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Neo-Confucian Scho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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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의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저술 의의 구명(究明) - 주자와 박세당의 장자 인식 비교를 통해서 - (A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Park Se-dang's Composition of the Namhwagyeong Joohaesanbo(南華經註解刪補))

  • 전현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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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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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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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박세당(1629~1703)은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장자" 전편을 주석한 "남화경주해산보"를 저술하고, 말년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받던 인물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조선시대에 주류사상이던 주자학의 집대성자인 주자(1130~1200)와 박세당의 장자 인식의 비교를 통해 17세기 조선에서 "남화경주해산보" 저술이 가지는 의의를 구명(究明)하는 데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이 정통 교학으로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노장(老莊)을 비롯한 여타의 사상은 주자학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박세당의 장자 인식은 주자의 장자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화경주해산보" 저술은 주자의 장자 인식을 계승하여 적극적으로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노론 측에서 사문난적으로 비판할 때에도 "신주도덕경"과 "남화경주해산보"은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에서 벗어나려는, 즉 탈주자학적 시도이다. 박세당은 장자가 유가와 대척점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남화경주해산보"를 통해서 첫째, 장자가 세상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였음을 강조하고, 둘째, 부자(父子)와 군신(君臣) 간의 인륜(人倫) 관계를 중시했음을 증명하여 유가사상과 상통점을 찾고, 셋째, 장자의 인성론(人性論)을 새롭게 조명하여 유가 인성론을 재정립하고, 넷째, 장자사상을 응용하여 분당(分黨)과 예송논쟁(禮訟論爭) 등 소모적인 정쟁(政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박세당이 "신주도덕경"과 "남화경주해산보"를 저술하지만, 이는 보유(補儒)의 일환이고 본령은 유학이다. 그가 탈피하고자 한 것은 주자학의 절대화였지 유학 자체는 아니다. 주자학이 정통 교학이자 지배 이념으로 절대화되고 교조화되던 17세기의 조선에서 박세당의 "남화경주해산보" 저술은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서, 박세당이 주자학에서 벗어나 탈주자학의 선구자로서 정통 주자학자들과 지향점을 달리하여 독자적이고 진보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음을 보여준다.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의 경설(經說)과 그 특징(特徵) (Noju Oh Hui-sang's ConfucianismDoctrine and its Characteristics)

  • 김영호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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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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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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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노주 오희상은 조선후기 순조대에 활약한 유학자로서 당시 산림의 종장이었다. 그는 절충파 성리학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생부 오재순과 백형 오윤상으로 이어지는 가학을 계승하여 경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노주의 경설과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노주 경설의 경학방법론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전체적으로 분석이 정밀하며 경서해석에 있어서 주로 성리설과 관계된 장절을 주석하였다. 둘째, 주자주에 대한 견해는 물론 사서집주대전의 소주(小注)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탐구를 하고 있다. 다만 노주는 주자설의 경우 반대하기 보다는 주자설(朱子說)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는 선에서 경서를 해석했다. 소주의 제가의 견해에 대해서는 찬동 보다는 비판적인 학설을 많이 개진하고 있다. 셋째, 중국 유학자는 물론 우리나라 유학자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이율곡을 비롯하여 남당 한원진의 학설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한원진의 "경의기문록"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넷째, 노주는 선배 유학자설을 인용함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학설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될 경우 과감하게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우암, 율곡은 물론 심지어는 맹자설에 대해서도 그 오류를 낱낱이 변파하고 있다. 다섯째, 특히 "주역"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정자의 "역전"에 대해서는 비판을 주자의 "본의"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주역"의 개략적인 설명이 많고 건괘를 제외하고는 괘를 직접 설명한 것은 적으며 특히 "계사전" 설명이 상세하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파리장서운동과 그 사상적 배경 - 화서학파(華西學派)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Kim Bok-han's Petition Movement to Paris Peace Conference and Its Idealogical Background)

  • 박성순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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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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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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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월에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한 독립청원운동이다. 김복한(金福漢)은 호서본 작성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였다. 여러 판본들을 비교해 보면 호서본은 영남본에 비해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호서유림들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서본의 보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파리장서운동을 기획 실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김복한의 능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고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능동적인 입장에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규명하는 일이다. 특히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유학사상사의 전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김복한의 역사적 위상이 드러나도록 시도하였다. 김복한이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할 때 유림계의 보수세력으로부터 오랑캐와 동사(同事)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김복한의 대국적 태도는 남당학파와 경쟁관계에 있던 화서학파에 대해서, 특히 1903년 '최익현 문제'가 야기된 이후에도 김복한이 최익현에게 보여준 포용적 태도에서부터 두드러져 보였다. 이것이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할 때의 대승적 태도로 연결되었다. 이는 '사공(事功)'을 중시한 김복한의 역사의식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경국제세, 그리고 전쟁관리 (Scholarship, Statecraft, and War Management of Ryu Seongryong)

  • 최연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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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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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7-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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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유교 지식인 류성룡과 정치가 류성룡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유교 지식인의 학문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실천을 지향하고, 역사의 선례와 현장에 대한 치밀한 연구는 정치가의 성패를 좌우한다. 류성룡이 위기에 처한 조선의 실질적인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이론과 현장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성룡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이러한 점들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먼저 류성룡이 주자 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가 정통 주자학자들과는 다른 실용주의적 경세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 결과 임진왜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란을 맞았을 때도 현실주의적 위기 대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 글은 학문과 실천의 균형을 추구한 류성룡의 삶을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돈암서원의 강학 활동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Donam Seowon)

  • 김문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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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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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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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한국 서원의 교육 내용과 방식은 주자가 제시한 교육 내용 및 방식과 대부분 유사하지만, 학파에 따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돈암서원의 초기 원장으로 재임한 이들은 모두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이다. 돈암서원은 같은 노론계 서원이었던 화양서원 석실서원이 기호 지역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서원의 위상과 강학 활동도 약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돈암서원 설립 초기의 학규는 전하지 않는다. 돈암서원의 운영 방식은 돈암서원 운영 전반에 관하여 17세기 후반 원장으로 재임하던 송준길에게 문의한 윤증의 서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서신을 통해 볼 때, 돈암서원의 학규는 이이의 <은병정사학규>와 유사하였다고 추정된다. 18세기 이후 돈암서원의 역대 원장은 노론의 낙론계 학자들로서 권상하 계열보다 김창협 계열의 원장이 많았다. 돈암서원 원장은 화양서원, 석실서원의 원장이 겸임하거나 전후로 재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돈암서원에서 행한 강학 활동은 서원 설립 초기에는 김장생-송시열의 교학체계에 따라 소학${\rightarrow}$가례${\rightarrow}$심경${\rightarrow}$근사록 등 성리서를 우선하고 다음에 사서 오경을 가르쳤다. 점차 노론계 낙론 서원인 석실서원 출신의 학자들이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소학${\rightarrow}$사서${\rightarrow}$오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성리서를 가르치는 이이의 교학체계를 시행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강학 순서는 김창협 계열의 학자들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석실서원의 강학 내용과 순서이다. 돈암서원의 입학 자격은 신분은 중시하지 않았으며, 학문과 인품을 중시했다. 서원에서 과거 공부는 허용되지 않았다. 원생들은 서원에서 거재(居齋)하면서 강학에 참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점차 서원의 재정이나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자기 집에 거가(居家)하면서 삭망에 행하는 강회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한국유학사에서의 김굉필(金宏弼)의 위상 (Status of Kim Goeng-pil in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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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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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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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은 고려 말엽 정몽주가 단서를 열어놓은 도학을 하나의 학문 경향으로 승화시켰다. 김굉필은 '조선도학의 시조'로 일컬어졌으며, 이후 4백여 년 동안 도학자의 전형으로 받들어졌다. 김굉필이 씨를 뿌린 도학은 학문과 정치의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김굉필을 본받아 "소학"을 통해 근기(根基)를 배양하였고, 그 기운은 선비의 원기(元氣), 나아가 국가의 원기로 승화하여 국맥(國脈)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굉필은 "소학"으로 학문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소학"에서 요구하는 강한 실천성을 바탕으로 도덕적 인간, 도덕적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개인의 수양과 사회 개혁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김굉필이 몸으로 보인 '자기 수양(律己)'의 정신은 조광조(趙光祖)의 단계에 이르러 도학적 이상국가의 추구로 발전하였다. 김굉필은 '경(敬)'을 통해 "소학"의 가르침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이라는 수양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조선 성리학의 요체다. 김굉필은 조선의 유학을 '심학(心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굉필 이전에는 심학의 모습을 제대로 선보인 학자가 없었다. 명종 선조 시기 이후로 조선의 유학은 심학으로 정초되어 갔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경'을 중심으로 한 심학 체계가 공고하게 구축되었다. 김굉필의 문인과 그들이 양성한 학인들은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학계 정계를 이끌었다. 이들은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士林派) 집권의 주인공들이었다. 조선을 도덕적 이상국가로 승화시키고 '사림의 나라'로 만든 그 기초는 사실상 김굉필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신구(新舊) 관념의 교차와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 (The Conceptual Intersection between the Old and the New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Traditional Knowledge System)

  • 이행훈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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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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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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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고는 서양 근대 문명 수용 초기(1890~1910)에 발생한 신구 관념의 대립과 충돌을 중심으로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을 역사의미론적으로 탐색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를 성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에서 신구 관념을 놓고 벌어진 주체 간의 투쟁은 전통개신론자들과 문명개화론자들의 주장에서 첨예하게 드러났다. 서양의 충격에서 비롯된 신구 관념의 대립과 충돌은 우주 자연으로부터 사회 정치체제, 학술?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였지만, 전통 지식 체계를 이해하는 시각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신구 관념에 따른 전통 지식 체계의 구축과 변용과정에서 문명개화론자들에게 '구(舊)'는 단순히 과거의 '지나간', '오래된'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제거하지 않으면 새로운 문명 건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전통개신론자들에게 '구(舊)'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이념 속에서 다시 '신(新)'으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함하고 있는 '개신(改新)'의 대상이었다. 박은식의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이나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전통 지식 체계를 '신학(新學)'으로 재편하려한 대표적인 시도였다. 보편성과 객관성,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방법을 수용함으로써 전통 지식 체계는 근대적인 학문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학(新學)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성학(聖學)으로서의 위상은 탈각되었고, 신앙과 종교적 전통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통 지식 체계의 변용과 '구학의 신학화' 과정에서 신구 관념의 교차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특히 신구 관념의 교차를 가능하게 한 '실(實)(학(學))'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전후 발간된 다종의 근대 매체는 신구 관념의 다층적 전개 양상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전통 지식 체계가 신학(新學)으로 변용될 수 있었던 계기로서 '실학'이라는 개념적 준거틀이 작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 실학이 지칭하는 대상은 대체로 서양의 학문인 '신학(新學)'을 표상하고 심지어 등치되기도 했지만, 전통개신론자들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점유하였던 '실학' 개념과 그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전통 지식 체계를 신학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들은 과학 기술에 압도되어 점차로 거세되어가던 전통적 가치를 '신학' 수용의 토대로 인식하고, '실학(實學)'을 개념을 준거로 하여 '신학(新學)'을 재전유(再專有)(re-appropriation)하였다. 일제의 강점이 구체화 되어 전통 지식 체계의 주체적 변용 시도는 일정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구학의 신학화'는 '동도서기(東道西器)' 논리가 지닌 모순과 문명개화론의 탈주체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도덕 원리와 경쟁 원리가 충돌하고 '진화'와 '진보'가 대세인 현실에 대응하려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 논리는 이미 분리될 수 없는 도(道)와 기(器)를 분리 가능한 것으로 상정해야만 성립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고, 문명개화론은 서양을 내면화하여 자기 비하와 멸시로 주체의 균열을 야기하고 전통 지식 체계로부터 단절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의 『중용』 해석 (Toegye(退溪)'s interpretation of Chungyong(中庸))

  • 서세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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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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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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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고에서는 성리학의 조선식 수용의 완성을 이끌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중용(中庸)"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지, 그 해석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 작업이 중점을 두는 것은 "중용"에 대한 독자적인 퇴계의 관점을 밝히는 것보다는 퇴계가 어떤 방식을 통해 주희(朱熹)가 제시한 성리학의 체계에 맞추어 "중용"을 이해해 나갔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본고는 다음의 구성을 갖는다. 먼저 "중용" 이해를 위해 두 가지 연구방향을 설정하였는데, 이 작업은 조선 시대 "중용" 해석의 사례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을 통해 도출되었다. 1) "중용"의 전체 구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와 2) "중용" 본문에 나타나는 주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두 가지 연구 방향이다. 이 연구 방향을 기준으로 퇴계의 "중용" 이해를 분석하였는데, 곧 퇴계의 작업은 전체 구조를 파악함에 있어 "중용장구(中庸章句)" 장절(章節) 구조와 분절 체제를 따르며, "중용"의 주요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 주희의 주석과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의 소주(小註)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연구의 대상과 방법은, "중용석의(中庸釋義)"와 "중용질의(中庸質疑)"의 분석을 통해 구조적 측면에서 "중용장구"의 구조와 분절 체제를 따르고 있음을 살폈고, 이어서 "중용장구"의 의미 단락에 근거하여 각 부분의 주요 개념들에 관한 퇴계의 논의를 살펴 주자주와 소주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맥락 안에서 "중용"을 이해하며, 해석의 다양성을 줄이고 하나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음을 밝혔다.

성재 유중교의 가평 옥계구곡 위치추정 연구 (A Study on an Estimated Location of Seongjae Ryu, Junggyo's Okgye Gugok in GaPyeong-Gun)

  • 강기래;이해주;이현채;김희채;김동필;하성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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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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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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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조선건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성리학의 도입과 그 모태가 되었던 유학은 우리의 생활과 학문, 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이들 학문의 주창자인 공자(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주자(朱子) 등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 여기었다. 그들 중 자기 수행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이는 주자이며, 이(理)와 기(氣)의 발현과 그 관찰을 통한 심성(心性)의 체득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진리의 체득을 위한 수신의 장소와 도구로서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을 택하였고, 이러한 존주자(尊朱子), 학주자(學朱子)의 신념이 조선유학자들의 기본적 사상과 실천 철학이 되었고, 위정척사파의 유중교도 옥계구곡을 명명하고 경영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으로 조선후기 유학자인 유중교가 설정한 옥계구곡의 위치를 비정하기 위한 본 연구는 옥계구곡의 위치 비정을 위한 기본적인 텍스트인 성재 유중교의 "가릉군옥계산수기(嘉陵郡玉溪山水記)"를 기본으로 하여 그 장소 추정을 위한 기본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옥계구곡 현장을 10회 답사하여 그 위치를 추정하였으며, 검증을 위해 옥계구곡에서 태어나고 자란 원주민 3인에게각각 그 위치를 탐문 하여 추정하였다. 연구로 비정된 각 곡의 위치는 공간정보자료로서 좌표와 사진을 취득하였으며, 이러한 자료는 향후 옥계구곡의 스토리텔링이나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경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옥계구곡의 곡(曲)을 지정하는데 기초적 자료가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대순사상의 역학적 조명 - 종지(宗旨)를 중심으로 - (Daesoon Thought Explained Through the Philosophy of the Book of Change)

  • 최영진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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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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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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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e Four Tenets of Daesoon thought are the Creative conjunction of the virtues of Eum and Yang, the Harmonious union of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for the mutual beneficence of all life and the Realization of the Dao in the world. This article compares the concepts of the "Creative conjunction of the virtues of Eum and Yang", the "Harmonious union of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and the "Resolution of grievances for the mutual beneficence of all life" with "EumYangDaeDaeRon", "ShinMyonKiDeok", the Theory of Mutual Giving Life / Mutual Destruction (SangSaeng/SangGeukRon) of the Book of Changes and analyzes their common and different points. The conclusion is that Daesoon thought and the philosophy of the Book of Changes share common fundamental standpoints. However, the Daesoon thought defines the world of SeonCheon (the state before the Heaven and Earth have been created) as Mutual Giving Life (SangSaeng), and the world of HuCheon (the state after the Heaven and Earth have been created) as Mutual Destruction (SangGeuk). According to Daesoon thought the Mutual Destruction (SangGeuk) is seen as negative, while according to the philosophy of the Book of Changes the Theory of Mutual Giving Live/Mutual Destruction (SangSaeng/SangGeukRon) is viewed as a positive relationship of EumYangDaeDae. This is a point of difference between the Daesoon thought and the philosophy of the Book of Changes. According to EumYangDaeDae relationship theory the contradictory "other" is viewed not as an enemy, but as a necessary element that assures one's existence. When Buddhism and Christianity first came to existence, they did not belong to a main stream. Later, through continuous theorization and systematization they became generally accepted religions. The case of Confucianism was not much different. During Song dynasty in China Buddhism has contributed to the systematization and establishment of Neo-Confucianism; in the middle of 20th century the Confucian scholars of Hong Kong and Taiwan interpreted and defined Confucianism a new in the light of Western philosophy. Thus the "Modern Neo-Confucianism" came to existence. That's why the history of Confucianism is also called "the history of advancing and developing a concep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critical acceptance of some elements of Confucian, Buddhist, Taoist etc. traditions, as well as modern philosophy, by Daesoon, in order to achieve the systematization of Daesoon thought, is a very important process. As a part of this process, this essay explains the Daesoon though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Book of Changes, which may be said to present the original East-Asian view of the world. Daesoon's emphasis of human dignity, the equality of sexes, the critics the hierarchical society etc. are rather "modern" and should be examined from the point of view of social science. Besides, leaving the boundaries of "modern philosophy", the concepts of "Harmonious union of divine beings and human beings", viewing the universe as one organism etc. should be approached from the point of view of Post-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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