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King S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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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고사의 시각화 - 기기도(欹器圖) 연구 (The Tilting Vessels: Visualizing Anecdotes from the Life of Confucius)

  • 송희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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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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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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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춘추전국시대에 활동한 공자는 수많은 어록을 남기면서 제자를 양성한 교육자이며 한중일 지식인의 존경을 받아 온 대표적인 성현이다. 공자의 행적 및 제자와 경험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그림과 조각 등으로 다양하게 시각화되었다. 특히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가 노나라 환공의 묘에서 기기(?器)를 발견하고 중용의 원리를 터득하여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다는 일화는 조선 왕실을 비롯한 문인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이 일화를 담은 기기도는 그릇만 표현한 정물화와, 공자가 기기를 관찰하는 사건을 그린 인물화로 분류된다. 전자는 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리고 행동거지를 바로하기 위한 중용의 척도로, 후자는 공자의 일생을 표현한 성적도에 포함되어 교육용 시각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공자가 기기를 관찰하는 장면은 단독 장르로 독립하거나 인물화 병풍에 수록되었다. 공자의 다른 일화가 도(道)의 계보를 시각화 한 화첩에 포함된 반면, 공자가 기기를 관찰하는 장면은 풍류와 서화 골동 감상을 즐기는 문인들을 그려 모은 병풍에 포함된 것이다. 이렇듯 기기도는 공자의 일화를 그린 인물화의 기능과 상징성을 여러 각도로 알려주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기기도의 형식을 분류하고, 시대와 목적에 따라 변화하는 조형성을 분석하여 공자의 일화를 그린 그림들의 다양한 면모를 규명하고자 하는 이 글을 통해 옛 성현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방법과 감상 코드에 따른 표현상의 차이가 파악될 것이다.

웹기반 정간보 사보 프로그램 설계 (Designing a Web-Based Jeongganbo Notation Program)

  • 심인섭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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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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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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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최근 문화의 세계화와 K-컬처의 세계적인 유행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알릴 수 있는 좋은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음악에는 세종대왕이 개발한 정간보라는 우수한 기보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기보법의 보편성으로 점차 사용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 이후 초등 음악교육에서 정간보의 소개와 활용 비중이 늘어나고 있고, 이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 기보법을 다시금 보편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반면 기보법의 해석에 관한 연습 이외에 정간보 사보의 실습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다양한 도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본 연구는 설치나 다운로드가 없이 웹에서 정간보를 사보할 수 있는 웹 프로그램에 대한 설계를 연구하였다. 또한 정간보를 사보하는 과정에 사용자의 편의성을 증대하기 위해 자판을 건반처럼 활용하여 입력하는 방안과 입력된 음악 정보를 MIDI 기능을 통해 청취하고 파일로 저장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계하고 제안한다. 본 연구를 통해 누구나 쉽고 간단히 접근하여 실습하고 사보할 수 있는 웹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으며, 이는 향후 국악의 기보 실습 혹은 전통음악 사보에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우주환경 자료 보유 현황: 전리권/고층대기 (Ionospheric and Upper Atmospheric Observations in Korea)

  • 이창섭;이우경;한국우주과학회 태양우주환경분과
    • 우주기술과 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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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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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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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한국우주과학회 태양우주환경분과에서는 국내 우주환경 관측 자료 활용도를 높이고, 분야 간 융합 연구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국내 연구소와 대학에서 활용 중인 태양, 자기권, 전리권/고층대기 자료 현황을 조사하였다. 자료는 관측 방식에 따라 지상과 위성 자료로 분류하였고, 개발 또는 활용 중인 모델 정보도 포함한다. 이 논문에서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극지연구소와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전리권/고층대기관측기 현황과 자료 설명 및 활용 방법 등을 소개한다. 극지연구소에서는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와 세종과학기지, 그리고 북극 다산과학기지에 전천 카메라, 페브리-페로 간섭계, 이오노존데 등을 설치해 운영 중이다. 한국천문연구원은 보현산천문대 전천카메라와 충남 계룡대 VHF(Very High Frequency)/유성 레이더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 40여 개 GNSS(Global Navigation Satellite System) 관측소에서 수집한 자료를 사용해 전리권 전자밀도 정보(total electron content)를 산출하고 있다. 또한 보현산천문대와 탐라 KVN천문대에 GNSS 신틸레이션 수신기를 설치해 전리권 교란을 관측하고 있다. 현재 관측 자료들은 웹 페이지나 FTP, 또는 요청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이 밖에 논문에 담지 않은 기타 전리권/고층대기 분야 자료 현황은 한국우주과학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http://ksss.or.kr/). 이 논문을 통해 우주과학 연구자들이 우주과학 자료에 대한 장기적이고 연속적인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내에서 생산 중인 자료의 활용도와 신뢰도를 높이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길 기대한다. 더불어 국내 관측 자료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새로운 데이터 공유 체계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광화문광장의 인식 분석 연구 - 텍스트마이닝과 소셜네트워크 분석을 중심으로 - (Study of Recognition and Spatial Attributes of Gwanghwamun Square - With a Focus on Text Mining and Social Network Analysis -)

  • 우경숙;민병욱;김진표
    • 환경영향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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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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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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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광화문광장의 이용자들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광화문광장의 공간적 속성을 도출하였다. 광화문광장의 공간적 속성은 4가지로 역사적 환경의 보존, 주변경관의 아름다움, 휴식 공간으로서의 적합성, 레크리에이션 활성화이다. 첫 번째 속성인 역사적 환경의 보존은 광화문광장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고 문화와 공감대를 가진 공간과 관련된 것으로 청와대, 북악산, 경복궁, 육조거리, 세종대왕, 이순신 등의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속성인 주변경관의 아름다움은 주변경관을 방해하지 않고 풍부한 녹지와 자연환경 제공과 관련된 것으로 풍경, 하늘, 녹지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세 번째 속성인 휴식공간으로서의 적합성은 방문객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조경시설 및 서비스로 테이블, 의자, 그늘, 화분, 휴식공간, 분수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레크리에이션 활성화이다. 다양한 경험 제공으로 전시, 공연, 체험, 구경 등의 키워드를 포함한다. 본 연구에서 도출된 광화문광장의 속성을 활용하여 추후 광화문광장의 가치 평가 및 추정 연구로 유형별 선호의 차이를 검증하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화문광장의 재조성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정간보(井間譜) 교육 프로그램 (Research on Jeongganbo Education Program)

  • 한미례;정낙현
    • 지역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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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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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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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의 목적은 교육 콘텐츠로써 정간보(井間譜)를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있다. 정간보는 세종 때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악보로, 우리 음악 기초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간보 교육은 초등3~4학년 통합음악과정에서 비교적 간단한 형태로 시작되어, 초등 5~6 통합음악과정에서는 정간보의 형태가 구체화 된다. 이러한 정간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처음 접하는 단계의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한다. 초등 3학년 학습자를 대상으로 전래놀이를 그 도구로 삼아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프로그램은 1단계 교구 만들기, 2단계 교구를 활용한 장단의 부호 이해, 3단계 전통 놀이를 통한 놀이로 장단을 익히는 과정을 거친다. 총 2차시 프로그램으로 1차시에서는 기본적인 내용을 학습하고, 2차시에서는 전통놀이 사방치기를 활용하였다. 본 연구는 정간보 이해도 측면의 국악교육과 에듀테인먼트 교육 콘텐츠 개발의 의의를 동시에 가진다. 또한 지역 특성에 따라 편중되었던 국악교육프로그램을 교육현장인 학교와 연계함으로써 폭넓은 국악교육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학문 목적 한국어 학습자의 한국어 능력과 학업 적응에 관한 연구 (The narrative inquiry on Korean Language Learners' Korean proficiency and Academic adjustment in College Life)

  • 정연숙
    • 국제교류와 융합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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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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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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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이 연구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한국어 능력 시험(TOPIK) 등급이 학업 적응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IRB의 승인을 거쳐 모집한 학생은 모두 7명으로 이들의 면담 내용은 실용적 절충주의에 기초한 포괄적 분석절차 (이동성, 김영천, 2014)의 6단계를 활용해 분석했으며 그 결과 학문 목적 한국어 학습자의 학업 적응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학업, 생활, 심리·정서의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학업적 측면에서 인터뷰 대상자들은 적응하기 힘들었던 전공 용어와 전공 공부를 지적하였고, 한자 및 한자어에 큰 어려움을 경험했다. 다음으로 생활 측면에서는 고급 수준의 토픽 등급 소지자인 연구 참여자들도 대학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고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인 표현과 풍부한 어휘 지식이 필요함을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심리·정서적인 범주에서는 이들이 한국인들과의 대화나 발표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 문화 및 일상 생활 문화에 관한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하더라도 화용적인 면에서 실수나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 이것이 심리·정서적인 어려움에 처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근거로 한국어 학습자의 학업 적응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학습의 다양한 기회 부여라는 목표를 기반으로 학습자의 전공 관련 학업 능력 강화, 한국어 숙달도 향상, 학내 관계 형성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연구자는 이를 위한 해결 방안으로 외국인 학습자들을 위한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계획·설계하여 시도해 볼 것을 제안했다.

한국(韓國).몽고복식(蒙古服飾)의 상관성(相關性) 연구(硏究)(II) -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몽고침략기(蒙古侵略期)를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n Interrelationship Between Korean And Mongolian Costume Laying Emphasis On The Age Of Mongolia's Invasion Upon Corea)

  • 손경자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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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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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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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
  • A nation's culture isn't consisted by the characteristics of the nation only, but it is greatly affected by the geographical features and natural conditions, and it could be also dominated by the continual effect through mutual contact on economic exchange or social problem and political interests with neighboring countries. It is a well known fact that the contact of culture between Korea and Mongolia established under the special political situation that Corea was invaded by Won. But more basically, the Nomad including Mongolia had influenced upon neighboring countries, therefore, our country was also greatly influenced on consisting of our own culture by them. Moreover. the fact that our language belongs to their language's category(mostly Tweigru and Mongolian language) proves that the origin of our culture was deeply related with Mongolia. Accordingly, we could not limit the cultural relation between Korea and Mongolia within a special era. But especially, since unification of China by Mongolia, Won which appeared as a new great nation had dominated Corea for one hundred years, and the Corea's costume culture had a point of conversion to the mongolian. Therefore, this study expects to comment upon the relations of costume between Corea and Mongolia from a view point of Corea's tribute and royal gifts gifts by Mongolia written on the reference literatures. 1) From the ancient times, between our country and Mongolia there has been a direct or indirect exchange caused by the people's movement or invasion due to very closed neighboring. The relations between Corea and Mongolia have started from the mongolia's requests of tribute for the reason why they helped Corea against the Keoran's invasion, and these relation had continued by King Kongmin's age. 2) Mongolia had plundered a tribute such as dress, cereals, horses, military supplies, soldiers, maiden and little girls etc. from Corea, and therefore, a great confusion occurred on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fields. And since King Chungyoul of Corea got married with a Princess of Won, the Corea's position was placed as the Buma nation(nation of son in law) and then high class people of Corea preferred to follow the mongolian costume such as Byunbal (pigtail), Ho dress (mongolian dress), Rouges, Chockturi (a kind of formal cap) and Doturak pigtail ribbon, and some have been applied up to date. On the other hand, the custom of Corea had transmitted to the Mongolian nobility, they called it "Corea Yang(style)". 3) The costume of Corea could be divided into three different periods, the first is the period influenced by Tang and Song's regime, the second is affected by the Won's costume and the third is applying the Myung's regime in the end of Corea. The Mongolian dress was based on the Ho dress form and it has been developed through compounding artistic traditional fields and foreign customs in long history. And Mongolia is composed of various tribes, therefore, they have their own dress for each tribe. Our country and Mongolia had a similar dress form based on Ho dress and both used the Chacksukunggo (jacket with small sleeves and slacks) and Seon(line). And the ornaments of costume such as Chockturi, Doturak pigtail ribbon and Rouges had transmitted and fixed down as a traditional wedding garment, but the Rouges has been used by noble women from the ancient times in our country. Since a member of the Society of Korean Costume has visited Mongolia in August 1990 for the first time, I really recognized the neccesity of more detailed study on the costume relation between Korea and Mongolia, and I will proceed with the study on various fields of costume under cooperation of Institute of Oriental Academy of Mong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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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옥(獄) 구조에 관한 고찰 - 발굴 유적과 고지도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e of a Local Prison in the Joseon Dynasty Based on the comparison of excavation sites and antique maps)

  • 이은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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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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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6-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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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시대 지방 읍성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으나, 그 내부 관청 건물의 하나인 옥(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죄인들이 머무는 옥사의 배치나 구조, 옥리(관헌)들이 사무를 보거나 숙직 근무를 서는 집무소, 탈출을 방지하는 담장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1997년 경주에서 옥이 처음 발굴된 이후 연구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으나 비교 대상이 없어 답보 상태였다. 그러나 그 후 발굴된 연일옥 자료와 공주옥 등의 사진을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축조된 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전국의 죄수들을 잘 관리하도록 1426년 표준적인 설계도인 안옥도(犴獄圖)를 배포하였고, 동·하절기 처우 개선 등을 위해 1439년 한 차례 수정하기도 하였다. 1421년부터 1743년까지 운영된 연일옥은 조선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경주옥과 비교할 때 원형 담장, 동서 옥사의 배치와 구조 등 그 형식이 매우 유사하며 규모만 작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조선 말기 사진으로 남아 있는 공주옥까지 계속 그 형식이 유지되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옥은 타원형의 담장과 남녀를 구분하여 수용하는 건물이 나누어져 있었고, 담장의 높이는 약 3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사는 동쪽이 남자, 서쪽이 여자 옥사로 구분되며 지붕으로 탈출이 어려운 기와집 구조였다. 원형 담장 앞에는 옥리(押牢)들이 근무하는 초가 지붕의 집무소가 있었는데, 2중의 옥문을 통해야만 옥의 출입이 가능하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인본주의 유교 사상을 구현하고자 미결수들이 머무는 옥의 환경을 개선하고 남녀를 구분하여 수감토록 한 것이 건축물의 배치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녹산(鹿山)의 성립과 경관적 의의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Landscape Meaning of Noksan in Gyeongbokgung Palace)

  • 이종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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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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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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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녹산은 경복궁 내부에 위치한 구릉 형태의 녹지로서 문화재공간으로 주목받지 못한 장소이다. 이에 본 연구는 녹산이 성립된 배경과 변화 양상을 고찰하여 경관적 의의를 도출하고자 실록, 지도류, 사진에 대한 문헌 분석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녹산의 정체성은 풍수적 내맥(來脈), 소나무림, 사슴과 관련되며, 경관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복궁전도」 외 다수의 고지도에는 백악으로부터 경복궁 내부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묘사되었는데, 그중에서 녹산은 강녕전과 문소전으로 이어지는 내맥에 위치함으로써 형성된 숲이다. 북궐도상에서 녹산에는 육우정(六隅亭), 남여고(藍與庫), 녹직처소(鹿直處所), 그리고 남북 방향의 어구와 담장이 표현됨으로써 최소한의 시설과 숲으로 구성된 원형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세종대에 경복궁의 북쪽 궁장이 건설되었으며, 경복궁 창건 시기에 연조 뒤쪽부터 신무문 안쪽을 후원으로 인식했던 반면에 경복궁 중건 시기는 신무문 밖에 새로운 후원 영역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녹산만 내맥의 산줄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신무문 밖 후원에 대규모 관사가 건립되고 경무대 부지에 총독관저와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여기에 1967년 청와대와 녹산 사이의 청와대로가 신설되면서 녹산은 백악산록과 단절되었다. 셋째, 내청룡에 해당하는 경복궁 북동쪽의 풍수적 형세가 부족하여 소나무를 심어 지맥을 배양하였던 점과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배치도에 '소나무밭(松田)'이라고 표현된 사실에서 녹산의 원형이 된 숲의 주요 성상을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로 확인한 상수리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밤나무가 어우러진 소나무림을 원형 식생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녹산에는 성토로 인하여 어구가 사라지는 등 지형이 바뀌고 아까시 등 외래수종과 관상용 향나무 등이 식재되었다. 현재는 소나무림의 비중이 줄고 상수리나무림, 낙엽활엽수혼효림, 일부 가죽나무림과 버드나무림으로 구성된 숲을 이루고 있다. 넷째, '녹산(鹿山)'이라는 명칭이 신령, 장수, 영생, 왕권을 상징하는 사슴으로부터 유래된 사실을 '경복궁 녹원에서 기르던 사슴 일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굶어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

조선 초기 용준(龍樽),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의 특징과 성격 (A Research on Buncheong Jar with dragon and cloud patterns(龍樽) in the early the Joseon Dynasty with priority given to Buncheongsagisanggamunryongmunho, National treasures)

  • 오영인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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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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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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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논문은 조선 초기 용준(龍樽)의 실례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에 주목하여 제작과 용도, 그리고 전개양상에 주목한 것이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높이 50cm에 달하는 대형의 입호로 전체적인 기형에서 안정감을 주고, 동체 외면에는 상감 및 인화상감기법으로 시문된 문양으로 유려한 장식성을 갖추었다. 입호의 기형과 문양 소재, 제작수법은 중국 원·명대 자기를 연상시켰고, 세종연간에 제작된 왕실 자기로 그 가치가 인정되었다. 다만, 조선 초기의 도자사 연구에 있어 우수한 자기 제작수준을 보여주는 실례로 단편적인 기술 외에 생산유적이나 사용실태, 소멸 등 일련의 전개과정에 대한 논의가 미진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 초기 왕실 자기로서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세종연간 왕실 행사의 화준으로 사용된 용준이었다. 1420~1430년대라는 한정된 기간상주목 일대 특정 상품자기소에서 제작된 용준으로서 원·명대 백자 청화 운룡문 호와 기형 및 문양 구성에서의 친연성뿐만 아니라 문양면에서 고려청자의 전통성, 기형 및 문양면에서 조선 자기의 시대성을 모두 보여주었다. 조선 왕실은 개국의 당위성과 문물 정비의 근간을 명으로부터 찾았고, 어기 또한 백자 및 청화백자를 선택함으로써 지향대상이 명 황실임을 보여주었다. 왕실 의례에 사용할 용준 역시 명 황실로부터 사여 받은 '청화운룡백자주해'를 기준으로 삼았고, 분청사기가 아닌 백자로 제작된 용준이 오랜 기간 왕실 의례에 화준과 주준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조선 초기 왕실에서 화준으로 사용되어온 분청사기 상감 운룡문 호는 명 황실로부터 '청화운룡백자주해'가 전해진 1430년을 기점으로 점차 왕실의 용준으로서 가졌던 의미와 용도를 백자 청화 운룡문 호에 일임하였고, 제작과 사용의 중단으로 이어졌다.