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funeral cust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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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연간의 백색복식(白色服飾) 착용풍습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Wearing Practice of the White Costumes during King Jeongjo's Reign)

  • 최지희;홍나영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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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4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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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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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Historically, white clothes have been passed down through the generations as the symbol of the Korean people. This study was motivated after coming across a text written by Lee Ok(李鈺, 1760~1815), a writer during the Joseon dynasty. Lee wrote that "Koreans mostly wear blue clothes." This raised questions regarding the wearing practice of the white clothes at the time of King Jeongjo's reign(1776~1800), and led to further studies on the matter. The results show that discussions were held about changing the color of the government official's changui(氅衣) from white to blue. An order was also given replacing white boots with black boots. Therefore, it is supposed that blue clothes phenomenon was influenced from the blue changui policy. However, this change was temporary as later generations wore preferred white with the exception being women's skirts. Women preferred blue skirts to white skirts for a long period. Detailed analysis of the white changui showed that people were burdened by high dyeing costs, and this was a big factor as studies indicated a large gap in wealth disparity. In a society that put funeral and ancestral rites as one of its priorities, the white clothes could have been favored due to its multi-functional use. Also, the noblemen who set importance on Gija(箕子) Joseon connected white clothes custom to Gija. This connotes that the reason for wearing white clothes differed depending on the class. And as white clothes were widely worn, people developed different ways of wearing the clothes for aesthetic purposes.

조선시대 회격·회곽묘 출토 삽(翣)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Excavated Sab(a funeral fan) from Lime-filled Tomb and Lime-layered Tomb during the Joseon Dynasty)

  • 이승해;안보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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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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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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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삽(?)은 유교 예법에 따른 상장례(喪葬禮) 도구로 나무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백포(白布)나 두꺼운 종이를 붙여 그림을 그린 후, 자루를 달아 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례기(禮記)"에 따르면 삽은 주대(周代)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사례편람(四禮便覽)"에 나타난 삽의 용례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회격 회곽묘에서 발견되는 삽의 발굴 사례 및 문헌 기록을 통해 그 용례와 제작방식, 시기에 따른 유물의 특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삽은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개수와 그리는 문양이 다른데, 사대부가에서는 주로 '아(亞)'형의 불삽 1쌍과 구름 문양을 그린 화삽 1쌍을 사용하였다. 삽의 크기는 너비가 2자[척(尺)], 높이 2자[척(尺] 4치[촌(寸)]로 만들었는데 초주지나, 저주지로 두 번 싸고, 세 번째는 연창지로 쌌다. 그리고 나서 백저포, 마포, 무명, 공단 등으로 덮었다. 그 양면에 보불을 그리고 구름 변아(邊兒)에 운기를 그리는데 대개 주사 또는 진사를 사용하였다. 사대부가 회격 회곽묘에서 출토되는 삽은 광중에 부장된 것으로, 삽자루와 분리된 형태이다. 즉, 출토되는 삽은 발인행렬시 삽을 매달았던 5자 길이의 삽자루는 태워 없애고, 관의 좌우에 세워 넣은 것이다. 출토 유물의 검토를 통해서도 제작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출토된 유물은 각(角)의 개수에 따라 각이 3개 달린 것과 2개 달린 것으로 대별된다. 먼저 각이 3개 달린 것(유형 I) 중에는 나무 통판을 사용하거나 대나무를 납작하게 갈라, 바구니처럼 엮은 것도 있다. 각이 3개인 삽은 비교적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 비해 그 제작방식이 다양한 편으로 생각된다. 반면 각이 2개 달린 삽의 경우에는 비교적 정형화된 제작방식이 보인다. 직사각형이나 역사다리꼴로 몸통부분을 만든 후, 2개의 각이 달린 삽의 윗부분을 연결한 형태이다. 다만 상단면을 곡선(유형 II) 또는 직선(유형 III)으로 처리하는 것이 다르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각이 3개 달린 것에 비해 간단하며, 제작기법 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특히 상단면을 직선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분석에 사용된 30건 중 묘주의 몰년, 즉 삽의 제작 연대가 명확한 것만 선택하여 분석한 결과, 유형 I은 16세기 전반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유형 II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 유형 III은 17세기 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고르게 분포하고 있다. 요컨대 삽의 형태는 유형 I에서 유형 II로, 다시 유형 II에서 유형 III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는 변화의 시기로 유형 II III이 혼재되어 있다. 유형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하였으나 유형 II III은 각이 2개인 측면에서 그 형태가 유사하다고 볼 때 주목할 만한 전환기는 16세기 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유형 I은 유형 II III에 비해 제작 과정상 공이 더 많이 들어갈 것으로 생각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삽의 형태 및 제작방법도 간소해진 것으로 보인다. 상장례의 간소화 경향은 "선조실록(宣祖實錄)"에 예장(禮葬)이 몇 차례 중지되는 사건들을 통해 임진왜란 이후에 가속화된 변화로 볼 수 있다. 삽의 경우 이미 16세기 후반부터 간소화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18세기에는 삽을 따로 제작하지 않고 구의(柩衣) 및 관(棺)에 직접 그리는 현상까지 초래하였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단순화 되는 과정에도 "례기(禮記)"의 삽 사용 규정은 지켜지고 있어, 그 의례의 형식은 합리적으로 간소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장신구의 사치 금제 고찰 (A Study on Luxury Prohibition of Korean Personal Ornaments)

  • 추원교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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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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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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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The luxury is the expression of human being's ornament instinct. In this study, in order to grasp the moulding system of the Korean's personal ornaments, the process of luxury prohibition was reviewed to search for to which direction the ornaments developed in the frame of the prohibited style connected closely to the character of the personal ornaments. The proiod was fixed from the old society to the late Chosun dynasty era. The beginning of the luxury in Korea seems to be the start of the luxury burial at the time of funeral in the age of Koguryo., In the era of Koguryo, 10th year of King Dongmyung (B. C. 28), in the era of Baekje, 27th year of King Koi(260), the prohibition of dress regulation and the style of dress were conducted. The prohibition of personal ornaments in Silla was started from King Bup:Heung, and in the 9th year of King Heung-Duk, the prohibition was conducted in order to correct the luxury of the nobles and set up the social discipline. In the 11 th of King Il-Sung-Ni-Sa-Kum, the use of gold, silver and jade was prohibited in the civilian circles. The prohibition of Silla was succeeded to Koryo era, and in the 7th year of King Kwangjong(956), the system of Baekgwan Gongbok(uniform for government officials) was set up, and the system of Sasek Gongbok(four color official uniform) was set up in the 11 th year of the same King, and the prohibition of the personal ornaments such as crown and band is considred to have been conducted. The prohibition of gold and silver was conducted in the first year of King Sungjong(982), and in the 4th year of King Chungryul(l260), the order of wearing the dress and hat in accordance with the Yusan dynasty and the Mongolian customs were widely circulated in the royal court and vivilian circles. The strong influence of Mongolia made the taste of the traditional personal ornaments laste. The personal ornaments were used for the nobles until the age of the Unified Sillar but even the common people could use them in case they were rich, and such a circumstances made the use of foreign goods inflated. The prohibition of Koryo era was aimed at the prohibition of the foreign goods of luxury, and the classification of the social status.In the age of Chosun Dynasty, the production of gold and silver was feeble indeed but the oute reason of the prohibition was to eradicate the luxurious tendency, elevate the custom of eradicate the luxurious tendency, elevate the custom of thrift, and moreover, the gold, silver and jade were no the products of Korea and the prohibition was conducted but the true reason was afor the tribute tt China and the classification of status. The prohibition of Chosun dynasty was conducted first in the June of the 3rd year of King Taejo The major contents of prohibition was no use of gold, silver and jade, coral, agate, amber, etc. of th, wives of the Dang-Sang-Kwan (Court Nobleman) or their sons and daughters, and the same pheno menon was common even at the time of marriage. The people engaged in the secret trade there of wert beheaded. The personal ornaments in the prohibition were the pendent trinket, Binyo (crossbar) ceremonial ornamental hat, ring, earring, ornamental knife, hat string, hat ornament, belt, etc. Thl luxurious marriage expenses out of the luxury was severe, and lose of the marriageable age because 0 non-preparing the marriage goods was the national evil. The prohibition oC luxury was hard to bt kept to the nobles or rich people, the same as old days and present days. The prohibition of th{ luxury and personal ornaments of Korea had nothing to do with the commons, and it was limited tc the nobles and rich people. The prohibition was aimed to cultivating the custom of frugality by eradicating the luxurious atmosphere, but it was chiefly due to the tribute to the China and tht discrimination of the. status. We can say that the recent personal ornament was the flower of handi craft industry bloomed in the prohibition and reg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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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일고찰 (Consideration on National Rituals and Folk Beliefs Found in 『Hajaeilgi』)

  • 송재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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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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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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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6월 29일까지 20년 7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쓴 "하재일기"에는 보고 들은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한 것은 "하재일기"에 기록된 민속 관련 내용이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당시 실제로 행했던 세시풍속 민속놀이 의례 민간신앙 등 민속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일기는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되며,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하재일기"에 나타난 민속을 연구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의례의 경우, 가례(嘉禮)는 황제의 즉위기념일과 황제 황태자 탄신기념일 관련 기록만 전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지만,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를 백성들이 충실하게 실행하였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러한 국가적인 기념식과 경축식행사 때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제창케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흉례(凶禮)는 궁중상례 관련 내용만 전하고 있는데, 민비의 상례를 제외하고는 궁중 상례를 종전처럼 절차에 의해 제때 제대로 치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정부의 명에 따라 이를 잘 실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민비를 살해하고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워 재로 된 것을 버려둔 채 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간신앙의 경우, 분원에서 정기적으로 동리의 신사를 지냈고, 동리에서도 매년 고청신사를 지냈는데, 제사비용은 마을 사람들의 경제적 사정에 따라 차등적으로 배분해 추렴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힘을 합쳐 제수를 준비하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산신당과 부군당에도 지냈으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는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인이 된 후, 회사에서 지내는 신사 제사를 폐지하려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새신(賽神), 즉 굿이나 푸닥거리하는 것도 없애려 했지만, 전례대로 어쩔 수 없이 따랐다. 한편, 지규식은 마을에 홍수가 나고 전염병이 퍼지자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자기 집 앞에 제단을 설치하고 희생과 술 등 제수를 갖추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황천후토(皇天后土)에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있는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규식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등 이러한 무속이나, 주로 정초에 관성제군(關聖帝君)을 참배하고 한 해의 운수를 점쳤던 것들은 모두 민간신앙으로서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생활 속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규식의 풍수신앙 선호도 당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식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국가의례와 민간신앙 관련 내용은 자료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민속 연구의 일환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민속학적으로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수출회화로서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 풍속화 연구 (A Study on the Genre Painting by Gisan Kim, Jun-Geun as Export Painting)

  • 김수영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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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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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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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Kim, Jun-Geun(Gisan) was a late 19th century Chosen dynasty painter who created numerous genre paintings for West European clients in the newly opened treaty ports of Wonsan, Busan and Inchon. The treaty ports in the late 19th century Chosen represented of the crossroads the economy, values, and the institutions of the West European powers. In particular, the agriculture-based economy, Confucianism, and land-owner noble class started being eroded by a commerce-based economy, the values of Christianity, West European institution, and a new class of people who amassed wealth from commerce. As Kim, Jun-Geun's paintings were created for sale to West European clients, they exhibit characteristics that are distinct from the traditional genre paintings in terms of presentation style and the selection of the subject matters. The export genre painting originated in the 18th century around Guangdong, China. Broadly, there are two styles of genre paintings: the Guangzhou style and Ningbo style. Kim, Jun-Geun's paintings resemble the Ningbo style. The Ningbo style tends to highlight the main subjects, form an album of small paintings, and provide a simple treatment of the scenes without the background. Kim, Jun-Geun's paintings cover most aspects of life of common people of his time, ranging well beyond the subjects matters of the traditional genre paintings. His subject matters include the scenes of funeral, folk games, Buddhist and ancestor worship, prison and punishment, shaman custom, debauchees, government officials' formal trips, beggars and handicapped, etc. Many of the subjects are the neglected and the oppressed of the society. And he presents in detail the dress and its ornament that the subjects wear, and all the utensils and things around them. Besides, his subjects' faces are generally expressionless, and their postures are stiff; as such, the feeling of liveliness or movement is lacking. It may be the results of Kim, Jun-Geun's taking the other perspective, namely of his West European clients, rather than his own. The adoption of the other perspective may in turn be a product of the Social Darwinism and the new sense of values that accompanied the infusion of Christianity and West European institutions. Kim, Jun-Geun's portrayals of his subjects appear to reflect the attributes with which the West European Orientalists' of the period characterized the people of the Far East, namely, backwardness, barbarity, irrationality, violence, and mys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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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DNA의 분석과 검증 (Analysis and Verification of Ancient DNA)

  • 지상현;서민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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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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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7-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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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대 DNA분석은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자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사가 될 정도로 점차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고고학자와 생물학자는 인류의 기원과 집단의 이주, 민족의 형성 그리고 고대인의 질병과 매장문화를 규명하는데 있어 고대 DNA분석을 접목하고 있으며, 이미 멸종된 동물의 계통진화학적인 연구에도 이를 활용하고 있다. 고대 DNA분석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계기는 고대 시료에서 추출되는 미량의 DNA 증폭을 가능하게 한 종합효소연쇄반응(Polymerase chain reaction, PGR)법이 개발되면서였다. 그러나 고대 DNA는 탈아미노화나 절편화 등의 분자 손상 정도가 심한데 이것은 PCR에서 중합효소의 정확한 DNA 증폭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시토신이 탈아미노화되어 우라실을 형성하는 것은 DNA의 염기치환오류를 일으킬 수 있으며, 이런 현상은 증폭 과정에서 고유의 염기서열에 대한 고정치환($C{\rightarrow}T$, $G{\rightarrow}A$)을 유도하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고대시료는 외부 오염물에 노출되어 있는데, 특히 외부 DNA의 오염은 고대 DNA의 염기서열을 결정함에 있어서 부정확한 결과를 도출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곤 한다. 이와 같이 고대 시료는 오랜 기간 동안 자연 분해과정과 다양한 오염물질에 노출되어 있어 그 훼손 정도가 심한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 DNA 연구에 있어서 많은 생화학적 손상과 외부 DNA의 오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통의 분자생물학적인 방법과 기준보다 더욱더 엄격한 검증 절차에 의하여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며, 연구 결과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고대 DNA의 손상과 오염물질에 의한 부정확한 염기서열결정과 오류를 보정하고 예방할 수 있는 연구 기준과 실험적 절차를 설명하고자 한다.

초분, 한국 이중장제의 분석심리학적 고찰 : 부패와 뼈로의 환원을 중심으로 (CHOBUN, Understanding the Double Burial Custom in Korea from a Jungian Perspective : Focusing on Putrefaction and Reduction to Bones)

  • 조자현
    • 심성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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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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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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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초분은 살이 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관에 넣은 시신을 짚으로 싸두는 초가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모든 살이 다 없어지고 나면, 초분은 해체되고, 뼈만 추려 다시 묻는다. 이러한 방식의 초분은 따라서 처음 시신의 살을 처리하기 위한 임시 매장과 이후 남은 부분(뼈나 재)을 영구히 매장 하는 이중장제에 속한다. 초분은 사람이 잘 가지 않고, 집에서도 떨어져 있지만, 유족이 가서 돌볼 수 있는 곳을 택해 만들어지는데,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지속적인 관심을 쏟을 수 있으면서도 고요히 격리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심리적인 재생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초분을 두는 기간, 일차장의 기간을 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뼈만 남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하여 초분을 해체하였을 때 완전한 뼈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초분이 부패와 뼈로의 환원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패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연금술 문헌에서 보듯 동시에 일어난다. 부패의 최종 목적은 육신을 영적 상태로 만들고, 그리하여 죽은 자를 다른 삶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서, 부패를 견뎌내고, 썩는 냄새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썩히는 것은 그리하여 육화된 세계, 몸을 용해시켜 없애고, 그 핵심, 열매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부패의 과정은 자기 스스로의 오염되고 끔찍한 측면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며, 무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오게하는 것이다. 원형적인 세계, 무의식은 우리가 접근하려 할 때, 종종 위협적이고 공격적인, 더러운 무엇으로 경험된다. 개성화 과정에서, 우리가 우리 정신의 이 끔찍하고 오염된 부분들을 볼 수 있는 용기를 낼 때만이, 무의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각성과 새로운 삶의 감각이라는 축복을 주는데, 이것이 부패가 의미하는 것이다. 뼈와 골격은 생명의 부술 수 없는, 소멸되지 않는 본질적인 요소를 상징한다. 뼈는 재생을 위한 최소 단위이자, 재생의 바탕이 되며, 여기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게 된다. 뼈의 상태로 환원은 생명의 바로 그 원천으로 돌아감을,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 심리적으로 자신의 자아중심성을 버리고, 자기가 개성화의 전 과정을 이끌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발달을 위해, 골격 상태로의 환원의 어려운 과정을 겪는 것은, 자아의 죽음의 선언이며, 그 목적은 자신을 썩기 쉽고 덧없는 살과 피, 육신에서 해방시키고, 전체로서의 영적인 갱신, 생명의 불멸의 요소를 얻기 위함이다. 초분은 또한 식물의 순환에서 해마다 보이는 부패와 생명의 부활을 보여준다. 초분에서는 이러한 식물의 순환의 상징이 다른 일반적인 한국 전통 상장례에서보다 명확하고 강하게 드러나는데, 죽음에도 살아남는 생명의 부분을 식물의 상징을 통해 경험하게 한다. 초분과 관련된 식물은 죽음 후의 생명의 지속성, 심리적으로 말해, 자기의 존재를 말한다. 초분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식물의 이미지들은, 모든 것이 사라진 죽음의 상태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으며, 심리학적으로 우리의 삶에 정신에 끝없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영원히 존재하며 의식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새롭게 하는 자기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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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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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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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