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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ics of Wae Lineage and the Keyhole-Shaped Mounds in the Honam Area

호남지역(湖南地域)의 왜계자료(倭系資料)와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

  • Received : 2018.03.30
  • Accepted : 2018.05.23
  • Published : 2018.06.30

Abstract

From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ism up to the present, the researchers of archaeology and ancient history in Korea and Japan have paid much attention to the Honam area. Recently the ruins and relics of Wae lineage are often discovered at archaeological excavation sites in this region. In particular, at least 17 keyhole-shaped mounds were confirmed. The fact that three mounds were built on one site was newly revealed. Haniwa, a representative earthenware object of the Kofun period in Japan, was discovered as well. Therefore, the study of a historical meaning of archaeological materials about Wae lineage in the Honam area thus far must be reexamined. The ruins and relics of Wae lineage in the Honam area have been studied by selecting only specific cases. I identified all the ruins and relics of Wae lineage in the Honam area and analyzed the process of their change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relationship between Wae and Mahan, and the purpose of their negotiation based on archaeological characteristics, changing processes, and historical records on a quarterly basis. The ruins and relics of Wae lineage have increased and widely spread since the early period of the 5th century in the Honam area. This tendency continued until the late period of the 6th century. Weapons of Wae lineage were introduced and tombs in the style of Wae were built from the late 4th century to the early period of the 5th century (TG232~TK216 period). Sueki was introduced from the middle to late period of the 5th century (TK208~TK23 period). Keyhole-shaped mounds and tombs in the style of Wae were built from the late period of the 5th century to the early period of the 6th century (TK47~MT15 period). Japanese weapons were introduced from the middle to late period of the 6th century (TK10~TK209 period). In other words, the archaeological appearance is different in each quarterly period. There was an intensiv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Baekje and Wae in the TG232~TK216 period. The military might be included in a mission of Wae. The materials of Wae lineage of this period are likely to be related to this. Sueki spread to the inland part of the Honam area in the TK208~TK23 period. This Sueki tends to be excavated on advantageous sites for the accumulation and distribution of supplies. The main characters of the keyhole-shaped mounds are presumed to be a group of traders which were under the control of a certain influence in the north of Kyushu. The keyhole-shaped mounds were abruptly built at some distance from mounds of the leaders in the Honam area. Additionally, there was no special influence base to which the characters of the keyhole-shaped mounds belonged in the surroundings. However, it might have been impossible for the group of traders to build the keyhole-shaped mounds without the support from the residents at all because there was a big difference in the building technology of the keyhole-shaped mounds between Japan and the Honam area. The time of building some keyhole-shaped mounds is the same or almost the same with that of the mounds built for the regional leaders. This proves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residents as well. What do the archaeological materials of Wae lineage which have been used and buried mean over 200 years in the Honam area? Geumgwan Gaya, which had exported iron resources to Japan, perished in the early period of the 5th century. Instead of Gaya, the Honam area might have played an important role to supply the necessary resources to Japan. We assume that the Japanese (Wae) actively worked to acquire various resources focusing on the underground resources in the Honam area.

호남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일 고고 고대사학 연구자 사이에서 항상 큰 관심을 받았던 지역이다. 근래 이 지역에서 왜계 고고자료 발견 사례가 양적 질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와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기존에 13기로 알려졌지만 최근 발견 사례가 17기까지 증가했다. 한 곳에서 3기가 조영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으며, 또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특징짓는 형상식윤(形象埴輪)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는 특정 자료나 특정 유적 유구에 한정된 사례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호남의 모든 왜계 고고자료를 대상으로 수량 고고자료의 종류 출토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변천을 추적하였다. 시기별 특징이나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왜와 마한세력의 관계 의도 동향을 문헌 자료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였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는 5세기 전엽부터 증가 및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며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에는 왜계 무구와 왜계 매장주체부,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5세기 말~6세기 전엽에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 6세기 중엽~7세기 초에는 왜계 무구 석침이 중심을 이루어 시기마다 양상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의 왜계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집중된 백제와 왜의 왕래 기사를 근거로 외교 사절단을 수행했을 무인계층과의 관련성을 상정했다.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토기가 호남 내륙부로 확산되었다. 물자의 집적에 유리한 지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를 북구주(北九州) 제세력에 속한 왜인을 중심으로 한 교역자 집단으로 해석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기본적으로 기존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서 특별한 세력 기반 없이 돌연 출현했다. 그러나 재지인의 협조 없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현지와 호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구축 기술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전방후원형 고분은 재지 수장묘와 동시기 아니면 직후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재지 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왜 제국(諸國)은 새로운 교섭 상대로 호남지역을 선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왜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하)자원이나 물자를 확보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쳐서 사용되고 매장된 호남지역의 왜계 고고자료는 왜인의 다양한 교섭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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