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otus pedes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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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쌍봉사 극락전 아미타불 연화좌대의 수종 및 연륜연대 분석 (Species I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the Lotus Pedestal of Amitabha Statue at Ssangbong-Temple in Hwasun, Korea)

  • 김요정;손병화;오정애;조태건;최선일;박원규
    • 한국가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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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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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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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objective of this study was to conduct the species identification and tree-ring dating of Lotus Pedestal of the Amitabha Statue at Ssangbong-Temple in Hwasun. The six wood blocks used for the Lotus Pedestal were hard pines (Pinus spp.; diploxilon) except one piece which was ginkgo (Ginkgo biloba L.). The lotus leaves surrounding the pedestal body were also made of ginkgo. Tree-ring patterns of 3 blocks were synchronized and a 133 years chronology was made. The chronology was crossdated well with the master chronology of Japanese red pine in South Korea. It dated back to A. D. 1551~1683, i.e. the last ring dated A. D. 1683. Through the estimation of the number of sapwood rings removed during carving, the felling year was calculated A. D. $1704{\pm}10$. The calligraphic writing on the Pedestal indicated that this statue was made in A. D. 1694. Therefore, the accuracy of the tree-ring dating has been pro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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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955호 선암사 금동팔각원당형사리탑 보존처리 (The conservation of a gilt-bronze Sarira Reliquary, Treasure No. 955)

  • 고형순;유재은
    • 보존과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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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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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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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e gilt-bronze Sarira Reliquary was discovered when repairing three-stories east stone pagoda (Treasure No. 395) at Seungju-eup in Suncheon city in Jeollanam-do Province in August, 1986. Then it was appointed as Treasure in 1988. The Sarira Reliquary had been held in Seonamsa temple, but deterioration on the surface and corrosion had appeared affecting its surface detail. Consequently, the conservation treatment was carried out from November 2002 to March 2003.The corrosion and dirt on the surface of the Sarira Reliquary were cleaned with ethyl alcohol and Benzotriazole was applied to prevent further corrosion. Finally, NAD-10(Paraloid NAD-10), acrylic resin, was used to consolidate the structure. Moreover, after non-destructive analysis to confirm element of alloy, copper, gold, silver and mercury were discovered and this result tells us that it was plated with gold by amalgam. Fibers at the pedestal were examined under the microscope and identified as silk. The total height of this Sarira Reliquary is 6.0cm, the height of lotus pedestal and the roof is 2.7cm and 1.8cm, respectively. The roof and body are joined together, and the lotus pedestal can be separated, on which the octagonal reliquary is impaled. The pedestal consists of 3layers of petals and the surface is decorated with flower pattern. The reliquary is presumed to be created in the 14th century, and it becomes valuable historical material to reveal the secret of metal work in the late Gorye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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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이조리귀부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Ijori Tortoise Pedestal of Namsan Mountain in Gyeong-Ju)

  • 이은석;조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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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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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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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하는 최진립신도비의 받침인 석제 귀부(龜趺)는 1740년경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귀부를 모사한 조선시대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당시 제작되는 귀부 형식과는 다르고, 모사한 원 귀부의 형식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모습들이 확인되고 있다. 첫째, 제작 과정을 기록한 '문루일기(門樓日記)'에는 비석을 먼저, 이후에 귀부를 제작했음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비좌 삽입부가 작아 비석 양쪽 끝단을 잘라 삽입한 흔적이 보이며, 비석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귀부와 비좌를 만들었다는 것은 공정상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한 비석 제작 부분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백운대라는 사찰터에서 제작되었다고 할 뿐, 공정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당시 실사를 하고 기록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다. 둘째, 이조리귀부의 구름문양은 초기의 태종무열왕릉귀부와 서악리귀부 구름문에서 이행되는 시간상의 세리에이션(Seriation)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좌 주변을 장식한 연화문은 중앙에 형식화된 보상화가 표현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대 기와 등에 가장 잘 나타나던 문양이다. 셋째, 전진하는 모습의 이조리귀부는 지금까지 경주에 전해지는 귀부들에서도 찾기 힘든 생동감을 가지고 있으며, 일렬상의 귀갑문 배치는 이전 귀부의 문양 배치보다 훨씬 간결해지고 공간 활용을 고려한 발전된 형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조리귀부는 시기적 변화를 보여주는 문양 형식, 비신과 비좌의 불일치, 기록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18세기 조선시대 석공이 신라문양의 형식변화 등을 모두 고려하여 제작한 모사품이라기보다는 8세기 중반 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귀부였음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부여 규암리 출토 금동관음보살 입상의 형상과 제작기법 (Gilt-bronze Standing Avalokiteshvara from Gyuam-ri, Buyeo: The Structure and Production Technique)

  • 신용비;김지호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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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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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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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논문에서는 부여 규암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 M335번)' 1점을 현미경으로 확대 관찰하여 제작기법을 확인하였고, XRF 성분분석과 Hard X-선 조사로 구성 성분과 불상 표면 처리 방법, 주조법을 확인하였다. 이 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직립하는 보살상이다. 불상 양 측면으로 흘러내린 천의와 대좌에 표현된 연화문의 모양을 볼 때 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불상의 특징을 하고 있다. 대좌 안쪽에서 내형과 외형을 고정시키기 위한 틀잡이와 주물의 주입 흔적이 관찰되었다. 또한, 주조기법은 팔과 대좌 부분에 청동 주물시 형성된 기포가 확인되어 이를 종합해 볼 때 고대 중소형 금동불 제작에 많이 사용되는 밀납주조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성분분석 결과, 불상 내부에서는 시기적으로 6~7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구리(Cu)-주석(Sn)-납(Pb) 계열의 3원계 합금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며 이는 금속을 합금하여 주조를 쉽게 하고 불상에 표현된 문양 및 장식을 선명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추정된다. 불상 표면에서는 수은(Hg)이 검출되어 금(Au)을 수은(Hg)에 용해시켜 도금하는 방식인 아말감도금기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도금방법은 고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소형 금동불에서 주로 확인되는 불상의 도금 방식이다.

거창 송계사(松溪寺) 목조여래좌상과 18세기 후반 조각승 상정(尙淨) 불상의 작풍(作風) 연구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Buddha at Songgyesa Temple in Geochang and the Sculpting Style of Sangjeong, a Monk Sculptor in the Late 18th Century)

  • 유재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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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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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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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상정(尙淨)은 18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수조각승 상정의 조상 활동 6건과 그가 조성한 기년 불상 중 마지막 작품으로 발견된 1767년 거창 송계사 <목조여래좌상>을 토대로 상정 불상의 전체적인 작풍을 설정하였다. 상정이 조성한 불상의 공통점은 귀의 생김새, 상·하반신 옷주름, 오른손이 놓인 위치, 하반신 표현 등에 나타나 있었다. 그 중 하반신 표현은 불상 하단에 표현된 연잎 사이로 하반신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A유형, 연잎과 대좌 표현 없이 하반신에 'S'자형 옷주름만 형성된 B유형, 불신과 대좌를 일체형으로 조성하여 대좌에 표현된 연잎 사이로 하반신 옷주름이 흘러내리는 C유형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정은 그가 유일하게 조각 수업을 받았던 스승 태원(泰元)의 작풍을 충실히 계승하였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는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나한상> 조성 불사에서 수조각승 태원 아래에서 상정이 3위 조각승(3/12위)으로 참여한 기록과 봉은사 석가상에서 표현된 'S'자형 하반신 옷주름이 상정이 조성한 모든 불·보살상에 반영된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현좌 표현, 보발의 형상 또한 18세기 전반 조각승 진열(進悅)에서 태원을 거쳐 상정에게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상정과 태원 두 조각승의 작풍은 불상에서 나타나는 양감과 측면의 두께, 하반신 옷주름의 요철 강도, 오른쪽 가슴의 옷자락 형태, 귀의 세부적인 표현 등에서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조각가 개인의 양식을 추출하였고, 상정의 작풍을 갖고 있는 불·보살상 10건 14점에 대해 상정 또는 태원(계) 등 원 조각가를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Buddhist Sculpture of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at Myeongju and the Gulsan School of Seon Buddhism)

  • 최성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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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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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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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굴산사(?山寺)는 신라하대에 통효대사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개창된 이래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파(??山派)의 본산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위치한 굴산사지에는 거대한 당간지주를 비롯해서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2구 전해오고 있으나, 범일과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854~930), 행적(行寂, 832~916)이 활동했던 나말여초기 굴산사를 알려주는 불교조각은 전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나말여초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살펴보기 위한 시도로서 굴산선문의 영역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의 강릉, 오대산, 동해시 등지로 범위를 넓혀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범일과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기 굴산선문의 불교미술을 유추해 보았다. 강릉지역의 석조물 가운데 강릉시 오죽헌박물관에 옮겨진 무진사지(無盡寺址) 석탑의 부조 사방불상과 사천왕상은 신라 중앙이나 양양 진전사지, 선림원지 석조미술과 양식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말여초기 명주지역 불교미술이 당시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범일의 제자인 개청이 주석했던 보현산 지장선원[普賢寺]에 전해오는 석조대좌의 부재(部材)는 팔각연화대좌의 하대 복련좌(覆蓮座)를 받치고 있던 팔각의 받침석으로 안상(眼象)에 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 나말여초기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던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국립춘천박물관과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지(寒松寺址) 석조보살좌상 2구는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비롯해서 머리 위에 쓴 원통형의 고관(高冠), 양손의 검지를 곧게 뻗은 수인(手印), 다리를 편히 놓은 서상(舒相)의 좌세 등, 독특한 밀교계 요소를 보여준다. 이러한 밀교계(密敎系) 도상(圖像)은 굴산선문 승려들의 당 유학(遊學)을 통해 명주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활발했던 굴산선문 승려들의 국제적 활동은 지역 미술에 큰 영향을 주면서, 선진성을 고양하였을 것이다. 동해시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시무외 여원인의 수인을 결(結)한 화엄계 노사나불상 표현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으로서 명주지역 미술이 전통성을 고수했던 면도 있었음에 주목하게 한다. 굴산선문 불교미술은 중앙지역과 같이 하는 양식 수준, 활발한 대당(對唐) 교류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진문화의 수용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선진성과 국제성은 나말여초기 굴산선문 불교미술의 기본 성격으로 생각된다.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에 기반한 전통문화콘텐츠 구축 사례 고찰 - 서역춤 <자지무>의 동아시아 전파를 중심으로 - (A Case Study on the Process of Developing a Traditional Culture Content based on the Spread of Asian Traditional Dance - with a Focus on the Spread of Jajimu to East Asia -)

  • 허동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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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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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3-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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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고대 서역의 석국(石國. Chach)의 민족무용인 <자지무>가 중원에 전파된 후 <쌍자지> 혹은 <굴자지>로 변용된 뒤 당송대에 고려에 유입되어 궁중의 당악정재 <연화대>로 변용된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 과정을 토대로 한 공연문화콘텐츠의 구축 사례를 돌이켜 고찰하였다. 본 프로젝트를 위해 서역, 중국, 한국의 고대 무용 전파와 관련된 광범위한 사료를 분석하는 사전 연구를 수행하였다. 나아가 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련 도상, 동영상, 음원 자료들을 수집하여 공연 제작에 반영하였다. 사전 연구를 기반으로 각 분야 전문인력과의 협업을 통해 음악, 무용, 복식의 재구를 시도하고 그 결과를 공연으로 마무리한 제작 과정을 기술하였다. 나아가 프로젝트의 성과와 향후 활용방안을 제안하였다. 고증사료와 참여인력의 부족에 따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대 아시아 전통춤의 전파와 변용을 주제로 시도한 국내외 최초의 전통문화콘텐츠 구축 사례인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고양 상운사 석불좌상과 조선 전기 조각 양식의 전통과 모색 (The Stone Buddha Statue of Sangunsa Temple at Bukhansan in Goyang, Gyeonggi Province)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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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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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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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경기도 고양시 북한산 상운사 석불좌상에 대한 연구로, 이 작품은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완성도 있는 석불상의 예로 주목된다. 불상 하부에는 149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 묵서명도 함께 전하고 있어 자료적인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 유존하는 조선 전기 석불상이 귀한 상황에서 상운사 석불좌상은 우수한 조각 작품으로서의 역사성 및 미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본 석불좌상의 형식과 양식을 분석하여 15세기 조선 전기 불상으로서의 미술사적 가치를 구명하였다. 상운사 석불좌상은 육계와 정상계주의 형식, 대의 착의법과 옷 주름의 표현 방식, W자 모양으로 약간 늘어진 가슴, 앙복련의 단순한 연화대좌 등에서 고려의 양식을 이은 전형적인 15세기 불상의 조각적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에 허리가 길어진 장신의 표현은 당시 명으로부터 영향받은 새로운 양식이며 내의를 묶은 띠 매듭이 생략된 것은 향후의 조각 양식을 예고하는 새로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머리의 가르마라든가 내의 위로 늘어진 나뭇잎 모양의 짧은 자락은 상운사 석불좌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고대부터 사찰이 운영되어온 명산 북한산에는 1711년 도성 방비를 위해 산성이 축성되고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해 승영사찰이 건립되었다. 30년간 팔도도총섭을 지낸 성능은 1745년 지은 『북한지』에서 이 사찰들의 현황을 전하면서 상운사는 승장 회수가 133칸 규모로 창건하였다고 적었다. 1813년의 <상운사극락전중창기> 및 이를 전하는 『봉은본말사지』(1943)에 의하면 상운사의 원래 이름은 노적사로, 1722년 승장 회수가 창건하였으며 1745년 상운사로 개칭하였다. 그런데 상운사 천불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의 발원문과 개금기에 의하면 1713년 상운사의 이름은 노적사였고, 1730년 개금 시의 사명은 상운사, 화주는 회수로 기록되었다. 이에 18세기 초반으로 알려져 있는 상운사의 초창 시기는 상운사 석불좌상의 조성 연대와 부합하지 않아 본고에서는 상운사의 연혁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재검토하고 불상의 조성지를 살펴보았다. 상운사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유존하므로 상운사의 역사를 고려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상운사 석불좌상은 사찰 인근에서 채취한 석재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상운사가 조선 초에도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북한지』 등에서 언급한 회수가 관여한 133칸 규모의 상운사는 초창이 아니라 중창의 결과로 볼 수 있고, 중창 이전의 이름은 노적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