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army records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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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관리기관에서의 비밀기록 관리절차 개선방안 -유관법령 분석을 중심으로- (A study on an Improvement plan of Classified records Management process in Records Center -On the basis of related Act analysis-)

  • 천권주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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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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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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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1999년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급속하게 변화된 기록관리 환경에 부합하도록 현행 법률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로 전면 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에 관한 부분만은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논문에서는 현행 기록관리법령과 유관법령을 고찰하여 기록물관리기관에서 적용할 수 있는 비밀기록관리 제도개선 사항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 정보화계획과 육군의 특수기록관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실무적 접근을 병행하였으며 분석된 결과를 바탕으로 기록물관리기관에서 모범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비밀기록 관리절차를 '이관단계', '보존관리단계', '활용단계'로 구분하여 제언하였다.

일본(日本)에 있어서 기록관리학(記錄管理學)의 발전상황(發展狀況)과 기록관리학(記錄管理學)의 역할(役割) (The Overview on the Introduction and Development of Records Management in Japan : Historical process and roles of the Records Management Society, Japan)

  • 마사야 다카야마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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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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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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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vcrtical filing 개념이 일본에 도입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이것이 사무관리의 기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차대전 후 점령군이 미국식의 문서관리법을 소개했고 filing system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filing 방법은 사무직원에게 필요한 기술로 인식되었다. 사무문서는 양적으로 증가하고 사무관리에 있어 정보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기록관리학의 도입과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사무실에서의 기록관리 개념과 방법을 전파하기 위해 학술연구와 교육체제를 확립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 1989년도에 일본기록관리학회가 설립되었고 1999년도에는 스루가다이대학교에 기록관리학 대학원 과정이 개설되었다. 이들은 일본에 있어 기록관리 연구와 학술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한국 기록관리행정의 변천과 전망 (Records Management and Archives in Korea : Its Development and Prospects)

  • 남효채
    • 한국기록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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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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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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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조선왕조의 기록관리 전통의 맥이 끊어진지 거의 한세기가 지난 1999년도에 한국은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 시행함으로써 기록관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국사 전반에 걸쳐 오백년 간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주요한 업적이며 전세계적으로 귀한 사례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실록이 누대(累代)의 사관들이 저술하고 편찬한 일차자료인 기록물을 수집, 선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기록보존소에서는 중요한 공공기록물이 원형대로 보존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록보존을 위해 중요한 국가 기록물을 평가 선별하는 근대적 기록보존제도를 확립해야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식민지화로 그 기회를 빼앗겼고 우리의 훌륭한 기록보전 전통은 계승되지 못했다. 중앙화된 기록보존제도는 1969년 총무처에 정부기록보존소를 설립함으로써 발전하기 시작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조선왕조의 사고 전통을 계승해서 1984년 부산에 현대적 사고시설을 건축했다. 1998년 정부기록보존소는 대전정부종합청사로 본부를 이전하고 첨단 시청각기록물 서고를 갖추었다. 1996년부터 정부기록보존소는 마이크로필름 보존을 보완하고 수작업 등록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하여 기록물 관리시스템 전산화를 도입했다. 소장 기록물의 디지털화는 이용자에게 디지털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한 주요한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기록보존소는 새로 컴퓨터/서버 시스템을 구입하고 응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이와 병행하여 정부기록보존소는 역사학 및 문헌정보학 배경을 가진 아키비스트들을 증원하여 고도의 전문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인력구조를 크게 혁신하였다. 보존연구직과 전산직 역시 채용되었다. 새로운 기록물관리법은 200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한국의 기록물관리에 있어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이 법은 입법 사법 행정부, 헌법기관, 육해공군, 국가정보원 등 모든 공공기관의 기록물을 규정한다. 범국가적으로 통일된 기록물관리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둘째, 각 기관의 수준별로 공공기록물 관리 기관을 두게 되었다. 중앙기록물관리기관, 국회 및 사법부에 특수기록물관리기관, 대도시 및 도에 지방기록물 관리기관, 공공기관에 자료관 또는 특수자료관, 각 과단위에서는 기록물관리책임자가 기록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셋째, 공공기관의 기록물은 생산시에 컴퓨터에 등록된다. 따라서 인터넷이나 컴퓨터망을 통해 기록물을 쉽게 추적, 검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넷째, 기록관리학 분야에서 전문적 훈련을 받은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배치를 의무화함으로써 기록물의 전문적 관리를 보장하게 된다. 다섯째, 공공기록물의 불법적 처리는 처벌을 받을 수 있는 범죄를 구성한다. 앞으로 공공기록물관리는 한국정부의 '전자정부 추진정책'과 함께 발전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변화가 예상된다. 첫째 공공기관에서는 전자결재 문서 외에 종이문서, 시청각기록물, 간행물 등도 모두 디지털화하여 행정의 효율화 및 생산성을 제고할게 될 것이다. 둘째, 국회는 이미 특수기록관을 설립하였다. 법원과 국가정보원도 뒤를 따를 것이다. 시도 차원에서 더 많은 기록관들이 설립될 것이다. 셋째, 우리 사회가 지식정보사회화 될수록 기록관리기능은 더욱 중요한 국가기능이 될 것이다. 더 많은 대학교, 학회, 시민단체들이 기록보존에 고한 인식제고에 참여하고, 기록보존운동이 범국민적 차원으로 심화될수록 한국의 기록물관리는 현재보다 눈에 띄게 발전할 것이다.

"증언자료의 비판적 활용 - 6.25전쟁 시기 유격대의 경우" ("Critical Application of Witness Commentaries: The Case of Guerrilla Warfare in the Korean War")

  • 조성훈
    • 기록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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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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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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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The anticommunist guerrillas' activities that aretheconcern of this article took place largely in North Korea or behind the enemy-held lines. Verifying their history is accordingly difficult and requires careful attention, but despite their active operations the military as well as the scholarly community have been lax in studying them. The Korean War came to be perceived as a traditional, limited war with regular battles, so that the studies addressed mostly the regular operations, and guerrilla warfare is remembered as an almost 'exclusive property' of the communist invaders; a small wonder that the anticommunist guerrillas have not been studied much and the collection of materials neglected. Therefore, in contrast with the witness accounts concerning regular battles, witness resources were of a small volume about these "patriots without the service numbers." For the above reasons the guerrilla participants and their later-organized fellowships took to the task of leaving records and compiling the histories of their units. They became active preservers of history in order to inform later generations of their works and also to secure deserved benefits from the government, in a world where none recognized their achievements. For instance, 4th Donkey Unit published witness accounts in addition to a unit history, and left video-recordings of guerrilla witnesses before any institute systematized the oral history of the guerrillas. In the case of Kyulsa ("Resolved to Die") Guerrilla Unit, the unit history was 10 times revised and expanded upon for publication, contributing substantially to the recovery of anticommunist guerrilla history which had almost totally lacked documented resources. Now because the guerrilla-related witness accounts were produced through fellowship societies and not individually, it often took the form of 'collective memory.' As a result, though thousands of former guerrillas remain surviving, the scarcity of numerous versions of, or perspectives upon, an event renders difficult an objective approach to the historical truth. Even requests to verify the service of a guerrilla member or to apply for decoration or government benefits for those killed in action, the process is taken care of not at the hands of the first party but the veteran society, so that a variety of opinions are not available for consideration. Moreover, some accounts were taken by American military personnel, and since some historians, unaware of official documents or evaluation of achievements, tended to center the records around their own units and especially to exaggerate the units' performances, they often featured factual errors. Thefollowing is the means to utilize positively the aforementioned type of witness accounts in military history research. It involves the active use of military historical detachments (MHD). As in the examples of those dispatched by the American forces during the Korean War, experts should be dispatched during, and not just after, wartimes. By considering and investigating the differences among various perspectives on the same historical event, even without extra documented resources it is possibleto arrive at theerrors or questionable points of the oral accounts, supplementing the additional accounts. Therefore any time lapses between witness accounts must be kept in consideration. Moreover when the oral accounts come from a group such as participants in the same guerrilla unit or operation, a standardized list of items ought to be put to use. Education in oral history is necessary not just for the training of experts. In America wherethefield sees much activity, it is used not only in college or graduate programs but also in elementary and lifetime educational processes. In comparison in our nation, and especially in historical disciplines, methodological insistence upon documented evidences prevails in the main, and in the fields of nationalist movement or modern history, oral accounts do not receive adequate attention. Like ancient documents and monuments, oral history also needs to be made a regular part of diverse resource materials at our academic institutes for history. Courses in memory and history, such as those in American colleges, are available possibilities.

기억방식을 통해 본 임진왜란의 서사 양상 (Phases of the Discourse Through the Way of Remembe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음영철;박은미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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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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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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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임진왜란을 통해 본 기억의 서사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을 활용하였다. 연구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까지 임진왜란과 이순신 중심의 기억 서사의 주류를 이룬 것은 이순신의 영웅담론이었다. 임진왜란 당대에 씌여진 "징비록"과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에 대한 객관적 묘사와 주관적 묘사가 서사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중심이 되어 서술하였기에 백성과 격군의 겪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반영하지 못한 것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둘째,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창작된 김훈의 "칼의 노래"는 기존의 영웅 담론에서 벗어나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독백의 형식으로 그려내었다. 임진왜란과 백성 중심의 서사는 전란에 참여한 해상의병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에 대한 다른 서사를 보여주었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존의 기억 방식을 수정한 것으로, 수많은 전쟁 장면을 통해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이 백성이고 이순신은 부수적임을 보여주었다. 역사의 진실은 기록된 것만으로는 전부를 알 수 없다. 소설과 영화와 같은 문화 텍스트는 임진왜란의 기억방식을 영웅이 아닌 개인에 두었으며 백성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음을 보여주었다.

조직판막을 이용한 대동맥판막치환술의 중기성적 (Midterm Results of Aortic Valve Replacement Using Tissue Valve)

  • 문덕환;이재원;김윤석;조원철;정성호;주석중;정철현
    • Journal of Chest Surg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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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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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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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배경: 조직판막의 내구성은 심장 판막 수술에서 기계판막과 조직판막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본 연구는 조직판막이 사용된 대동맥판막치환술의 중기성적을 분석해 보았다. 대상 및 방법: 이 연구는 1990년 3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조직판막을 이용하여 대동맥판막치환술을 시행한 380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술 후 평균 관찰 기간은 $46.7{\pm}40.8$월(0~196개월)이었으며 외래 경과 기록과 의무기록을 통하여 후향적으로 분석하였다. 결과: 총 380명의 환자에서 389예의 수술이 시행되었으며 환자들의 평균 연령은 $69{\pm}9$세, 남녀 비는 227 : 162였다. 조기 사망은 15명 (3.9%)이었다. 1년, 5년, 10년 생존율은 92.3%, 78.1%, 54.2%였다. 재수술의 l년, 5년, 10년 회피율(Freedom from reoperation)은 98.4%, 97.1%, 91.7%였으며 구조적 판막 손상 1년, 5년, 10년의 회피율(Freedom from structural valvular deterioration)은 96.1%, 92.3%, 88.0%였다. 수술 전 위험인자의 다변량 분석에서 젊은 나이 (p<0.001)가 재수술의 위험인자였으며 수술 후 판막 부하 최고속도(p=0.034)와 젊은 나이(p=0.029)가 구조적 판막 손상의 위험인자였다. 고령(p=0.001), 장시간의 심폐기사용(long bypass time) (p=0.035), 관상동맥 우회술을 동시에 실시한 경우(concomitant CABG) (p=0.003), 술 전 중등도 이상의 좌심실 기 능부전(Left ventricular ejection fraction, LVEF<40%) (p=0.003)이 조기 사망의 위험인자였으며 술 전 신기능저하(estimated glomerular filtration rate, eGFR<60 mL/min) (p=0.025)와 지속적인 좌심실비대(persistent left ventricular hypertrophy, LVH) (p=0.032)가 만기 사망의 위험인자였다. 결론: 이 연구를 통해 조직판막을 이용한 대동맥판막치환술은 재수술과 구조적 판막 손상 회피율 등의 측면에서 만족할 만하다고 할 수 있으며, 향후 더 많은 환자에서 보다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