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Naksansa Temple was famous for a miracle temple where Lee Haeng-ri(李行里), King Ikjo(翼祖), had prayed for offspring and soon begat King Dojo(度祖). According to the First King's Annals("太祖實錄"), King Dojo was the person who directly received prophecy of founding a Joseon. For these reasons, Naksansa Temple received attention concerning the foundation of Joseon. The birth story of King Dojo and his father's prayer at the Avalokitesvara Bodhisattva cave(觀音窟), Naksansa Temple, was well known among the noblemen and royal families until the Late Joseon period. Lee Seoung gye(李成桂) paid particular attention to the Naksansa Temple, and King Sejo(世祖) also made people rebuild the temple when he went for a royal tour in Gangwon-do. Naksansa Temple was built during the time when King Sejo made many temples in order to strengthen the royal authority. King Sejo made people extensively rebuild the temple, praying for health and longevity of King Yejong(his son). King Sejo's will of rebuilding the Naksansa Temple was very strong. The residents of the area had to pay a huge cost because the rebuilding of the Naksansa Temple was a big construction. Hak-yeol(學悅), who had a responsibility of rebuilding the Naksansa Temple, forcedly obtained supplies as he received protection from the royal family. Naksansa Temple thrived with the protection of the royal family after rebuilding. King Yejong and Seongjong gave Naksansa Temple slaves and fields(田地). He also bestowed upon the temple the salts which was the tribute paid by Gangwon-do. In order to protect the precincts of the Naksansa Temple, the government closed the Yang Yang Main Street near Naksansa Temple and built a new road. And the signs of preventing fishing(捕漁) was built along the coast of Naksan in four kilometers in order to keep people out. Although the Naksansa Temple declined in the late Joseon period, it still received support under the protection policy and maintained its reputation as an original Buddhist shrine.
낙산사는 익조(翼祖)인 이행리(李行里)가 관음굴에서 후사점지를 기원하여 도조(度祖)를 낳게 해준 사찰이었다. "태조실록" 등에 도조는 조선개창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받은 인물로 기록된다. 낙산사는 창건 이래 관음신앙의 본산으로 그 명성이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도조의 잉태로 조선의 창업과 관련있는 사찰로 주목받았다. 도조의 낙산사 관음굴 기복잉태설은 조선후기까지 왕실과 사대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이성계(李成桂)도 낙산사에 관심을 보였고, 세조(世祖)가 강원도 순행(巡幸) 시 예종의 원찰로 중창하였다. 낙산사는 세조가 왕권강화 등을 위해 불교적 상서(祥瑞)와 이에 따른 사찰의 중창 등을 집중적으로 시행하던 시기에 중창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달리 낙산사 중창은 세조가 자식 예종의 무병장수 기원을 위한 신앙심의 발현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세조의 낙산사 중창의지는 매우 강했다. 그러므로 낙산사는 국가의 전폭적 후원을 받으며 중창되었다. 낙산사 중창비용은 국가에서 모두 충당하는 것으로 표면화하고 추진하였으나, 워낙 큰 공역이었으므로 중창에 필요한 물자와 비용조달에 따른 지역의 피해는 매우 컸다. 조선왕실에서는 낙산사 중창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감동승(監董僧) 학열(學悅) 또한 비호해 주었다. 낙산사는 중창직후 왕실의 지원으로 사세가 더욱 번창하였다. 예종과 성종은 전지(田地)와 노비 등을 낙산사에 하사하고, 강원도에서 공납하던 소금을 사급(賜給)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낙산사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낙산사 인근 양양대로를 폐지하고, 새 길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낙산사 해안 십리의 구역에 포어(捕漁)를 금지하는 금표를 세워 민간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낙산사는 조선후기에 들어 크게 쇠락했으나 왕실의 원당보호정책 속에서 후원이 지속되었고, 원당으로서의 명맥과 사세를 유지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