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nowledgement
Supported by : 한국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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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udy looked into the process by which Haseo(河西) Kim In-hoo(金麟厚:1510~1560), a neo-confucian scholar of mid Joseon Dynasty, was recognized and adored as an inheritor of traditional academic genealogy of neo-confucianism of Joseon Dynasty. I intended to examine the process of personal embodiment affected or excluded in certain manners by various materials covering the lifetime of bygone persons based on the process of such embodiment. The part related to childhood of Haseo was arranged newly to highlight solid relationship between Kim In-hoo and King Injong(仁宗). That was because Kim In-hoo raised the issue of loyalty and fidelity, one of the most important and most contentious issues at that time, in connection with reinstatement of GimyoSarim(己卯士林, progressive political faction with young officials), and King Injong was the king who reinstated Gimyo Sarim. That played a decisive role in establishing the image of Haseo, a classical scholar with unwavering integrity and loyalty.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canonization of Haseo was made under the leadership of King Jeongjo(正祖) and Seoin(西人) in royal court. In the 17th century, Seoin scholars revised the materials related to lifetime of Kim In-hoo in various way and proofread and published the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by Kim In-hoo. That aimed to establish scholastic system associated with Seoin and legitimacy of study as pursued by Seoin. This made progress with adoration towards scholars affiliated with Seoin, including Yulgok(栗谷) Lee Yi(李珥). Finally, King Jeongjo showed strong intention to take the lead as sovereign in the process while Haseo was canonized into national academy in the 18th century. That came from the desire to solidify his status as a teacher who took pride in taking responsibility for the dynasty's authentic study, as well as the king heading the dynasty politically.
이 논문은 하서 김인후가 사후에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계승하는 존재로 위상이 부여되고 추숭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상화의 과정을 근거로 과거 인물의 생애를 다룬 다양한 자료가 상호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거나 배제하면서 인물형상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하서의 어린 시절 생애는 김인후와 군주 인종의 굳건한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새로이 배치되었다. 김인후는 당시 사림들에게는 깊은 상처이자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던 기묘사림의 복권이라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고, 인종은 기묘사림의 복권을 실현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절개와 충심을 가진 선비로서의 하서의 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조선후기에서는 중앙 조정의 서인과 군주 정조의 주도 하에 하서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졌다. 우선 17세기는 서인들이 김인후의 생애를 다룬 자료들을 다방면으로 수정하고, 김인후의 문집을 교정하여 간행했다. 이것은 당시 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서인계열의 학통 수립, 학문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에 따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계 학자들에 대한 추숭과 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에 이르러 하서는 문묘에 종향되면서, 조선에서 가장 앞선 성리학자이자 해동정학(海東正學)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조가 군왕으로서 정치적으로 한 국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정통의 학문에 대한 책임을 자부하는 사표(師表)로서 자기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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