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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고 제도에 대한 몇 가지 쟁점: 기원과 운영, 기능.제도의 변천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hinmoongo System: Issues of the Origin and Changes of Function and Institution)

  • 김영주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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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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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0-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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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논문의 목적은 조선시대 '청원 상소 고발의 최후 수단'으로 알려진 신문고 제도의 기원, 기능과 운영의 변천, 그리고 대체기능을 수행했던 격쟁 제도의 배경과 그 부침에 대해 몇 가지 쟁점 중심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조선시대 군주와 신하들은 신문고 제도의 기원을 이론적 차원에서 하은주 삼대(三代)에 설치되었다는 '감간지고(敢諫之鼓)'로 보았지만, 실천적 차원에서 주자(朱子)가 활동했던 송나라의 태조가 설치하였다는 등문고(登聞鼓)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후한 때 이미 '간고'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위진남북조 시대의 진조(晉朝)부터 시작하여 당 송을 거쳐 명 청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등문고'를 설치 운영한 것이다. 신문고 제도는 태종 때 개인적 상소사건 사회적 청원사건 국가적 고발사건 등을 다양하게 상달하는 '언론제도'였지만, 세종 2년부터 개인적 원억문제를 주로 해결하는 '사법제도'로 전락하였다. 원래의 설치 목적은 '억울한 일이 있으나 고할 데 없는 일반백성'들에게 그들의 하정을 상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건국 초기 무질서한 가전상언(駕前上言)이나 월소직정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일부 사대부 계급들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하고 관찰사나 수령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신문고 제도는, 수도의 궁궐에 위치하고 여러 단계마다 각각 글로 올려야 되며, 위법 격고자에 대한 처벌도 과중하고 신분제 아래에서 상관에 관계되면 신문고 사용이 통제되는 까닭에 일반 백성들이나 천민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고 제도의 폐지 후 탄생한 격쟁 제도는 중국에 없는 우리나라 고유한 언로양식으로, 세조 14년에 '불법 관리에 대한 고소'가 허용되자 관사의 노복들이 내부 고발자가 되어 고소활동의 한 방편으로 마련되었다. 격쟁 제도의 설립 초기는 개인적 원억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결국 신문고 제도의 대안적 장치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신문고 제도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합법적 언론제도뿐만 아니라 비합법적 반(半)합법적 언론제도 예컨대, 통문(通文)이나 격문(檄文), 등장(等狀), 격쟁(擊錚), 가전상언(駕前上言), 규혼, 익명서(匿名書) 등과 함께 적절하게 연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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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월미도유원지를 통한 행락 문화의 수용과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Adaptation and Change of Amusement Culture on the Case of Wolmido Pleasure Groun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김정은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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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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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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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일제강점기 도입된 유원지는 새로운 행락활동이 조직되는 장이었으며, 대규모 사적 공간인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으로 발전해갔다. 이에 본 연구에서 당시 대표적 유원지였던 월미도유원지를 통해 유원지의 경관과 수용, 행락 문화의 변화를 고찰해 보았다. 당시 월미도는 수목과 어우러진 이국적 건물, 해수욕장, 임해학교, 공설운동장, 동물원 등 서구 및 일본 유원지의 요소들이 섬 곳곳에 배치되어 종합적인 오락/놀이 공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과 경인선으로 연결되었던 월미도유원지는 당시 대표적 행락지로 떠오르면서, 행락 문화의 대중화와 상품화 과정을 보여준다. 행락의 대중화 과정을 보면, 유원지를 통해 수려한 풍경을 찾아 여가를 즐기는 행락 활동이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철폐되고, 유원지의 이용은 비용만 지불하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었고, 그 이용요금도 다양하였으므로, 유원지에서의 행락은 남녀노소, 조선인과 일본인 등 계층의 구분이 점차 사라져갔다. 또한 유원지는 서구적인 취미-스포츠 활동이 펼쳐지는 공간이었으며, 여름학교와 각종 운동경기가 열리면서 집단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보편화하는 매개가 된다. 동시에, 유흥시설과 복합되어 기존의 사회적 규범에서 일탈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행락의 상품화는 인위적 환경 속 인공적 오락문화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첫째, 인위적으로 경관을 조성하고, 이를 매개로 '매혹적인 여름 휴양지', '물나라' 등 낙원이라는 장소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관광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고, 지역개발을 꾀하려는 식민당국과 철도회사, 유원회사의 의도가 결합한 결과이다. 둘째,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위적인 스펙터클을 조성한다. 월미도 유원지에는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조합되어 선진화되고, 이국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특히 방파제나 아케이드 등의 인공물들은 자연과 군중을 새로운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여 새로운 볼거리를 창출했다. 셋째, 유원지는 주어진 용도와 이용방법을 벗어남 없이 따르는 수동적인 이용자를 등장시켰다. 이처럼 유원지가 역동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조성되면서 현재 관광 단지나 놀이공원, 테마파크 등의 대중적 오락 공간의 원형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황복사지(皇福寺址) 동편 폐고분지(廢古墳址)의 성격 (Analysis of Characteristics of the Abandoned Tumulus Site Located at the East Side of the Silla Era Hwang Bok Sa (皇福寺) Site)

  • 장호진;강량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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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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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8-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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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이 글에서는 신라 황복사지(皇福寺址) 동편 폐고분지(廢古墳址)의 성격에 대한 기존의 제설(諸說)을 검토하고 최근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고고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고찰 결과 다음과 같은 연구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신라 황복사지 동편 논 경작지 지면에 노출되어 있었던 원형의 거석(巨石)들은 발굴조사 결과 모두 전면(前面)이 호형(弧形)으로 가공된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이었다. 이 왕릉의 호석들은 대부분 후대 경작으로 인해 원위치에서 이탈되어 있었고, 일부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건물의 담장이나 기단 등의 건축부재로 재활용된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라의 계세관념(繼世觀念)과 골품체제(骨品體制) 및 왕실의 권위를 감안할 때 인위적으로 능묘(陵墓)를 파괴한 후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왕릉의 석재는 당시 왕의 능원(陵園)이 조영되던 중 어떠한 이유로 인해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오다가 후대에 자연스럽게 건물지의 부재로 재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구황동(九黃洞)왕릉지 탱석(撑石)의 규모와 암질(岩質)을 비교·분석한 결과 능지탑지(陵只塔址)에 복원되어 있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탱석들과 동일한 왕릉의 호석이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황복사지 십이지신상 호석은 또 다른 왕릉의 호석이라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황복사지 십이지신상 호석이 구황동왕릉지에서 옮겨왔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학계의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셋째, 호석의 구조와 능묘 형식으로 본 구황동왕릉지의 피장자(被葬者)는 흥덕왕보다는 늦고, 전(傳)경덕왕릉의 피장자와는 비슷하며, 전(傳)김유신묘의 피장자보다는 앞선 시기의 왕 중에서 찾아진다. 또한 능지탑지로 옮겨진 십이지신상 탱석의 미술사적 형식을 감안해 보더라도 구황동왕릉지의 피장자는 9세기대의 신라 하대 왕 중에서 비정되는 것이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조성 배경 (A Study on the Background of the Rock-cut Sculpture of Two Buddhas Seated Side-by-Side in Wonpung-ri, Goesan)

  • 정성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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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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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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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괴산 원풍리 마애불병좌상은 보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는 초대형 마애불이다. 이불병좌상은 발해에서 동경용원부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불상이나 신라나 고려에서는 조성 사례가 매우 희박하다. 본문에서는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조성 시기를 10세기 후반기인 광종 집권기로 파악할 수 있었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이 소백산맥을 넘는 주요 교통로 입구에 조성된 이유는 진천과 청주 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진천과 청주는 광종에 앞서 재위하였던 고려 2대, 3대 왕인 혜종과 정종의 처가 세력들의 세거지였다. 이들은 광종이 가장 경계했던 호족들이었다. 마애이불병 좌상의 제작에는 중앙 정부의 후원 하에 충주와 문경 지역 장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문경 지역 장인들의 경우 발해 유민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의 제작에 발해 유민들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은 마애불이 발해에서 유행하였던 이불병좌상인 점, 협시보살 보관의 특징이 발해적 요소가 확인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각연사 비로자나불좌상 광배 후면의 불패형 불탑이 발해적 요소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고려시대 발해 왕실 후예로 추정되는 대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개 태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태씨들의 집단 거주지가 문경이라는 점을 통해 발해 유민들이 고려초 문경에 정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북부와 충청도 중부 지역을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 권위는 한 때 광종에 대항하여 권력 투쟁을 벌였던 진천과 청주의 호족 세력들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거대한 이불병좌상을 주요 교통로에 조성한 이유는 후삼국 시기 이후 고려에 내투한 수만의 발해 사람들이 광종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 또한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10세기 후반 경 광종대의 시대적 상황과 조각사의 흐름이 잘 반영되어 있는 의미 있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정규 과학영재학교, 교육청 영재교육원, 일반 중.고등학교 과학교사의 과학영재교육에 대한 인식 비교 연구 (Comparison of Perception on the Korean Gifted Education in Science among the Science Teachers of Formal Schools for the Gifted in Science, District Institutes for the Gifted Education, and General Secondary Schools)

  • 황정훈;김영민
    • 영재교육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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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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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7-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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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연구에서는 전반적으로 과학교사들이 과학영재교육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탐색하고, 정규 과학영재학교 소속 과학교사, 교육청 영재교육원 소속 과학교사, 및 일반 중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과학영재교육을 담당하지 않는 과학교사들 간에 과학영재교육에 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은 한국과학영재학교, 과학고등학교, 중고등학교 과학교사들이었으며, 층 266명 과학교사의 설문 응답지를 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 일반학교 교사의 13%가 과학영재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과학영재교육 관련 연수기관으로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원을 선호하는 비율이 60%를 넘고 대학 부설 연수 기관, 부산광역시 영재교육연수원, 교육청 연수원 등에 대한 선호도는 모두 2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과학영재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 대해서도 정규 과학영재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과학교사, 교육청 영재교육원 출장 교사는 각각 자신들이 속한 기관의 교사들이 담당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인식하고 있고, 과학 계열 교수 및 연구원이 담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20% 정도에 그치고 있다. 과학영재교육은 과학영재교육 전문기관에서 담당하는 것이 좋다고 대부분 과학교사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과학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상자 비율에 대해서도 70% 이상의 과학교사들이 3% 이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비율도 집단 간에 차이가 있어서 일반학교 과학교사들은 반 수 정도가 1% 이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항보안요원의 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Study on Legal Position of Aviation Security Subject in Aviation Safety and Security)

  • 황호원
    • 항공우주정책ㆍ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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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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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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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항공보안검색 활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를 일선에서 담당하는 우리나라 항공보안요원의 법적 체계가 갖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개선 안을 고찰하기 위하여 국제민간항공기구의 규정과 관행을 검토하고 일부 선진국의 항공보안체계를 고려하여 우리나라의 현행법 및 규제체제나 보안활동 수행 체계가 갖는 문제점을 파악하는데에 주력하고 이에 따른 일부 개선 안을 고려해 보았다. 즉, 현재 특수경비원 신분인 공항검색요원의 신분을 일반경비원으로 변경하여 보다 효율적인 운영을 꾀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는 우선 현행법에 의하면 항공보안업무에 대한 감독 기능은 공항운영자가 담당하도록 되어있는 한편, 실제적 보안업무인 항공여객 및 수하물 검색과 경비업무 등은 보안전문업체가 위탁 받아 수행한다. 따라서 현장에서 보안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말단 근무자는 아웃소싱한 보안전문업체 소속직원이고 감독자는 공항공사 직원으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들이 특수경비원 신분으로 말미암아 경찰의 지휘를 받게 되어 지휘계통이 이원화되는 불합리한 제도가 법적 미비로 실현되고 있다. 또한 항공보안요원이라 함은 항공안전및보안에관한법률 제 2조 6호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의미를 항공기안의 질서 및 안전을 해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직무를 담당하는 자로 국한하고 있다. 그러기에 공항보안요원이란 개념이 현재 법안에 규정되어 있지 않고 단지 공항운영자를 공항검색의 주체로 표현하고 있기에 제 2조 8호의 "보안검색"이란 불법방해 행위를 히는데 사용될 수 있는 무기 또는 폭발물 등 위험성이 있는 물건들을 탐지 및 수색하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라는 규정에다가 이를 수행하는 자는 보안검색요원 이라하며 이는 일반경비원으로 보한다라는 개정안을 제시하는 바이다. 나아가 "사법경찰관리의직무를행할자와그직무범위에관한법률"에 공항검색요원 및 보안검색감독자를 제 7조 3항을 신설하여 추가 규정하는 방안을 제안하는 바이다. 형사소송법상 수사란 범죄혐의의 유무를 명백히 하여 공소를 제기, 유지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범인을 발견, 확보하고 증거를 수집, 보전하는 수사기관의 활동을 말한다. 이는 원칙적으로 검사와 사법경찰관리가 담당한다. 그러나 특수 분야의 수사를 담당하는 사법경찰관리가 실제 운영상 필요하며 이는 형사소송법제 197조에 의하면 특수사법경찰관리라 하여 삼림, 해사, 전매, 세무, 군수사기관 기타 특별한 사항에 관하여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자와 그 직무의 범위는 법률로써 정한다는 규정에 힘입어 "사법경찰관리의직무를 행할자와그직무범위에 관한법률"이 제정되어 그 직무를 행하는 자와 직무의 범위를 법률로 정하고 있다. 이 법 제 7조 2항에 의하면 "항공기내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관하여는 기장과 승무원이 제 1항의 규정에 준하여 사법경찰관 및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본인은 공항보안요원 및 검색감독자에게도 이의 권한을 주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즉 제 7조 3항을 신설하여 "공항에서 보안검색을 행하는 자 및 이의 감독자에게도 제 1항의 규정에 준하여 사법경찰관 및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권한을 부여 한다"는 규정을 추가하기를 제안한다. 는 방안을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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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江原道) 화전정리사업(火田整理事業)에 대(對)한 소고(小考) (A Study on the Resettlement Policy for the Hwajeon-Farmers of Illegal Reclamation in Gangweon-do)

  • 김동수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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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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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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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강원도(江原道)는 전도면적(全道面積)의 8할(割)이 산림(山林)으로 점(占)하고 있어 화전정리(火田整理)도 타도(他道)에 비(比)하여 가장 많이 분포(分布)되고 있어 이로 인(因)한 산림피해(山林被害)가 막심(莫甚)함으로 65년(年)부터 7개년계획(個年計劃)으로 화전정리사업(火田整理事業)에 착수(着手)하였으나 69년(年)부터 국가안보적(國家安保的)인 정세변동(情勢變動)에 따라 산간택지(山間僻地)의 독가촌저리사업(獨家村整理事業)이 시급(時急)을 요(要)하게 되어 중단(中斷)되었다. 그 후(後) 새로운 화전모경자(火田冒耕者)가 증가(增加)하게 되어 산림피해(山林被害)는 날로 심(甚)하여 짐으로 73년(年)부터 4개년계획(個年計劃)으로 화전정리사업(火田整理事業)을 완수(完遂)할 목표하(目標下)에 도행정력(道行政力)을 총동원(總動員)하여 목하추진중(目下推進中)에 있다. 본사업(本事業)의 성패(成敗)는 화전정리(火田整理)로 생활기반(生活基盤)을 잃고 평지(平地)로 이주(移住)하게 되는 화전민(火田民)에 대(對)한 다음의 문제점(問題點) 해결여부(解決如何)에 달려있다고 본다. 1) 자립(自立)할 때까지의 최소한(最小限)의 생활대책(生活對策)이 보장(保障)되어야 한다. 2) 취로취업(就勞就業)으로 생활기반(生活基盤)이 확립(確立)되어야 한다. 3) 공공기관(公共機關)은 물론(勿論) 민간기업사업장(民間企業事業場)에서 화전민(火田民)을 우선적(的)으로 취로(就勞)시키도록 하여야 한다. 4) 새마을사업(事業)과 연결(連結)된 자조근로사업(自助勤勞事業)을 확장(擴張)시켜 치로(就勞)의 기회(機會)를 주어야 한다. 5) 화전민자신(火田民自身)이 자조(自助) 자립정신(自立精神)이 고취(鼓吹)되어야 한다. 6) 도민(道民)은 이주화전민(移住火田民)에 대(對)한 동포애(同胞愛)를 발군(發揮)하여야 한다. 7) 요소요소(要所要所)에 배치(配置)된 화전방지감시초소(火田防止監視哨所)의 기능(機能)을 강화(强化)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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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공포도 형식의 분류체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Classification System for Gong-Po-Do Style in Tomb Wall Paintings of Koguryo)

  • 황세옥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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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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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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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우리나라 공포양식(?包樣式)의 초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공포도(?包圖)를 북방 주변 국가와의 문화적 교류와 천도(遷都)에 따른 지역 시기 형상별로 고찰하고 유형별로 체계화 정립을 주 내용으로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공포는 지상에서의 묘주가 통치자로서 군사 행정 정치 사회적으로 누렸던 지위나 신분에 따른 옥사(屋舍)의 제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묘주 생전 지상가옥의 공포형태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이며, 지상에서의 실제 공포 출현시기는 고분 축조 편년보다 최소한 1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고구려 지상에서의 공포출현시기와 관련하여, 공포가 묘사된 중국 동한기(東漢期) 고분(古墳) 내 가형명기(家形明器)와 화상석(?像石) 화상전(畵像塼)의 제작시기와도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에서도 추정을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 결과, 고분벽화에 묘사된 공포도는 비포작계, 준포작계, 포작계로 대별되고, 포작계는 비출목형과 출목형으로 세분하였다. 또한 고구려 공포는 한(漢) 이후 같은 동이족인 북위(北魏)로부터 유입되었으며, 고구려 풍토와 정서에 맞도록 토착화되어 고유한 고구려 형식의 공포체계로 발전 확립되었다. 고구려 멸망(668) 이후 이러한 기법은 문화적 교류 및 망명인들에 의해 주변국에서 그 맥을 이어갔다.

조선왕실의 낙산사(洛山寺) 중창과 후원 (The Rebuilding and Patronage of Naksansa Temple in Joseon Royal Famil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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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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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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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낙산사는 익조(翼祖)인 이행리(李行里)가 관음굴에서 후사점지를 기원하여 도조(度祖)를 낳게 해준 사찰이었다. "태조실록" 등에 도조는 조선개창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로 기록된다. 낙산사는 창건 이래 관음신앙의 본산으로 그 명성이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도조의 잉태로 조선의 창업과 관련있는 사찰로 주목받았다. 도조의 낙산사 관음굴 기복잉태설은 조선후기까지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이성계(李成桂)도 낙산사에 관심을 보였고, 세조(世祖)가 강원도 순행(巡幸) 시 예종의 원찰로 중창하였다. 낙산사는 세조가 왕권강화 등을 위해 불교적 상서(祥瑞)와 이에 따른 사찰의 중창 등을 집중적으로 시행하던 시기에 중창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달리 낙산사 중창은 세조가 자식 예종의 무병장수 기원을 위한 신앙심의 발현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세조의 낙산사 중창의지는 매우 강했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국가의 전폭적 후원을 받으며 중창되었다. 낙산사 중창비용은 국가에서 모두 충당하는 것으로 표면화하고 추진하였으나, 워낙 큰 공역이었으므로 중창에 필요한 물자와 비용조달에 따른 지역의 피해는 매우 컸다. 조선왕실에서는 낙산사 중창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감동승(監董僧) 학열(學悅) 또한 비호해 주었다. 낙산사는 중창직후 왕실의 지원으로 사세가 더욱 번창하였다. 예종과 성종은 전지(田地)와 노비 등을 낙산사에 하사하고, 강원도에서 공납하던 소금을 사급(賜給)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낙산사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낙산사 인근 양양대로를 폐지하고, 새 길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낙산사 해안 십리의 구역에 포어(捕漁)를 금지하는 금표를 세워 민간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낙산사는 조선후기에 들어 크게 쇠락했으나 왕실의 원당보호정책 속에서 후원이 지속되었고, 원당으로서의 명맥과 사세를 유지해 나갔다.

북송 동경 변량성의 조영과 특징 (The characteristics of capital city plan of the BianLieng palace, the Dongjing Walled Town (東京城), the Northern song Dynasty)

  • Dashu, Qin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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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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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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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송대는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를 통틀어 중국 역사상의 중요한 전환기이며, 정치제도와 경제체제, 사상의식과 문화특징 등 모든 면에서 중요한 변혁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 당대(唐代) 후기에 시작되어 북송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그 발전이 비교적 긴 과정을 거쳤지만, 그 변화는 거대하고도 본질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각 분야의 제도에 비교적 강력하게 나타났으며, 그 가운데 도성의 조직체계와 특징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송대 정치제도 변화의 핵심은 동한(東漢) 이래 형성된 사족문벌제도(士族門閥制度)가 철저하게 붕괴되고 황제를 중심으로 긴밀하고 완벽한 관료체제가 형성되었다는 것으로, 송대는 고도로 집중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다. 이는 대략 재상(宰相)집단의 형성, 중앙정권의 권력분화, 황제의 지방통제 강화, 관리선출과 과거제도의 개선 등의 내용을 포괄한다. 이로부터 황제는 전 분야에 뻗치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각종 제도의 제정은 황제의 권력과 지위 강화라는 목적으로 직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동시에 송대는 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시기로, 농촌에서는 조전제(租田制)를 핵심으로 하는 생산구조가 형성되어 농업발전이 극대화되었고, 만당(晩唐) 시기부터 농업과 수공업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상품경제의 발전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상업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크게 향상되고 나아가 도시경제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치제도의 변화와 경제적 발전이 각종 도시제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80년대 초기 이후로 북송 동경 변량성(東京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에 대해 진행된 고고학적 작업을 정리하고, 또한 그 성과에 근거하여 북송 동경 변량성의 특징을 간략하게 종합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