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arim f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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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의(儒醫)의 형성과 변화 (A Study about the Emergence and Changes of Confucian doctors in Choseon Dynasty)

  • 김성수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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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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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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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Confucian doctors (儒醫) emerged who either voluntarily or involuntarily studied medical science and participated in clinical practices. This was made possible by a newly established position known as Euiseoseupdokgwan (醫書習讀官), made up of officials who had knowledgeable about medical book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By the 16th century, Confucian doctors who acquired knowledge from medical books began to practice more broadly. Most of the Confucian doctors had either direct or indirect connections with the Sarim faction 士林派, and had interest in practicing medicine in provincial regions. In 1610, Donguibogam (東醫寶鑑) was published, providing the Confucian doctors with solid academic and clinical foundations. From the late 17th century onwards, the medical environment quickly became commercialized and the status of Confucian doctors gradually weakened.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상의 형성과 그 시대적 맥락 - 생애자료에 대한 비교변증을 통해 - (The Meaning of Evaluating Ha-Seo in the Historical Context - Through demonstration based on comparison of materials related to lifetime)

  • 김남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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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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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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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하서 김인후가 사후에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계승하는 존재로 위상이 부여되고 추숭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상화의 과정을 근거로 과거 인물의 생애를 다룬 다양한 자료가 상호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거나 배제하면서 인물형상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하서의 어린 시절 생애는 김인후와 군주 인종의 굳건한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새로이 배치되었다. 김인후는 당시 사림들에게는 깊은 상처이자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던 기묘사림의 복권이라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고, 인종은 기묘사림의 복권을 실현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절개와 충심을 가진 선비로서의 하서의 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조선후기에서는 중앙 조정의 서인과 군주 정조의 주도 하에 하서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졌다. 우선 17세기는 서인들이 김인후의 생애를 다룬 자료들을 다방면으로 수정하고, 김인후의 문집을 교정하여 간행했다. 이것은 당시 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서인계열의 학통 수립, 학문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에 따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계 학자들에 대한 추숭과 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에 이르러 하서는 문묘에 종향되면서, 조선에서 가장 앞선 성리학자이자 해동정학(海東正學)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조가 군왕으로서 정치적으로 한 국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정통의 학문에 대한 책임을 자부하는 사표(師表)로서 자기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

한국유학사에서의 김굉필(金宏弼)의 위상 (Status of Kim Goeng-pil in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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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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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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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은 고려 말엽 정몽주가 단서를 열어놓은 도학을 하나의 학문 경향으로 승화시켰다. 김굉필은 '조선도학의 시조'로 일컬어졌으며, 이후 4백여 년 동안 도학자의 전형으로 받들어졌다. 김굉필이 씨를 뿌린 도학은 학문과 정치의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김굉필을 본받아 "소학"을 통해 근기(根基)를 배양하였고, 그 기운은 선비의 원기(元氣), 나아가 국가의 원기로 승화하여 국맥(國脈)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굉필은 "소학"으로 학문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소학"에서 요구하는 강한 실천성을 바탕으로 도덕적 인간, 도덕적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개인의 수양과 사회 개혁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김굉필이 몸으로 보인 '자기 수양(律己)'의 정신은 조광조(趙光祖)의 단계에 이르러 도학적 이상국가의 추구로 발전하였다. 김굉필은 '경(敬)'을 통해 "소학"의 가르침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이라는 수양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조선 성리학의 요체다. 김굉필은 조선의 유학을 '심학(心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굉필 이전에는 심학의 모습을 제대로 선보인 학자가 없었다. 명종 선조 시기 이후로 조선의 유학은 심학으로 정초되어 갔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경'을 중심으로 한 심학 체계가 공고하게 구축되었다. 김굉필의 문인과 그들이 양성한 학인들은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학계 정계를 이끌었다. 이들은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士林派) 집권의 주인공들이었다. 조선을 도덕적 이상국가로 승화시키고 '사림의 나라'로 만든 그 기초는 사실상 김굉필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정조(正祖)의 사대부(士大夫) 인식(認識)과 그 특징(特徵) (King Jeongjo's recognition on Neo-Confucian literati and it's historical meaning)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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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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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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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정조는 척족이 특권세력으로 발호하던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에서 아버지를 여읜 피해자였다. 노론의 거센 방해공작을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의 목표는 왕권 강화였다. 정조는 탕평정책을 영조 50여년 치세의 대업적으로 칭송하고 척신과 탕평당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신하들에게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국변인(國邊人)'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정조가 즉위 직후부터 설치 운영한 규장각(奎章閣)은 겉으로는 어제(御製)의 봉안 등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우군을 양성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만큼 정조가 외척들을 누르고 어떻게 사대부들을 포섭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본고에서는 정조가 사대부들을 어떻게 굴복시키고 포섭하려 했는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정조가 시도한 왕권강화책의 논리와 방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정조는 경학(經學)의 본질은 성리학이 아니라 실생활과 절실하게 관련된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이념적 근거를 붕괴시키고자 하였다. 정조가 사대부들의 풍기와 세도를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의 의미를 축소했던 것은 사대부들을 왕권에 복속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붕당론이나 성학론을 기본으로 하는 사대부들의 정치 이념과 학문적 근거를 반박함으로써 공론(公論)의 주체로서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려고 하였다. 정조가 영조의 '군사(君師)' 개념을 계승하고 왕호도 '홍재(弘齋)'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바꾼 것은 그의 사대부 비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