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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구역 수준별 공유 전동킥보드 통행발생모형 개발 (Development of Trip Generation Models for Shared E-Scooter by Service Areas Clustered by Level of Trip Density)

  • 송태진;김규혁;이창훈
    • 한국ITS학회 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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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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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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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세계적으로 공유 전동킥보드의 이용이 급증하면서 해당 수단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의 연구 결과가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 통행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을 파악하는 연구들이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통행발생 모형 개발은 교통계획 측면의 활용에서 아주 중요하며 신교통수단인 공유 전동킥보드는 국내외적으로 통행발생모형 개발이 부재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선행연구를 면밀히 검토하여 유의미한 변수들을 활용한 공유 전동킥보드 통행발생 모형을 개발하고자 한다. 공유 전동킥보드 특성 상 주요 서비스 지역과 그 외 지역의 통행 특성이 상이하다. 서비스 통행량에 근거하여 서비스 수준별 지역을 구분하여 지역별 통행발생모형을 구축했다. 분석 결과, 주요 서비스 지역 내 공유 전동킥보드 통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대학 유무, 근접중심성, 문화지역 면적 등으로 나타난 반면, 그 외 지역 내 공유 전동킥보드 통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대학 유무, 매개중심성, 통행거리 등으로 나타났다.

논산 노성산(魯城山)의 입석(立石) 분포와 총석사(叢石寺) 수석(樹石)의 정원적 면모 (Dispersion of Standing Stones at Noseongsan(Mt.Noseong) and Aspect of the Stone Decorated Garden(Soo-suk Jeongwon) at Chongsuk-Sa(Chongsuk Buddhist Temple) in Nonsan City)

  • 노재현;허준;장일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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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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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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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논산 노성산성 일대 입석과 총석의 현황과 그 형태 및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에 따라 노성산과 노성산성의 장소정체성과 노성산성 내외부에 산재한 입석의 분포를 파악하는 한편 입석의 밀도가 가장 높고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총석사'를 중심으로 수석(樹石)의 배치형태 및 구성 특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서의 '탑사(塔寺)' 존재의 언급, 탐문조사 결과 사찰의 존재설 그리고 '관음사(觀音寺)' 명의 와편 발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전부터 산성 내부에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총석사'라는 각자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조사 결과, 산성내부에 존재하는 다수의 입석지 중 제6입석지는 수석(樹石)의 규모, 수석 구성의 복합적 경향, 주변 우물(샘) 및 방지 그리고 석문 등에 이르는 계단의 조성 흔적 등을 볼 때 총석사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총석사를 비롯하여 삼신암, 칠성암, 대장암 등으로 각자된 5개의 수석과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선각 마애불은 동일 공간 바위 위에서 발견된 북두칠성의 성혈(星穴)과 함께 이 공간이 불교 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발생한 칠성신앙 및 산신신앙적 공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 파악되었다. 총석사 입석의 실측조사 결과, 수석의 수는 총 24개로 수석고는 29~402cm, 수석폭은 48~290cm로 규모에 있어 큰 편차를 보였으며 수석간 평균거리는 23.56cm로 나타났다. 또한 입석, 평석, 산형석 그리고 영상석 등 다양한 돌을 특치(特置), 군치(群置)하여 수석하였으나 돌의 좌향은 서향(W)으로의 일관된 지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국내에 알려진 정토정원의 유구와 비교할 때 수석의 배치 기법상 입석과 형상석 이외의 3개의 평석은 선원의 대표적 구성요소가 되는 좌선암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보살암을 마주하는 평석은 삼산석(三山石)을 상징화하여 조성된 것이지만 높이 및 주변 수석 배치 여건으로 보아 참선의 목적보다는 제수를 위한 공양석으로 추정된다. 총석사 수석의 구성은 입면이나 평면구성상 천지인 삼재(三才)를 형상화한 삼존석형(三尊石形)을 바탕으로 심경미(深景美)를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등변삼각형의 3:5:7 복합수석법으로 일정한 지향성을 보이며 배치되고 있음을 볼 때 총석사 입석군은 사원수석의 형태로 참선을 목적으로 돌짜임된 축경적(縮景的) 정원 유구로 보인다.

고흥현 자기소(磁器所) 은촌(犾村)의 위치 탐색과 운대리 가마터 성격 검토 (Investigation of the location of Jagiso eunchon in Goheung-hyeon and review the characteristics of Undae-ri kiln)

  • 성윤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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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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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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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고흥현 자기소 은촌은 운대리 가마터와 관련되어 연구성과가 집적되었다. 그 이유는 운대리에서 27개소의 분청사기 가마터가 확인·조사되어 그 수량이나 밀집 분포 면에서 중요 유적으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현 서쪽(縣西)'이라는 방위와 부합되지 않아 명쾌한 해결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운대리 가마터가 현(치소)의 서쪽이 아니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고흥현 자기소 은촌(犾村)에 대해 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고흥현 치소는 『세종실록』 지리지 편찬연대인 1424~1432년 전에 이미 현 보성군 조성면 우천리 고내마을 일대로 이동되었기 때문에, 자기소 또한 보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치소의 위치는 자기소·도기소를 비정하는데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흥현 사방경계 기록 중 남쪽과 동쪽의 경우 현재 옥하리에 있는 흥양현 읍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와 부합되지 않는다. 하지만 보성 조성면 우천리의 조양현성은 영조척으로 환산하게 되면 사방경계 기록과 유사한 결과값이 나와 이곳이 『세종실록』 지리지 단계의 고흥현 치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자기소 은촌(犾村)의 의미구조는 동물+소리인데, 이와 유사한 구조의 지명이 보성 득량면 정흥리에서 확인되었다. 바로 호음동(虎吟洞)으로, 이 마을 남쪽에서 분청사기 가마터가 조사되었고, 여기서 '내섬(內贍)'의 '섬(贍')자 중 아래 획에 해당되는 '언(言)'자가 있는 분청사기편이 확인됨에 따라, 공납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되어 고흥현 자기소 은촌은 보성 정흥리 분청사기 가마터로 추정하였다. 남은 문제는 고흥 분청사기 핵심 연구 대상인 운대리 가마터의 성격이다. 최근 운대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각종 제기(祭器)를 근거로 고흥현에서 흥양현으로 확대 개편되는 1441년 2월 이후 1450~70년대에 운대리 가마터가 자기소 기능을 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지방 군현(郡縣)의 수령이 주관하는 국가의례인 주현제(州縣祭)에 이용된 자기 제기가 운대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상준(象尊), 희준(犧尊)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하였던 7호 가마터 주변에서 수습된 '예(礼)'명 분청사기편 역시 달리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예(礼)'명은 관사명이기 때문에 공납자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대리 가마터가 1441년 2월 이후 1450~70년대에 흥양현의 자기소 역할을 하였다면, 이 편은 자연스럽게 운대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신라사천왕사건축(新羅四天王寺建築)의 설계기술(設計技術) 고찰(考察) (Study on the Planning Method of the Sacheonwangsa Temple Architecture in Silla)

  • 이정민;미조구치아키노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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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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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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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신라사천왕사는 670년 '조창(祖創)'된 이후 '개창(攺刱)'을 거쳐 679년에 낙성된 밀교사원이다. 본 연구는 근년의 발굴조사 성과와 사원건립과정 및 조영척도에 관한 고찰 결과를 바탕으로, 사천왕사건축의 설계기술 해명을 시도한 것이다.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부지 조성에 있어서는, 낭산 남록 상에 1방(坊)의 크기를 상정, 그 남북 폭을 3등분한 후, 그 중 2구획분을 평탄부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2) '조창'에 있어서는, 평탄면 남단을 경계로 하여 300척(尺)평방의 규모를 상정, 그 중심에 '선축기단'을 축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초기구상으로써 문두루(신인(神印))의 장치를 목적으로 한, 외원 2주(肘)(3척(尺)), 내원 1주(肘)(1.5척(尺))의 단(壇) 평면 의장을 자체 고안, 그것의 100배를 중심곽 규모 및 배치 계획에 있어서의 근거로 설정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3) '개창'에 있어서는, '선축기단'의 중심을 금당 중심으로 고수할 경우 발생되는 목탑·금당간거리 협소 문제를 인지, 초기구상으로부터 중심곽 규모 및 배치를 조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4) 당탑 및 단석의 배치는, 확정된 중심곽 규모(280척(尺)×320척(尺))를 대상으로 한 분할에 기초해 결정되었는데, 동서방향에 있어서는 중심곽 동서 폭을 4등분하는 선상으로 정한 반면, 남북방향에 있어서는 중심곽 짜임새상의 특성에 입각, 동서회랑의 도리칸 분할과 조정을 통해 익랑 위치를 확정한 후, 이를 기준해 금당·단석을 배치했다고 추정된다. (5) 당탑 및 단석 등의 규모는 각 건물의 정면 기단 폭에 의해 제어되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특히 금당·목탑의 규모는 중심곽 동서 폭의 4등분으로부터 시작되는 단위분수적 분할의 반복을 통해 결정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단의 평면의장을 전형으로 한 자기유사성에 연원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제주도 지역 성곽 유산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방향 (The Status of Studies on Historical Wall Relics in the Jeju Area and the Strategic Direction for Their Preservation and Maintenance)

  • 변성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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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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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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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상 동아시아 해로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주변국의 외침을 빈번하게 받아왔다. 특히 쓰시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이 중국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제주를 정복하기 위한 왜구의 침략이 고려 말 이후 계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제주도 곳곳에는 외침에 대비한 방어시설들이 설치되었고, 특히 소수의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이 곳곳에 축조되었다. 이는 내륙과 떨어져 있어 유사시 신속한 지원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관계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성곽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던 만큼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런 이유로 성곽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성곽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다른 지역의 성곽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1970년대 들어서야 조사되기 시작했다. 이는 제주도 성곽의 중요성을 빨리 인식하지 못했고 성곽을 연구하는 전공자가 제주지역에 없었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제주도에 대한 고고학조사가 본격화되면서 성곽에 대한 연구도 점차 진전되었으나 아직도 그 수준은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제주도 성곽 유적에 대한 연구 현황과 보존 정비 현황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시대 성곽 유적 2개소와 조선시대 성곽 유적 13개소의 성곽 유적 현황과 연구 현황을 분석하여 제시할 수 있었다. 성곽 유적의 보존 정비 현황에서는 잔존하는 성벽과 부속시설 현황을 제시하였고 지금까지 이루어진 정비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곽 유적의 정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언급하여 향후 복원 정비에 참고할 수 있는 개선방안을 간단하게 제시하였다.

덕수궁 돌담길의 역사문화가로 장소 인식 특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Place-Cognition Characteristics of Historic Cultural Streets in Deoksugung Doldam-gil)

  • 양유선;손용훈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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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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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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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오늘날 서울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덕수궁 돌담길은 역사유산으로서의 장소 인식과 공원으로서의 장소 인식 등 혼재된 장소성을 지닌 곳이다.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과 관련한 기존 연구는 장소성에 중요한 변수인 이용자를 배제한 채 장소성을 논하였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덕수궁 돌담길 장소 인식과 이에 미치는 요인을 방문객을 대상으로 분석 해석하여 장소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석하고자 한다. 연구결과로 덕수궁 돌담길의 대표 이미지는 '걷고 싶은 거리'로 차량 통제 및 보행환경 개선이라는 제도적 요인이 작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장소성을 형성하는 변수들을 물리적 환경, 활동, 의미로 분류해 분석을 실시한 결과, 물리적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았으며, 그 중에서도 '푸른 녹음의 가로수(3.95)', '곡선의 돌담길(3.88)'이 높게 나타났다. 활동의 범주에서는 '도심 속 산책 활동(4.01)'이, 의미에서는 '사랑과 낭만(3.57)'이 높게 나타났다. 이는 가로공간이라는 장소적 특성과 기존에 친숙하게 받아들여지던 장소이미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요인분석을 통해 5개의 요인을 추출하여 장소인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으며, 각 요인들과 덕수궁 돌담길의 장소적 분위기와의 상관관계 분석을 통해 '녹지 가로경관'과 '역사성'에 대한 높은 상관성을 확인했다. 이는 녹음으로 위요된 공간, 시지각적 체험, 자유로운 보행 여건 등이 반영되어 도심 속 공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덕수궁이라는 역사문화유산에 영역이 포함되기에 오랜 시간 누적된 장소적 이미지와 행태가 반영된 결과이다. 덕수궁 돌담길 장소 인식 요인 및 장소적 분위기 형성에는 녹지와 관련된 것들이 강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이는 향후 역사문화가로 또는 유산과 관련된 보존 및 관리활용에 있어 녹지에 대한 가치 및 중요도를 반영할 필요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본 연구는 이용자의 장소 인식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으나, 장소 인식에 미치는 요인을 도출하는데 있어 다차원적 장소성의 일부분만을 고려했기에 추후 이러한 한계점을 보완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야생동물위치추적기를 이용한 동아시아 저어새(Platalea minor)의 가을 이동경로 (Autumn Migration of Black-faced Spoonbill (Platalea minor) Tracked by Wild-Tracker in East Asia)

  • 정상민;강정훈;김인규;이한수;이시완;오홍식
    • 한국환경생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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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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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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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저어새(Platalea minor)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발표한 RedList에 Endangered(EN)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6년 기준으로 3,356개체가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저어새 번식 개체군의 70% 이상은 한국 서해안에서 번식하며, 대만, 중국, 홍콩 등지에서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지역에서 저어새의 장거리 이동과 남하 시 서식지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 연구에서는 야생동물위치추적기(WT-200, GPS-Mobile phone based telemetry, KoEco)를 이용하여 저어새의 이동 경로와 분포, 중간기착지 및 월동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위치추적기는 2014년 6월 말 한국의 번식지에서 저어새 유조를 포획하여 부착했다. 추적 결과, 저어새의 남하시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로 나타났으며, 월동지까지의 이동 거리는 최소 746km, 최대 1,820 km로 평균 1,201 km이었다. 하루 최대 이동 거리는 1,479 km이었으며, 평균 782 km이었다. 월동지까지 이동소요 기간은 평균 10일이었으며, 가장 짧은 기간은 2일이었고 가장 긴 기간은 34일이었다. 대부분의 개체들은 2~3개의 중간기착지를 이용하였으며, 1~2일을 머물렀으며, 주요 중간기착지는 강, 하천, 저수지, 갯벌과 같은 습지였다. 월동지는 중국 해안 지역(5개체), 중국 내륙 지역(1개체), 대만(3개체), 일본(1개체)등 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저어새의 이동경로 상에 있는 국가 간의 협의와 보호정책을 통해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중간기착지 및 월동지역을 보전할 필요가 있으며, 향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추가연구를 통해 체계적인 보전대책 및 활동계획 등이 수립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기능성화장품에 대한 요구 및 만족도 연구 (A Study on Requirement and Degree of the Satisfaction about Cosmeceuticals of Women)

  • 김강미;김주덕
    • 대한화장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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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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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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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최근 새로운 문화코드로 자리잡은 웰빙은 화장품업계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해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기능성 춘원이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기능성을 적응시키는 품목이 기초에서 색조로, 한방 화장품으로 점차 다양하게 늘고 있어 기능성화장품 시장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화장품 업계에서는 적극적인 웰빙 라이프 스타일로의 접근이 필요하다. 잠재된 웰빙 라이프로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웰빙 컨셉 상품개발은 물론 기능성화장품이 가진 고유의 기능적인 면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기능성화장품의 중요 과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최근의 웰빙 경향과 맞물려 보다 심화 발전되고 있는 국내 기능성화장품 시장을 점검해 보고, 여성 소비자들의 기능성화장품에 대한 요구 및 만족도 조사를 통해 기능성화장품을 육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보 연구를 위하여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19세 이상 50세 이하 우리나라 성인 여성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총 510부의 설문지를 배포해 그 중 379부를 분석에 최종 이용했다. 수집된 자료는 SPSS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분석했다. 분석기법으로는 연구대상자의 일반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빈도와 백분율을 산출했으며, 우리나라 여성들의 기능성화장품의 이용행태와 기능성화장품에 대한 요구 및 품질지각요인, 기능성화장품에 대한 만족도를 살펴보기 위해 $Cronbach's\;\alpha$ 신뢰도 검증, $x^2(chi-square)$ 검증과 빈도분석, t-test 검증, 그리고 one-way ANOVA를 실시했다. 위의 결과를 토대로 본 연구에서는 기능성화장품의 이용행태와 소비자 요구 및 만족도에 대한 기초 정보의 제공을 통해 소비자의 요구를 보다 직접적으로 파악, 기능성화장품 시장에 대한 마케팅 전략 수립시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호남지역(湖南地域)의 왜계자료(倭系資料)와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 (The Relics of Wae Lineage and the Keyhole-Shaped Mounds in the Honam Area)

  • 土田純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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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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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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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호남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일 고고 고대사학 연구자 사이에서 항상 큰 관심을 받았던 지역이다. 근래 이 지역에서 왜계 고고자료 발견 사례가 양적 질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와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기존에 13기로 알려졌지만 최근 발견 사례가 17기까지 증가했다. 한 곳에서 3기가 조영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으며, 또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특징짓는 형상식윤(形象埴輪)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는 특정 자료나 특정 유적 유구에 한정된 사례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호남의 모든 왜계 고고자료를 대상으로 수량 고고자료의 종류 출토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변천을 추적하였다. 시기별 특징이나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왜와 마한세력의 관계 의도 동향을 문헌 자료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였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는 5세기 전엽부터 증가 및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며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에는 왜계 무구와 왜계 매장주체부,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5세기 말~6세기 전엽에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 6세기 중엽~7세기 초에는 왜계 무구 석침이 중심을 이루어 시기마다 양상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의 왜계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집중된 백제와 왜의 왕래 기사를 근거로 외교 사절단을 수행했을 무인계층과의 관련성을 상정했다.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토기가 호남 내륙부로 확산되었다. 물자의 집적에 유리한 지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를 북구주(北九州) 제세력에 속한 왜인을 중심으로 한 교역자 집단으로 해석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기본적으로 기존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서 특별한 세력 기반 없이 돌연 출현했다. 그러나 재지인의 협조 없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현지와 호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구축 기술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전방후원형 고분은 재지 수장묘와 동시기 아니면 직후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재지 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왜 제국(諸國)은 새로운 교섭 상대로 호남지역을 선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왜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하)자원이나 물자를 확보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쳐서 사용되고 매장된 호남지역의 왜계 고고자료는 왜인의 다양한 교섭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의 사르마티아(Sarmathia)식 검집 패용 방식의 전개 과정으로 본 동서교섭 (Thinking in Terms of East-West Contacts through Spreading Process of Sarmathia-Pattened Scabbard on Tillya-Tepe Site in Afghanistan)

  • 이송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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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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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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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최근 북방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들이 증가하면서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양상과 그 실체들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사르마티아인들의 동서 교역의 활동 양상을 사르마티아식 검집의 확산 지역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사르마티아인들의 검은 스키타이나 페르시아인들이 사용한 아키나케스(Akinakes)의 계보를 잇는 것이지만 손잡이나 패용 방식에서 손쉽게 칼을 뺄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즉 양 측면에 달린 4개 돌기에 끈으로 연결한 검집을 허벅지에 부착시키는 패용 구조로 변한 것이다. 사르마티아식 검은 기원전 5세기 파지리크시기 알타이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사르마티아인들의 활동 중심지인 남시베리아, 박트리아, 파르티아, 로마로 확산되었다. 이 글에서는 동서 교섭의 요충지인 박트리아지역에 속하는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 4호묘에서 출토된 검집에 관심을 두었다.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한 채 매장되었던 틸랴 테페 4호묘의 묘주는 당시 쿠샨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박트리아에서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파악된다. 묘주가 2자루의 사르마티아식 검을 패용하고 있었던 것은 박트리아에 사르마티아의 영향이 상당이 수용된 사실을 의미한다. 사르마티아인들이 동서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산 물자를 실크로드에 공급하였던 이들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이에 사르마티아인들이 활동한 북방 초원 루트에 중국 한대 동경, 메론형 구슬, 수정구슬 등의 장식구슬, 금환연접구슬 등 중국 특히 비단이 생산되었던 남중국의 공예품들이 출토되는 경위에 관심을 가졌다. 모자이크 구슬은 당시 남중국 그리고 사르마티아와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살펴보았다. 거리적으로 먼 사르마티아와 남중국이 교섭할 수 있었던 중간 매체로는 흉노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하여 흉노의 유적에서 남중국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는 금환연접구슬이 발견되는 점을 참고하였다. 남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한 금환연접구슬이나 모자이크구슬이 아프카니스탄의 틸랴 테페 유적에는 없는 반면 같은 초원길로 연결되는 사르마티아 유적이나 흉노의 몽골 유적에서 등장하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는 남중국과 사르마티아, 흉노와의 연결 루트를 상정하게 한다. 한편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심연대인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 초원루트와 남중국을 잇는 교통로로는 운남에서 미안마를 지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 동부로 들어가는 서남실크로드로 판단된다. 1세기 동서교섭의 루트에는 북방 초원 루트, 남해 루트, 오아시스 루트 등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이들 루트들은 운반, 집산되는 물자의 특성이나 당시 정치적 관계에 의해 다양하게 사용되고 형성되었다. 이 글에서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남중국을 잇는 최단거리의 길인 서남루트가 북방 유목민들인 사르마티아인들에 의해 사용되고 개척된 상황을 살펴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