Geography on the Map of Korea in the Kangxi Atlas)

  • 김기혁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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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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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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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규장각에 소장된 "관동 관서지도"의 조선전도는 다른 지도에 비해 "황여전람도" "조선도"와 가장 유사하다. 본 연구는 두 지도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하여 "조선도"의 모본이 된 지도의 형태를 추정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두 지도를 비교하여 볼 때 섬 지명의 기록은 거의 동일할 뿐만 아니라 지명에서 약 80%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한반도 모습, 함경도, 평안도 등 북부 지역 내용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해도와 강원도 이남 지역에서는 해안선 형태, 도별 경계, 감영 위치 묘사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이를 볼 때 "규장각본"의 모본이 된 지도가 "조선도" 제작 당시 조선이 제공한 지도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명에서 차이를 보면 "규장각본"은 강원도 경상도에서 누정 지명이 많으나 "조선도"의 경우 이들은 삭제되고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관방 지명의 비중이 높다. 이들 차이는 "조선도"를 제작하면서 지리정보가 편집된 내용을 추정하게 한다. "규장각본"과 다른 조선 지도와 비교해 보면 17세기에 이미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지도가 만들어졌으며, 이는 "조선도"와 함께 18세기 지도 제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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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의 어제(御製) 현판(懸板)의 유형과 내용 분석 (An Analysis on Types and Contents of Hanging Boards Inscribed with King's Writings in Donggwanwangmyo[East Shrine of King Guan Yu])

  • 장경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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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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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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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관우를 모신 동관왕묘에는 51점의 현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들은 조선의 국왕이나 명 청대 사신 및 장군들이 쓴 것이다. 그동안 현판에 대한 연구는 궁궐에 소장된 것들이 주로 연구되었고, 동관왕묘의 것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국왕의 글씨로 만든 현판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 내용과 형식을 분석하였다. 내용상으로는 현판의 제작자와 제작시기 및 제작배경을, 형식상으로는 현판의 유형과 재료 및 시기별 양식 변천을 밝혀 보았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관왕묘에 국왕 글씨로 만든 현판은 총 7점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이 쓴 1점, 영조가 쓴 4점, 고종이 쓴 2점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건물의 이름을 쓴 편액(扁額)과 동관왕묘에 방문한 느낌을 시로 쓴 시액(詩額)으로 나뉘었다. 특히 후자는 국왕이 봄과 가을에 능행(陵幸)하면서 동관왕묘에 들렀을 때 썼으며, 관우의 의리와 충성을 통해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의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국왕의 현판은 명 청대 사신이나 장군의 것들과 비교할 때 재료나 형식면에서 차별화되었다. 바탕은 청색[회회청(回回靑) ]이나 주색[주칠(朱漆)] 및 옻색[흑칠(黑漆)]으로서, 먹색[묵(墨)]이나 흰색[분질(粉質)]으로 된 현판보다 고급 재료로 칠하였다. 글씨는 양각으로 새긴 위에 금(金)으로 칠하였다. 현판의 형식은 4면이 모판처럼 $45^{\circ}$로 비스듬하며 단청기법으로 꽃문양이나 칠보문양을 그렸고, 그 좌우와 아래로 길게 빼 당초문양을 장식하였다. 이것은 '사변형(斜邊形)'이라고 부르는 형식이며, 나머지 3종류의 형식보다 품격이 높아 최고 수준의 것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글씨를 새긴 현판의 존재를 통해 조선후기에 동관왕묘는 국왕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들의 충성심을 강조한 정치적 공간으로서의 위상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 명대 사신이나 청대 장군의 글씨로 제작된 현판과 형식 비교나 시기별 양식적 변천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허임(許任) 『鍼灸經驗方』 연구(硏究) (A Study of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 박문현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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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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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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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Huh-Im(許任, 1570~1647) was an acupuncture doctor of Chosun(朝鮮) era through the late 16th century and early 17th century. Even though he was a person of low birth, he participated in the loyal medication through three loyal generations, Sunjo(宣祖), Kwanghaegun(光海君) and Injo(仁祖). He was recognized of his services and became an official, 'Dangsanggwan'(堂上官) and Kyunggi(京畿) district official several times. In the early Chosun era, acupuncture medicine was focused. During the late 16th century, Imjin(壬辰) war aroused more needs about acupuncture medicine, and acupuncture doctors showed remarkable work. Under these circumstances, Huh-Im(許任)'s fame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Huh-Im(許任) wrote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in 1644 based on his lifetime clinical acupuncture & moxibustion experience. It was the first specialized book of acupuncture in Chosun era. This event took place 30 years after DongEuiBo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was published. But it was not influenced much by DongEuiBo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 鑑-鍼灸篇") in the form or content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and Huh-Jun(許浚)'s DongEuiBo- 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were the fruits of the middle Chosun, and they ar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in theory and practice. The chief distinctions of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are in it's compact and practical edition and a lot of his clinical acupuncture prescriptions mentioned in the book. Huh-Im(許任) not only accepted the existing books such as NaeKyung("內經"), DongInSuHyulChimGuDoKyung and Shin- Eung Kyung("神應經") with his point of view and clinical experience, but also showed creative operation of studies. Indicating incorrect acupuncture points(訛穴), acupuncture remedy based on the visceral pathogenesis(臟腑病機) and the channel pathogenesis, research on new acupuncture points, sorting out plenty of outer meridian acupuncture points(經外奇穴), creating supplementary and purging acupuncture method(鍼補瀉法) which is a change of hand treatment of KiHyoYangBang("奇效良方"), operating variety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treatments, and application of acupuncture treatments on surgery field such as intumescences and emergency cases are the examples.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influenced on the folk remedy books(民間經驗方書) in the late Chosun era. Compact and practical characteristics of the book let acupuncture treatment be freindly to the people. It can be confirmed in JeungBoSanRimKyungJe-Emergency Chapter("增補山林經濟-救急篇") or the formation of SaAmChimBob(舍巖鍼法).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was introduced to Japan in 18th century and published twice. ChimGuJibSung("鍼灸集成"), known as an acupuncture medical book of late Qing dynasty(淸末, 1874), is confirmed to be an plagiarization of DongEuiBoGam-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and ChimGuKyungHum- Bang("鍼灸經驗方") of 17th century Chosun. Confusions and errors arouse from mistaken editional trend of ChimGuJIbSung("鍼灸集成") which had not disclosed it's original author and the title of the book must be reformed. In this way, fruits of acupuncture of the middle Chosun era including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will take a right place in acupuncture medicin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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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 (A Study on Glass Mirror Trade and its Characteristics of Craft after Joseon Dynasty)

  • 박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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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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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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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유리거울을 서양경(西洋鏡), 양경(洋鏡), 파리경(玻璃鏡), 파려경(玻瓈鏡), 석경(石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고, 이를 경험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과 교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 청·러시아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유리거울이 수입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금지 품목에 포함되는 등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문물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으로 더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18~19세기의 유리거울은 개인이 용모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관한 시각적 충격과 경험들을 글로 남겼고, 유리거울에 대한 유용함은 조선의 소비 욕구로 이어져 유리거울의 수입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유리거울은 조선의 청동거울을 빠르게 대체하였고 유리거울을 이용한 새로운 공예품들이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내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으로 일체식 유리경갑(一體式 琉璃鏡匣)을 개발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던 빗접과 함께 이용해 편리하였다. 당시 경갑의 인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비롯해 조선시대 풍속화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기형으로 볼 수 있는 경대(鏡臺)도 조선에서 많이 제작했는데 서랍 개수와 크기, 상자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러 형태의 경대를 살필 수 있다. 또한 휴대용의 작은 면경도 조선만의 미감으로 표현한 길상 문양, 장식 기법을 통해 품격 있는 공예품들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도 유리거울을 수입했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일본식의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일본 명치~대정시대에 유행했던 유리경대가 수입되었고 대형의 유리거울을 이용한 공예품들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경병의 경우 응접실처럼 큰 공간에 진설하거나 연회를 위해 중국·일본으로부터 수입했으며, 서양식으로 거울을 벽에 걸거나 부착해 공간의 밝기를 조절하고 외부의 풍경을 들여와 실내를 장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과송평(戈頌平)의 『소문지귀(素問指歸)』에 대한 고찰(考察) - 음양론(陰陽論)을 중심으로 - (A Study on Suwenzhigui(素問指歸) of Ge Songping(戈頌平) - Focusing on Yinyang theory (陰陽論) -)

  • 김도훈;김종현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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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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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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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Objectives : Ge Songping(戈頌平) was a medical doctor in Qing Dynasty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who annotated the original texts of four medical classics and wrote Suwenzhigui (素問指歸), Shanghanzhigui(傷寒指歸), Jinkuizhigui(金匱指歸), and Shennongbencaojingzhigui (神農本草經指歸). This paper's objective is to compile information about his writings, and shed a light on the unique characteristic of his scholarly works. Methods : Information regarding Ge Songping's life has been gathered through existing research papers and the sources revealed in the introduction. His works were divided into different formal characters as listed in part of the introduction and in the table of contents. Contents related to Yinyang(陰陽) found in Suwenzhigui were studied in order to discover his unique scholastic character. After selecting and analyzing three texts related to Yinyang, some characteristic terms and emphasized contents were studied. Results : The review yielded knowledge about Ge Songping's life, the times of his publications, the meanings of the names of his books, and basic information abou them. In terms of his scholarstic works, he used the ideas he gained from Shanghanlun(傷寒論) to form his medical theory, and used this to write annotations for four types of medical classics. The features of his theory of Yinyang can be divided into four categories. First, he coined the term Qiye(氣液) to bring contrast between yinyang as yinye(陰液) and yangqi(陽氣). Second, he shaped the temporal and spatial structure of the circulation of yinyang based on Shierdizhi(十二地支). Third, he expla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yin and yang while mainly focused on yangqi. Fourth, he explained the physiology and pathology mechanisms while focused on the circulation of ascending and descending and the idea of mutual beneficiary.

상한병(傷寒病)의 개념(槪念)과 논치근거(論治根據) 확립을 위한 구조주의적 분석 (Structuralistic Analysis for Establishment of Concept and Variables of Shanghan Diseases)

  • 지규용
    • 동의생리병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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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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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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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In order to grasp the clear concepts and variables to treat Shanghan diseases which has complex meaning by each medical literature, several concepts and analytic method of structuralism from early to late stage encompassing Saussure and Derrida were used. Main concepts are langue and parole, signifiant and signifie, syntagme and paradigme, denotation and connotation, synchronie and diachronie, identity of structure and differance etc. and methods are substituting these concepts to historical Shanghan theories from Zhongjing to Ming-Qing dynasty and comparisons of synchronie about their era. Essential qualities of Shanghan diseases are pathologic phenomena under the order of unification of nature and man formed through concrescence between individual human body and geo-climatico-socio-cultural environmental conditions, neither injuries by cold pathogen nor five types of exopathogenic febrile diseases. The former environmental elements can be inferred from general traits of desires and public pathological aspects of social members, and the latter personal factors from corresponding features to those pathogenic variables. In addition, the concepts of Shanghan disease are added successively up to now via Jin-Yuan's four great masters and Wenbing masters, and thus the new concepts of denotation became another connotation obtaining new signifiant. In this way, for the treatment of Shanghan diseases, new theories should be made for ranging prescription over the wenbing field; reflecting not only climatical variables but also each patient's physio-pathological features and sociocultural variables. Thereby an appropriate and reasonable therapeutical systems can be designed and can guide research direction hereafter.

한자문화권 문자도의 그래픽 콘텐츠 연구 -한, 중, 일, 베트남의 민간화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Graphic Contents of Munja-do of the culture sphere of Chinese Characters -centered on Minhwa of Korea, China, Japan, Vietnam-)

  • 이명구;남인복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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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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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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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에서는 일반 서민계층에서 민간화가 성행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길상문자도와 함께 표현방식은 다소 다르나, 보다 조형화 한 다양한 양식의 문자도가 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인 명말청초대에 중국 각지에서 유행하던 연화 양식이 주변국으로 건너가면서 각 국가의 고유한 정서를 담은 특색 있는 양식으로 발전한다. 문자를 제재로 한 이들 연화나 문자도는 이미지를 문자화 하거나 문자를 이미지 화하여 제작된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론적인 도'를 눈에 보이는 선과 형태로 조형화 하여 나타낸 작품이라 하겠다. 문자를 소재로 한 이 같은 상징체계는 표의성을 대표로 하는 한자문화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나라마다 독특한 양식은 당시 민간의 다양한 생활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도 연구 대상이 될 만하다. 특히 21세기 세계의 관심이 문화로 집약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전통 생활문화의 하나로서 문자도가 갖는 가치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우리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문자도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남다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자문화권의 문자도 양식의 비교를 통해 전통문화에 패한 인식을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문화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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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부권(婦權)의 존재 양상 연구 (The Modes of Existence for the Housewife's Authority in Joseon Dynasty)

  • 이은봉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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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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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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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주부의 명절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제사 문화와 시집살이 문화는 어쩌면 오랜 전통이 아닌 최근의 문화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본 연구는 조선시대 부권(婦權)의 상실이 조선 후기 성행한 '양반-되기' 문화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 중기까지 여성 특히 가정 내 부인은 친정에서 가지고 온 재산과 친정과의 유대를 통해 나름의 권위를 가지고 주체적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부권(婦權)은 임병양란 이후 영세해진 가문을 지키기 위해 딸을 상속에서 배제하면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전 인구의 양반화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양란을 기점으로 종법제에 입각한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전 인구로 확산될 수는 없었다.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전 인구의 보편적 윤리가 된 것은 양란 이후 지속적 사회 변화 속에서 양반의 수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자부터 평민까지 모든 사람이 종법제를 지켜야 한다는 정주학의 예론은 모든 집안에 '사당'을 두어 조상의 제사를 모시라고 하는 "주자가례"를 통해 실현되었다. 경제력을 상실한 양반이 자신을 양반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준엄한 의례밖에 없었으며, 양인에서 양반이 된 사람들 또한 양인과의 구별을 위해 '형식적 예'만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19세기 조선의 '양반-되기' 문화는 성리학적 가부장제에 의한 예법을 공고히 했다. 이 결과 여성은 오로지 시집을 위해 종사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이 남편과 아들의 가문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해 스스로를 옥죄기도 했다.

북인(北人) 학파의 연원과 사상, 그리고 현실인식 (The Origin and Philosophy of the "Northerners School(北人)," and their Perception of the world)

  • 신병주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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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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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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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조선중기 북인의 모집단을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던 학파는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였다. 경의(敬義)의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사상은 임진왜란 때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하였고, 광해군대 정인홍이 북인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그 사상이 이어졌다. 이외에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이해하고 개방적 성향을 보인 화담의 사상이 북인 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해군대에 북인이 정국을 운영할 때 실천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성리학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에는 남명이나 화담의 사상적 영향력이 크다고 판단된다. 대북(大北)의 정인홍과 허균, 소북(小北)의 김신국, 남이공 등은 북인의 사상과 현실인식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인물이었다. 1623년의 인조반정이후 사상계가 퇴계학파나 율곡학파가 주축이 된 주자성리학 흐름으로 정착되면서 북인(北人)의 사상은 시대의 주류적 흐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치사상에도 자파(自派)만이 군자당(君子黨)이라 확신하고 타 정파에 배타적인 입장을 취한 점 또한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7세기 중반 인조반정과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상계가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북인(北人)의 사상은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 저류적인 흐름으로서 그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북인(北人)의 사상은 17세기 중, 후반 근기남인 학자들이나 18세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치면서 그 흐름이 일부 이어졌다. 북인은 조선중기 서인, 남인과 함께 정치, 사상을 이끌어간 대표적인 정파이자 학파였다. 최근 북인의 뿌리가 되는 조식과 서경덕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북인 정치사상의 계승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중기 이후 정치사와 사상사 연구의 폭을 보다 확대 줄 것이다.

서울 송현동 일대의 문화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 분석 (An Analysis of Cultural Hegemony and Placeness Changes in the Area of Songhyeon-dong, Seoul)

  • 최지영;조경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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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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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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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서울 송현동에 역사문화공원과 이건희 기증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송현동의 역사성은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받은 시련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소성 분석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토지소유자와 용도 변화에 국한해서 다루어졌다. 그래서 본 연구는 현대문화지리학과 비교역사학 관점을 활용하여 송현동의 장소성이 문화 헤게모니에 따라 변화한 맥락을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역사적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중화주의, 대항해, 시민혁명,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대중예술, 신자유주의 같은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는 송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에 새로운 지식인층을 만들어냈고, 사회제도와 공간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송현동의 장소성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첫째, 송현의 소나무숲은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목표로 했던 조선 건국세력이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며 만든 비보숲이었고, 내사산의 지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로 관리되었다. 세계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조선 후기에는 연행이 늘며 청나라 문화를 향유하는 경화세족의 정원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단지개발로 소나무 숲과 정원은 사라졌지만, 인공적인 정원과 외부의 자연을 조화롭게 연결했던 차경의 경관적 미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 둘째, 세계의 근대화 물결은 북촌 일대에 신식학교를, 친일파 소유의 송현동에는 하숙집을 만들었다. 송현동 옆의 안국동천길은 시민혁명과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사상가들이 교류했던 장소였고, 최대규모의 하숙집이었던 송현동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며 학생운동문화가 발아한 계기가 되었다. 안국동천길은 옛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어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역사 도심 보행 재생의 한 부분으로 의의를 지닌다. 셋째,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기부터 군사 정권기까지 송현동은 조선식산은행의 서구식 문화주택과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서며 서구문화의 통로였다. 주변 지역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며 근현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이건희 기증관은 북촌한옥마을, 공예박물관, 현대미술관, 갤러리와 문화벨트를 이루며 시민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같이 장소를 이루었던 숲과 정원, 시민탄생의 거리, 근·현대 미술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새롭게 조성될 역사문화공원과 미술관 그리고 주변 보행 네트워크와 조화롭게 재창조될 수 있도록 담론과 도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