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청대 중기에 활동했던 장학성(章學誠)(1738-1801)의 사례를 통해 당시 '문인'의 존재방식과 글쓰기의 의미, 문화권력과 정치권력의 관계 등을 재고해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여기에서 '문인'이란 '문학적인 글을 쓰는 작가(the literary man)'라는 협의의 개념보다 '문학적인 재능을 갖춘 지식인(the literary intelligentsia)', 영어의 'literati'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우선, 장학성은 건륭(乾隆)3년부터 가경(嘉慶)6년까지 64년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로, 특히 18세기 중후반 중국 문인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절강성 회계(會稽) 출신으로 전형적인 강남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는 고향인 절강성 소흥과 호북성 응성(應城) 지역에서 교육받고 성장하였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도시는 북경이었다. 건륭27년(1762), 25살의 나이에 북경(北京)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한 이후 그는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직례(直隸), 하남, 안휘, 호북 등지를 떠도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는 18세기를 주도하였던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였는데, 대표적인 후원자로는 심업부(沈業富), 구양근(歐陽瑾), 주분원(朱棻元), 주균(朱筠), 양국치(梁國治), 필원(畢沅), 사계곤(謝啓崑)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는 회시에 합격한 이후에도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재야 문인으로 사는 길을 선택하였는데, 후원자들을 통해 주로 가정교사, 서원의 산장(山長), 막료(幕僚) 등과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였다. 18세기 출사(出仕)를 포기했거나 관료로 있다가 사직한 문인들은 대부분 장학성과 같은 비정규 일자리를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다. 다음으로, 18세기 문인의 담론에서는 당시 학술계를 크게 의리(義理), 고거(考據), 문장(文章)(사장(詞章))으로 구분하였다. 이 셋의 의미와 가치, 위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당시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문학적인 글인 '문장(文章)'은 학술적인 글인 '고거(考據)'와 '의리(義理)'에 비해 대체로 그 의미와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인식되었다. 장학성의 글쓰기는 전체적으로 '문인의 글'보다는 '학자의 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의 글쓰기의 가치도 문학적인 글보다는 학자적인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고증은 의리를 실증하고 문장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말로 요약되듯이, 그는 사학을 중심으로 의리와 고증을 통합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기가 추구해야 될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마지막으로, 장학성을 비롯하여 전조망(全祖望), 원매(袁枚), 왕명성(王鳴盛), 조익(趙翼), 전대흔(錢大昕), 요내(姚鼐) 등은 출사를 포기하거나 관직에 들어섰다가 일찍 사직하고 훨씬 오랜 기간 동안 재야에서 강학(講學)과 글쓰기에 종사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이 출사를 포기하거나 일찍 사직한 이유와 배경은 각기 다양하지만, 불후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려는 원대한 포부와 욕망은 공통적인 부분일 수 있다. 이와 함께 청대 학술이 전문화되어 당시 문인들에게 관료와 학자의 길은 적절히 병행하기 어려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청대 만주족이 주도적인 문화권력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문화권력이 한족 문인의 개별적인 선택의 몫이 되어 가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