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試論朝鮮時代'古文'及'古篆'定義的範圍 (A Study on the Scope of the Word '古文' and '古篆' Definition in the Joseon Period)

  • 신세리
    • 중국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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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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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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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本文透過朝鮮時代文人所寫的文章, 先整理文字學相關詞語的來源及其定義, 再考察朝鮮文人所接觸的字書所採取的具體字形, 闡明朝鮮文人對文字學相關詞語的理解。本文將特別針對'古文'及'古篆'概念進行分析, 分析兩者的異同點, 並探討發生差異的原因。

유가 문인예술에 나타난 선비정신의 특질 -조선조 유가 문인의 문인화를 중심으로- (The review of characteristic for 'SUNBI'spirit, seen literati arts of confucian scholar -focused on literati paintings of confucian scholar for chosun dynasty-)

  • 권윤희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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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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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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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유가의 문인은 자신의 성정을 수양하고 학문을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들은 지고와 지선의 삶을 추구하며 예술을 통하여 열락의 경계에서 삶을 향유하였다. 유가 문인의 예술은 주로 문인화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시서화가 어우러진 문인화는 문인의 인품과 학문을 전제로 한다. 이는 보통 여기(餘技)와 묵희(墨戱)·석묵(惜墨)으로 인한 신사(神似)의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유가 문인예술의 지향은 사의성(寫意性)의 추구(追求)·정신성(精神性)의 추구(追求)·유·도가미학의 혼융추구에 있다. 이는 유가 문인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학문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고매한 정신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유가 문인의 선비정신은 우선 절의는 절개와 의리 그리고 충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의병활동과 구국을 위한 강학활동, 성정을 자연과 함께 한 풍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선비의 절의(節義)·충절(忠節)·의병(義兵)·강학(講學)·풍류(風流)등이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경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문인화에 담겨진 화제이다. 여기에 유가 문인의 흉중을 바로 읽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비정신의 미의식은 풍류·충절·실학·애민·의리·사랑 등에서 그 미학을 새겨볼 수 있다. 선비정신의 예술적 구현을 위한 예술의 심미체험은 주로 감성지능에 의한 심미의 체험과 개인의 성향에 따른 심미체험이 있다. 이는 우리의 여러 문인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조 유가 문인예술에 드러난 선비정신은 정신 지향성이었으며 여유 지향성이었다. 나아가 사의 지향성과 실득 지향성이 있어 선비정신의 특질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청대 문인(文人)의 존재 방식과 정체성 - 장학성(章學誠)을 중심으로 (The Existential Mode and Identity of the Qing Literati - Focusing on Zhang Xuecheng(章學誠))

  • 최형섭
    • 중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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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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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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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청대 중기에 활동했던 장학성(章學誠)(1738-1801)의 사례를 통해 당시 '문인'의 존재방식과 글쓰기의 의미, 문화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 등을 재고해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여기에서 '문인'이란 '문학적인 글을 쓰는 작가(the literary man)'라는 협의의 개념보다 '문학적인 재능을 갖춘 지식인(the literary intelligentsia)', 영어의 'literati'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장학성은 건륭(乾隆)3년부터 가경(嘉慶)6년까지 64년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로, 특히 18세기 중후반 중국 문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절강성 회계(會稽) 출신으로 전형적인 강남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는 고향인 절강성 소흥과 호북성 응성(應城) 지역에서 교육받고 성장하였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도시는 북경이었다. 건륭27년(1762), 25살의 나이에 북경(北京)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한 이후 그는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직례(直隸), 하남, 안휘, 호북 등지를 떠도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는 18세기를 주도하였던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대표적인 후원자로는 심업부(沈業富), 구양근(歐陽瑾), 주분원(朱棻元), 주균(朱筠), 양국치(梁國治), 필원(畢沅), 사계곤(謝啓崑)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는 회시에 합격한 이후에도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재야 문인으로 사는 길을 선택하였는데, 후원자들을 통해 주로 가정교사, 서원의 산장(山長), 막료(幕僚) 등과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다. 18세기 출사(出仕)를 포기했거나 관료로 있다가 사직한 문인들은 대부분 장학성과 같은 비정규 일자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다. 다음으로, 18세기 문인의 담론에서는 당시 학술계를 크게 의리(義理), 고거(考據), 문장(文章)(사장(詞章))으로 구분하였다. 이 셋의 의미와 가치, 위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시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문학적인 글인 '문장(文章)'은 학술적인 글인 '고거(考據)'와 '의리(義理)'에 비해 대체로 그 의미와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인식되었다. 장학성의 글쓰기는 전체적으로 '문인의 글'보다는 '학자의 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의 글쓰기의 가치도 문학적인 글보다는 학자적인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고증은 의리를 실증하고 문장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그는 사학을 중심으로 의리와 고증을 통합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기가 추구해야 될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장학성을 비롯하여 전조망(全祖望), 원매(袁枚), 왕명성(王鳴盛), 조익(趙翼), 전대흔(錢大昕), 요내(姚鼐) 등은 출사를 포기하거나 관직에 들어섰다가 일찍 사직하고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재야에서 강학(講學)과 글쓰기에 종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이 출사를 포기하거나 일찍 사직한 이유와 배경은 각기 다양하지만, 불후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려는 원대한 포부와 욕망은 공통적인 부분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청대 학술이 전문화되어 당시 문인들에게 관료와 학자의 길은 적절히 병행하기 어려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청대 만주족이 주도적인 문화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문화권력이 한족 문인의 개별적인 선택의 몫이 되어 가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선초기(朝鮮初期) 국왕의 차가변화(車駕變化)와 상로(象輅)·연(輦) (A Study on The Change of Royal Cart in Early Joseon Dynasty)

  • 신명호
    • 동북아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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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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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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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in the late 14th century, korean confucian literati, sinjinsadaebe(新進士大夫), tried to reform korean society in the base of neo confucianism. after Joseon Founding, korean confucian literati modified a lot of confucian ceremonies in order to substitute buddhist ceremonies. at first, they titled confucian ceremonies as "gyu sik(regulation manuals)", "Eui mun(ceremonial manuals)", and "Eui je(ceremonial manuals)". but in the end, they titled confucian ceremonies as "Eui gwe(Ritual Protocol Manuals)". they also titled the reports on national occasions as "Eui gwe(Ritual Protocol Manuals)". among the confucian reforms, the most important reforms were auspicious ceremony. korean confucian literati tried to make perfect confucian auspicious ceremony. the first national achievement by confucian reformers was the five national rituals in annals of king sejong. and the second national achievement by confucian reformers was the five national rituals. the royal cart regulated in the five national rituals in annals of king sejong was cart decorated by ivory. but the royal cart regulated in the five national rituals was the sedan with cover. the reason of the change of royal cart were king sejo's political showmanship and diplomatic pretext toward ming(明) china. after the publishment of the five national rituals, the royal cart was represented by the sedan with cover.

운임(雲林) 예찬(倪瓚)의 사상(思想)과 그의 문인화(文人畵) 경계(境界) (Unlim Yechan's Thoughts and his literati paintings land)

  • 권윤희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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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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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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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예찬은 중국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시대적인 환경하(環境下)에서 자신의 독특헌 예술세계룰 구축하였다. 그의 화론인 흉중일기(胸中逸氣)는 동양 전통사상인 유(儒), 불(佛), 선의(禪) 영향으로 이루어진 정신적인 산물이다. 일기사상(逸氣思想)은 도가적(道家的)인 청담(淸淡)이나 허무(虛無), 무위사상(無爲思想)의 영향으로 문인(文人)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일어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이는 세속을 초월하여 일어났으며 남종 문인화(文人畵)의 이론적인 토대가 되었다. 예찬(倪瓚)의 일필(逸筆)은 흉중(胸中)의 일기(逸氣)를 그리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노력하고 실천한 가운데 얻어진 문인화 경계이다. 예찬(倪瓚)은 생활의 체험 속에서 깨달은 선의(禪) 오경(悟境)으로 시서일체(詩書一體), 시선일치(詩禪一致)의 높은 경지를 실현하였다. 그의 예술정신은 흉중일기로 대변되는 탈속원진(脫俗遠塵), 일소부주의 고답(高踏), 시서일체(詩書一體)의 높은 경지를 표출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는 원말(元末) 명초(明初)의 화단에 독창적인 문인화(文人畵) 세계를 구축하였다.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장물지(長物志)』 화목류에 나타난 문인원림 취미 비교 (A Comparative Study on 「Yanghwasorok」 and 『Zhangwuzhi』 - Focused on the Taste of Plants in Scholar's Garden, Korea and China -)

  • 박희성;윈쟈옌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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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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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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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대표 원림서(園林書) 가운데 하나인 "양화소록(養花小錄)"과 "장물지(長物志)"를 비교하여 한중 원림에 나타난 문인의 취향을 이해하고자 했다. 주요 비교 대상은 화목류이며,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강희안은 화목을 기르고 감상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완성에 두었지만, 문진형(文震亨)은 은일의 삶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화목을 이용하였다. 둘째, 강희안이 화목을 기르는 것은 성리학적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덕성 함양이지만, 문진형은 화목의 형태나 배식방법을 통해 '아(아취(雅趣))'를 구현하였다. 셋째, 양국 문인의 화목 선호도는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지만, 화목을 화분에 두고 감상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일례로 화분을 선택하거나 배치하는데 있어서만 하더라도 강희안에게는 소박함과 담백함이, 문진형에게는 화려함과 세련됨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문인 정신의 표본이 되었던 송대(宋代) 문인의 완상(玩賞) 취미에 비춰볼 때, 강희안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계승한 반면, 문진형은 '문인다움'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시켰다.

권상하(權尙夏)의 황강(黃江) 이주를 계기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의 형성과 발전 (Forming and Developing Rural Neo-Confucian Literati after Gweon, Sangha's Move to Hwang-gang)

  • 구완회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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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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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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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조선 시대의 재지사족은 핵심적인 지배집단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분포한 중소 규모의 지주였으며, 유교적 소양을 보유한 지식인 집단이었다. 17세기 이후로는 곳곳에 동성마을을 형성하고, 현조(顯祖)를 내세우면서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지역에서의 실질적 주도권을 재지사족이 행사하는 예가 많았다. 이런 면에서 제천 지역의 황강(黃江) 신동(新洞)에 정착한 안동 권씨 화천군파(花川君派) 문중은 대표적인 재지사족이었다. 이 집단은 1675년에 이뤄진 권상하 형제가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노론 정파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는 과거를 외면하고 황강에서 강학에 힘썼으며, 결국은 산림(山林)으로 초빙되어 좌의정으로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권상하의 사후에 그가 가르치던 곳에는 황강서원을 비롯한 기념 시설과 제사 공간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권상하가 중시했던 삶의 가치를 후손들이 받아들이는데 이바지했고, 지역 사회에 숭명의리(崇明義理)에 토대를 둔 척사적(斥邪的)인 정서가 자리 잡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 화천군파가 제천 지역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또 다른 인물은 권상하의 조카인 권섭(權燮)이었다. 그는 권상하를 위한 여러 기념시설을 건립하고, 문중의 발전을 위하여 여러 규칙을 제정하였다. 아울러 황강을 넘어서 제천의 신동에 새로운 거주공간을 확보하고, 청풍 단양 문경 등지에 별서(別墅)를 장만하며 거주공간을 넓혀 나갔다. 각각의 공간에는 조상을 모시기 위한 제사 시설도 설치했다. 그 결과 권상하와 권섭의 자손들은 제천 일대에서 대표적인 성씨 집단으로 수백 년간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은 서울에 남았던 이들에 비하여 많은 엘리트 관료를 배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지사족의 성장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성장, 나아가 전 조선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중국(中國) 회화이론(繪畵理論)과 원림건축사상(園林建築思想) 비교연구(比較硏究) (A Comparative study on the thought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and Painting theory)

  • 김정용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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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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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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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The essence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realization of a space that embraces nature and human integrating the openness and encloseness. The concept of landscape architecture that artificially furnishes natural elegance into urban areas coincides with the spiritual basis of Chinese literati-painting which subjectifies the scenery of objective world and entrusts personal feelings on that. In other words, the ultimate ideal of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is embodying the Utopia of confucian intellectual in a city. This paper has tried to shed a light on inter-relationship of literati-painting theory and Chinese landscape architecture theory through comparing them. It is the identical spiritual basis they shared harmoniously that made landscape architecture, poetry and painting possible to m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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